유언비어– 전야(前夜) 5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7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마가복음 4 : 21 – 25, 개역개정본에서 

‘강남’이라는 말이 세계 여러나라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게 다가가게 된 까닭은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라는 노래 덕이고, 그  배경에는 구글과 유튜브라는 현대판 통신수단이 있습니다. 십여년 전만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강남의 일부인 잠실을 제가 어릴 적에 어떻게 갔는지 알려 드릴까요.  제 어머님의 외가가 당시 잠실이었답니다. 제가 살던 신촌에서 잠실을 가려면 우선 신촌에서 버스를 탑니다. 지금의 신촌노타리가 당시 버스의 종점이었습니다. 동대문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그 곳에서 전동차를 갈아 탓습니다. 전동차로 광나루까지 가서 나룻배로 갈아 탓습니다. 나룻배로 한강을 건너고 모래사장을 걸어 올라가면 논밭이 이어졌답니다. 그리곤 어머니의 외갓댁 잠실에 가 닿을 수 있었답니다. 꼬박 하루길이었습니다. 언젠 적 이야기냐고요?  1960년대 초였답니다. 

느낌은 옛날 고려적 이야기지만 고작 50여년 전의 일이지요. 

자!  이즈음의 시간 차이는 빠르게 변하지만  옛날 정말 고려적에는 그런 빠른 변화가 있었을까요? 칠백 여년전 고려 말이나 천이 백여년 전 고려 초나 아마 생활의 변화 속도란 이즈음 십년에 미치지 못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하물며 이천 여년 전에는 어땠을까요. 

이런 저런 역사적인 사건들이 이어지지만 실제 보통 사람들의 삶의 변화란 백년 전이나 백년 후나 크게 변한 것들이 없었던 시절이었을겝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삶이 급변하는 어떤 계기들이 있게 마련이랍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보면 제가 중학교 들어가던 해인 1965년에 개통한 제2한강교를 들수 있겠습니다.  이 다리를 놓는데에 약  2년 6개월이 걸렸다면 이즈음 사람들은 “정말이래?” 할 수도 있겠는데 정말 그만큼 걸렸거니와  당시 신촌사람들에게는 정말 신촌(新村)이  새 마을이 되는 새로운 역사의 계기였답니다. 신촌이 더 이상 버스 종점이 아니라 시내 중심가가  되기 시작한 때랍니다. 

다시 이천년 전 팔레스타인으로 넘어갑니다. 

팔레스타인에 살던 다시 유대인들의 삶이 급격한 변화를 격게되는 시초는 헤롯1세가 왕위에 오른 때로부터 로마의 총독시대가 이루어지던 무렵이었습니다.  이로부터 약 70여년에 이르는 동안 그 땅에서는 무수한 반란과 도적(이 도적을 의적 또는  혁명가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들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자칭 메시야라고 하면서 사회 혁명을 꿈꾸거나 사람들을 규합하여 테러를 일삼거나 하는 무리들이 넘쳐나던 때였습니다. 

784603_0-468365_57568

또한 알렉산더대왕이 “당신의 소원을 말해보시요. 내가 다 들어 드리겠오.”라는 말에 거적깔고 드러누운 노숙자인 주제에 “좀 비켜 주시겠오, 햇볕 가리지 말고….”라고 대답했다는 전설적 이야기의 주인공인 디오게네스로 유명한  견유철학자(犬儒哲學者)들도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많았답니다. 

견유철학들자들의  삶의 태도를 잘 나타내는 유명한 말이 있답니다. 

“나는 내가 배고프지 않을 만큼, 목마르지 않을 만큼 가졌다. 벗지 않을 만큼 입었다. 밖에 있을 때는 저 부자 칼리아스보다도 더 떨지 않고 안락하다. 안에 있을 때는 따듯한데 왜 옷이 필요한가?”  견유철학자(犬儒哲學者)의 시조인 안티스테네스의 말입니다. 

빈정거리며 사회와 등을 지거나 저항하거나 하는 무리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유대는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젖과 꿀이 흐르는 기후는 아니랍니다. 특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쪽 유대 지방은 그리 농사에 적합한 땅은 아니었답니다. 그에 반해 갈릴리 호수 주변의 땅들은 농사에 적합했다고 합니다. 그 지역의 농산물들이 유대의 젖줄이 되었던 셈이지요. 

그런데 로마시대 농사를 짓는 농민들의 수입은 수확물의 반도 가져가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이마저도 자기 농토를 가진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만큼 각종 세금으로 이들에게 뺏어가는 것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농토의 많은 부분들은 예루살렘 중심의 권력자들의소유였고 농지는 대부분 소작농들이 경작을 하는 현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를 살던 소작농들을 더욱 어렵게 했던 것은 당시 부자들이 즐겨 사용한 매점 매석행위였다고 합니다.  농사가 잘 된 해에 마구 거두어 들여 창고에 쌓아 놓았다가 흉년이 들 때 엄청 높은 값에 파는 일들이었는데  당시 기록에 보면 16배 정도의 이득을 남기기도 하였답니다. 

당시 떠돌던 유언비어에는 이런 것들이 있답니다. 

“어떤 랍비의 일년 수확은 예루살렘 시민이 십년  동안 먹을 정도이었다.”, “마을 천개와 배 천 척을 가진 부자들도 있었다.”, “성전에 바치는 십일조가 송아지 만 삼천마리인 부자가 있었다.” (안병무가 쓴 갈릴래아의 예수에서) 등등이랍니다.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더 가질 것이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마가 4 : 25)라는 성서의 말이 그대로 적용되는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로마에게는 인두세 및 각종 간접세들을 내야하고 유대 종교 자치기관에게는 성전세(이 세금은 빈부의 차이없이 유대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냈답니다.) 와  십일조세(당시만 하여도 정확히 지켜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를 내야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점점 살기가 팍팍해 갔답니다. 

그렇게 하루살이조차 힘들어진 사람들에게 수많은 “하라”와 “말라”라는 율법들은 애초 지키기 힘든 굴레였을 뿐입니다. 

먹고 살기도 힘든 판국에 종교적, 전통적, 관습적 죄인이 되어 사는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소수(minority) – 전야(前夜) 4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6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 사도신경에서 

1961년 이탈리아의 고고학자 안토니오 프로바(Antonio Frova)는 지중해 연안 도시 가이샤라(Caesarea)에 있는 원형극장 입구에  놓여 발판으로 사용되고 있던 한 돌판에서 다음과 같은  비문을 발견합니다. 

220px-Pontius_Pilate_Inscription

 [DIS AUGUSTI]S TIBERIÉUM

[…PO]NTIUS PILATUS

[…PRAEF]ECTUS IUDA[EA]E

[…FECIT D]E[DICAVIT] 

Tiberium(티베리움) Pontius Pilate(본디오 빌라도) Prefect of Judea(유대의 장관)  …has dedicated [this](헌정되다) 라는 의미랍니다. 이를 빌라도의 비문(The Pilate Stone)이라고 합니다. 

가이샤라는 헤롯 대왕이 건설한 항구도시입니다. 당시 로마황제 가이사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따서 “가이샤라”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유대를 로마 총독이 다스리면서부터 로마 총독이 머물던 도시입니다. 나중에 바울과 베드로 이야기를 할 때 중요하게 등장하게 될 도시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읊조리는 신앙고백문인 사도신경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받으사 십자가 못박혀 죽으시고…”라고 적시되는 본디오 빌라도는 다섯 번 째 유대 총독입니다. 초대총독인 코포누스(Coponus)로부터 유대가 완전히 멸망할 때의 총독인 폴로루스(Gessius Florus)까지 14명의 총독이 65년 정도를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을 다스립니다. 

그 가운데 본디오 빌라도와 안토니오 벨릭스(Antonius Felix), 폴시우스 베스도(Porcius Festus) 등이 신약성서 중요한 장면에 등장합니다. 

유대를 다스리던 로마총독은 로마의 점령지 총독 가운데 일급 총독인 시리아(수리아)총독 아래 위치한 이급 총독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군사 및 사법권을 쥐고 있었고 가장 중요한 권한 중에 하나는 세금을 거두어 드리는 징세권(徵稅權) 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세금은 세금을 거두어 드리는 청부인들이 맡아서 했고 실제적인 일들은 성경에 나오는 세리들의 몫이었습니다. 눈여겨 보아야 할 사실은 세금 징수 청부인들은 정해진 세금 이상을 거두어 드리면 그 몫을 챙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총독은 천인부대(千人部隊)라는 다섯개의 부대를 거느리고 있었고, 그 중 네개 부대는 가이샤라에 일개부대는 예루살렘에 배치했다고 합니다. 주로 가이샤라에 거주하던 총독은 유대의 명절때이면 대규모 군중이 모여드는 예루살렘의 치안을 위해 예루살렘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총독은 로마의 직접통치자 였습니다. 다만 식민지의 상황을 고려하여 식민지 고유의 종교및 전통적인 사회규범들의 치리는 유대의 최고법정인 “산헤드린”의 몫이었습니다. 

이 최고법정 ‘산헤드린’의 최고 책임자는 대제사장이었고 당시 그들은 ‘유대인들의 원수(元首)’로 불리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사독가문의 몫이었던 대제사장은 유대의 마지막 왕조 하스몬시대에 이르러 왕이 대제사장을 겸하게 됩니다.(자세한 것은 제가 이 이야기 시리즈 일부인 구약 및 중간사이야기를 참조하시길..) 

그러다 유대가 로마총독 시대에 접어들면서 헤롯대왕의 아들 아켈라오스의 몰아낼 때 큰 역할을 한 사두개파인 안나스가 대제사장이 되면서 이후 그 권력을 5대에 걸쳐 이어갑니다. 예수 시대의 대제사장 가야바도 안나스의 세력 아래 있던 인물입니다. 

산헤드린은 대제사장을 필두로 70명의 의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의원이 되려면 순수한 유대혈통이어여만 했습니다.  70명 의원 가운데 8명에서 10명 정도의 최고 평의원회가 있고, 이들이야말로 당시 유대의 종교 및 사회의 최고 지배계층이였습니다. 이들은 대토지 소유자들이었고, 이들에 의해 각종  제사들이 집행되었으며, 성전 수비 및 성전 금고 관리가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이들은 각종 성전세를 거두어 드리는 주체였습니다. 그 하급 직원으로 레위인들이 전통적인 십일조세를 거두어 드리는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산헤드린을 구성하는 70명의 의원들은 크게 두 개의 당파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바로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입니다. 사두개파는 종교적으로는 모세 5경만 경전으로 인정을 했고, 천사나 부활 등을 믿거나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지향적이었습니다. 그 구성원들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고위 직급과 경제적으로 부유한 축들이었습니다. 일테면 산헤드린의 보수세력이었던 셈입니다. 

반면 바리새파는 종교적으로는 율법에 충실하여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충실한 사람들로서 율법을 지키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과는 분리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율법해석에 충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천사나 부활을 믿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유대 민족주의적인 입장이었습니다. 나중에 유다의 독립전쟁에도 가담을 합니다. 이들은 민족주의적 입장을 취하기는 했지만 구약시대부터 내려온 예언자의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했고, 율법을 생활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이 나중에 유대교를 세우는 주류가 됩니다. 직업적으로 천막이나 가죽 세공업 등의 도시 소시민층이었습니다 .일테면 산헤드린의 진보세력이자 야권의 대표였던 셈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사람사는 세상은 다 똑같듯이 당시 왕, 총독, 산헤드린을 비롯한 그 세력에 빌붙어 사는 사람들은 소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당시 왕, 총독, 산헤드린을 비롯한 그 세력에 빌붙어 사는 사람들)과는 무관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들 때문에 하루 하루가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세례요한과 예수와 바울의 이야기를 듣게되는 당시 보통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열심당(熱心黨) – 전야(前夜) 3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5 

헤롯이 죽은 뒤에, 주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꿈에 나타나서  말하기를 “일어나서, 아기와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그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하였다.  요셉이 일어나서, 아기와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요셉은, 아켈라오가 아버지 헤롯의 뒤를 이어 유대 지방의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 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는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서,  나사렛이라는 동네로 가서 살았다. 이리하여 예언자들을 시켜서 말씀하신 바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 마태복음 2 : 19- 23, 표준 새번역에서 

헤롯 1세가 죽고 그의 세 아들이 아비가 다스리던 지역을 나누어 차지하게 됩니다. 첫째인 아켈라오스(아켈라오)는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메(에돔) 지역을, 둘째인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세째인 필립포스(빌립보)는 북요르단 지역을 차지하고 다스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헤롯 1세처럼 왕으로 불리우거나 대접 받지는 못합니다. 로마가 승인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아켈라오스를 민족지도자로 나머지 안티파스와 필립보스는 그 보다 한 단계 아래인 분봉(分封)지도자로 대우했습니다. 

첫째 아들 아켈라오스는 약 10년간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두메 지방을 다스리다가 로마에 의해 추방을 당합니다. 그는 심한 악정을 편 것으로 알려져 있고, 반란을 일으킨 유대인들을 무차별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에 삼천 명 넘는 유대인들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사람들이 의견이 일치되어 약 8천명의 사절단이 로마황제를 찾아가서 아켈라오스를 탄핵합니다.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이들의 탄원을 받아드려 아켈라오스를 추방하고 그가 다스리던 지역을 “유대주”로 하고 로마 총독이 직접 관할하여 다스리게 합니다. 

그러나 실제 이 내막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실력자들 곧 사회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는 지배층들이 자기 땅과 재산을 유지 증식시키려는 속셈과  직접통치로 더 많은 것을 거두어 갈 수 있는 로마의 잇속이 서로 맞아 떨어진 속내가 있었던 것입니다. 

기원후 6년부터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및 이두메는 로마 총독 관할령이 되었고 갈릴리의 안티파스와 가이사랴 지역의 필립보스는 이 총독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 무렵에 대한 성서의 기록으로 누가복음 2장을 보기로 하지요. 

“그 때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서 온 세계가 호적등록을 하게 되었는데,  이 첫 번째 호적등록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시행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호적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동네로 갔다.  요셉은 다윗 가문의 자손이므로, 갈릴리의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에 있는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자기의 약혼자인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올라갔다. 그 때에 마리아는 임신중이었는데,  그들이 거기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되었다.    마리아가 첫 아들을 낳아,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구레뇨(Quirinius)가 시리아(수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 인구조사가 있었고, 바로 그 무렵 예수가 탄생했다는 누가의 기록입니다. 이 시기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아주 분분하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그 무렵 유대의 인구조사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인구조사 곧 호적조사의 근본적인 목적은 인두세(人頭稅, 주민세)와 토지세 등의 직접세와 이동세와 시장세 등의 간접세를 잘 거두어 드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금 문제는 민심을 자극하는 직접적이고도 자극적 요인이지요. 

the_Zealot_the_Apostle_300

이 인구조사에 항거하는 민중 반란이 일어난답니다. 더더군다나 자기 나라 정부도 아닌 식민통치자들에 의해 실시되는 호구조사에 반대하는 운동은 민족주의 열망이 더하여져서 아주 탄력을 받는답니다. 이 때 생긴 집단으로 젤롯당(the Zealous)이라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열심당(熱心黨)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들 가운데 아주 극렬한 사람들로 “단검을 가진 자들”이라는 뜻으로 불린 시카리파(Sicarians)도 있습니다. 

이 반란의 중심지 가운데 한 곳은 갈릴리였습니다. 그리고 그 갈릴리 지역을 다스렸던 사람이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예수도 그를 “여우”로 불렀듯이 헤롯 안티파스는 아주 교활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관심은 관할지 백성이 아니라 식민지 주인인 로마의 환심을 사는 것이 늘 우선이었습니다. 

갈릴리는 이방인들이 많이 살았고, 예루살렘과 달리 사회 하층 계급에 속한 이들이 많이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통과 종교적 측면에서는 예루살렘 못지않게 유대적인 것을 고수하는 지방이었습니다. 로마의 인구조사에 반발하여 일어난 젤롯당의 반란의 진원지는 바로 갈릴리의 세포리스였습니다. 

이 반란의 결과로 세포리스시는 폐허가 되고  세포리스시 입구에는 반란 유대인들을 매달은 십자가가 2000여개가 세워졌다고 요세푸스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세포리스시는 예수가 자란  나사렛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대도시였고(약 8km 거리), 이 사건은 바로 예수 탄생 직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이 세포리스를 재건하고 요새화합니다. 갈릴리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의 반란을 대비한 요새화였습니다. 그리고 이 곳을 갈릴리의 수도로 삼았다가 후에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딴 티베리아(디베리아) 시를 건설하고 그 곳으로 수도를 옮기게 됩니다.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리던 시절의 갈릴리, 그리고 그의 동생  필립보스가 다스리던 지역 가이샤라를 중심으로 같은 시대에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전했던 이가 바로 예수입니다. 

헤롯 1세의 셋째인 필립보스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자기의 영지를 다스리다가 기원 후 37년에 죽고, 그  영지를 물려받는 이가 조카인 아그리빠입니다. 이 아그리빠에 의해 또 다른 삼촌인 헤롯 안티파스는 유배를 당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합니다. 

“아그리빠 대왕, 카이자르의 친구, 로마의 믿을만한 친구”로 불리우기를 즐겼던 아그리빠왕 시절에 기독교 첫 순교자 스테반이 죽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도 처형되고, 베드로가 옥에 갇히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아그리빠는 당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상류층으로부터는 진실한 야훼 하나님의 신앙인이자 유대 전통의 수호자로 대접받은 인물입니다. 이는 곧, 당시 유대 상류층들이 이미 썩을대로 썩은 “부(富)”에 정신을 팔렸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탄생했던 무렵 로마의 총독이 유대를 관할하기 시작합니다. 로마 총독의 권한은 실로 막강한 것이었습니다. 군사, 경제, 사형권 들을 손에 쥐고 있었으며 화폐 발행권에도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예수시대를 전후한 로마 총독들에 대해 살펴보고, 그 당시 시대상을 간략히 훑어 본 후 세례요한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헤롯 1세- 전야(前夜) 2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4 

헤롯은 격정의 노예가 되어 모든 인간을 짐승같이 취급한 야만스러운 인간이었으며 의(義)와는 담을 쌓은 사람이었으나 그 누구보다 운이 좋은 인물이었다. 왜냐하면 일개 평민으로서 왕의 지위까지 올랐을 뿐만 아니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위험에 직면했음에도 그 모든 위험을 극복하고 장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롯 자신은 적들을 물리쳤으므로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의 가정과 자식들의 문제를 두고 볼 때에는 매우 불행하였다. –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17권 8장에서 

권력에 대한 욕망과 의지로는 당대 최고였으나 정통성이 허약했던 헤롯왕에 대한 이야기들은 유대의 기록 뿐만 아니라 로마쪽 기록에도 별난 인물로 전해져 내려옵니다. 

헤롯왕(이하 헤롯 1세) 말년의 모습에 대한 기록으로 눈에 띄는 것 중 하나 소개드립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입니다. 

그가 병이 들어 이제 죽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자기가  다스리던 유대에서 평생해  온 일을 생각해보니 자기가 죽은 다음에 유대 백성들이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기는 커녕 박수치고 좋아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래 헤롯1세는 전 유대에 유력한 인사들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모두여리고로 모여라!”라고 말입니다.(당시 헤롯1세는  여리고에 거주했답니다.) 

헤롯1세의 명령이기도 하고 전 유대에 내린 명령인지라, 헤롯1세왕 밑에서 완장차고 행세했던 이들이 모두 여리고로 모였답니다. 행여 눈밖에 나면 살아남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모인 유력한 유대인들을 그 자신(헤롯1세)이 세운 로마식 대형 경기장안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의 여동생 살로메와 매제 알렉사스를 불러 명령을 내립니다. “내가 죽거든 경기장에 가둔 모든 유대의 유력인사들을 모두 죽여라. 내 마지막 길에 두 가지 큰 기쁨이 될 것이다. 하나는 내 유언이 그대로 집행되어 곧 죽어서도 왕이 되는 기쁨이요, 두번 째는 죽은  유대인들의 가족들이 모두 통곡을 할 것이니 전 유대가 울음바다가 될 것이고 그 울음 속에서 내 장례식이 거행되는 기쁨이다.”라는 명령이었답니다. 

이런 헤롯1세를  이용한 것은 로마였고, 헤롯1세는 또한 로마를 적절히 이용하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로마의 입장에서는 식민지를 조용히 다스릴 수 있는 완장찬 똘마니가 절대 필요했던 것이고, 로마의 완장을 차고 유대 지방을 잘 다스릴 수 있는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 것이 헤롯1세였습니다. 

06._하나님의_성전_페이지_6_philosophy78

그의 재능은 그의 아버지인 안티파트로스에게서 물려 받은 것이었습니다. 강자 곧 로마에게는 온갖 아부와 뇌물로 신뢰를 얻고, 약자인 유대인들은 철저히 힘으로 억누르면서도 적절히 필요한 것들을 자신이 주는 것처럼 포장하는 기술이 뛰어 났던 것입니다. 

이제 몇가지 실례를 들어봅니다. 

그이 아버지 안티파트로스로가 로마에 아부와 뇌물를 주고 받은 로마 식민지 유대 총독 자리를 두 아들에게 넘겨 줍니다. 첫째인 파자엘은 예루살렘 지역을 둘째인 헤롯1세에게는 갈릴리 지방을 넘긴 것입니다. 이 때 갈릴리 지방에서는 반(半)유대인인 헤롯에게 거센 저항을 합니다. 히스기야라는 민중 지도자를 중심으로 반기를 들자, 헤롯1세는 이들을 무차별 학살을 합니다. 

이런 헤롯1세의 만행에 분노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전 유대인들이 로마에 진정서를 올리고 헤롯을 탄핵해 달라는 청원을 올립니다. 헤롯은 엄청난 뇌물로 로마의 실권자들을 매수해 버립니다. 이후로도 헤롯1세가  34년 동안 로마의 대리인인 유대의 왕 노릇하며 이런 유사한 일들을 수없이 반복합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치적들도 만만치 않게 많답니다. 

그이 삶과 그의 치적을 짧게 정리해 봅니다. 

첫째 그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일지라도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한 인물이었습니다. 자신의 출신이 반쪽 유대인이라는 약점을 가리기 위해 제사장 가문의 딸과 결혼을 하고, 필요에 따라 그 아내는 물론 장모와 자식까지 죽여없애기도 한 인물입니다. 자신의 권력에 대항하는 세력들은 아무도 모르게 잡아 가두고 죽이는 일도 서슴치 않고 행한 인물입니다. 정통성이 허약했던 그는 늘 유대인들의 반란에 대한 대비를 게을리 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둘째 그는 오늘날 통곡의 벽으로 유명한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을 비롯하여 예루살렘성의 수로(水路)건설 등 괄목할만한 토목공사와 건축물들을 남겼습니다. 

세째 유대인들의 전통을 최대한 지킬 수 있도록 로마를 설득하고, 이 일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일테면 유대지방에서 통용되는 로마화폐에는 시이저의 초상을 넣지 않도록 로마를 설득해서 실제 성과를 거둔 일 등이 그러합니다. 

네째 예루살렘은 유대 중심으로 사마리아는 로마 중심으로 로마의 입 맛에 맞게 변형시킨 일입니다. 사마리아를 이름까지 로마 황제의 이름으로 바꾸고 아폴로 신전을 세우고, 경기장을 세우고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옷을 벗고 경기를 벌이는 일들을 서슴치 않고 벌인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로마의 입맛에 맞게, 유대인들은 적당히 구슬려가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뛰어난 재능을 보인 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죽기 직전 자신이 다스리던 땅을 삼등분하여 세 아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러나 미처 로마의 승인을 얻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그의 아들들은 더 이상 왕의 칭호를 사용하지 못하고 분봉왕으로 불리웁니다. 그 가운데 갈릴리 지방을 차지하게 되는 헤롯2세 곧 헤롯 안티파스가  예수시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인물이 됩니다. 

성서에 나오는 헤롯1세의 대한 이야기로는 동방박사를 만난 후, 동방박사가 헤롯의 말을 듣지 않고 그냥 자기들 나라로 돌아가자,  당시 2살 미만의 아이들을 모두 죽였다는 이야기와 믿음에 대한 제 생각은 나중에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할 때 몰아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세례요한의 목을 따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받게 한 헤롯2세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그 시대 – 전야(前夜) 1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3 

박사들이 물러 간 뒤에 주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어서 일어나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에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알려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하고 일러 주었다.  요셉은 일어나 그 밤으로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에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살았다. 이리하여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내가 내 아들을 에집트에서 불러 내었다”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몹시 노하였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박사들에게 알아 본 때를 대중하여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 – 마태 2 : 13 – 16, 공동번역에서 

이제 이천 여년 전 유대 광야에서 젊음을 태우다 간 사내 세례요한과 갈릴리 해변 마을을 다니면서 하나님 나라 이야기에 온 몸과 맘을 던졌던 사람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광야, 갈릴리, 세례요한, 예수의 이야기를 제대로 나누려면 먼저 몇가지 알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당시 광야에 나갔던 사람들, 갈릴리 해변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 그리고 광야, 갈릴리, 세례요한과 예수와는 아무 연관없이 그저 그들을 바라 본 사람들 등등의 모습들을 먼저 알아 볼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27_안동양반_양반과상놈_145

우리들이 조선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당시의 사회상을 좀 알 필요가 있는 것과 똑같은 이치에서입니다. 이즈음은 너나없이 다 제 뿌리가 양반인양 행세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따지고 보면 양반의 후손들 별로 안된답니다. 오늘날에야 돈과 권력이 곧 양반인 세상이지만 그조차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뿌리를 따지곤 하는 것이지요. 

조선시대말사회가 아주 문란해서 양반을 돈으로 사고 파는 세상이 되었어도 그 숫자는 전체 인구의  5%를 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이화 선생의 한국사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답니다. 

“서기 1910년의 호구조사에서도 확인되는데 총 가구(家口) 수 289만 4777호 가운데 양반이 5만4217호로 전체 인구의 겨우 1.9%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 충청남도가 충남 전체 가구수의 10.3%로 가장 양반이 많고 충북(4.5%) 경북(3.8%) 서울인 한성(2.1%) 그리고 전북(1%) 순 이었다. 여타 도는 모두 1% 미만이고 양반이 많았던 고을은 경북 경주군(2599호), 충남 목천군, 경북 풍기군, 충남 공주군 순 이었다. 경상북도와 충청도, 한성에 양반들이 집중되어 있고 그나마도 인구의 5%를 넘지 못했다.” 

다시 이천년 전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보지요. 조선시대 양반, 상놈 따지기 이상으로 신분을 따져 묻던 시대였답니다. 혈통이 어떤 혈통이냐가 매우 중요한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기준은 뭘로 밥먹고 사냐? 곧 직업의 귀천을 매우 중요시하던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당시의 시대상도 좀 알아야 세례요한이 왜 그 때 그 말을 했고, 예수는 왜 그 때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이해가 좀 정확하고 빠르게 다가오겠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주 쉬운 예를 하나 들지요. 누가복음을 쓴 누가의 직업은 의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날 의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일반적으로 말하면 ’똑똑한 사람’들이 ‘공부 잘해서’ 가질 수 있는 직업으로  ‘돈 잘 벌고’,  ‘안정적인’,  ‘때론 사회적으로 존경까지 받을 수 있는’ 직업이라고 말하는 것이 크게 엇나간 정의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천년 전 팔레스타인 유대사회에서의 의사란 ‘가정 휼륭한 의사라도 지옥으로”갈 뿐이고, ‘의사란 도둑과 같은 직업일 뿐’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회에서는 천대받는 직종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이지요. 물론 돈은그 당시도 좀 벌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천대받는 직종으로 낙인 찍혔는가 하면 첫째는 의사를 믿게 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고, 두번 째는 부자들에게는 잘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멸시하고 잘 봐주지 않는다는 것,  세 번 째는 의사들이 상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죄 지은 자들 뿐이라는 것이랍니다(당시에는 병은 곧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던 시대였으니까요). 

이게 다 제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요, 앞으로  제가 예수와 바울 이야기를 하면서 자주 인용하게 될 요하임 예레미아스(Joaehim Jeremias)라는 사람이 쓴 책  “신약성서시대의 사회경제사 연구 – 예수시대의 예루살렘”이라는 책과  잔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이 쓴 책 “역사적 예수”에 나오는 당시 시대상이랍니다. 

이런 저런 뜻으로 예수 이야기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두 명의 헤롯 이야기 –  곧 성서에 나오는 동방박사를 만나고 난 뒤 두 살 미만 갓난 아이를 다 죽인 헤롯대왕과 세례요한과 예수를 죽인 헤롯대왕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 – 와 당시 로마 총독들의 이야기를 먼저 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경제적인 상황과 사회적인 상황들을 대충 짚어 본 후에야 광야로 나가 세례 요한을 만나 보려고 합니다. 

“권력을 움켜 쥘 때는 여우처럼, 권력을 행사할 때는 호랑이 처럼, 그러나 죽을 때는 개처럼…” 살다 간 독재자들의 이야기는 동과 서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넘쳐납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 흉내를 못내 안달하는 권력자들이 숱하고요. 

그런 인물 가운데 전형적인 사람이 바로 헤롯대왕이었습니다. 헤롯이 임금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희생된 이스라엘 사람 숫자가 10만 명이 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답니다. 

그 헤롯 이야기 이어집니다.

우리시대 – 들어가는 글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2 

예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점검해 보고 싶은 것들이 있답니다. 

‘예수’라는 말이 당신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지요? 기독교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떤 것인지요? 교회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떤 것인지요? 당신이 알고 있는 ‘교회’란 어떤 곳인지요? 교회와 기독교 그리고 예수는 어떤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는 것인지요? 

아니 그런 어려운 말들 다 접고요. 

당신에 있어서 예수란? 교회란? 기독교란? 도대체 무엇이고 어떤 것인지요. 

일테면 이런 질문으로 다시 바꾸어 물어보지요. 

이즈음 한국방송에서 연예 또는 스포츠 스타들에게  상을 주고 받는 프로그램에서 상을 받는 이들이 하는 인사말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먼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운운하는 말을 들을 때 당신의 느낌은 어떤 것인지요?   

그래요, 이게 제일 간단한 점검일 것 같습니다. 그럴 때 당신의 느낌 말입니다. 

그럴 때 제 느낌은 어떤 것이냐구요?  예, 저는 “쯔쯔쯔…” 혀를 찬답니다. 물론 그 말을 한 이를 경멸한다거나 우습게 본다는 뜻이 아니랍니다. 그저 조금만 더 생각 깊게 믿으면 안될까 하는 마음으로 뱉는 탄식이랍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를 되돌아보면 교회 성장이 폭발적으로 이루어 졌던 때가 두 번 있었습니다. 첫번 째는 1907년 길선주 목사의 “내가 바로 아간입니다”라는 회개로 시작된 평양 대부흥사건입니다. 그리고 두번 째는 1973년 여의도광장에 백만명이 넘게 모였던 빌리그래함 집회였습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 사건과 길선주 목사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경험했던 일이 아니므로 기록과 이야기를 통해 알고 이해하고 있답니다. 

그러나 1973년 빌리그래함 여의도 집회는 제 직접 경험이었고, 그 시대를 신앙적으로 깊이 고민하며 살았던 시절이므로 제 나름으로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순간 가운데 하나랍니다. 

1960대년대 말과 1970년대 초, 약 6 – 7년 동안 한반도 남쪽 대한민국 사회는 아주 새로운 경험들을 몇 가지 겪게 된답니다. 

당시만해도 한반도 북쪽이 남쪽보다 조금 잘 살던 시절이었답니다. 

김신조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1.21사태가 일어나고, 남북은 극단 대결국면으로 접어 들던 무렵 다가온 선거에서 삼선개헌을 밀어부쳤던 박정희 대통령은 그야말로 간발의 차로  당선이 됩니다. 그리고 10월 유신이 일어났던 해가 1972년이었습니다. 

이 무렵 기독교계에서 일어났던 세가지 운동이 있었습니다. 

들어가는...

사영리(사영리)로 잘 알려진 김준곤목사의 CCC (한국 대학생 선교회)운동과 삼박자 축복으로 오늘까지 이어져 오는 조용기목사의 순복음운동과 일부 카톨릭과 민중신학을 바탕으로한 기독교 사회참여 운동이 바로 그 세가지였습니다. 

당시에 친구들이나 선후배 가운데,  만나는 이들에게 손바닥만한 작은 책자를 보여주며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하는 이들을 종종 볼 수있었답니다. 사영리 전도 책자가 대학가의 유행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사영리란 성경66권에 나타난 구원의 원리를 네가지로 축약 시켜놓은 것입니다. 첫째 원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둘째 원리는 사람은 죄로 인해 멸망하고 영원한 형벌에 놓여 있다. 세째 원리는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의 길이 열렸다. 네번째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원리입니다. 

이 사영리가 만들어진 것은 1958년 미국 CCC  수련회에서 당시 총재였던 빌 브라이트이 만든 것이랍니다. 만든 동기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답니다. 당시 수련회에 강사로 초빙된 이는 세일즈맨으로 거부가 된 사람이었는데 세일즈맨으로써 그가 성공한 이유를 당시 이렇게 설명했답니다. 

“성공적인 세일즈맨이 되는 지름길은  반복해서 사용할 수 있는 짧고 알기쉬운 그러나 눈에 띄는  선전 문구를 사용해야 한다. 고객에게 항상 기본적으로 똑같은 내용의 말을 하고, 그것을 잘 전할수록 성공적인 세일즈맨이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 말에 감명을 받은 빌 브라이트총재가 만든 것이 바로 사영리 전도지라는 것입니다. 

이 사영리전도지를 당시 젊은이들의 손에 쥐어 준 사람은 한국 CCC 총재인 김준곤목사입니다. 1960년대 말 지금의 정동 및 신문로 일대에는 판자집들이 즐비했습니다. 신문로일대는 중국인들이 촌을 이루어 살기도 했고요. 당시 박정희 정부는 이 일대를 개발하기 위해 판자집 철거를 하고 철거민들을 지금의 홍은동 일대로 소개시켰답니다. 홍은동 일대에는 천막촌이 들어선 것이지요. 

당시 정동의 구 러시아 공관 일대 헐어버린 판자집 터 위에 높은 빌딩이 우뚝 세워지는데 바로 CCC회관 건물이었습니다. 

이 때의 일을 기록으로 남긴 이는1970년대에 일본 도쿄의 외신기자 클럽에 소속한 미국 언론인 짐 스탠츨(Jim Stentzel)입니다. 다음의 그의 기록입니다. 

“서울시 당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은 서울에 있는 전 러시아대사관 부지 일부를 대학생선교회에 제공하였다.(무상 제공되었다고 전해진다). 미대사관저 근처에 자리한 이 대사관 부지는 대한민국이 소련과의 관계를 끊은 이후로 판자촌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1968년 경찰이 밀려들어가 수 시간에 걸친 혈투 끝에 판잣집들을 제거하였다. 그 피가 마르자마자 고층 건물이 건축되기 시작했는데 그 건물에 오늘날 한국대학생선교회 전국본부가 자리 잡고 있다. 

1년 후 박 대통령이 삼선개헌을 고려하고 있을 때 김준곤은 청와대를 방문하여 삼선개헌은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충고하였다. 1971년과 1972년 억압이 강화되고 기독교회의 반응이 묵종(침묵속의 복종)과 대결로 양극화되기 시작하자 박은 또 다시 김을 신임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두 사람의 만남에서 네 가지의 계획이 수립된 것으로 알려졌다. 1) 한국 군대를 기독교인화하기 위한 선교단체와 친정부 보수교회들의 계획을 정부가 전적으로 지원한다. 2) 닉슨 대통령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본 뜬 대통령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열기 위한 일련의 계획을 강력히 지원한다. 3) 새로운 헌법이 제정된 후 조속한 시일 내에 빌리 그래함 선교단이 한국에 올 수 있도록 추진한다. 4) 그래함 선교단에 뒤이어 대학생선교회 자체의 친정부적 대작품을 서울에서 선보인다. “

 1973년 여의도 빌리그래함 대전도집회는 당시 사영리를 손에 쥐고 다니던 모든 친구들의 축제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정동에 살고 있었던 얼굴이 동글던 제 친구는 홍은동 천막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난민촌이었답니다. 천막안에 땅을 파고 연탄화덕을 놓고 베니아판을 깔고 살았습니다. 그 천막촌에 뿌려졌던 전단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 잘 믿으면 영혼 구원뿐 아니라 물질과 건강까지 얻는다.” 는  서대문 순복음교회 조용기목사의 삼박자 축복 전도지였습니다. 

사영리와 삼박자축복 교리는 1973년 여의도 빌리그래함 전도 대집회와  이듬해인 1974년 같은 장소에서 열린 ‘EXPLO’74’대회를 시발로 오늘날까지 한국 기독교와 교회 밑바탕에 깔려 있는 정신이 됩니다. 

‘EXPLO’74’란 1974년 8월 13일부터 18일까지 ‘예수혁명-성령의 제3폭발’과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소서’를 표어로 하여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개최되었던 행사입니다.  엿새 동안 열린 이 행사에 연인원 655만명이 참여하였고  17일 하루 동안은 약 20만명이 길거리 전도에 나서 27만 여명의 새신자를 얻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답니다. 

이 행사에서 눈여겨 볼 대목하나는 한국기독교에 깊게 심어진  반공주의의 한 단면입니다. 

이 행사 둘째날인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육영수가 저격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행사의 기도 제목과 내용은 쾌유를 비는 통성기도로 바뀌고 , 끝내 육영수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참석자들은 일제히 눈물을 흘리며 추모기도를 바쳤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튿날 집회에는 추모와 분노가 뒤섞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는데,  당시 목사들의 기도 내용들은 “북괴의 간악한 도발에 맞서 한국을 이끌어온 박정희 대통령에게 용기와 지혜를 불어넣어 달라”,  “공산당의 악랄한 만행을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해주시기를”  등 이었습니다. 

천막교회에서 시작하여 서대문 성전 시대를 거쳐 여의도 순복음 성전이 삼박자 축복에 맞추어  성장해 오듯 한국 교회는 약 사십여 년간 눈부신 성장을 이루어 왔습니다. 

물론 교회만 성장해 온 것이 아닙니다. 한국사회, 한국인, 한국 역시 엄청난 변화와 성장을 이루어왔습니다. 

홍은동 천막집에서 국수를 끓여 나누어 먹던 그 친구 역시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을 터입니다. 

이제 시작하려는 제가 만나고 이해한 예수 이야기는 이런 사영리와 삼박자 축복과 민중신학이라는 제 경험을 벗어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제 이천년 전 갈릴리 호수가로 가보려합니다.

다시 시작하며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1

이즈음 젊은이들이야 생각지 못할 일이겠고, 아마 우리들 세대들도 “정말 그랬나?하는 이야기로 다가갈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신분증에 적혀있는 신장 곧 키높이는 5피트 5인치 라고 적혀 있답니다. 165cm라는 것입니다. 이게 거의 삼십년 전에 잰 것이거니와 그 당시 어떤 신발을 신고서 운전 면허국에 섰었는지 모를 일이므로 거의 정확치도 않답니다. 그 이후로 제가 키를 재본 적은 없지만 아마 제 키높이는 163-165cm 사이 정도가 될 것입니다. 

아주 작은 키이지요. 제 또래의 사내 평균치 아래이니 이즈음 한국 남성 평균으로 본다면 ‘아주 작은 사람’축에 속한답니다. 

제가 학교을 다닐 때인 1970년대 초 170cm의 여학생이 있었답니다. 이 친구는 그 큰 키(?)가 부끄러워 늘 높이가 전혀없는 샌들같은 신발을 신고 허리를 구부정하니 굽히고 다녔었답니다. 아마 이즈음 아이들은 이해 못할겝니다. 

제 키인 163cm 의 크기가 한국인 남성 표준키 였던 때가 있었답니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시대였습니다. 

이제, 이천 여년 전에  신기원을 열며 이전, 이후를 통털어 오직 하나 뿐인 소리로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에 대한 모습에 대해  약 13년 전인 2001년 영국의 BBC 방송은 이렇게 보도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의 초상“넓고 투박한 농부의 얼굴에 짙은 올리브색(황록색) 피부,  짧은 고수머리, 툭 튀어나온 코를 가진 키 153㎝ 정도에 몸무게는 약 50㎏ 정도의 사내” –  바로 예수의 모습을 영국 의학자 리처드 니브 연구팀이  1세기경의 이스라엘인 유골을 토대로 컴퓨터 프로그램과 인조피부, 진흙 등을 사용해 얼굴을 재현한 결과에 대한 보도였습니다 . 

153cm의 키, 50kg의 몸무게 사진같은 얼굴의 사내가 당신 앞에 서서 “내가 예수요!”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이실런지? 

예수에 대해 알려진 이야기 몇 가지를 간추려 본다면… 당신도 한번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이야기를 간추려 보시기를… 

첫째, 그는 팔레스타인 나사렛 출신으로 갈릴리에서 활동했다.  둘째, 그의 어버지 또는 그의 직업 역시 목수였다. 세째, 그는 초등학교 졸업장 정도도 없거니와 글 한 줄 조차 남긴 게 없다. 네째, 그가 결혼을 했다거나 자식을 두었다는 어떤 물중도 없다. 다섯 째 그는 도대체 가진 것이 없는 떠돌이였다. 여섯 째 그는 주로 갈릴리 사람들하고만 놀았다. 일곱번 째 그는 병을 고치거나 기적을 행한 일들이 있다. 여덟번 째 서른 셋 짧게 살다 갔다. 아홉 번 째, 죽기 전에 기존 체제(성전 체제)에 도전을 했었다. 열번 째 그는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열 한번 째 지난 이천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구세주로 믿고 그 믿음 안에서 자신도 부활함을 믿고 살다가 죽었다. 

마침내 열 두번 째,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나 읽고 있는 당신은? 

이제 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갑니다.

로마 – 그 날 7

(당신의 천국 –여든 한번 째 이야기) 

스페인, 이탈리아, 스위스, 룩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잉글랜드, 웨일즈, 헝가리 남부,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그리스, 지중해의 섬들,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 터키, 시리아, 이스라엘, 레바논, 요르단, 이라크, 이란 등 이 모든 나라들의 공통점은 옛날 로마제국의 영토였다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영토가 가장 컷을 때 그 넓이는 약  약 7백20만km2  였다고 합니다.  이 면적은 국제 연합 통계국에서발표한 미국 면적  9,629,091km²보다는 작습니다만,  도로(길)망을 따져보면 놀랄만한 사실을 알 수 있답니다. 로마가 한참 잘 나가던 시절인 약 3세기 말 자료에 따르면 로마제국의 국영도로는 372개가 있었는데 그 길이의 총합계는 약 8만 5천 km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사통팔방(四通八方)으로 길하면 한 수 한다는 미국의 도로망 총연장 길이가 약 8만 8천 km라는 사실을 놓고 보자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된답니다. 

38

 

 

 

 

 

 

 

 

 

 

 

 

 

이 로마의 도로(길)은 기독교의 세계화에 큰 몫을 한 요인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제 그런 로마 시대가 온 것입니다. 유대 땅에도, 유대인들에게도 말입니다. 

로마제국의 초대황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와 2대황제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Tiberius Julius Caesar ) 의 시절 유다 갈릴리 땅에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그 시절 유대의 상황을 점검해 보는 것으로  제 이야기 당신의 천국 1부를 마감하려고 합니다.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초대황제에 오르기까지에는 피비릿내 나는 숱한 권력 투쟁이 있었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크라수스 세 사람이 이끌던 삼두정은 카이사르에 의해 일인 독재체제가 되었다가 “부르투스 너마저”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죽고,  카이사르의 상속자인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의 수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세 사람이 권력을 공유하는  제2의 삼두정치 체제가 됩니다.  그러다 레피두스는 추방되고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이집트 클레오파트라여왕의 연합군을  격퇴하여 로마의 유일 지배자가 됩니다. 초대황제에 오른 것입니다. 

이 무렵 유대 이두메(에돔) 땅에 살던 안티파트로스(Antipatros – 이 이름은 단축형으로  Antipas  곧 안티파스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사람이 헤롯대왕의 아버지이고, 헤롯 안티파스로 알려져 있는 갈릴리 분봉왕, 곧  세례 요한을 죽이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명령한 헤롯 안티파스의 할아버지입니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집안의 이두메(에돔) 지방의 유력 가문이었는데 아버지는 하스몬왕조 시절 이 지방의 총독을 지낸 사람이었습니다. 

이 안티파트로스(Antipatros)와 그의 둘째 아들인 헤롯은 권력을 향한 촉이 매우 발달된 부자(父子)였습니다. 이들에 대한 꽤 긴 이야기들이 많습니다만 단 한가지로 요약해서 이들의 성품과 권력에 대한 욕망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크라수스,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 레피두스 등 로마의 권력을 두고 싸움을 벌였던 모든 사람들이 인정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 권력의 이동에 따라 뛰어나게 순종을 하면서 유대지방의 권력을 인정받는 그들의 처세는 누구도 감히 흉내 내지 못할 뛰어난 수완이었습니다. 

정통 유대인이 아닌 에돔(이두메)사람으로 로마의 인정을 받고 헤롯이 유대지방의 왕이 된 것은 기원전 37년이었습니다. 식민지의 통치자로서  로마에게 대항하지않는 범위내에서 전권을 휘두를 수 있는 왕이 된 것입니다. 

로마의 황제 시대가 열리면서 Pax Romana의  세상을 주창하게 됩니다. 로마를 통해 평화를 누리는 세상이 곧 팍스 로마나의 세계입니다. 로마의 정복전쟁의 궁극적인 목표는 로마제국에 의해 이루어지는 평화로운 세상이었습니다. 

식민지 유대를 다스리는 로마의 첨병인 헤롯왕의 임무는 Pax Romana의 세계를유대 땅에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로마의 초대황제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인들에 의해 신으로 추대되고 추앙받았습니다. 신이된 것입니다. 유일신 야훼 하나님만을 모시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악의 근원인 셈입니다. 

로마의 신에 의해 유대의 왕이 된 헤롯은 스스로 유대의 메시아가 되고자 했고, 유대인들은 그런 그를 반쪽 유대인이라며 경멸해 마지 않았습니다. 

오직 유일한 신 야훼 하나님만을 믿는 유대 땅, 유대 민족들에게 황제가 곧 신인 로마가 식민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식민지배의 앞잡이인 헤롯은 이방인 출신 주제에 온 유대가 고대하고 기다리던 메시아인양 처신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바로 그 시대의 끝자락에서,  후에 갈릴리 해변가를 떠돌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며 자기가 그 나라의 주인이라고  떠들던 한 사내가 태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내는 신이됩니다. 

하나님나라에 얽힌 1부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새해 2014년에 이어질 당신의 천국 2부는 그야말로 신앙, 믿음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믿음 말이지요. 

이제껏 이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

마지막 왕조 – 그 날 6

(당신의 천국 – 여든 번 째 이야기) 

성전이 함락되어 로마군들이 들어와 성전 안에 있던 자들의 혀를 자르는 상황에서도  제사를 드리던 제사장들은 한 발자국도 꼼작하지 않았다.  – 중략 –  이어서 큰 살육이 일어났다. 일부 유대인들은 로마인의 손에 죽고  일부 유대인들은 서로  살해하였다.  – 중략 – 이에 사망한 유대인들은  모두 12.000명이나 되었다.  –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제14권 3- 4장에서 

jerusalem

지금으로부터 약 65년 전인 1948년 5월 15일,  유대인들은 독립국가 이스라엘을 수립합니다. 이는 기원전 63년 유대인들의 마지막왕국였던 하스몬왕조가 로마에 의해 멸망한 때로부터 따진다면 실로 2011년 만에 다시 세운 유대국가인 셈입니다. 

오늘은 유대인들이 세웠던 마지막 왕국인 하스몬왕조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사울, 다윗, 솔로몬왕국을 거쳐 남북분열왕국시대를 지나,  약 450여년 동안의 식민지 시대를 마감하고 유대인들의 왕국인 하스몬왕조가 예루살렘에 세워진 것은 기원전 142년의 일입니다. 

하스몬왕조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반드시 보아야 할 성경 두군데를 찾아보도록 하겟습니다. 

첫째는 사무엘상 13장입니다. 기원전 1000년 경 사울이 유대왕국을 세우기 직전,  블레셋과 일전을 앞두고 있던 때의 일입니다. 블레셋과 대적하려고 모인 이스라엘인들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은 블레셋 군대를 보자  뿔뿔이 줄행랑 치기에 바빳습니다. 이 때 사울은 속전속결로 전투를 끝내려고 합니다. 야훼 전통에 따라 전투를 치루기 전 야훼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되는데 제사를 집행할 사무엘사제가 없었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칠일동안이나 꼬박 기다렸습니다. 두려움에 휩싸인 사울의 군사들은 하루가 다르게 수가 줄어 들고 있었습니다. 급박한 사울은 자신이 직접 야훼 하나님께 제사를 올립니다. 이 일로 사울은 야훼의 노여움을 사게되고 결국 자신의 왕조를 이어가지 못하고 다윗에게 왕위를 뺏기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두번 째는 역대기하 26장입니다. 남왕국 유대의 왕 웃시야는 역대 남왕국 왕들 가운데 가장 성공한 왕이었습니다. 잘 나가던 웃시야가 단 한순간에 야훼의 버림을 받고 문둥병자가 되어 쓸쓸하게 역사에서 사라지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란 바로 제사장을 제끼고 왕 스스로 성전 본관에 들어가 제단의 향을 짚혔던 것입니다. 기원전 750여년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이 두가지 유대인들의 역사적 사실과 경험을 되새기며 하스몬 왕조 시대로 들어가 봅니다. 

헬라 셀류큐스왕조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왕의 가혹한 유대 탄압 정책에 대항하여 들고 일어난 마따디아에게는 아들이 다섯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가띠라고 불리던 요한, 다씨라고 불리던 시몬, 마카베오라고 불리던 유다,  아와란이라고 불리던 엘르아잘, 그리고 아푸스라고 불리던 요나단이었습니다. 

기원전 166년에 마따디아가 죽자  유다 마카베오가 아버지의 뜻을 승계하여 독립전쟁을 이끌게됩니다. 유다 마카베오는 일시 승리를 거두며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하누카라는 축제를 벌이기도 하지만 이내 광야로 밀려나고 맙니다. 유다 마카베오는 반 헬라파 유대인들을 하나로 결집시킨 사람입니다. 

유다 마카베오가 전쟁 통에(엘리사 전투) 죽고 그의 동생들인 요나단과 시몬이 투쟁의 선봉을 이어가지만 광야로 쫓겨나 게릴라전을 이어가는 형편이었습니다. 이 때 형제 가운데 맏이인 요한이 에돔(이두메) 지역 나밧족속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살해됩니다. (나중에 등장하는 헤롯대왕은 바로 이 곳 에돔(이두메) 출신입니다.) 

요나단과 시몬이 이끄는 저항군을 살려준 것은 다름아닌 적들 곧 셀류커스왕조였습니다. 유대를 탄압하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왕이  죽자 서로가 죽은 왕의 아들임을 자처하며 자기가 왕이라고 우기는 두 사람이 쟁탈전을 벌입니다. 알렉산더 발라스라는 사람과 데메트리어스라는 이였습니다.  이 두 세력을 적절히 잘 이용하면서 요나단과 시몬은 다시 세를 키우게 됩니다. 마침내 예루살렘에 다시 입성한 요나단에게 도움을 청한 것은 바로 셀류커스 왕위 다툼을 벌이던 두 세력들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이들의 청을 교묘히 잘 이용하면서 한쪽으로부터는 유대의 통치권을 인정받고, 또 다른 한 쪽으로부터는 대제사장권을 인정받게 됩니다. 유대에 대한 정치, 종교 양 권력을 한 손에 쥐게 된 것입니다. 그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한 것은 요나단의 뒤를 이은 그의 형 시몬이었습니다. 시몬은 스스로 부르기를 “위대한 대제사장, 전략가, 그리고 유대인의 맹주”라고 칭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스몬왕조를 연 시조가 됩니다. 

이 새 왕국의 건설은 외부적으로 헬라 왕국인 셀류커스왕조의 내부분열과 새롭게 떠오르는 세력인 로마의 힘이 아직 미치지 않았던 요인이 크게 작용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독립왕국인 하스몬 왕조가 세워졌지만 이제 문제는 내부에서 일어납니다. 이제껏 반헬라 유대 독립운동에 힘을 합쳐던 사람들이 서로 파당을 지어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가장 큰 요인은  왕이 대제사장직을 겸한 일에 반발하는 세력들이 이탈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옛날 사울왕도 웃시야왕도 제사 한번 잘못 집행했다는 이유만으로 벌을 받았는데, 왕이 제사장 권력을 송두리채 가져 간다는 것은 유대 전통이 몸에 배인 세력들, 특히 그 전통 때문에 기득권을 누렸던 세력들의 반발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다윗왕 이래 누가 임명을 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세습되는 자리였고, 특별한 혈통만이 누릴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비록 돈을 주고 사고 팔더라도 그 혈통 가운데 이어여 온 것입니다. 바로 사독가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이나 시몬이나 사독가문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그 가운데 예루살렘에는 더 이상 구원이 없다며 등돌리고, 자신들만의 독특한 공동생활을 영위하며 빛의 아들이 나타나길 고대하며 격리된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일컬어 엣세네파라고 합니다. 

또 한 부류는 대제사장 및 제사직을 이어오던 종교적 귀족계급이자 헬라화된 사두개인들입니다. 

마지막 한 부류는 분리된 자들이라는 뜻을 지닌 바리새파입니다. 이들은 제사장 계열이 아닌 평민 출신들이지만 유대 전통과 율법에 충실한 무리라고 스스로를 일컫고 일반 백성들과 분리된 삶을 사는 집단이었습니다. 

에세네파는 광야에서 굴을 파고 자기들끼리 살았음으로 이후 하스몬 왕조의 왕권이나 권력 다툼과는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자기들끼리의 파당을 이루며 이후에 일어난 왕권과 권력 다툼에 중심이 되어 부침을 겪게 됩니다. 

왕이 된 시몬은 기원전 135년 사위가 다스리는 여리고성을 방문합니다. 모처럼 사위와 함께 술 한잔 나누려던 시몬은 사위 아브보스의 칼에 맞아  죽습니다. 사위의 반란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시몬의 처와 두 아들도 죽습니다. 아브보스의 반란은 시몬의 남은 아들 요한 힐카누스에 의해 실패로 끝나고 힐카누스가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됩니다. 

힐카누스는 하스몬왕조의 전성기를 이룹니다. 그는 알렉산더 대왕처럼 전 세계를 유대왕국으로 만들고 유대교로 세상을 지배할 꿈을 꾸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왕성한 정복전쟁을 벌려 옛날 다윗과 솔로몬이 지배했던 지역을 거의 손에 넣습니다. 이 때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그리심산에 있는 사마리아인들의 성전을 부숩니다. 또한 그의 큰 삼촌인 요한을 죽인 에돔(이두메) 땅도 정복하고 그 곳 사람들을 모두 할례를 받게하고 유대교로 개종을 시킵니다. 이 때 개종한 에돔(이두메) 사람의 후손들 가운데 헤롯대왕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때에 바리새파를 중심으로 한 하시딤세력이 대제사장직은 율법대로 사독가문에서 세우고 왕은 대제사장직을 내놓으라고 주장하다가 된서리 맞아 숙청을 당하고 사두개인들이 권력의 중심에 들어섭니다. 

31년 동안이나 다스리던 요한 힐카누스가 죽고 나서부터는 치열한 왕위 승계다툼으로 피흘림이 그치지 않습니다. 왕위를 이어받은 아들 아리스토불로스는 어머니와 형제들을 감옥에 가두고 동생 하나는 죽이기까지 합니다. 

일년 뒤 그가 죽자 그의 아내 살로메가 왕위에 오르는데 이 여자가 아주 웃깁니다. 여자로서 왕위에 올라보았자 대제사장을 겸임할 수가 없으니 죽은 자기 남편이 감옥에 가두었던 시동생 알렉산드로스 야나이를 감옥에서 풀어내어 그와 결혼을 하고 야나이를 왕위에 올려 놓는답니다. 야나이는 살로메보다 14살 아래였답니다. 아무튼 이 이상한 부부들 시대에 유대왕국은 또 다른 전성기를 구가합니다. 그런데 사건은 내부에서 또 일어납니다. 한동안 잠잠했던 바리새인들이 야나이왕에게 대제사장직을 내놓으라고 데모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촛불들고 함성만 지르는 데모였으면 좋으련만 제사를 집행하러 성전에 올라가는 야나이왕에게 나무 열매 등을 투척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크게 화가 난 왕은 이 때 바리새인들 약 6000명을 죽여 버립니다. 나중에는 바리새인 800명을 동시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인답니다.(여기서 십자가 처음 등장) 결국 무수한 바리새인들이 광야로 도망가거나 에세네파와 합류하기도 합니다. 

야나이가 죽자 다시 부인 살로메가 왕위를 이어받고, 이번엔 바리새파를 다시 다둑여서 끌어드리고 사두개인들을 내칩니다. 왜 그랬느냐하면 여자가 대제사장직을 맡을 수 없음으로 아들인 힐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에 앉혔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들어 준 셈이 되었고 그들을 자기 권력의 수족으로 부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답니다. 

살로메가 늙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자 그의 두 아들인 힐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로스 2세와 왕위 쟁탈전을 벌리는데 이 때 바리새파는 힐카누스 2세 쪽에 붙고, 사두개파는 아리스토불로스 2세 쪽에 붙어 싸움을 벌이게 됩니다. 이들 싸움은 어느 한 쪽의 승리가 아니라 서로 권력을 나누어 갖는 합의로 끝나게 됩니다. 종교권력인 대제사장은 힐카누스 2세에게 정치권력인 왕은 아리스토불로스 2세가 차지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이좋게 나누어 가진 권력을 오래 쥐고 있지는 못합니다. 드디어 하스몬 왕조 마지막 날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유대인 일만 이천 명을 학살한 때 곧 마지막 유대인 왕국 하스몬왕조가 무너진 것은 기원전 63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예루살렘으로 로마군대를 이끌어 들이는데 지대한 공로(?)를 세운 사람이 있습니다. 유대교로 개종한 에돔(이두메) 사람 안티파트로스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헤롯대왕의 아버지랍니다.

눈(眼, 視覺) – 그 날 5

(당신의 천국 – 일흔 아홉 번 째 이야기)

지난해(2012년) 미국 제 45대 대통령 선거를 코 앞에 둔 11월 초 시사주간지 타임은 표지 인물로 에브라함 링컨대통령을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표제를 ‘링컨이었으면 무엇을 했을까?(What would Lincoln do?)라고 달았습니다. 그 기사에는 이런 말이 있었답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의 기억은 위태로운 질주를 하는 현재의 두 후보(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미트 롬니 공화당 후보)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둘 중 누가 승리하더라도 극단적으로 분열된 국가를 영리하게 이끈 링컨의 정치수완을 진지하게 돌아볼 줄 알아야  먼 훗날 가치 있는 승리로 평가 받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lincoln

이 기사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 두가지는 오늘날 미국사회가 극단적으로 갈려 있다는 것과 미국 역사상 정치 수완이 뛰어났던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은 링컨이라는 것입니다. 

제 기억에 이 링컨대통령을 팔아서 재미를 좀 본 한국 사람 두 명이 있답니다. 한 분은 돌아가셨고, 한 사람은 여전히 활동 중이십니다. 두 분 다 제가 뵌 적도 있거니와 한 때 두 분 모두 제가 존경해 마지않는 분들이셨습니다. 또한 두 분 모두 생각할수록 안타까움에 제 가슴에 눈물을 흘리게 하시는 분들이십니다. 한 분은 돌아 가셔서 슬픔을 주시고, 다른 한 사람은 살아계셔서 슬픔을 주시는 분입니다. 

살아계신 분은 링컨 연구로 박사를 학위를 받고 링컨 이야기로 책장사 좀 하셨던 김동길선생이고, 돌아가신 분 역시 링컨 팔아 책상사도 하고 감히 대통령까지 지내신 노무현님 이십니다. 

두 분들이 쓰고 펼치셨던 링컨에 대한 이야기들은 모두 읽어 보았답니다. 그리고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면 김동길선생은 링컨이 살아가면서 만들었던 가십(gossip )에 대한 관심과 그 이야기를 팔았던 것이고, 노무현님은 정치인 링컨의 고뇌와 당시 미국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거리를 팔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똑같은 링컨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삶에 그 모습을 투영해 보려고 했던,( 어쩌면 비교 자체가 슬프기는 하지만), 두 분에 대한 평가의 차이가 어쩜 오늘 한국말을 쓰고, 한반도에 관심을 두는 이들에 대한 올바른 평가의 잣대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이쯤 성서를 보는 눈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세주 예수를 바라보는 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나라를 보는 눈이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전했던 말씀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만나는 문앞에 서 있습니다. 신약시대를 코 앞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가십(gossip)으로만 만나면 추하거나 슬퍼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나이들어 가야할 길 마주할 때 자신이 없고 두렵고, 놓고 싶지 않고, 아니 웃으며 간다하여도 가십으로 남는 삶이 된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만나려면 이천여년 전 예수 그리스도가 온 몸으로 곧 눈으로 손으로 입으로 껴 안았던 당시 갈릴리 사람들을 알고 만나고 이해하는 일을 먼저 해야만 합니다. 

기원전 167년 어간부터 헤롯왕 시대까지 약 130여년간의 팔레스타인  특히 갈릴리로 시야를 좁혀가며 당시 그 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진솔한 모습과 갈망, 염원 등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유태인들의 축제 하누카의 기원은 기원전 165년경으로 올라갑니다. 지금으로부터 얼추 2300년 쯤입니다. 한반도에서는 부여왕국 시대이고 고구려는 아직 시작하지 않은 때였답니다. 

마카베오 가문의 유다라는 이가 헬라(그리스) 셀라큐스 왕조에 대항하여 유대 독립혁명을 일으키고 잠시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의 일입니다. 채 이년도 되지 않아서 이들 곧 마카베오 일당의 세력은 다시 광야로 내몰린답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말 하나가 있다는 것 머리 속에 깊히 생각해 두셔야 합니다. 

“채 이년”이라는 말입니다. “채 이년”도 길지요. “채 일 년”, “채 한 달”, 아니 “채 하루” 때문에 역사와 인생이 바뀌는 거 어디 한 둘 이던가요? 

아무튼 용맹스럽던 유다 마카베오가 죽고 그의 동생 요나단이 뒤를 이어 독립투쟁을 이어갑니다. 요나단은 아주 뛰어난 정치꾼이었습니다.  정치꾼을 나쁘게 표현한 말이 아닙니다. 시대를 읽고 자기 시대를  잘  이끌어 갔다는 말입니다. 그를 이은 시므온 역시 대단한 정치가였습니다. 

그러나 뛰어난 정치가라는 것이 우리들이 가서 만나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이들이 바로 마카베오일가의 하스몬 왕조입니다. 

마카베오 일가를  중심으로 유대 독립 전쟁을 일으키게 했던 주 요인은 헬라(그리스) 계통인 셀류커스 왕조 에피파네스왕이 유대 전통 및 신앙을 전면 거부 및 금지 조치로 인해 생긴 일이었습니다. 

일단 “아니다”하는 일에 생각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뭉치는 것 당연한 일이지요. 그렇게 뭉치다 보면 또 생각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도 있게 마련인 것이고요. 

그렇게 유다 독립이라는 큰 틀에서 뭉쳤던 사람들의 실제 속내는 다 달랐다는 것이지요. 특히 야훼 하나님과 나 또는 내가 속한 무리들의 이해 관계 나아가 믿음의 속성에 따라 말입니다. 

그 마지막을 향해 찢어져 가는 상징으로 대변되는 실존 역사 인물 헤롯왕 이야기까지를  구약 이야기로  삼고 두 차례 더 잇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