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치(廉恥) – 새 부족 4

(당신의 천국 – 열 다섯 번 째 이야기)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백 십 세에 죽었다. –중략-  그의 세대에 속한 사람으로는 그가 죽어 조상에게로 돌아 간 마지막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야훼를 모르는 새 세대,  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어떤 일을 해 주셨는지 모르는 새 세대가 비록되었다. (판관기(사사기) 2 : 8, 10, 공동번역) 

모세의 후계자로 가나안 정복의 임무를 잘 수행한 여호수아도 그의 조상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출애굽의 경험과 가나안 정복의 첫 경험들을 쌓은 세대들이 모두 죽고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세대가 겪었던 탈애굽과 가나안 정복 과정의 일들과 그 일들 위에 함께 하셨던 야훼에 대해  겨우 이야기로만 전해들은 세대들이 가나안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일제의 경험들과 해방, 6.25 등의 경험이 없이 이야기로만 전해들은 세대들이 주인이 된 한국을 생각하신다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다만 보는 이에 따라 생각들이 다 다를 일이지만, 제 생각으로는 지금의 대한민국의 경우는 지난 역사의 경험이 없는 새 세대의문제가 아니라, 마지막 옛 세대들과 그들이 남긴 부(정치, 경제, 언론, 문화, 교육, 군사 등등 모든 면에서 가진 富)를 이어 받고자 갖은 수단을 동원하는 특정 그룹의 후예들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뻔뻔하다는 생각을 한답니다.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비단 성서의 잣대가 아니더라도 염치(廉恥)없는 짓을 너무 대놓고 하니 참 볼성 사납기만 할 뿐입니다. 

적어도 오,육, 칠십년대 이승만, 박정희 정권 아래서도 친일이 부끄러운 짓이었다는 양심은 통했었다는 생각입니다. 비록 본인 자신들의 친일 행각이나 부모 세대의 친일에 대해 숨기거나 우린 그런 일과는 무관한 척 행동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문명의 21세기에 이르러 일제 통치의 부끄러운 역사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저 뻔뻔스러움이 활개치는 것을 보면서,  제가 믿는 신앙의 눈으로 보면 “때가 꽉 차 오르고 있다.”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랍니다. 

“때가 이르렀다.” – 이즈음 한반도 남북을 바라보는 제 심정이랍니다. 어쩌면 기도일 수도 있겠고요. 

자! 이쯤, 우리들의 이야기인  천국 곧 하나님 나라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약 60년에서 백년 정도가 흐르니 세대가 싹 바뀌게 된 것이지요. 세겜에서의 새로운 계약으로야훼 하나님을  유일한 신으로 믿고 의지하고 칭송할 것을 선언하며 새 출발한 이스라엘 부족 동맹은 세대가 바뀌자마자 야훼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맙니다. 

세 새대들이 들어서면서 일어난 제일 큰 문제는 바로 십계명의 제 일계명을 범한 것입니다. 성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들을 섬겨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못할 짓들을 하였다.” 

판관(사사)시대(왜 판관 또는 사사로 불리었는지는 다음 글에서 하기로 하고요) 약 200년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새 세대들이 야훼 하나님을 버리고 택한 바알신들은 어떤 신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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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만신전(萬神殿)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는지요? 오만 잡신들이 다 모인 신들의 전당을 일컫지요. 대단히 미안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나, 이 글을 읽고 읽는 당신에게나 우리 조상들이 섬겨 왔던 오만 잡신들에 대한 믿음과 생각들의 어떤 인자들을 조금씩은 다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랍니다. 한국인이라는 사고체계, 한글을 쓰는 사고 체계에서만 느끼는 신에 대한 관념이 있다는 말씀인데, 이런 문제들은 나중에 바울을 이야기하면서 좀 상세히 이야기 해 보려고 합니다. 

아무튼 가나안에는 많은 신들이 있었습니다.  가나안 지역은 농사를 짓는 지역이었고, 농사는 계절에 영향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농사란 반복되는 일입니다. 씨뿌리고 거두는 일이 반복딘다는 말입니다. 올해는 이런 결과를보았지만 내년에는 다른 결과를 볼 수 있는 일이지요. 또한 농사는 땅과 하늘이 잘 도와 주어야 되는 일입니다. 토질도 좋아야 하고 물의 관리도 쉬어야 하지요. 그러러면 또 하늘이 도와 주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족을 이룬 첫 세대들 곧 광야세대와 가나안 정복세대들의 꿈과 목적은 노예에서의 해방과 내 땅을 가진 자유인이었습니다. 시작이 있었고 끝이 있는 일이었습니다. 야훼신은 그 시작과 끝을 만드신 신이었습니다. 

가나안에 있었던 신들은 야훼 하나님과는 다른 신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새로운 세대들에게 유혹이 가는 신들이었던 것입니다. 

원래 농사를 짓는 가나안인들이 믿는 많은 신들 가운데 으뜸되는 신의 이름은 엘(EL)이었고 그의 아내되는 신의 이름은 아세라입니다.(열왕기상 18:19)  그 둘 사이에서 나은 아들 신이 바로 바알인데 이 바알신이 주관하는 일은 비와 식물들이었답니다. 곡식들을 자라게 하는 신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바알신의 부인은 아나스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데 사랑과 전쟁을 주관하는 신이었답니다. 

자!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이스라엘족들이 범한 야훼에 대한 배신 행위들이 시작된답니다. 

크게 두가지입니다. 부(富)에 대한 욕심과 성욕(性慾)으로 지배된 사회로 변모되어간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공평과 평등으로 자유하는족속들을 위한 신이었는데 말입니다. 서로 크게 부딛힌 것이지요. 

가나안인들이 믿었던 바알신앙의 핵심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농사가 잘 되어서 부를 쌓는 것이 최고의 복인데, 그 농사가 잘 되는 일은 바알신과 아나스가 성적관계를 즐겁게 잘 맺어서 하늘과 땅의 조건을 만드는 일에서 시작된다고 믿은 것입니다. 바로 성의 자유화를 맘껏 구가하는 사회였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지요. 또한 가나안 사람들은 해마다 죽음의 신(Mot 신)이 바알을 죽이고, 바로 그 바알의 죽음 때문에 각종 자연 재해들이 생겨 농사를 망치는데, 아나스가 모트를 죽임으로 바알이 다시 살아나고 바알과 아나스의 성관계를 통해 다시 풍년이 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족의 선조들이 가졌던 야훼라는 드높은 이상(理想)에 비해 참으로 감각적인 현실 만족을 추구하는 바알신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새로운 세대들에게는 바알이 훨씬 가까운 신이었던 셈입니다. 

기원전 약 1200여년 전, 지금으로부터 3300여년 전,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 족의 모습이 그럤다는 것인데요. 뭐 오늘날과 그리 다를 게 있나요? 

그렇게 시작한 판관(사사) 시대 이야기는 또 내일로.

새 계약 – 새 부족(部族) 3

(당신의 천국 – 열 네번 째 이야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의 종교 공동체를 가르킬 뿐만 아니라 생존과 건강한 삶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갖는 주권적인 재부족화(再部族化) 사회를 가르킨다. – 노만 갓월드의 ‘히브리 성서”에서 

제가 사는 미국 동부의 아주 작은 주인 델라웨어에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낚시터들이 제법있답니다.  주 남단에 있는 Indian River도 그 중 한 곳입니다. 특히 대서양과  만나는  강 하구는 주변 해변가와 함께 아주 잘 알려진 낚시터입니다. 흑돔을 비롯한 다양한 어족들이 낚시꾼들을 부르는 곳입니다. 

그 곳에 가면 주립공원 낚시터와 계절에 따라 잡히는 어족들과 낚시 규율 등을 담은 안내판이 있답니다. 안내문은  3개국어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 스페인어 그리고 한국어입니다. 그 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어떤 언어권에 속한 사람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답니다. 

요즈음 국립공원에서 일하시는 분들 놀고 있지요. 아직도 미국 정부의 shutdown이 풀리지 않은 탓입니다. 그랜드 캐년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마찬가지라지요. 그랜드 캐년의 관광 포인트에는 많은 안내문들이 중국어로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답니다. 심지어 어떤 곳엔 영어 표기없이 중국어로만 만들어진 표시판도 볼 수 있답니다. 중국 관광객들이 대세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중국  – 소련의 붕괴 이후 세계의 한 축으로 일컬어지는 대국이지요. 그런데 중국이 대국이었던 것은 21세기 뿐만 아니지요. 유사 이래 그들은 중화(中華) 곧 세계의 중심이요, 한족(漢族)이 제일 잘난 종족이라는 우월감으로 똘똘 뭉쳐진 나라지요. 

오늘은 잠시 중국 역사를 들여다 보려고 합니다. 

중국 대륙을 지배했던 역대 수많은 왕국들이 있었지요. 혹시 진나라, 한나라, 남위,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 명나라라는 이름들 기억하시나요. 중국에 있었던 나라들 이름이지요. 그러면 북위,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는요? 마찬가지로 중국에 있었던 나라들 이름이지요. 

그런데 차이가 좀 있답니다. 먼저 이야기한 진, 한, 남위, 수, 당, 송, 명나라는 한족이 세운 나라들이고요. 나머지 북위, 요, 금, 원, 청나라는 다른 민족들이 중국을 정복해서 세운 나라들이랍니다. 

북위는 선비족이, 요나라는 거란족이. 금나라는 여진족이, 원나라는 몽골족이,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나라들이지요. 

그런데 중국을 정복했던 이민족(異民族)들은 지구상에서 없어졌거나 지금은 세력이 아주 미미하지요. 중국만 남아 있을 뿐이지요. 중화(中華) 안에는 그 모든 민족들의 것들이 섞어서 하나가 된 것이지요. 

자! 이쯤 우리들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던 때로 돌아가 보는 것이지요. 

가나안에는 이미 원주민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사는 모든 다른 종족들을 멸하시고 그 땅을 너희들에게 주마고 히브리족들에게 약속했습니다. 여호수아가  그의 일을 마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니 그가 죽고 난 후, 다윗과 솔로몬 왕국이 들어서기까지 가나안의 원주민들 다 정복하지는 못했답니다. 

성서는 그리된 까닭을 야훼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을 먼저 깬 이스라엘의 탓과 또한 그들을 경고하고 교훈을 주노라고 야훼께서 택하신 방법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태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은 예수 이후 기독교인들 믿음의 근간이 되는 아주 중요한 고백입니다. 

실제 역사적 사실을 놓고 보자면 나중에 삼손이야기나 다윗이야기에 막강한 적수로 등장하는 블레셋족 같은 경우는(그들의 이름 블레셋이 오늘날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의 어원이 된 까닭은 나중에 다윗 이야기 때 하도록 하고요.) 이미 그 당시 철기문화로 들어섰다고 합니다. 가나안을 정복한 히브리족들은 아직 청동기 수준의 무기를 쓰고 있었을 때이니까요. 

아무튼 가나안의 서쪽으로부터 동쪽까지 많은 땅을 정복하고 나서의 일입니다. 그도 이제 기가 쇠할떄로 쇠해져서 땅으로 돌아갈 나이가 되었답니다. 

세겜2

여호수아는 말년에 세겜이라고 하는 땅에서 민족 총회를 개최하게 됩니다. 12지파로 알려진 부족 총회를 연 것이지요. 

이미 그 당시에는 애굽으로부터 탈출해 온 무리들과 가나안 정복 과정을 통해 히브리족과 함께 한 가나안 원주민들, 타지에서 이들 새로운 세력들과 합친 무리들 등등이 그 민족 총회의 구성원들이 되어있었을 것입니다. 

자! 여기서 한번 깊게 생각해 볼 것이 있답니다. 

모세가 이끌어던 광야시대의 히브리족과 야훼와의 약속을 되새겨 보는 것이지요. 십계명 말입니다. “나 야훼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약속말입니다. 

그렇다면 당시에 야훼 말고 다른 신들이 많았다는 이야기이고,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일이 많았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그러지 말라는 계약이 성립된 것 아니겠어요. 

바로 이것이랍니다. 중화사상(中華思想)이 중국인들의 버팀목이듯 당시 히브리족들의 버팀목은 유일한 야훼만이 신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 시절 히브리족들을 제외한 모든 족속들의 주된 신들은 자연신 일테면 해, 달, 별, 바람이나 먹고 사는 음식이나 하루살이에 절대 불가결한 소, 말, 곡식 들이 바로 신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우상화했고요. 또 다른 아주 중요한 우상, 야훼가 가장 싫어했던 우상은 바로 사람이라는 우상이었답니다. 바로 왕으로 대변되는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체제였습니다. 

모세가 이끌었던 광야 사십년 동안의 히브리족들은 주로 종족안에서 일어난 불만, 불평이나 갈등으로 야훼와의 약속을 저버리곤 했지만, 가나안 정복 이후로는 다른 종족들이 믿고 있는 신들과 생활 양식과 문화 등등에 눈을 돌리고 유혹 당하면서 야훼와의 약속을 저버리는 일들이 생긴 게 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부족 총회를 열고 새로운 계약을 맺은 까닭입니다. 

<만일 야훼를 섬기고 싶지 않거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여러분이 오늘 택하시오. 유프라테스강 건너편에서 여러분들이 섬기던 신을 택하든지, 여러분이 들어 와서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인의 신을 택하든지 결정하시오. 그러나 나와 내 집은 야훼를 섬기겠소.”(여호수아 24: 15, 공동번역)> 

새로운 부족 이스라엘은 그렇게 새로운 다짐과 함께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다짐도 잠시, 세대가 바뀌면 또 달라지는 법이지요. 그 이야기도 성경은 우리에게 잘 전해 주고 있답니다. 그 이야기는 내일로.

다름(Difference) – 새 부족(部族) 1

(당신의 천국 – 열 두번 째 이야기) 

야훼의 종 모세가 죽은 다음이었다. 야훼께서 눈의 아들이자 모세의 부관인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내 종 모세가 죽었다. 그러나 너는 이제 이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떠나 이 요르단강을 건너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는 땅으로 들어 가거라. 너희 발바닥이 닿기만 하면 어디든지 그 곳을 모세에게 약속한 대로 내가 너희에게 주리라. (여호수아 1: 1-3, 공동번역)  

이제 모세 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뒤로 하고 여호수아와 사사기(판관기)를 중심으로 한 주간 동안 이야기를 이어가려 합니다. 광야 시대를 접고 야훼 신이 탈출 무리들인 히브리족들에게 주마고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십 년 광야 생활을 끝내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한 달에서 한달반 사이면 충분히 들어 갈 수 있었던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십 년이 걸렸습니다. 삼십 년 한 세대보다 더한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제외하고 모세를 비롯한 탈출 1세대들은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시간이 흐른 것입니다. 

성서는 카데스 땅에서 있었던 히브리족들의 야훼 하나님에 대한 불신 때문에 그리 되었다는 고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민수기 20장, 신명기 1장을 읽어 보시길) 

그리고 이제 여호수아를 대장으로 한 무리들이 여리고성을 시작으로 가나안을 정복해 나가는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성서 여호수아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정복한 땅을 부족들이 나누는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한마디 여담을 드립니다. 얼마 전 제 가게 손님과 아내가 나눈 대화입니다. 

아내 : 많이 피곤해 보여요.

손님 : 어제 밤에 잠이 안 와서 혼났다구. 거의 잠을 못잔 거 같애. 그래서인지 아주 피곤해.

아내 : 아, 그럴 땐 저는 성경을 읽으면 그냥 잠이 오던데요.

손님 : 아이고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해지. 다음엔 나도 꼭 그래야겠네요.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읽기에 좀 졸린 부분들이 있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에 이르면 흥미진진이랍니다.  마치 삼국지를 보는 것 처럼 땅따먹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삼국지

삼국지 이야기 좀 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삼국지 몇 번이나 읽어 보셨는지요?  제가 어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세 번 이상 읽었던 책들을 꼽자면 성서, 삼국지, 수학 1의 정석 등이 생각난답니다. 

그런데 이 세가지 중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었다는 말은 100% 거짓말이랍니다. 제가 삼국지를 네 다섯번 읽은 것은 사실이랍니다. 그런데 진짜 제가 읽은 것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라는 소설책일 뿐 삼국지(三國志)라는 역사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본 적은 전혀 없답니다. 

역사서 삼국지는 중국 서진 나라의 진수라는 이가 쓴 서기 184년의 후한 시대부터 280년 진나라 사마염이 천하를 통일하는 96년 동안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위서(魏書) 30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 이렇게 총 65권으로 된 책이랍니다. 

특히 삼국지 위서(魏書) 마지막 책인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에 부여, 고구려 등의 한반도 나라들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지요. 

당연히 이 역사서 삼국지의 주인공은 위나라이고, 위나라를 세운 조조가 역사의 주인공입니다. 역사는 그렇게 흘러갔으니까요. 

거기에 비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한참 뒤인 1522년 명나라 때 나관중이라는 소설가가 쓴 소설이랍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당연히 유비와 제갈 공명이지요. 

삼국지연의는 소설이니까 당연히 역사적으로 있지 않았던 사실이나 사람들이 많이 나온답니다. 그런데 저만해도 역사책 삼국지는 한 번도 다 읽어 보지 못했지만 삼국지연의는 몇 번이나 읽었던 고로 제 머리 속에 실제 상황인 것처럼 남아있는 사실은 소설 속 이야기들인 셈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돌아가 보는 히브리 족의 가나안 땅 정복 이야기도 마찬가지랍니다. 

실제적 사실과 고백의 차이가 분명 존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 사는 세상 일이란 실제적 사실과 고백이 반드시 똑 같을 수도 없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더더우기 신앙의 세계, 믿음의 세계에서는 실제적 사실과 고백의 차이를 따지는 일은 실로 무의미한 일이 되기도 합니다. 

히브리족의 가나안 땅 정착과 그들이 왕을 세워서 나라를 세우기까지의 모습을 돌아보는 여호수아와 사사(판관)기의 이야기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수아서 읽으며 마치 야훼 하나님의 약속처럼 여호수아가 앞장 선 무리들이 거의 일거에 가나안을 점령하고 12부족이 그 땅을 나누어 갖는 것처럼 보이지만 꼼꼼이 다시 들여다보면 매 순간 순간, 매 장면마다 우리들이 한번 곱씹어야만 할 장치들이 숨어 있음을 알게 된답니다. 

바로 사실과 고백의 차이를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고백을 통해 역사적 사실들을 야훼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는 기록자들의 노력을 읽게 된답니다. 

가나안 정복 이야기인 여호수아와 사사(판관)기를 통해 그 이전(광야 시대)과 그 이후(가나안 정착 시대)의 완벽한 다름 곧 차이는 민족의 이름이 바뀌는 것입니다. 

히브리족에서 12지파 부족 공동체인 이스라엘로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 다음에 잇겠습니다.

공짜- 신(神)의 무상급식법-2

(당신의 천국- 세번 째 이야기) 

야훼의 명령이니 저마다 먹을 만큼씩 거두어 들여라. 한 사람에 한 오멜씩 식구 수대로 거두어 들이면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키는 대로 하였다. 많이 거두어 들이는 사람도 있었고 덜 거두어 드리는 사람도 있었으나 오멜로 되어 보면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결국 저마다 먹을 만큼씩 거두어 들였던 것이다. (출애굽기 16장 16-19절, 공동번역) 

제 나이 어렸을 때의 기억입니다. 아마 국민학교 입학 전후 무렵일 터이니 1950년대 말에서 1960대 초 쯤의 제 기억일 것입니다. 친가보다는 외가 친적들이 많았답니다.  특히  한남동 토박이 외할아버지의 권위가 대단한 시절이어서 명절이면 외가에 모인 친척들이 수십명이 넘었답니다. 

제가 한 살 터울 외사촌 형과 막걸리에 취해 어른들의 놀림을 받던 시절이었답니다. 

잔치상에 한 잔 얼근해 지신 어른들의 이야기는 한 곳으로 모이곤 했답니다. 대청 마루에 진을 치셨던 외할아버지 항렬의 할아버지들이나 건너방의 외삼촌들과 큰 형님들 사랑채 차지였던 아버지나 이모부들 예외가 없었답니다. 

이야기의 꼬리가 물려 이어지던 이야기는 바로 6.25 전쟁 때 이야기였답니다. 

6.25a

할아버지들의 피난 이야기나, 큰 외삼촌의 국민방위군 시절 이야기, 아버지와 둘째 외삼촌의 전쟁 이야기, 막내 삼촌과 큰 형님의 피난 이야기 등등 오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리 만큼 듣고 또 들은 이야기들이랍니다. 

외가 일가들이(당시 용산 미군 부대에서 일하시던 아버지 덕에 우리 가족들도 한남동 외가의 일원이었답니다.) 피난 행렬에 합류한 것은 한강다리가 끊어진 이후였다고 합니다. 다행히 한강을 접하고 있는 한남동의 특성상 배를 타기가 쉬었기에 한강을 쉽게 건넜다고 합니다. 

외가의 피난 행렬이 천안을 지날 무렵 이고 지고 온 먹을 거리들이 동이 났고, 가락지들을 팔아야 하는 끼니를 때우는 처지들이 되었답니다. 그리고 식구들이 뿔뿔이 헤어지게 되고 부산에서 다시 합류하여 한남동으로 되돌아 오기까지의 그 긴 소설들을 들을 수 있었답니다. 

국민방위군_징집자들

제 외가의 피난 이야기를 돌아보면 급하게 짐을 꾸려 떠났지만 서울서 천안까지는 먹을 만큼의 양식을 이거나 지고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의 양식이면 바로 돌아 올 수 있겠거니 하는 생각들도 조금은 했을 것이고, 당시 지니고 떠날 양식의 전부가 그 것 뿐이었을 수도 있겠고, 운반 수단상 그 이상은 짊어지거나 이고 갈 수가 없었을 수도 있었을 겝니다. 

그 피난 대열에서 외가의 모든 식구들은 무사했고, 다시 다 한남동으로 모였다고 합니다. 다만  저 보다 일곱 살 위인 누님이 어머니 곁을 떠났다는 이야기와  제일 거지 차림으로 해골만 남은 모습으로 돌아 온 가족은 국가에서 불러서 동원되어 국민방위병이 되었던 큰 외삼촌이었다는 이야기가 아직 생생하답니다. 

자! 3500여년 전으로 중동의 시내 광야로 돌아가봅니다. 

탈애굽을 한 백만(사실 이 숫자는 아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직은’ 이라는 말을 기억해 두시면 좋겠습니다.)에 이르는 노예 무리들이 강을 건너 광야에 들어섰습니다. 

이들이 애초 목적지로 정한 가나안은 무리들이  약 한달 정도 걸으면 도착 가능한 거리였습니다. 적어도 한 달 정도 먹을 양식은 탈애굽을 할 때  너나없이 챙겨왔을 것입니다.  한 달 반쯤 지났을 때 굶어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며 무리의 우두머리인 모세를 비롯한 왈 지도부에게 원망의 소리를 드높혔다는 기록을 보면 적어도 한 달 정도는 먹는 것으로 걱정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출애굽기 16장의 기록을 보면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 탈출 노예들이 원망하고 항의하는 대상은 모세와 지도부였습니다.(출애굽기 16장 3절) 모세와 지도부가 모여서 구수회의를 하고 대책 마련을 하고 어쩌고 하는 일은 없습니다. 무리들의 원망에 바로 야훼 신이 개입해서 해결책을 내어 놓습니다.(출애굽기 16장 4절) (모세와 지도부는 허당이었다는 것인데요. 요거 나중에 또 이야기 합니다.) 

“내가 먹을 것 준다”는 약속입니다. 

야훼라는 신이 개입하는 세상, 곧 야훼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의 기본은 “먹을 건 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나라는 음식이건 햄버거건 육개장이건 아니, 하다못해 풀죽이건 굶어죽이지는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성서 이 부분에 대한 뛰어난 주석들도 많고, 오늘도 많은 설교가들이 다양한 해석들을 남기지만 신의 선언은 “내가 다스리는 한 굶어 죽지 않을 먹을 거리는 공짜로 준다”는 것입니다. 

제가 성서 이야기에서 실락원 이후에 처음으로 만나는 하나님의 나라 바로 천국의 모습입니다.  제가 죽음 이후에 만날 천국의 첫 모습인 동시에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첫 번째 동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라도 굶어 죽지 않을 만큼 공짜로 먹을 거리를 받을 수 있는 세상의 확대사”야말로 인류의 역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대사가 인류 역사라는 말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도 있는 사람들,  곧 절대 기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10억에 가깝다고 하지만 그 퍼센테이지는 인류 역사의 발전과 함께 꾸준히 줄어왔습니다. 

성서 이야기에 나오는 신(神)의 무상급식법 제 일장 제일조는 “누구라도 굶어 죽지 않을 먹을 거리는 공짜로 준다.”는 것입니다. 신이 세상을 다스리는 한 그렇다는 말입니다. 

한달 정도 걸릴 거리를 사십년이 지나서야 도달한 히브리족의 숱한 사연들 처럼 아주 간단할 것 같은 “누구라도 굶어 죽지 않을 먹을 거리는 공짜로 준다.”는 신의 선언은 ‘하나의 조건’으로 하여 350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미완성의 선언으로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답니다. 

하늘나라의 두번 째 모습,  바로 평등의 문제랍니다.

밥이 된 사내 이야기 12

다시 성서로 돌아가 보자.

마가복음 4장 30-32에는 이른바 “겨자씨의 비유”에 대해 기록하고 있고, 4장 26-29절에는 “자라나는 씨의 비유”가 마태복음 13장 33절에는 “누룩의 비유”들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어떤 여자가 누룩을 밀가루 서말속에 집어 넣었더니 온통 부풀어 올랐다. 하늘나라는 이런 누룩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 :33)”는 말을 세상을 확 바뀌는 어떤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만 겨자씨의 비유나 자라나는 씨의 비유처럼 나는 서서히 변하는 어떤 것으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그 본질 밀가루가 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비유 이야기들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은 사람이 할 일과 하나님의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 놓았다. 하루 하루 자고 일어나는 사이에 싹이 트고 자라 나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 나는지 모른다(마가 4: 26-27)” 사람이 할 일은 씨를 뿌리는 일이다. 그것을 자라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가는 과정이란 말이다.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핵심적 이해는 바로 이것이다. 땅에 씨를 뿌리는 것, 가루에 누룩을 섞는 것, 그것은 사람이 할 일이다. 그리고 씨를 심는 땅, 누룩을 받는 가루는 역사이며 현실이다. 바로 오늘이다. 그리고 자라고 부풀리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확 바뀌는 어떤 것이 아니라 비록 지금 우리 눈으로 확인하고 만질 수는 없어도 역사 안에서 현실화되는 것이다. 그 나라는 이 천년 전 예수가 서서 말하였던 갈릴리에서부터 오늘 여기까지 지속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곳이며 이 일에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도록 초청받은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예수를 죽음으로 이끌어 간 (아니 어쩌면 그 스스로 이끌려 간) 사람들의 하나님 나라의 이해는 지금 오늘도 곳곳에서 일어 나고 있다. 그를 또 다시 죽음으로 몰고 있다.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자꾸  뒤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또 어려워졌다. 쉬운 이야기 하나 하자.

 언젠가 “아버지 학교”를 다녀 온 후배가 한 말이다. “제가 확 바뀌었습니다. 기쁘게 살자는 것이죠. 우선 화를 내지 말자. 말의 높이를 낮추자. 성내는 마음을 죽이자. 그렇게 하고 나니 우리 가정이 확실히 바뀌었습니다. 가정이 천국이 되어 갑니다.”

자, 그의 표현대로 그가 확 바뀌었다치자. 그의 가정은 아버지학교를 다녀오기 전이나 다녀 온 후나 구성원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그 가정이 천국으로 바뀌었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먼 곳이 아니다.

기쁨과 나누어 먹는 밥에 대한 예수의 선포는 마침내 말로써가 아니라 그의 온 몸을 던진 증언으로 우리 앞에 다가 온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다가 서는 것이다. 더불어 나누어 먹는 본을 보이며 마침내 그의 몸을 나누는 밥으로 내어 놓은 역사적인 장면 그것이 바로 최후의 만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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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 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 나누어 주시며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하고 말씀하셨다.(마가 14: 22)” 이 때가 유월절이라고 하였다. 죽기 직전에 마지막 식탁, 그는 나누는 밥상을 온 몸으로 보여 설명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나누는 밥상과 함께 하는 것이다. 사족(蛇足)처럼 한 마디 달자. 이즈음 차고 넘치는 교인들의 “나 하나만” 또는 “내 가정만” 아니면 “내 교회만”하는 곳은 하나님의 나라와는 아주 다른 곳이다. 물론 나도 그 한 가운데 서 있다.

기쁨에 대한 예수의 실체적인 증언 그것은 바로 부활이다.

“젊은이는 그들에게 ‘겁내지 말라. 너희는 십자가에 달리셨던 나사렛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예수는 다시 살아 나셨고 여기에는 계시지 않다. 보라. 여기가 예수의 시체를 모셨던 곳이다. 자,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예수께서는 전에 말씀 하신대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그 분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전하라하였다.(마가 16: 6-7)”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번역된 ‘에게이로’라는 본래의 말 뜻은 <일어나다> 또는 <궐기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캄캄한 죽음을 이기고 다시 일어난, 다시 궐기한 예수는 갈릴리로 그의 삶의 현장이었던 갈릴리로 먼저 향했다. 기쁨은 바로 이것이다. “기쁜 소식” 곧 복음 – 예수가 살아 복음이 되어 오늘 여기 우리들의 갈릴리에서 기쁨으로 일한다는 성서의 증언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예수를 죽였던 무리들, 그를 따르다 죽음으로 몰고 가는데 함께 하였던 추종자들은 오늘도 살아 있다. 그들은 어떤 이들 이었을까?

***오늘의 사족

‘아버지 학교’를 통해 확 바뀌었다는 후배는 세월이 흘러 바뀌기 전 본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에게이로’ – 일어나라! 궐기하라! 그게 아직도 누구에게나 유효한 까닭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밥과 기쁨 – 1(하나님 나라)

밥이 된 사내 이야기 – 7

<밥과 기쁨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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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함께 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의 죽음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 볼 일이 있다.

도대체 그가 살아생전 무엇에 그렇게 관심이 있었고 무슨 말을 하였나 하는 것이다.

역사속 예수를 연구하던 또는 연구하는 학자들이나 거룩하신 정통 보수 신앙인들 모두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사실에는 의견이 일치한다. 물론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반쯤 죽은 상태에 있다가 그의 측근들에 의해서 어찌어찌 구사일생하여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멀리 일테면 스페인 어디론가 가서 숨어 살다 죽었다던가 하는 소설책들도 있다만 그런 것은 다 허구의 문학작품들이고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건은 사실인 동시에 진실임이 명백하다.

그가 왜 그렇게 죽었을까?

그가 한 말 때문이라는 것이 첫 번째 답이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 말은 예수가 한 첫 번째 설교인 동시에 그의 공생애 동안 한 모든 이야기의 요약이라고 해도 아무 탈없다. 이렇게 단정 지어 말하는 까닭은 기독교의 좌, 우파 신학자 또는 성서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a,b,c로 곧 a “때가 찼다”, b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c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렇게 나누어서 a,b는 진짜 예수가 한 말 c는 후대에 첨가한 말 이렇게 말하는 학자들로 있지만 뭐 거기까지야 고민할 필요 있겠나?

여하튼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줄기차게 이야기한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가 이야기한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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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갓 이민 와서 몇 해 동안은 주로 아이가 태어난 집들을 방문하는 일이 잦았다.

세월이 흘러 이즈음엔 자녀 결혼식 초대나 어르신들 부고(訃告) 청첩을 받는 일이 잦아졌다.

지난해와 올 들어 유난히 장례식에 참석하는 회수가 많았다. 최근에 참석하였던 세 곳의 장례식의 설교자들은 서로 다른 이들이었지만 내용은 엇비슷하였는데 나는 그 때마다 “참 아니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분! 오늘 아무개집사(성도,권사,장로)는 교회를 열심히 섬기시다가 하늘나라에 들어가셨습니다. 이제 이 죽음 앞에 서서 우리가 결단을 해야합니다. 열심히 교회 섬기다 하늘나라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지옥불에 던지워질 것입니까?” 내용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김없이 이런 협박성 경고는 빠지지 않았던 것인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야”였다. 설혹 ‘교회’ 대신에 ‘예수’로 말을 바꾼다 하여도 여전히 “아니다”이다. 마치 설교자들이 천국 열쇠를 손에 쥐고서 “너는 들어 가고, 당신은 안돼!”하는 어투도 그렇거니와 적어도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들어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 예수로 돌아가자. 예수가 한 말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왔다”에서 “다가왔다” 또는 “가까왔다”라는 말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그 나라가 이미 온 것이냐(현재형) 아니면 곧 올 것(미래형)으로 해석해야 하느냐하는 문제이다. 이 논쟁은 꽤 오래된 것이며 지금도 진행중이다. 이른바 종말론이 이 논쟁에 끼여들게 된다. 또 이야기가 어렵게 나가는 것 같다. 내가 어렵다는 표현을 자주 쓰는바 이것은 읽는 이들을 향해 하는 말이 아니고 내 스스로 하는 말이다. 쉬운 말이 내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예수와 함께 살며 그를 쫓아 다녔던 사람들이나, 예수가 죽은 후(혹 느낌이 안 좋으신 분들에게는 부활승천후) 그를 믿고 고백했던 첫 무리들(교회)은 그들 당대 곧 그들이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오지 않았고 그들은 그렇게 믿다가 죽었다.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일을 하나 생각 해 보자. 서기 2000년을 앞두고 있던 1990년대 우리 이민사회도 함께 시끄러웠던 무슨 선교회인가 하는 집단들이 “휴거”운운 하며 떠들었던 일 말이다. 종말이 온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그런 비슷한 사건들은 지난 이천년 동안 쉬지않고 계속되어 온 일이다. 서기 1000년을 앞두고서 일어났던 세계 종말에 대한 믿음은 전 유럽을 공포로 몰아놓기까지 하였다. 옛날 이야기만이 아니다. 바로 몇 달 전인 2012년 말에는 노스트라다무스라는 이름까지 얹혀 전 세계가 들썩한 일도 있었다.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을 연결 짓는 일을 두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본다. 하나는 개인의 종말이요, 다른 하나는 역사의 종말 곧 세계의 종말이다.

개인의 종말이야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 아니겠나? 그 어떤 변설과 유려한 말로 치장 하더라도 죽으면 이 세상은 없다. 세상이 끝난 것이다. 죽은 이에게 지금 여기서 돌아가는 세상은 끝난 것이다.

역사의 종말 곧 세계의 종말에 이르면 참 복잡해진다. 개인의 죽음처럼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은 뒤에 일어날 일들과 세상은 반드시 끝장은 나는데 그 뒷일들을 고민, 고민하다가 만들어 낸 말이 이른바 “피안(彼岸)”, “하늘나라”, “천당”, “천국”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말들 앞에서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 곧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역은 그렇게 가장 중요한 말과 내용이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잃게 한다. 많은 이들은 이것이 바로 올바른 성서적 이해라고 믿고 있다.

성서를 통해 보면 이러한 이해를 뒷받침 해주는 이야기들이 있다. 일테면 복음서들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 그 곳이 어떤 곳이냐 하는 명확한 언급은 거의 없다는 점, 심지어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너희가 이 비유도 알아듣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비유들을 알아듣겠느냐?”고 예수가 말했다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에게 철저히 가리워져 있다는 믿음을 심은 것들이 그러한 예이다. 이와 같은 믿음을 아주 논리 정연하게 이론화 시킨 사람이 불트만이다. 그의 이야기를 그대로 적어 보자.

“하나님 나라는 인간 역사 안에서 실현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모퉁이 돌, 건설, 그리고 완성은 어디서도 언급되지 않는다. 오직 그 나라의 ‘가까이 옴’, ‘도래’, ‘출현’만이 언급될 뿐이다. 그것은 초자연적이고 비세상적인 어떤 것이다.”

이야기가 이렇게 흐르다 보니 우리가 잃어 버린 것이 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이냐?”하는 물음이다.

*** 오늘의 사족 : 예수를 죽음으로 몰았던 그의 말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였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그리고 꿈꾸거나 가고 싶은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곳인가?

인류사에 지속된 고민 가운데 하나인 동시에 한정된 삶 가운데 자유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만난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