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옛 일들은 또렷한데 최근의 일일수록 기억이 희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나는 내 나이를 수긍하곤 한다. 이즈음 제 아무리 ‘신 중년’이라는 말로 치장하더라도 그저 화장일 뿐, 모든 일에 내 나이에 걸맞는 생각과 행위로 측정해 보자면 어쩔 수 없이 나도 이미 노년이다.
모처럼 아무 생각없이 즐기던 연휴 오후, 게으른 긴 낮잠에서 깨어 일어나 아내를 재촉했다. 아내 편에서 보면, 목소리 톤만 높아가는 주제에 제 생각에 빠져 재촉하기 일쑤라고 핀잔주는 일이 당연하고 마땅할 것이다. 솔직히 이런 아내의 모습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내 피곤을 더할 만큼 미련하지는 않은 나는 조용히 차 시동을 걸고 기다릴 뿐이었다.
그렇게 아내를 재촉해 집을 나서 찾은 곳은 필라 외곽 지역에 있는 노인 요양원이었다.
벌써 너 덧 해가 지났나 보다. 당시 어머니는 곧 돌아가실 듯 하셨다. 응급으로 병원에 실려 가셨던 어머니는 평소에 ‘난 죽거든 화장으로’라는 말씀을 ‘매장으로’ 바꾸셨다. 유언처럼.
그 때 그렇게 마련한 것이 어머니 아버지 묘자리부터 우리 형제들 묘자리 까지, 누울 순서까지 다 정한 우리 가족 장지였다. 누울 묘자리 순서를 정하는데 가장 입김이 센 것 역시 어머니셨다.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 자리가 정해진 나는 혼잣 말로 웅얼거렸었다. ‘죽어서도 이 자리라니, 피곤하고만…’
그러다 병원에서 퇴원하셨던 어머니가 일주일 가량 머무르셨던 곳이 동네 요양원이었다.
올 초엔 동네 지인 한 분이 계신 뉴저지 양로원에 위로 방문을 다녀 오신 후, 어머니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 저으시며 선언하셨었다. ‘얘야, 우린 요양원이나 양로원에는 안 갈란다!’ 그 선언으로 우리 형제들은 언젠간 맞게 될 시간에 대한 준비를 마치었다.
어머니는 오늘도 정정하신 모습으로 내 오른 편에, 아내는 당연히 팔팔하게 내 왼 편에서 나를 지탱한다.
그리고 어제 찾았던 요양원에 누워 계신 분은 손 할머님이시다. 할머님은 어제 또렷하신 목소리로 아흔 둘이라고 하셨다. 그게 만 나이라면 내 어머니와 같다.
손 할머님은 필라세사모 모임의 최연장자이시다. 나는 아흔 두 해 그녀의 삶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다만 이웃의 아픔에 대한 진한 공감으로 살아오셨음은 몇 번의 만남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갑작스런 통증과 함께 병원에 실려갔던 손 할머님이 요양원으로 옮겨지신 것은 이틀 전이었다. 손 할머님 곁을 지켰던 젊은 필라세사모 친구들이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손 할머님을 위로 방문해 달라는 통문을 보내 온 것도 그 때 쯤이었다.
아내와 내 손을 꼭 잡으시고 ‘고맙다’를 몇 번이고 되뇌이시던 할머니는 ‘이젠 곧 일어날 것 같다’고 하셨다.
한 시간 여 짧은 자식 노릇을 마치고 나온 요양원 앞 뜰에는 꽃밭을 바라보며 어린 사슴들이 놀고 있었다.
손 할머니는 몇 해 전 내 어머니처럼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건 우연이다. 노년과 죽음 그리고 오늘을 살아야 하는 까닭들에 대한 책들을 내게 권하는 호주 홍 목사님의 편지를 받은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