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

어제나 오늘이나 욕심의 끝은 없다. 그 욕심 쫓다 보니 일이 제법 커졌다. 애초 부엌이나 조금 손대어 고쳐 볼 요량이었는데 그만 일이 커져 버리고 말았다. 다 버리지 못한 욕심 탓이다.

그렇게 시간에 쫓기다 맞이한 새해 첫 날, 장기 요양 시설에 계시는 아버지와 제법 긴 시간을 함께 보냈다. “이젠 말하기도 힘들고 귀찮다”고 하시는 아버지는 “아버지, 오늘은 정월 초하루… “라는 내 말에 “정월 …초하루, 정월… 초…하루…”를 몇 번 되뇌이셨다.

올해는 호랑이해, 1926년생 내 아버지가 여덟 번 째 맞이하시는 호랑이해이다. 두어 달 후면 꽉찬 만 아흔 여섯, 우리 나이 아흔 일곱 그야말로 백세 나이가 욕심이 아닌 아버지를 생각하다.

내가 세탁소를 막 시작할 무렵이었다. “얘야! 이 동네 이름이 Newark이구나. 여기가 너의 새 방주(New Ark)가 되길 바란다!” 따져보니 그 말씀을 하셨을 때의 아버지의 나이보다 지금의 내 나이가 훨씬 많아졌다.

그리고 오늘 아침 동네 뉴스. 거의 대개의 뉴스들이 어둡다만 오늘자 News Journal도 크게 엇나가지 않는다.

델라웨어 공중보건국(Delaware Division of Public Health)은  지난 주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 수가 급증했으며 지난 수요일에만 하루 3381명의 확진자가 발생하는 등 Covid 팬데믹 이후 가장 높은 수의 감염자가 생겼다고 하였다. 또한 John Carney 주지사는Delaware주는 1월 3일 월요일부터 비상사태에 들어가고 정부가 운영하는 건물에 일반인 출입을 금한다는 발표하였단다. 모처럼 활기를 띠었던 UD(델라웨어 대학교) 겨울 학기도 전면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 한단다.

날씨는 예년에 비해 따듯하지만, 새해 첫 뉴스는 몹시 춥고 어둡다.

곰곰 이제껏 내가 맞아 온 새해 아침을 돌아본다. 아버지에게 들었던 새해 경험들도 되새겨 본다. 더하여 오래된 옛사람들이 남긴 새해 격언들도 새로 새겨본다.

그렇게 다시 만난 내 아버지에 대한 기억.

언제 어디서나 사람사는 세상에는 New Ark(새 방주)은 반드시 준비되어 있다는 생각을 해보는 새해 첫날 늦저녁,  아주 오래 전 옛사람의 말 한마디 되새겨 새해 욕심을 품어 본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2022년, 새해 나와 이어진 모든 사람들이 함께 누리는 하느님 나라를 꿈꾸어 보며. 이런 꿈의 욕심은 끝이 없어도 좋겠지.

어제 밤, 아내와 함께 한 공원 풍경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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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늘 델라웨어 주지사는 질병관리통제센터(The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의 새로운 지침에 따라 다음 주 금요일인 5월 21일부터 야외는 물론 대부분의 실내 모임에 이르기까지 백신 접종을 완전히 끝낸 사람들은 마스크를 벗고 생활할 수 있다고 발표하였다. 거리두기 역시 제한을 두지 않고, 식당, 상점 교회 등 실내모임의 제한 인원 규제 등도  해제한다고 덧붙였다.

만 일년 이 개월 동안 이어져 온 주민들의 생활양태가 완전히 바뀌어 옛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선언이었다.

신문이 전하는 주민들의 반응은 여러 갈래다. 환호하는 축이 있는가 하면, 아직은 이른 처사이어서 당분간 마스크를 계속 쓰고 다니겠다는 이들도 많단다.

이대로 팬데믹 이전의 생활을 누리게 될런지는 아직 아무도 장담하지는 못할게다.  다만 늘 그래왔듯 사람들은 바뀐 생활양식에 쉽게 적응해 나가리라.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이 쓴  ‘예수 – 사회적 혁명가의 전기(Jesus: A Revolutionary Biography)’를 읽다가 생활양식이라는 말에 꽂혀 몇 번이나 곱씹어 본 문장 하나.

<그것(하나님의 나라)은 미래를 향한 삶의 희망이라기 보다는 현재를 위한 생활양식이다. It(Kingdom of God) is a style of life for now rather than a hope of life for the future.>

온전히 제 뜻으로 만들어 나가는 생활양식을 통해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다는 말.

저녁나절 새소리 들으며 마음 다스리는 짧은 시간을 누리는 이즈음의 축복이 그저 감사하고 때론 미안하다.

오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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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2015년 9월의 마지막날 밤입니다.

지난 두어 달여 좀 정신적으로 혼돈스런 시간들을 보냈다는 생각이 드는 밤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개인적인 삶이야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엔 딱히 무어라고 찝어 말하기 어려운 허전함이 이어졌답니다.

엊저녁에 문득 든 생각이었는데, 그 허전함이란 어떤 간극(間隙) 사이에서 헤매다 결국 어느 쪽에도 가까이 못하고 하루해를 보내고 난 뒤끝에 만난 느낌 같은 것었습니다.

일테면 지난 주간에 미국을 방문해서 넓게는 세계적으로, 좁게는 한국내 또는 한인들 사이에 뉴스가 되었던 인물들이 있었지요. 프란치스코 천주교황,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들입니다.

그이들에 대한 뉴스들을 보면서 느끼는 허전함과 제 일상의 허전함 사이에는 별반 큰 거리나 간격이 놓여 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엊저녁 그런 생각의 끈을 잡게된 까닭은 화장실에 앉아 펴든 천상병 시인의 시 탓이었습니다. ‘새’라는 부제가 붙은 ‘그날은’이라는 시였습니다.

<이젠 몇 년이었는가 /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 당한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내 살과 뼈는 알고 있다. / 진실과 고통 /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내 마음 하늘 / 한편 가에서 / 새는 소스라치게 날개 편다.>

SAM_4693천상 시인이었던 천상병이 1967년에 있었던 이른바 ‘동백림사건’이라는 관제 간첩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당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호된 곤욕을 치른 날들을 되살려 쓴 시입니다. 그가 떠난지도 오래 되었거니와 그에게 ‘다리미(아이론)에 눌린 와이셔츠’같은 고통을 주었던 박정희가 죽은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그리고 2015년 오늘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이 되어 유엔에서 ‘새마을 운동’ 마케팅을 했다는 뉴스를 보면서 든 허전함 – 그런 느낌들이 지난 두어달 간 저를 누르고 있었던듯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 끝 모습에 연연해 뉴스들을 양산해 내는 이른바 언론과 종교에서 오는 허전함도 비슷한 것들이었고요.

지난달 중국 전승절 기념 행사 이후 시진핑의 방미에 이르기까지의 국제외교는 한국식으로 따지면  보수 수꼴인Donald Trump 와  종북 좌빨인Bernie Sanders에 대한 갈채만큼이나 어지럽고 현란함에서 오는 허전함이랄 수도 있겠고요.

아무튼 개인적으로나  이웃들과 손을 맞잡고 고민을 하거나 궁극으로는 허전함을 털고 사는 것 처럼 살아보자는 것이 모두의 꿈일 것이므로, 일테면 그것을 예수쟁이인 내가 ‘하나님 나라’라고 이름지어 부른다고 하여도 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내 삶속에서 만날 수만 있다면, 삶의 허전함과 혼돈스러움을 느끼지 않거나 최소한 극소화할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그리고 9월의 마지막 밤,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의 생각을 꺼내 읽어 보는 것입니다.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은 “지중해 지역의 한 유대인 농부의 생애”라는 부제가 달린 그의 유명한 저서 “역사적 예수(The Historical Jesus)”의 한국어판(2000년)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의 평화”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개혁을 통해 세계 경제가 붐을 일으키고, 식민지 총독의 통치 아래서 부자들과 대지주들은 토지 매입과 임대, 대부업을 통해 전례 없는 재물을 축적하는 마당에, 성전의 제사장들과 학자들은 민중의 굶주림과 고통, 질병을 외면한 채, 그 원인이 개인적 죄에있다고 가르치며, 브로커 노릇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식민지 상황에서 역사적 예수가 물었던 질문은 “유태인들의 하나님의 정의 공의는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 나라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여전히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유효한 질문이며, 특히 경제적 불평등과 생태계 파괴, 종교문화적 소외가 더욱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화 과정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현실적합성을 갖는 질문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질문은 2015년 오늘을 사는 누군가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말입니다.

그는 이 방대한 저서에서 “브로커들이 판 치는 세상”에서 “그 브로커들을 위한 체제와 그 체제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싸우다” 마침내 “브로커 없는 나라를 꿈꾸며 결국 그런 세상을 만든 이”가 예수라는 증언을 입증하노라 애씁니다.

그리고 그는 그 책의 후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는 예수의 의미를 가능한한 분명하게 정의하려고 시도했을 때, 예수가 ‘전적으로 하나님’(wholly God)이며 ‘전적으로 인간’(wholly man)이라고 정의했는데, 이것은 다시 말해서 예수 자신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중보자 없이 임재하신 분(unmediated presence of the divine to the human)이었다는 말이다.>

“하나님 나라를  절절히 간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미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진정 예수쟁이라면 말입니다. 아니 바로 그렇게 믿고, 그렇게 행동하고 산다면 말입니다.

그것은 아직 저는 “아니”라는 말인 동시에, 제게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했다(있다)”라는 말입니다.

제가 하기에 따라 말입니다.

9월의 마지막 날에….

털며……

바보들 세상 – 말씀 8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42 

“너희 가운데 누가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한 마리를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아흔 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둔 채 잃은 양을 찾아 헤매지 않겠느냐? 그러다가 찾게 되면 기뻐서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 와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자,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양을 찾았읍니다’ 하며 좋아할 것이다.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 누가복음 15 : 4 – 7 

 “너희의 생각은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자. 그 사람은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그대로 둔 채 그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 양을 찾게 되면 그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 마태복음 18 : 12 -14 

아주 잘 알려진 예수의 비유 말씀 가운데 하나인 잃어버린 양의 비유입니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 기록된 이 비유의 마지막 서로 다른 구절들 곧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마태)”와 “이와 같이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누가)”는 기록자들인 마태와 누가의 첨언이었을 가능이 높다는 것이 성서 연구자들 사이에 정설입니다. 

나머지 남은 예수의 비유 원형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흔 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둔 채(마태)”,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그대로 둔 채(누가)”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아나서는 주인 또는 목자의 행동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생각을 해 봅시다. 

양 백마리라는 한무리의 집단이 있습니다. 그 집단을 소유하고 있는 주인에게는 백마리들 하나 하나가 모두 소중한 가치를 지닌 재산입니다. 주인이나 목자의 입장에서 보면 말입니다. 백마리로 구성된 양의 무리는 들판 또는 산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안전한 우리(울타리나 가옥)에 있었던 상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lost sheep만일 양들이 안전한 어떤 우리안에 있었던 상황이라면, 그 상황에서 한 마리를 잃어버린 조건이었다면,  당연히 예수의 비유는 합당한 이야기가 됩니다. 상식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충분히 되찾은 후에 일어난 잔치자리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잃어버렸던 양 한마리의 가치 중 십분의 일 정도 한도내(?) 또는 양 한마리 값 통째를 다 써서 맘껏 먹고 마셔도 손해 볼 일을 아니었습니다. 그저 잃어버린 양의 가치만큼 즐긴 것으로 치부하면 될 일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비유는 이런 전제조건이 깔린 상황이 아니였습니다. 

들판이나 산에서 방목 상태에 있는 양떼에게는 그들을 지켜 줄 목자나 하다못해 양들을 지켜 줄 개들이 필요했습니다. 만일목자나 지킴이 동물조차 없이 양떼들을 방목상태로 방치한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재산권을 포기하거나 양들의 생명을 포기하는 일이었습니다. 양떼들을 공격하여 먹이로 삼으려는 들짐승이나 남의 재산을 약탈하거나 훔치는 일을 일삼던 당시 횡행했던 도적들에게는 내 놓은 밥상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이 비유에서 양떼들을 지킬 목자나 어떤 장치도 없이 양 아흔 아홉 마리를 들이나 산에 그대로 방치한 채로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아 나선 주인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쯤해서 우리 스스로에게 한번 묻기로 하지요. 

만일 똑같은 상황이라면 저나 당신은 어떤 행동을 보일까요? 아무런 전제 조건 없이, 일테면 “믿음으로”라는 수식없이 솔직하게 우리들이 보일 수 있는 행동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차라리 이런 비유가 더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 

뉴욕 맨하턴 타임 스퀘어 광장이나 서울 명동 한복판에서 좌판 행상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도록 하지요. 개당 백불 또는 십만원씩 하는 물건 백개를 놓고 팔려고 하는데 그 중 하나를 지나가던 행인 하나가 확 가로채 도망가고 있는 상황을 그려 보실까요. 

그 좌판에 있는 아흔 아홉개 곧 구천 구백불  또는 구백 구십만원을 버려둔 채, 잡을 수 있는지도 모를 그 백불 또는 십만원을 낚아채 도망간 이를 찾아 나설까요? 

한번 이런 상황을 머리 속에 그려 보면서 한번 솔직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을 생각해 보시자는 말입니다. 

아마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나 읽고 있는 당신이나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오늘 재수 더럽다”며 좌판에 있는 구천 구백불의 물건을 지키는 쪽으로 선택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지 않으신가요? 

이건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이지요, 그리고 합리적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글쎄 만일 이러한 제 물음에 당신이 “아니!”라고 하신다면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스스로를 속이고 있거나 예수 반열에 올랐거나…. 

예수가 말한 이 잃어버린 양 한마리의 비유는 바로 그런 우리들의 선택 지점에 대한 물음입니다.

상식에 대한 역설(逆說,paradox)을 넘어 상식에 대한 반역(反逆)이었습니다. 

혹시 역설, 반역. 이런 말들이 거슬리시나요? 그러면 그런 말들을 순하게 써보지요. 바로 바보랍니다.

바보들이 사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라는 말씀이랍니다. 

다가오는 주일이 기독교력으로 종려주일입니다. 사람들이 “바보들의 세상”에 열광하던 시간을 기리는 주일이지요. 그러나 똑똑한 인간들은 바보 한 사람 곧 예수를 죽이고 말지요. 십자가에 매달아 말입니다. 

자! 예수의 비유 몇 가지 더 이야기 하렵니다.

그의 선언 – 말씀7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41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갔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돈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아홉 시쯤에 다시 나가서 장터에 할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그러면 일한 만큼 품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니 그들도 일하러 갔다. 주인은 열 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오후 다섯 시쯤에 다시 나가 보니 할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어서 ‘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 있기만 하오?’ 하고 물었다.  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주인은 ‘당신들도 내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차례로 품삯을 치르시오’ 하고 일렀다.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런데 맨 처음부터 일한 사람들은 품삯을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밖에 받지 못하였다.  그들은 돈을 받아 들고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하고 따졌다. 

그러자 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고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하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 마태복음 20 : 1- 16 

인용성서 구절이 좀 길었습니다만, 이럴 때 성서 한번 다시 읽어보자는 뜻으로 길게 인용을 했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유 가운데 꽤 널리 알려진 대목입니다. 

예수가 한 이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요? 아니면 이  비유에 대해  이제껏 당신이들어 본 설교나 성서공부를 돌이켜 보면서 다시 곱씹는다면 어떤 해석과 신앙고백을 하실 수 있으신지요? 

자! 제 생각을 말씀드리기 전에 최근에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 하나 먼저 소개를 드립니다. 

제 또래의 한 사내가 지난해에 한국을 다녀왔답니다. 큰 맘 먹고 나선 십수년 만에 고국방문이었답니다.  이 사내는 이민 오기 전에 한국에서 제법 유수한 회사의 직원으로 있다가 해외파견 근무 형식으로 미국에 오게 되었답니다. 그러다 여기 눌러 앉게 되었고, 작지만 제법잘 나가던 사업체를 운영하다가 그만 통째 말아먹고 빚더미를 안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시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십 수년 만에 자녀들도 다 시집 장가를 들이고, 부부가 그저 하루 밥 먹고 살며 남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을만큼 살게 되었답니다. 그렇다고 치부를 해서 쌓인 재산이 있거나 한 형편은 아니었답니다. 

십 수년을 그렇게 고생을 하며 다시 일군 삶을 돌아보며 큰 맘 먹고 고국에를 다녀왔다는 것이지요. 짧은 모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그 사내가 하던 말이었답니다. “이젠 다시는 그 곳에 가지 않을겝니다. 너무 많이 변했어요. 모든 판단의 기준이 그저 돈이더라고요.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바로 돈이더라니까요.” 

이어지는 그의 말입니다. “만나는 친구들과 지인들은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답니다. 그들의 관심은 제가 얼마짜리 집을 소유하고 있는지, 얼마짜리 차를 타고 다니는지?  뭐 그런 것에만 관심이 있더라는 말입니다.” 

글쎄, 그 사내의 말을 100% 다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즈음 한국뉴스들을 보고 있노라면 가치판단의 기준이 ‘돈’ 인 것은 틀림없는 듯 합니다. 어떤 특정 분야뿐만이 아니라 사회 모든 분야에서 이 규칙은 어디에서나 통용되고 있는 듯합니다. 

이제 예수의 비유로 돌아갑니다. 

저 위에서 인용한 마태복음 20장의 기록에서 아주 유명한 16절의 말씀,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라는 것은 예수의 말씀이라기 보다는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의 이야기 곧 그가 첨가한 부분이다라는 것이 학자들 사이의 주된 의견이랍니다. 

16절을 빼 놓고 본다면 이 비유의 촛점은바로  15절에 있습니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라는 말입니다. 

vineyard-workers“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주인이 “네가 뭔데?”라며 꾸짖는 상대는 바로 아침 일찍부터 온종일 일하고도 한 시간 남짓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과 같은 임금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마 오늘날 이런 임금지불 방식을 고수하는 고용주가 있다면 각종 송사로 재산을 날리는 일은 고사하고 아마 사법 판단의 대상이 될런지도 모를 일입니다. 

예수의 비유는 상식을 뒤엎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상식을 뒤엎는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했을까요? 

귀가 열린 척, 눈이 뜨인 척이라도 해 가면서 비유를 곱씹어 보아야하지 않을까요? 

십수년만에 모국방문을 하고 돌아온 사내가 본 오늘날의 한국사회나 지금 저와 그 사내가 살고 있는 이 미국 땅이나 이천년전 예수가 숨쉬고 있었던 팔레스타인 유대사회나 전혀 다르지 않은 사실이 한가지 있답니다. 

법이나 율법, 아니 나아가 상식이 우선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법이나 율법 나아가 상식까지도 지킬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 그 때나 지금이나 존재한다는 것이고, 법이나 율법 나아가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제 배불리는 사람들이 그 때나 지금이나 여기나 저기나 늘 있어왔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는 비유를 통해 “그건 아니다!”라는 반기를 든 것입니다. 사람 곧 인간은 신 앞에서 누구나 평등하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예수 시대의 사람에 대한 평가가 율법의 잣대에 올려져 있었고, 제 또래의 한 사내가 본 오늘날 한국사회(한국말을 사용하는 사회)의 사람에 대한 평가가 돈에 올려져 있다는 것은 모두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에 대한 평가는 누구나 다 평등한 자리에 있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말씀5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40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 누가복음 17장 20 – 21 

제자들이 예수께 가까이 와서 “저 사람들에게는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일찌기,’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알아 듣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 보지 못하리라.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은 탓이니, 그렇지만 않다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 서서 마침내 나한테 온전하게 고침을 받으리라’ 고 말하지 않았더냐?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많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이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 – 마태복음 13장 : 10- 17 

예수가 주로 한 일은 기적행위와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바로 말씀입니다. 그 말씀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이른바 “비유”라는 형태의 이야기들입니다. 특히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들은 많은 경우 이 비유라는 형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오늘부터 몇차례 예수가 했던 비유말씀에 대해 써보려고 합니다. 

비유란 예수 당시 사람들과 그 이전 구약시대 이스라엘인들에게 아주 익숙한 이야기 방식의 한 형태입니다. 비유라는 말의 히브리어( ‘마샬’lvm, mashal)은 잠언, 속담, 풍자(satire), 비웃음(taunt), 조롱(derision), 수수께끼(riddle), 풍유 또는 비유(allegory) 등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답니다. 

그런데 예수는 스스로 왜 이런 비유를 사용해서 말씀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마태복음 13 : 10- 17, 마가  4: 10-12,  누가 8: 9-10) 

바로<보고 또 보아도 알아 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알아 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들이 알아 보고 알아 듣기만 한다면 나에게 돌아 와 용서를 받게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되새기고 넘어갈 일이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은 예수가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예수가 떠나고 난 뒤 한 세대 후쯤부터 글자화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비유로 이야기하는 까닭을 설명하는 말은 예수의 말이 아니라 구약의 이사야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사야가 야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언자로 나서기 전에 야훼 하나님께 들은 음성입니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일러라. ‘듣기는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말아라(못하리라). 보기는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말아라(못하리라).’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를 어둡게 하며 눈을 뜨지 못하게 하여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 와서 성해지면 어찌 하겠느냐?” – 이사야 6: 9- 10 

이사야에 나오는 말과 예수의 말을 곱씹어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비유로 이야기하는 까닭은 바로 “모르게 하기 위해서”라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 아닌지요? 조금 우스꽝스럽지 않으신지요? 

제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까닭은 제 생각을 누군가에게 이해시키고, 읽는 이들로 하여금 제 생각을 잘 드러내어 알게 하기 위해서 인데요, 읽는 사람들이 읽을수록 모르게 쓰는 글이라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런데 비유란 역설 곧 패러독스(paradox)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의 이런 비유에 대한 설명은 바로 역설이지요. 

바로 믿음을 전제하고 들어야만 들리고,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가짜 믿음”이 끼여들 여지가 너무나 많거니와, 실제 지난 이천년 동안 숱한 가짜들이 판을 쳐서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한 채 전혀 엉뚱한 예수만 바라보다가 간 사람들이 넘쳐나지요, 그리고 오늘 여기에서 마찬가지고요. 

here and now“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라는 말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이천년 동안 “여기있다, 저기있다”, “내가 보았다, 갔었다.” 등등 숱한 유혹들이 넘쳐났거니와 지금 오늘도 마찬가지랍니다. 

예수의 비유는 자칫 이현령 비현령(耳懸鈴 鼻懸鈴), 곧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의 이해하기 쉬습니다. 

이제 예수의 비유에 대해 이야기하렵니다. 저도 바르게 쓰고 읽는 이들도 바르게 이해하려면 바른 믿음의 잣대가 전제되어야 한답니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라는 말씀에서 “바로 너희가운데 있다”라는 말에 원뜻은 “바로 너희의 손이 미치는 곳에 있다.”라는 의미라는데는 성서학자들의 의견이 일치된답니다. 

예수의 비유, 예수의 말씀은 바로 저나 당신의 손길이 닿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는 말입니다.

일구이언 – 말씀 1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36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말씀하시자 그는 “선생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 하셨다.  또 한 사람은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따르겠읍니다. 그러나 먼저 집에 가서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 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자격이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 누가복음 9 : 59 – 62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아내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 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 마태복음 19 : 29 

가령,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누가복음 14장 26절의 말씀을 인간 공동생활의 토대였으리라고 가정하기보다는, 오히려 특별한 공동체 삶의 한 정황이라는 양식사의 한 전제를 문제삼고 싶을 것이다. 이러한 윤리적 극단주의 때문에 예수의 말씀은 일상의 행동을 규정하기에는 아주 부적합하다. 그렇게 때문에 오히려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즉, 그러한 말씀을 30년 동안이나 구전으로 전달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누가 그런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을까? 누가 그런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 들일 수 있었을까?   – 게르트 타이쎈(Gerd Theisen)의 “원시 그리스도교의 예수 말씀에 대한 문학사회학적 고찰”에서 

이즈음에도 이런 말을 쓰는지는 모르겠으되 “일구이언이면 이부지자라(一口二言 二父之子)”하는 말이 있습니다. 한입으로 다른 이야기를 하면 아버지가 둘인 사람이다라는 말이지요. 후레자식이라는 말입니다. 

이랬다 저랬다 상황에 따라 자기가 한 말을 뒤집기 일쑤인 사람을 일컬어 하는 말이지요. 특히 여기 미국이나 한국이나 정치판에서 먹고 사는 이들이 주로 듣고사는 말일겝니다. 

애비가 둘이다는 말은 욕이지요. 이즈음은 세상이 하도 급변해서 애비 두 서넛, 애미 두 서넛 되어도 욕은 될 수 없지요. 솔직히 저는 실제 그런 사람들을 욕되게 할 뜻이 전혀 없답니다. 그런 상황은 전혀 본인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고, 어떤 상황에 처한 사람일지라도 제가 믿는 신인 야훼(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똑같이 의미있는 삶인 까닭입니다. 

아무튼 이부지자(二父之子)  곧 애비가 둘이라는 말은  예전에는 큰 욕이었답니다.  후레자식이었지요. 후레자식이란 호래자식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하지요.  호(胡)와 래(來)에서 온 말입니다. 오랑캐 자식이라는 말입니다. 

누가 그렇다고요? 바로 한 입으로 딴 소리하는 사람을 일컬어 그리 불렀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말에 약속에 책임지지 않고 말을 바꾸는 사람은 오랑캐의 자식이란 말이지요.

운보 김기창

예수가 딱 그 짝이라고 제가 말한다면 아마 저를 미친놈으로 몰아치는 사람들이 차고 넘칠 것입니다. 그런데 대단히 죄송하지만 예수가 한 말씀들을 찬찬히 놓고보면 영락없이 딱 그 짝이랍니다. 

일구이언(一口二言)을 밥먹듯이 했다는 말씀입니다. 

지난 기적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는 기적을 통해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에게 “가라”는 명령을 즐겨했습니다. 가족에게로 돌아가라는 명령이었지요. 

그런데 예수는 똑같은 입으로 “가족을 버리라!”고 명령을 한답니다. 그것도 한두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가족을 버려라.”, “가족을 떠나라.”, “가족을 잊어라”, “가족을 돌아보지 마라”는 명령을 한답니다. 

도대체 이런 예수의 일구이언(一口二言)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현령 비현령(耳懸鈴 鼻懸鈴)”이라는 말도 있지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이지요. 귀걸이 코걸이는 옛말이지요. 요즈음엔 피어싱(Piercing)이라고 하지요. 입술,  혓바닥, 배꼽 등등 몸 아무데나 제 맘대로 장신구들을 달곤 하는 일 알입니다. 

일구이언이 이현령 비현령으로 아무 때나 어디서나 예수의 이름으로 만병통치가 되는 오늘날의 교회, 이른바 넘쳐나는 설교들은 때론 그저 성황당이 되곤 하지요. 

이게 누구 때문일까요? 일구이언한 예수 때문이라구요? 그런 답에는 그냥 웃고요. 

그럼 교회나 설교자들 때문이라고요? 어느 정도의 탓을 만드는 요인이 되겠지만 주된 요인은 아니랍니다. 그럼 누구 탓이냐고요? 

바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과 이 글을 쓰고 있는 제 탓이랍니다. 

자! 이제부터 예수의 말씀을 통해 그 까닭을 알아보도록 하지요.

주인공 – 기적 5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32 

그 때 더러운 악령들린 사람 하나가 회당에 있다가 큰 소리로  “나자렛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읍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하고 외쳤다.  그래서 예수께서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거라” 하고 꾸짖으시자  더러운 악령은 그 사람에게 발작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 갔다.  이것을 보고 모두들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이것은 권위 있는 새 교훈이다. 그의 명령에는 더러운 악령들도 굴복하는구나!” 하며 서로 수군거렸다.  예수의 소문은 삽시간에 온 갈릴래아와 그 근방에 두루 퍼졌다. – 마가복음 1 : 23- 28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이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요한복음 20 : 30 – 31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가 갈릴리로 나아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주로 한 일들은 치유의 기적을 행한 것입니다. 

귀신들린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문둥병, 열병, 중풍 등등의 각종 질병들을 치유하는 기적을 행함으로써 “예수의 소문은 삽시간에 온 갈릴래아와 그 근방에 두루 퍼(마가 1 :28)”졌거나,  “온 동네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 들(마가 1 : 33)”었고, “사람들은 사방에서 예수께 모여 들었(마가 1 : 45)”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께 가까이 데려 갈 수가 없었(마가 2 : 4)”거니와,  “예수께서는 밀어닥치는 군중을 피하시려고 제자들에게 거룻배 한 척을 준비하라고 이르(마가 3 : 9)”시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사람들이 예수에게로 몰려든 첫 번째 이유가 병고침의 기적을 행한데 있었다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에 이르면 미처 기록하지 못한 기적들이 아주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런 치유의 기적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까닭을 명확하게 정의합니다. 바로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20 : 31)”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예수의 치유기적 사건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이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아가 행한 권능으로 이루어진 역사적인 사실로 믿고 있듯이,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년 전까지만해도 이런 기적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믿어야만 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당연하고 마땅한 자세라고 생각했었습니다.

Pool at Bethesda

그런데 약 삼백 여년 전부터 성서학이라는 학문이 발달하면서 이런 기적 이야기들을 전하는 자료들과 성서를 분석하기 시작하였고, 그런 연구를 통해 예수의 기적이야기들은 다큐멘타리 같은 기록 영화같은 것이 아니고 이야기가 기록으로 남겨지기까지 여러 전승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일테면 똑같은 예수의 기적이야기라 할지라도 마태가 전하는 이야기와 마가의 이야기 그리고 누가가 기록한 이야기들 사이에 서로 다른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도록 하지요. 

“그런데 군중 속에는 열 두 해 동안이나 하혈증으로 앓고 있던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여러 의사에게 보이느라고 고생만 하고 가산마저 탕진했는데도 아무 효험도 없이 오히려 병은 점점 더 심해졌다.   그러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군중 속에 끼어 따라 가다가 뒤에서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손을 대자마자 그 여자는 과연 출혈이 그치고 병이 나은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곧 자기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돌아 서서 군중을 둘러 보시며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은 “누가 손을 대다니요? 보시다시피 이렇게 군중이 사방에서 밀어 대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둘러 보시며 옷에 손을 댄 여자를 찾으셨다.  그 여자는 자기 몸에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예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 마가복음 5 : 25 -34 

“마침 그 때에 열 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던 어떤 여자가 뒤로 와서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다.  예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께서 돌아 서서 그 여자를 보시고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하고 말씀하시자 그 여자는 대뜸 병이 나았다.” – 마태복음 9 : 20 -22 

혈루병자를 고치시는 예수의 기적을 전하는 마가와 마태와의 차이입니다. 기적사건을 전하는 이런 마태, 마가, 누가의 차이점들을 비교 분석하는 작업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어떤 모습이 가장 예수가 했던 원형에 가까운 것인가를 연구하는 일이 지속되었던 것입니다. 

약 200백년간에 걸친 이런 연구들을 한군데 모아 집대성한 사람은 아프리카의 성인 슈바이쳐입니다. 그의 책 “ 예수의 생애 연구사(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라는 것입니다. 

슈바이처는 이 책에서 성서학자들이 예수의 기적을 바라보는 여러가지 유형들과 그 연구의 변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이 글에서 학문적인 연구 결과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으로, 이런 연구들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점을 소개드리는 것으로 줄이고요, 아주 획일적으로 이렇다하는 결론은 아니지만 대충 예수의 기적이야기들의 변천에 대한 큰 틀에서의 같은 생각들이 있다는 점만 말씀드립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한 내용들을 보면 기적이야기의 주도권이 예수에게 있고,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를 부를 때 ‘메시야’ 또는 ‘그리스도’라는 호칭이 사용되고, 고침을 받은 사람의 선교 이야기가 이어지고, 고침받은 사람의 신앙이 강조되는 것들 <아라이 사사꾸(荒井 獻)의 예수의 행태> 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예수의 기적이야기로 가까이 시간을 돌려보면 예수는 누군가에게 요청을 받고 기적을 행하며 기적행위의 주도권을 쥐지도 않고, 메시아나 그리스도의 호칭도 없습니다. 기적 그 자체보다는 기적을 통해 고침을 받은 ‘사람’에 대한 관심이 더 크고, 고침을 받은 자의 신앙이 전제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적을 통해 치유받은 사람들이 원래 병들기 전에 그들이 있던 곳, 곧 그들의 가족이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예수의 기적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 곧 기적이야기의 주인공들을 만나 보도록하겠습니다. 이들을 만나보는 일이야말로 에수의 기적 이야기를 바로 이해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간절함 – 기적 3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30

악령의 발작으로 그 아이는 불 속에 뛰어 들기도 하고 물 속에 빠지기도 하였읍니다. 그래서 여러 번 죽을 뻔하였읍니다. 선생님께서 하실 수 있다면 자비를 베푸셔서 저희를 도와 주십시오.”  이 말에 예수께서 “‘할 수만 있다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안 되는 일이 없다” 하시자 아이 아버지는 큰 소리로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하다면 도와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 마가복음 9 : 22 – 24

개인적으로 정신을 집중해서 처리해야 할 들이 있어 한 주간 글쓰기를 쉬었답니다. 게다가 하루 걸러 내리는 눈이  일상의 시간들을 마구 헝클어뜨린 탓도 한 몫했답니다. 아무튼 다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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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정월 대보름도 지나갔습니다. 제가 어릴 때엔 해마다 음력 정초이면 시장바닥이나 역광장이나  정류장 부근에 자리를 깔고 호객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해의 토정비결을 봐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토정 이지함은 이상한 행동을 많이 했고  기지, 예언, 술수에 관한 일화를  많이 남긴 조선시대(1517-1578) 인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점보는 책 토정비결을 쓴 점술가 정도로 토정선생을 생각하지만, 그는 포천과 아산 현감을 지낸 목민관이었습니다.

특히 그가 아산현감으로 있을 때 걸인청(乞人廳)을 세워 관내에 있는 굶주린 백성, 아픈 백성, 노인들을 돌본 일들에서 이즈음 사회적 화두인 “복지”를 실현한 선각자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가 포천, 아산 두 고을 현감으로 있으면서 나라에 올린 상소문을 통해서는  당시 백성들의 어려움과 실상을 있는 그대로 소상히 적어 올리며 문제의 해결을 청원하는 백성 사랑하는 관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토정비결이라는 비결서를 그가 썻다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만 후대 사람들이 만든 비결서에 토정 행했던 여러 기행의 힘을 빌리고자 그의 이름을 차용했다는 의견이 우세하답니다.

아무튼 알수없는 내일에 대한 길흉의 점괘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 또는 행운이나 길운을 꿈꾸며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 토정이 했다는 말입니다.

“내가 뭐 하늘의 이치를 알아서 사람들의 신수를 말하겠소. 하두 졸라서 보아준 게지. 또 그네들은 내가 신수를 안보아 주면 마음에 안정을 얻지 못하고 다른 데 가서라도 기어이 신수를 보아야만 마음 편해질 것이니, 내나름대로 그들 사정을 들어 이리 저리 이야기하여 준 것 뿐이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이 했다고 전해오는 말이랍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와 함께  예수의 기록을 자신이 쓴 역사책에 남긴 사람으로 알려진 로마역사가 타키투스(Publius Cornelius Tacitus, 기원후56년 – 117년)는 그의 책 <역사>에서 로마황제 베스파시아누스가 기적을 행한 일에 대해 이렇게 기록에 남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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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일찍이 시력을 잃어버린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가 베스파시아누스 앞에 엎드려 한숨을 쉬며 자신의 눈을 고쳐줄 것을 간청했다.  – 중략 – 그가 청한 것은 베스파시아누스의 침을 자기의 뺨과 눈거풀에 문질러 달라는 것이었다. 또 어떤 사람은 손에 문제가 있었는데, 이 사람도 같은 신(세라피스 신)의 명령에 따라 베스파시아누스를 찾아와서 자신의 손을 발로 밟아 달라고 요청했다. 처음에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런 일들을 우습게 생각하고 거절했다. 그러나 병자들이 집요하게 매달리자 그의 마음도 흔들렸다.  – 중략 – 환자들의 간절한 바람도 있고 아부꾼들의 환호도 있어 용기를 가지고 시도해 보기로 했다. – 중략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의 행운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며, 더 이상 의심할 것이 없다고 판다하여 미소를 지으면서, 주변에 서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눈 앞에 섰다. 문제의 그 손은 금방 정상으로 돌와왔고, 앞을 못보던 사람에게도 새로이 광명을 찾아왔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해서는 이들을 볼 수 없는 요즘 같은 시기에도 그 때 그 사건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이 두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토정 이지함이나 로마 베스파시아누스황제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바로 비결을 받고, 기적을 받은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는 어떤 기원(祈願)과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람들의 확고한 믿음이 먼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이야기로 들어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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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보다 먼저 광야에서 ‘회개와 세례’를 선포했던 요한이나, 당시 갈릴리를 근거로 해서 일어났던 갈릴리 유다의 반로마 봉기에 많은 유대인들이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만 깊히 생각해 보면 세례요한을 찾아 나섰거나 갈릴리 유다와 함께 반로마 봉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함께 할만한 여건”들을 갖추고 있던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을 찾아가 세례를 받고 싶거나, 반로마 항쟁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을지라도, 그 길이 원천 봉쇄된 처지로 살던 사람들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나병환자, 귀신 들린 자, 간질 환자 등 각종 병을 앓고 있던 사람들이나 귀먹고 눈이 멀었거나 신체 이상이 있는 장애자들이 바로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아무 관계없이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살아야 했었고, 그것이 종교적으로 정당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적 규범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기원 곧 소망은 병이 낫고, 장애로 부터 해방되어 자신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정상인으로서 남들처럼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꿈과 소망을 이루어 줄 당시의 의술(醫術)은 그들이 기댈 곳이 못되었습니다. 값비싼 의약품들과 의술은 사회 상층부에 속하는 이들의 몫이었으며, 그들에게는 꿈도 꾸지 못할 먼 곳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댈 곳은 오직 ‘기적’뿐 이었습니다.

예수는 그런 이들을 향해 나아간 것이고, 또한 그들이 찾은 이가 바로 예수였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가 행했던 기적들은 어떤 것들이 있었고, 그 기적을 본 사람, 베품을 받은 사람, 전해들은 이들의 반응들은 어떠했으며, 기적을 행한 후 예수가 보인 모습들을 두루 훑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포용 – 기적 – 2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은 법> – 29 

요한이 예수께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 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는 우리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읍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았읍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말리지 말아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한 사람이 그 자리에서 나를 욕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여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다.” – 마가복음 9 : 38 – 41 

완전한 환상가(visionary)와 신비가(mystic)는 자신과 같은 환상가에게만 영향력을 행사하며, 그의 영향은 곧 전해진다. 실천적 지혜의 사람은 이 세상일에만 민첩하며, 단지 머리에만 영향을 미칠 뿐 가슴에는 닿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가슴 깊은 곳에서 회오리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지 않는다면, 결코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없다. 

신비적 신앙에 실천적 분별력이 동반될 때만, 강력하고 지속적인 결과가 뒤따른다. 나사렛 예수가 그의 추종자들에게 , 또한 그 추종자들을 통해 그 다음세대들에게 끼친 영향이 바로 이런 성격의 것이었다.  – 죠셉 클라우스너(Joseph Klausner)의 나사렛 예수(Jesus of Nazareth)에서 

예수의 첫 사역으로 기적을 베풀자 떠돈 소문이 “미쳤다”는 것이었고, 그 소문에 놀라 예수를 찾으러 온  그의 가족들을 향해 “누가 내 가족(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고 되물었던 예수의 모습을 그린 마가복음의 기록을 살펴보았습니다.(마가복음 3: 31 – 35) 

가족에 대한 예수의 혁명적인 발언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더 과격해집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말씀하시자 그는 “선생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 하셨다. – 누가복음 9 : 59 – 60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누가복음 14 : 26” 

비단 유대인들의 전통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아직도 우리들 실생활과 생각을 깊게 지배하고 있는 유교적 전통에서 보자면 거의 인간말종 수준의 선언인 것입니다. 

딱 예수의 말이였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고 ‘아멘’으로 받을 일이 아니라 한번 생각해 보시라는 말씀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이나 당신 주변의 사람 누군가가, 아니면 당신이 참으로 신실한 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아무개가 만일 제 부모가 죽었는데 거들떠 보지도 않고 하나님 나라 소식을 전한다고  종로거리에 나가 “예수 천당”을 외치고 있다면 그 사람을 제정신 가진 사람으로 생각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아니면 예수의 제자가 되겠다며 가족들을 심히 미워해서 전혀 돌보지않고, 자신마저 학대한다면 그게 어디 사람으로서 할 일이겠습니까? 

가족에 대한 예수의 선포는 그야말로 가족에 대한 일반적 생각을 깨부수는 혁명적 선언이자 가히 급진적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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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꼼꼼히 다시 예수의 선포를 들여다보면 예수가 그의 선포를 통해 방점을 찍은 가족의 의미는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가족에 대한 정의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가족의 범위를 끝없이 넓혀 확대한 것입니다. 

예수가 말한 가족은 핏줄 곧 혈연관계로 얽힌 관계가 아닌 그와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로 영역을 확대한 것입니다. 

먼저 예수가 찾아나섰던 갈릴리 마을의 살았던 사람들, 문둥병자를 비롯한 환자, 눈 멀고 귀먼 장애인들, 여자, 어린이, 사마리아인, 심지어 원수들 까지 예수의 가족이자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비단 그들 뿐만이 아니라 당시 로마인, 헤롯일가, 제사장들, 레위인,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를 비롯하여 부자와 권력자들까지 예수의 가족일수 있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저는 예수의 이러한 가족에 대한 관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답니다. 예수는 비록 급진적, 혁명적 언사와 선언으로 가족을 정의했지만 그는 누구나 모두가 가족이 될 수 있는 열린 가능성을 열어 놓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모습을 가장 적확하게 드러낸  말씀이 바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마가의  기록입니다. 

예수가 말씀하신 가족에 대한 선언을 바로 이해하는 일이야말로 폭넓고 깊이있게 하나님 나라를 만나고 볼 수 있는 중요한 이정표인 셈입니다. 또한 사랑의 범위를 넓히는 일인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은 비단 신앙적인 판단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른바 진보운동을 한다는 사람들, 한반도의 통일을 갈망하는 사람들, 한반도 남과 북 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 살던 한민족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면 반드시 곱씹어야할 예수의 가르침이랍니다. 

제 아무리 생각이 급진적이고, 제 잘난 구석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포용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예수가 행했던 기적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기적을 제대로 이해하고 믿고 구원을 받는 전제가 바로 예수가 선포한 가족의 뜻을 바로 이해하는 일이랍니다. 그리고 그 기적을 제대로 받아드리는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