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 – 예언자 18

(당신의 천국 – 마흔 일곱 번 재 이야기)

왕은 또한 이스라엘을 죄에 빠뜨린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베델에 세웠던 산당과 제단도 허물고 돌들을 부수어 가루를 만들었으며 아세라 목상은 태워 버렸다. – 열왕기하 23 : 15 

야훼께서 오실 무서운 날이 다가 왔다. 득달같이 다가 왔다. 야훼께서 오실 날, 역마보다 날쌔게 오는구나. 군인보다도 잽싸게 닥치는구나.   그 날은 야훼의 분노가 터지는 날, 모두들 죽도록 고생하는 날, 폭풍에 휩쓸려 가는 날, 먹구름이 뒤덮이는 어두운 날,  나팔소리 울리며 함성이 터지는 날이다. – 스바냐 1 : 14 –16

“야훼여,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이 소리, 언제 들어 주시렵니까? 호소하는 이 억울한 일, 언제 풀어 주시렵니까?    어인 일로 이렇듯이 애매한 일을 당하게 하시고 이 고생살이를 못 본 체하십니까? 보이느니 약탈과 억압뿐이요, 터지느니 시비와 말다툼뿐입니다.    법은 땅에 떨어지고 정의는 끝내 무너졌읍니다. 못된 자들이 착한 사람을 등쳐 먹는 세상, 정의가 짓밟히는 세상이 되었읍니다.” – 하박국 1 : 2 – 4, 이상 공동번역 

스물 네 살에 비명횡사를 한 아버지 아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요시야의 나이 고작 여덟 살이었습니다. 혹시 여덟 살 나이에 왕위에 오른 요시아 이야기를 보면서 생각나는 사람 없으신지요? 

조선시대 제 6대왕이었던 단종이 왕세손에 오른 나이가 여덟 살 때 였답니다. 아버지 문종이 임금노릇 한 지 이년이 조금 넘어 병으로 죽자 당시 왕세자였던 단종이 임금이 됩니다. 그의 나이 열 두살 때의 일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어린 단종은 아주 영민하고 똑똑하여 할아버지 세종 임금의 사랑을 둠뿍 받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삼촌인 수양대군의 권력욕을 이겨내지 못하고 열 일곱 살에 사약을 받고 죽습니다. 이른바 단종애사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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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야 왕이 여덟 살에 즉위했을 당시의 일이 성서 열왕기하 21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몬왕의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켜 그를 궁에서 죽였다.  그러나 지방민들이 반란자들을 모조리 쳐죽이고 왕자 요시아를 왕으로 모셔 대를 잇게 하였다.” 

역대기에서는 “맞아 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상황을 조금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지방민들이 그 반란자들을 모조리 쳐 죽이고 요시야를 왕위에 올렸다는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과연 “지방민들”은 누구였을까요? 

다른 번역본들에는 “땅의 백성들”이라고 번역되어 있답니다. 영어번역본 중 CEV(Contemporary English Version )에는 “the people of Judah” 곧 유다의 백성들이라고 번역해 놓았답니다. 

여기서 사용한 “땅의 백성들”  – 히브리말로  “암하렛츠(‛am ha·’a´rets)”라는 말 기억해  두시기를 바랍니다. 

아무튼 요시야왕은 지방민들 또는 땅의 백성들(암하렛츠)이라고 부르는 지원 세력에 의해 임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도 단종애사처럼 쉽게 왕위를 내주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단종의 할아버지 세종이 성군이었던데 반해, 요시야왕은 그의 증조 할아버지 히스기야왕이 다윗에 버금가는 임금이었습니다. 증조 할아버지를 빼닮은 요시야 역시 야훼 하나님의 사랑을 듬북 받은 임금이 됩니다. 

솔로몬 이후 남북 왕국으로 갈린 뒤 남, 북 왕국에 많은 임금들이 있었지만 단 두 사람만을 성서는 제대로 된 왕노릇을 한 임금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히스기야와 그의 증손인 요시야입니다. 

요시야왕이 막 왕위에 오르고 아직 어린 나이에 세상 물정 모를 때 예언을 했던 사람은 스바냐입니다. 

예언자 스바냐는 요시야왕이 아직 자신의 꿈을 펼치기 전 유다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바냐의 족보를 보면 그의 증조 할아버지가 히스기야였습니다. 요시야왕과는 한 집안 사람이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유다는 우상들을 섬기고 있었고, 정치 지도자들은 강대국들을 등에 업고 속임수로 백성들을 쥐어 짜고 있었으며, 거짓 예언자들과 사제들은  야훼 하나님을 우습게 여겼고, 판사들은 늑대같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유다의 운명은 벌을 받는 일만 남았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 스바냐의 예언이 이어지던 때 요시야가 성년이 되어 그의 꿈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요시야는 대대적인 성전 정화 작업과 이방 신앙과 우상들을 척결하는 작업에 나섭니다. 이 작업 과정에서 성전 안에 있던 야훼 하나님의 법전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세와 야훼 하나님과 맺었던 계약법전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이 법전의 발견으로 요시야왕의 종교개혁은 강한 힘을 얻어 박차를 가합니다. 

그가 실행했던 종교개혁의 상세한 내용들은 열왕기하 2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얼마나 많은 이방신들과 미신, 가짜 사제들이 판을 치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성적 문란 등의 사회상도 잘 알 수가 있답니다. 

요시야왕이 이런 강력한 종교개혁 정책을 밀고 나갈 수 있었던 데는 당시의 국제적 상황이 크게 한 몫하고 있었습니다. 

아시리아가 내분에 휩싸여 멸망의 길로 가속 페달을 밟고 있었고, 강국들인 바벨론과 이집트, 그리고 훗날 페르시아가 되는 메데 등등 주변 강국들은 아직 아시리아의 정황을 살피며 움추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강력한 외부의 적들의 힘이 느슨해진 상태에서 요시야의 국내 종교개혁 정책은 탄력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미 아시리아에게 점령당한 옛 북왕국 이스라엘 영토 지경까지 요시아의 종교개혁의 손길이 뻗쳤다는 것입니다. 남북으로 분열된 이후 가장 큰 세력 형성을 한 임금이 바로 요시야왕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성서는 요시야왕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야훼의 눈에 들게 바른 정치를 폈다. 모든 일에 태조 다윗을 본받아 한 발짝도 어긋나지 않고 그대로 살았다. 

그러나 요시야왕의 불꽃같던 위대한 업적은 단명(短命)하였습니다. 국제 정세가 급격히 바뀌어 갔기 때문입니다. 아시리아의 세가 위축되면서 남쪽의 이집트 세력이 치고 올라왔습니다. 요시야가  이집트 왕 느고의 군대와의 싸움에서 활에 맞아 죽으면서 유다의 몰락이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성서는 이 모든 일들이 이미 요시야의 할아버지 므나쎄가 저지른 죄 때문에 정해진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멸망을 예언하는 하바국의 예언처럼 이미 정의가 짓밟혀진 나라의 죄 때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아 이야기로 넘어 가려고 합니다. 

나훔, 스바냐, 하박국 예언자들의 예언서들을 읽으시면서 우리들의 머리 속에 꼭 담아 두고 가야할 것이 있답니다. 

성서가 누누히 지적하고 있듯이 당시에는 이런 예언자들 말고 숱한 예언자들이 있었고, 대다수의 가짜 예언자들은 당시 유다왕국은 잘 나가고 있고 잘 나갈 것이라는 예언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성서에 기록을 남긴 예언자들은 “곧 다가올 심판”이 “가까웠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당대나 그 다음 대에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비단 야훼의 심판 뿐만이 아닙니다. 야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예언 역시 당대, 또는 다음 세대들이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는 현실적 경험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언자들에 대한 역사적 또는 신앙적 경험이 그대로 후대들에게 넘겨져 전해지는 그 연장선에서 예수를 만나게 된다는 점을 기억해 두시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예레미아 이야기입니다.

기본 정신 – 예언자 13

(당신의 천국 – 마흔 두번 째 이야기) 

그(아하스 왕)는 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면전에서 쫓아 낸 민족들의 역겨운 풍속을 본받아 벤힌놈 골짜기에서 친자식들을 불살라 제물을 바쳤으며 산당과 산마루에서, 또 우거진 나무 아래서에서 분향하고 제사를 지냈다.  – 역대기하 28 : 3-4 

그(히스기야 왕)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드리기 시작하였고 하느님의 법과 계명을 지켜 자기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였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는 마음을 다 쏟았다. 그래서 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었다. – 역대기하 31 : 21 

무엇하러 이 많은 제물들을 나에게 바치느냐? 나 이제 수양의 번제물에는 물렸고, 살진 짐승의 기름기에는 지쳤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수염소의 피는 보기도 싫다.  – 중략 – 두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내가 보지 아니하리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 중략 – 내 앞에서 악한 행실을 버려라. 깨끗이 악에서 손을 떼어라. 착한 길을 익히고 바른 삶을 찾아라. 억눌린 자를 풀어 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 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 이사야 1 : 11 – 17 

20세기에 활동했던 가장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한사람인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은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신약성서 신학(Theology of the New Testament)”을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제 일장 ‘예수의 설교(The Message of Jesus)’에서 제 일과인 ‘종말론적 설교(The Eschatological  Message)’를 시작하는 첫 문장입니다. “예수 설교의 주요 개념은 바로 하나님의 통치이다. (The dominant concept of Jesus’ message is the Reign of God.)” 

하나님의 통치 곧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입니다. 

비단 불트만의 예가 아니더라도 신약성서 복음서에만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이라는 말이 백번도 넘게 나오는 것만 보아도 예수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아, 오늘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영생을 얻어 천국에 들어간다.>는 단호하고 확실한 신앙 고백을 나누기 위해서 저는 지금 “당신의 천국”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나라 이야기” 순례길을 걷고 있습니다. 

단 한 분이라도 제 이야기 순례길에 동행하며 같은 신앙 고백을 나눌 수만 있게 된다고 하여도 이 순례길은 제게 아주 의미있고, 제 삶의 가치를 스스로 부여할 수 있는 큰 일이라고 믿는답니다. 

바로 그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책이 이사야서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사야가 주로 활동했던 당시의 왕들 곧 아하스왕(주전 736년 – 주전 716년)과 히스기야왕(주전715년 – 주전 686년) 때의 역사적 사실들과 예언자 이사야의 당시 역할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이미 잠시 언급했듯이 아하스왕 시절은 북쪽에서 강력한 군대를 밀고 남하하는 아시리아 세력에 의해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시기였습니다. 

그 무렵 아하스왕의 행위에 대해 성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하스왕이 아시리아 왕들에게 도움을 청한 것도 그 때였다.(역대기하 28 : 16)”, “아하스는 야훼의 성전과 왕궁과 대신들의 집들을 털어 아시리아 왕들에게 바쳤으니 헛된 일이었다.(열왕기하 28 : 21) 

강국 아시리아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조공을 바치고 사대(事大)의 길을 택했던 아하스왕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외세(外勢)에 대해 굴복하는 일은 정권 또는 왕조의 역사를 이어가는 방편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겠으나, 오직 하나 뿐인 신(神)  야훼만을 모셔야하는 유다의 전통을 망가뜨리는 선택이기도 하였습니다. 

아하스왕 당시의 야훼 신앙을 망가뜨리는 종교적 타락에 대한 성서의 기록입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구들을 거두어 부수고 야훼의 성전 문들을 봉쇄해 버렸다. 그리고 예루살렘 모퉁이마다에 제단을 만들어 섬겼다. 또 유다의 성읍마다 산당을 세우고 남의 나라 신들에게 분향하게 하여 선조의 하나님 야휘를 진노케 하였다.(역대기하 28 : 24-25)” 

심지어 아하스왕은 이방 종교 풍습에 따라 친자식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습니다.(역대기하 28 :3) 

이사야가 야훼 하나님을 환상으로 보고 부름에 응답한 뒤 제일 먼저 했던 일이 바로 이 아하스왕 앞에 선 일입니다.(이사야서 7장) 

이사야는 야훼의 명령을 받고 두 번에 걸쳐 아하스왕 앞에 서서 야훼 하나님의 경고를 전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 시리아 등의 침략이나 외세에 대해 두려워 말고 오직 야훼 하나님만 믿으라는 경고였습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이사야의 경고를 무시하고 아시리아에게 의지합니다. 결국 이사야는 아시리아에 의해 남왕국 유다도 침공을 받아 유린되리라는 예언을 하게 됩니다. 

이 때 아하스왕 앞에서 전하는 두번 째 경고에서 이사야의 유명한 예언이 행해집니다. 바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 7 : 14)라는 예언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어질 메시아왕국편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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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승계한 사람은 그의 아들 히스기야였습니다. 히스기야왕은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의로운 왕으로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하스왕의 외교노선이었던 사대노선을 버리고 독립노선을 천명합니다. 그가 반 아시리아 정책을 선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의 주변 강국 사이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힘으로 남하하는 아시리아를 일시 저지하는데는 당시의 남쪽 강대국인 이집트의 힘이 컷기 때문입니다. 

이런 국제적 힘의 역학관계를 잘 이용했던 히스기야왕은  외교정치는 독립노선을 구가하면서 대내적으로는 과감한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다시 강화합니다. 

그는 성전을 재건, 정화 시킵니다. 이교도적인 이방신들을 모두 제거, 배척하고 유일신 야훼신앙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전통적인 제사의례를 복원하고 유월절 등의 전통적 절기를 복원함으로써 유다와 이스라엘 선조들과 함께 했던 야훼 신앙을 되찾은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예배의식을 복원한 일입니다. 지방에 산재했던 산당들을 부수어 없애고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야훼 하나님을 경배하는 제사를 지내도록 복원한 일입니다. 바로 중앙집권체제의 왕권을 복원시킨 일입니다. 

여기까지는 히스기야왕이 야훼 하나님께 복받는 위업이었습니다. 성서는 이러한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태조 다윗 못지 않게 야훼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였다.(역대기하 29 : 2) 

그러나 히스기야왕도 거기까지였습니다. 

예루살렘 중심의 제사의식과 의례, 전통 등은 야훼 하나님과 선조들이 맺었던 계약에 맞게 개혁하고 복원하고 실행하는데 성공했지만, 그 예배의 정신, 제사의 본래적 목적 곧 야훼 하나님과의 계약의 기본 정신을 되찾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들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억눌리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더불어 함께 가야하는 정신을 잃고, 그들의 인권을 짓밟고 드리는 제사는 가짜라는 예언들(이사야서 1 장, 10장 1-4절 등)입니다. 

이사야가 심판의 예언을 그치지 않는 까닭입니다. “공평을 기대하셨는데 유혈이 웬 말이며 정의를 기대하셨는데 아우성이 웬 말인가? (이사야 5 : 7)” 

그리고 그런 원인을 제공한 이들은 “나쁜 것을 좋다, 좋은 것을 나쁘다. 어둠을 빛이라, 빛을 어둠이라. 쓴 것을 달다, 단 것을 쓰다 하는 자들”, “지혜있는 이들이라 자처하는 자들, 유식한 자로 자처하는 자들, 독한 술에 빠진 자들, 뇌물에 눈이 어두어 죄인을 옳다 하고, 옳은 사람을 죄있다 하는 자들(이사야 5 : 20 -23)”이라고 선언합니다. 

히스기야왕의 성전 정화와 개혁에도 불구하고 유다왕국이 맞게 될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예언자의 예언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의 끝은 파국이 아닙니다.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 올 것입니다.(이사야서 9 : 2) 

이제 우리들이 만나 볼 이사야의 메시아 왕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