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만에 만나는 자리에 당신을…

라디오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이 흘러나온지도 벌써 여러날 되었습니다. 이렇게 올 한해도 서서히 저물어 갑니다. 이번 주간엔 한해에 대한 감사(thanks)를 드리는(giving) 날인 Thanksgiving Day를 맞습니다. 한해의 감사를 드려야만 할 대상들을 꼽아보는 일도 제법 뜻이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는 아침입니다.

제 자신과 가족들이 드려야할 감사의 내용들과 드려야할 대상들을 헤아려봅니다. 꼽자하니 꼬리를 잇습니다.

그러다 올 한해 제 마음이 자꾸 흐트러질 때마다 붙잡아 주었던 옛 선생님의 말씀 하나 떠올려봅니다.

올 한해 동안 제 마음이 자꾸 흐트러져 일상을 벗어났던 까닭은 “내가 이제껏 잘못 생각하고 살아온 것이 아닐까?”하는 물음 때문이었습니다. 일테면 그것은 제 신앙적 물음이었습니다.

이즈음에 이르러 오만하거나 무지한 자들에 의해 거의 “빨갱이들의 언어”로 규정지어지는 듯한 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민중”입니다. 이 “민중”이란 말은 어찌보면 제가 살아오면서 (비록 가까이 하지도 못했고, 스스로 그 범주에서 자꾸 벗어나려고 애써왔다는 게 솔직한 고백이겠지만) 꼭 붙잡고 싶었던 화두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제가 이해하고 믿는 성서의 가르침 탓인데, 올 한해 그 이해와 믿음이 자꾸 흔들렸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저를 추스리고 깨우쳐주신 선생님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바로 “민중과 함께 했던 예수”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안병무목사님은(1922-1996) “민중이란 정치, 경제, 문화, 종교 할것없이 ‘어떤 체제로부터 버림받고 밀려난 소외계층’이다.”라고 말씀하셨고, “그리고 그 민중이란 오늘이라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그때 그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객관화시켜 절대화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라고 가르쳐 주셨답니다.

바로 2015년 오늘, 소외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바로 민중들이고, 그 소외된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이들이 민중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비록 2015년의 제 삶이 민중적인 것이 아니고, 민중과 함께하는 삶도 아니였지만, 그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흉내라도 낸 까닭은 바로 안목사님의 가르침이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 감사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 이해와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성서를 손에 들고 질문하게 했던 신앙에 대한 감사입니다.

세월호 유가족들, 나그네나 이방인으로 이민자로 살아가는 사람들. – 모두 2015년 감사절에 위하여 기도해야만 할 민중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30년 넘는 세월동안 흔들림없이 민중들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꿈꾸며 외길 걸어온 벗을 소개 드립니다. 저도 30여년만에 이 친구를 처음 만납니다. 헤어져 만난지 30년이 넘었지만, 그가 서 있는 곳에서 한결같이 첫 마음 그대로 “어떤 체제로부터 버림받고 밀려난 소외계층”과 함께 하고 있는 김규복목사입니다. 그는 오늘도 함께하는 이들에게 ‘희망과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희망과 소망으로 산다는 것은 오늘 이 자리에서 내일을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을 초대합니다. 뜻깊은 2015년Thanksgiving이 되리라는 생각으로…

김규복목사 초청 온라인

제목 : 한국내 이민 노동자들과 다문화 가정

일시  : 2015 11 24() 오후 9오후11(미국 동부시간 기준)

장소 : 온라인 모임방https://zoom.us/j/6998016922  ) – 당일(11/24) 오후 8시 50분부터 입장 가능합니다. 녹색 글씨 링크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필라 세사모에서 당신을 온라인 강의에 초대합니다.

Join from PC, Mac, Linux, iOS or Android: https://zoom.us/j/6998016922

Or join by phone:

+1 646 558 8656 (US Toll) or +1 408 638 0968 (US Toll)

Meeting ID: 699 801 6922

참조 : http://conta.cc/1Lrc3ug

김규복목사 약력보기 (http://www.seomna.or.kr/page/m1s2.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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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이주민과 함께하는 모임> 사진첩에서

 

아름다움에 대하여

어제밤 이후 제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 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을 하고 있는 제가 그 생각을 무어라 불러야는지 딱히 이름지어 부를 수가 없었답니다. 제 머리속과 가슴을 꽉채운 어떤 생각이 있기는 한데 “그건 바로 이거다”라고 이름지어 말할 수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월요일 일터에서 일을 하면서도 그 ‘어떤 생각’이 그냥 느낌으로만 뱅뱅 돌 뿐이지, 생각이 영글어 표현에 이르는 지경에는 닿지 못했답니다.

그러다 하루가 지난 이 밤, 옛 선생님의 가르침 하나 문득 떠올리면서 그 생각을 무어라 이름 지어야 하는지를 찾아내었답니다. 바로 “아름다움”이랍니다.

저는 어제밤 <접속 – 세월호가족과 재외동포 온라인 만남>이라는 온라인 화상 모임에 함께 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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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임에는 한국에 계신 세월호 유가족분들을 비롯하여 미국, 캐나다, 독일 등지의 19개 도시에서 참가하신 약 백여명에 가까운 동포들이 함께 했답니다.

비록 컴퓨터나 휴대폰 화상을 통해 얼굴을 맞댄 것이지만, 마치 실제 한 공간에서 만나고 느끼는 것 같은 시간을 함께 했답니다.

어제밤, 거의 두시간을 넘긴 만남속에서 함께했던 이들은 마치 서로서로 손을 맞잡고 이어진 모습으로 하나가 되었었답니다.

그 순간들의 느낌들을 하나로 엮는 생각이란  바로 “아름다움”이었답니다.

사실 어제밤 함께했던 이들이 함께 나누고자 했던 것은 아픔이었답니다.

그리고 어제밤 모임은 그 아픔이 ‘너’만의 것이 아닌 ‘나’와 ‘우리’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자리였던 동시에 그 아픔을 남의 일로만 생각하는 “저들을” 향하여  “끝내 너희들도 우리가 되리라”고 함께 외쳐보자고 만든 자리였답니다.

그렇게 아파하는 자들의 모임이었지만 모임에 참석했던 우리 모두는 웃음을 잃을 수 없답니다.

바로 어제밤, 아파하는 우리들이 함께했던 그 웃음에 대한 생각을 “아름다움이다”라고 말씀하신 이는 함석헌선생님이시랍니다.

<그러나 정말 아름다움은 어디 있는지 아느냐? 도리어 강한 대조에 있지 않느냐? 푸른 잎에 붉은 꽃, 시커먼 구름에 반짝이는 샛별 모양으로. 감격을 하지. 비극이 무엇이냐? 극단의 대조 아니냐?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것을 맞대놓음으로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이 비극이다.우리 마음은 하나됨을 얻는 때에 가장 즐거움을 느낀다. 그러므로 하나될 수 없는 것을 맞대놓고 거기서 하나됨을 찾으려 하는 때에 아름다움을 느낀다.>

바로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세월호에 맺힌 한이 이미 아름다움으로 이어지는 한 “잊혀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아름다운 일들을 이어가는 새로운 걸음들을 이어갈 것입니다.

2015년 추석 – 이야기 셋(秋夕三題)

1.

이민생활에서 한국명절은 그저 추억일 뿐일 때가 많습니다. 한인들이 많이 모여사는 대도시는 그래도 명절 기분을 좀 맛보는 곳들도 있겠습니다만, 딱히 작정하고 만나지 않으면 한인들과 맞부딛히고 살지 않는 시골에서는 ‘오늘이 추석?’하고 지나치기 십상이랍니다.

다행히 친,처가 노부모님들이 모두 가까이 사시는 덕에 한국 명절이면 인사는 드리고 산답니다. 더더군다나 오늘처럼 일요일이나 여기 휴일이 명절과 겹치는 날이면 당연히 가족들이 모여 밥상을 나누게 된답니다.

그런데 이번 추석은 이런 저런 일들로 그저 ‘오늘이 추석이라네요.’라는 인사로 그냥 지나간답니다.

못내 송구스런 생각에 최근 수년래 제 취미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한 요리에 나서보았답니다. 엊저녁에 손질해 둔 쇠갈비와 사골들로 갈비찜과 사골국을 만들어 보았답니다.

오후에 아버지 어머니와 장인 장모를 찾아 갈비찜과 사골국으로 우리 내외 재롱 잠시 떨다가 돌아왔지요.

제 아무리 백세 시대가 눈 앞이라 하여도 제가 이미 환갑을 지나고보니 부모님들을 뵙고 돌아오는 길,  ‘내년 추석도…’라는 기도는 제법 절실한 것이랍니다.

2.

지난 일년 사이에 만난 벗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알던 친구들도 있지만 지난 일년 사이에 새롭게 만난 벗들과 함께 새로움을 느낀답니다.

딱히 단체라고 이름 지을 수는 없지만 그저 우리끼리 ‘세월호를 잊지 않는 필라 사람들’, 약칭으로는 ‘필라 세사모’라고 부르는 모임에서 만난 이들입니다. 제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들이랍니다.

일테면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것을 ‘공명’하려고 애쓰는 이들의 모습 – 바로 제가 배우는 점들이랍니다.

지난 주간 전세계에 으뜸 뉴스들로 퍼진 것들 중 하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미 소식입니다. 교황의 방미 일정 가운데 마지막을 장식한 것이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세계 가정 대회’였습니다.

교황의 필라 방문 일정에 맞추어 오래 전부터 이들이 준비해 온 것이 있었답니다. 지난해 여름 한국에서  ‘아파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베풀던 교황의 행렬을 되새기며, 2015년 오늘도 ‘여전히 아플 수 밖에 없는 이들’의 소리를 대변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어제 백만에 가까운 인파들 속에서 ‘SEWOL’이라는 피켓을 든 채 열명도 안되는 ‘필라 세사모’ 회원들의 기도와 외침은 교황의 행렬 속에서 모기소리보다도 작은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몸짓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쯤, 제 믿음이랍니다.

제게 배움을 주는 이들의 몸짓이 비록 교황에게는 들리지 않았겠지만, 제가 믿는 신 곧  ‘들으시는 하나님’은 이미 들었다는 믿음이랍니다.

이 믿음이 가족을 잃고 두번 째 맞는 추석을 보내는 이들에게도 전해지기를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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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일입니다. 예수쟁이이므로 성서를 펼쳐봅니다.

‘들으시는 하나님’을 웅변해 주는 성경책은 단연 창세기입니다. 히브리인들이 고백했던 신의 모습입니다.

창세기 16장과 21장에는 비주류였던 하갈의 소리를 듣는 야훼 하나님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무엇이라고 부르든간에(유태, 이슬람, 카톨릭, 개신교)  하나님은 고난과 고통 가운데 외치는 모든 아픈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고 들어주시는’ 신이라는 것입니다.

추석 – 우리들이 조상을 찾는 까닭도 조금만 생각해 보면 거기에 닿아 있는 것입니다.

*** 무릇 역사란  ‘그 들음에 대한 응답’이 기록되는 일일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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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사람들에게

어제 필라델피에 있는 작은 교회당 Ambler Mennonite Church에서는 서른여명의 한인들이 둥그렇게 둘러 앉아 약 세시간여에 걸쳐 도란도란 서로의 가슴에 쌓였던 말들을 풀어 내었답니다.

그들 가운데는 필라 인근에서 뿐만 아니라 멀리 뉴욕, 뉴저지에서 오신 분들도 있었답니다. 그렇게 둘러앉아 이어진 이야기들은 정해진 시간만 아니었다면 밤조차 새울만한 분위기였답니다.

그 가운데 한분께서 하셨던 말씀입니다.

“이번 주초에 버지니아에서 있었던 TV 생방송중에 일어난 총기사건은 이 땅에 사는 모든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방송국이 커버하는 지역의 시청자들은 실시간으로 그 사건의 현장을 지켜보았으며, 모든 미국인들이 그 사건 현장의 영상을 볼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뉴스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모든 국민들이 실시간으로 300명이 넘는 사람의 생명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것도 여러날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생중계로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비록 500일이 지났다고 하지만 그 충격적인 모습의 잔상은 제게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엊저녁에 필라세사모가 주최한 모임 “세월호 참사 500일 추모행사” 자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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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8월의 마지막  주일 아침입니다. 멀리 500일을 돌아볼 것도 없이 8월 한달 동안의 뉴스 타임라인들을 되돌려 훑어봅니다.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현장들에 대한 이야기는 세계 곳곳에서 하루 한시도 건너 뛰지 않고 어김없이 이어진 한달이었습니다.

더더군다나 다른 사람의 인격과 존엄을 “나” 또는 “우리”라는 개인이나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짓밟고 망가트리고, 온갖 수모를 가하는 현장들은 오늘 이 시간에도 도처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보내는 2015년 8월 한달 내내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이 있는 세상을 꿈꾸며 애를 끓이고 도전하며 기도하는 무엇보다 작은 것 하나라도 그 일을 위해 실천하며 살고자하는 정말 평범한 사람들은 넘쳐난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런 평범한 모든 이들에게 온몸으로 드리는 박수와 함께 드리는 글입니다.


 

8-30

팔월 마지막 주일 아침입니다. 하루 남은 팔월의 달력을 보면서 이름이 팔월(August)인 소년 이야기를 드립니다.

이미 읽어서 잘 알고 계신 분들도 많겠지만 R.J. Palacio가 쓴  동화소설  Wonder의 주인공 이름입니다. 이미 뉴욕 타임즈 선정 베스트셀러였고 2015년 마크 트웨인 상을 비롯한 여러 수상도 한 이 책은 한국에서도 번역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답니다. 한국에서는 “아름다운 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되었답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10살짜리 August는 자기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내 이름은August고요, 제 생김새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답니다. 제 생김새에 대해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시든 그보다 추한 모습일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선천적 안면기형으로 태어난  August는 열살이 되기까지 스물 일곱번이나 수술을 받았지만 누구나 그의 얼굴을 본 사람이면 악몽을 꿀만큼 기이한 얼굴을 지닌 소년이랍니다. 하지만  얼굴 생김새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지극히 평범한 10살짜리 아이랍니다.

이 소설은  열살짜리 August가 보통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처음으로 들어가서 일년 동안 벌어지는 일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단지 얼굴이 이상하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August를 평가하는 사람들의 편견과 학교아이들의 끈질긴 괴롭힘들을 불굴의 의지와 가족의 사랑, 친절을 베푸는 친구의 우정으로 극복하는 이야기랍니다.

이야기의 끝부분에 이르러 August는 이런 독백을 한답니다. “누구나 다 기립박수를 받을만 하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세상을 헤쳐나가며 극복하기 때문에…”

팔월을 보내면서 이 달에도 여전히 듣고 볼 수밖에 없었던 슬프고, 아프고, 안타까운 세상소식들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고 아름답고 희망찬 9월을 맞는 우리 모두에게 스스로 보내는 기립박수를 보낼 수 있는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It is the morning of the last Sunday in August. Looking at the calendar of August which has just one more day, I would like to share with you a story about a boy named August.

As many of you may know well, it is the name of the main character in the children’s novel, “Wonder,” written by R. J. Palacio. It was a number one book on the New York Times Best Seller List and it won several awards, including the 2015 Mark Twain Award. It was translated and published with a title, “아름다운 아이 (A Beautiful Child)” in Korea. It was loved by many people in Korea, too.

August, the main character and ten-year-old boy, introduces himself like this:

“My name is August. I won’t describe what I look like. Whatever you’re thinking, it’s probably worse.”

August was born with a rare medical facial deformity. Even after twenty-seven surgical operations, his face still looks strange enough to make those who see his face have a nightmare. However, except for his appearance, he is normal like any other ten-year-old kid in every respect.

This novel describes what August, who had been homeschooled until then, experienced during the first year at a prep school.

It is a story about how August overcomes the prejudice and distress due only to his facial deformity with his own unyielding will, love and support from his family, and warm friendship.

Almost at the end, August said to himself, “Everyone deserves a standing ovation because we all overcometh the world.”

I wish that all of us will give a standing ovation to ourselves as we enter September with a cheerful and bright mind, even though we could not avoid many sad, agonizing and deplorable incidents and news around us and in the world in August.

from Young Kim

아니, 아직도?

‘세살버릇 여든간다.’, ‘천성은 못고친다.’는 말들은 사람의 성품이나 습관이 쉽게 바뀌지 않음을 표현한 예들이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어릴 때부터 지녔던 못된 습관들과 성품들이 몸에 베어서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허나 예외없는 법칙이 없듯, 나이들면서 변하고 바뀐 것들도 있다. 일테면 ‘옳고 그름을 다투는 일’보다는 ‘같고 다른 것을 구별하는 일’을 우선하는 버릇들은 나이들어 바뀐 아주 좋은 예이다.

젊어서는 사물이나 사건 또는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옳고, 그름’이라는 잣대에 두었다면(물론 그 판단대로 살지도 못했지만) 인생의 어느 지점을 지나면서부터인지 나도 모르게 그 판단기준을 ‘같고, 다름’에 두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옳다, 그르다’의 기준으로 세상사를 바라보면 삶의 긴장감에서 오는 맛을 느낄 수 있지만, 자칫 삶의 여유를 놓칠 수도 있다. 반면에 ‘같다, 다르다’의 기준으로 세상사를 바라보면 삶이 품을 수있는 여유를 한껏 넓힐 수는 있지만, 자칫 삶의 가치를 잃을 수도 있다.

어느덧 나이들어 ‘세상사 다 좋은 게 좋은거지라며 사니 참 편하더라’는 말이다. 이런 늘늘한 내 삶의 여유를 깨트린 것은 바로 바뀌었다고 생각했던 내 성품이었는데, “세월호 참사 500일 추모행사” 포스터를 보는 순간이었다.

미루어 짐작컨대 필라 인근에 사는 한인들중 이 포스터를 보는 순간 “아니, 아직도 세월호?”하시는 이들이 태반을 넘어 대다수를 차지하지 않을까싶다. “그게 언제적 이야긴데… 책임질 사람들 다 책임졌고… 보상금 다 주었고… 그만큼 국가가 애썻고… 더더군다나 놀러가다가 일어났던 사건인데… 그만큼 했으면…”이라는 말끝에 “이래저래 사는 일도 바쁜데… 아니, 아직도 세월호?” 라는 모습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헤드뉴스를 장식하는 기사들이 하루도 아닌 시간에 따라 바뀌는 세상에서 500일이나 지난 사건, 빨리 잊혀지기를 바라는 어둡고 아픈 사건을 구태여 자꾸 꺼집어내는 것은 분명 피곤한 일이므로 그 당연함에는 설득력도 더해진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만일, 만일에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하나도 책임을 지지 않았고, 국가가 배보상금을 한푼도 주지 않았고, 국가는 사고원인과 책임을 감추기에 급급했고, 사고의 원인은 물론 책임자를 가리는 일을 방해했고, 향후 유사한 사건사고를 대비하자는 목소리마저 외면했다면…” 그게 언제적 이야기냐고 반문해서는 안되는 바로 오늘의 문제가 될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나름 삶을 늘 성서에 묻고사는 예수쟁이라고 내세우며 살고 있는 처지이므로 바로 이 지점에서 던져지는 질문으로하여,  “세월호 참사 500일 추모행사”에 한번 기웃거려 보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가족을 잃은 아픔을 안고 사는 이들의 삶은 원상회복되어야 마땅한 일임에도 그들의 신음소리가 외면받고, 그들의 삶이 소외받는 처지로 내몰리는 지경은 바로 성서가 말하는 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무릇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거나 같을 수도 있거니와 처지와 환경에 따라 옳고 그름의 기준은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소외되었다고 아픔을 호소하는 소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는 일은 옳고 그름이나 같고 다름을 떠나 사람이기에 당연히 흉내라도 내보아야 마땅한 일일 것이다. 나아가 소외되는 현장에 사람이 있는 한 “아니, 아직도?”라는 물음 보다는 “아니 어떻게?”라는 물음이 우선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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