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 8

‘주(州) 내 노인 요양원에 코로나 바이러스확산으로 가족들 임종 지키지 못해’ – 오늘자 동네 신문 온라인판에 오래 동안 걸려 있는 머리기사 제목이다.

오늘까지 주내에서 발생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사망자의 절반이 노인 요양원에서 나왔단다. 신문기사는 가족 면회가 차단된 노인 요양원의 현재 모습을 다루고 있다. 임종을 홀로 맞이해야만 하는 노인들의 모습과 빤히 알면서도 가까이 갈 수 없는 가족들의 처지를  꽤나 장문으로 전하고 있다.

노인 요양원에도 여러 등급이 있고, 고급 요양원에서 확진자나 사망자가 발생한 일은 없단다. 비교적 저소득층이 가는 요양원에서 주로 확진자와 사망자가 발생했단다. 기사는 주내 요양원의 실태도 비교적 상세히 다루고 있다.

기사를 읽으며 내 머리속은 여러모로 복잡해졌다. 약 일여 년 넘게 노양원에서 지내시다 지난 정월에 돌아가신 장인 생각과 치매기 날로 깊어지고 쇠해지시는 부모님을 할 수 있는 한 요양원에는 절대 보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지내는 내 형제들과 가족들 생각 때문이었다.

복잡한 머리 속이 내 맘대로 풀리지는 않을게다. 그저 하루 하루 시간에 감사하며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다. 이미 먼저 가신 장인이나 장모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다. 그저 모든 것 감사하므로 기억해야 할 터이다. 오늘 하루 내 삶을 감사할 수 있는 맘 하나, 먼저 가신 이들이 키워 준 것이다.

저녁 나절에 애기처럼 맛나게 드실 어머니 생각하며 우거지 갈비탕 진하게 우려 끓였다. 국을 끓이며 내일을 사는 힘을 얻다.

나는 그저 기억만 할 뿐이지만, 기억함으로 좋은 세상을 바꾸려고 늘 애쓰는 참 좋은 친구들의 삶을 보면 부끄럽기도 하고 그 정열이 부럽기도 하다. 그래도 고맙다. 그들로 하여 내일을 사는 내 힘이 배가되기 때문이다.

그래, 모든 삶은 죽음에 닿아 있지만, 누군가의 죽음은 기억을 통해 영생하는 삶에 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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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온종일 추적추적 내리는 12월 초하루, 모처럼 내 집안에서 나 홀로 누리는 즐거움을 만끽하다.

‘내 오두막에는 세개의 의자가 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해, 다른 하나는 우정을 위해, 또 다른 하나는 세상을 위해서다.’ 얼토당토않은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흉내 짓도 이런 날 내 집에서 내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일은 가하다. 이따금 내다 보는 창문 밖 풍경이 나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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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대한 큰 감사가 일다.

두 권의 책을 읽다. 홍성수가 쓴 <말이 칼이 될 때>와 윌리엄 파워스(William powers)가 쓰고 임현경이 옮긴 <속도에서 깊이로: 철학자가 스마트폰을 버리고 월든 숲으로 간 이유>들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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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수는 ‘혐오표현’이라는 말이 칼이 된 사회를 고발하며, 이어지는 ‘증오범죄’가 만연 되어가는 현실을 단숨에 읽히는 글로 엮어 놓았다.

저자 홍성수의 말마따나 ‘입법 조치나 법적 대응에 한정하지 말고 전 세계에서 고안되고 실천되어 온 거의 모든 반혐오 표현 대책을 이 책에 모두 망라해’ 놓았다. 그는 그렇게 이 책을 쓴 까닭을 ‘어떤 것이라도 시작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우리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라고 강변하며 글을 맺는다.

그는 ‘증오범죄가 발생했다면 그 사회에는 반드시 편견과 차별이 있고 혐오표현이 난무했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없이 증오범죄가 갑자기 발생하는 경우는 없다.’고 몇 차례 반복해 강조한다.

오늘을 사는 모든 이들이 한번 돌아 볼 일이다.

책을 읽으며 어느 잔치 자리에서 백인 사내가 우리 부부 테이블로 다가와 “너희 나라로 꺼려라!”했던 수 십년 전 경험과 며칠 전 내 가게에서 한 백인 여성이 “여긴 미국이야!” 소리치며 말도 안되는 불만을 터트렸던 일이 생각나 창문 밖 풍경에 위로를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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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찾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문제, 특히 소수자의 문제이다.’라거나 ‘혐오표현 자체를 금지해야 하는 영역들은 고용, 서비스, 교육 등 자율에 맡기기 어려운 영역과 방송, 광고, 인터넷 등 공공성이 강한 영역에 한정한다.’라는 저자의 주장을 읽다가 여전히 할 일 많은 세상에 감사하다.

다수자와 가진 자들이 외치는 표현의 자유의 소리가 여전히 높고, 한정하고 규제해야 할 영역들인 고용, 서비스, 교육 등과 방송, 광고, 인터넷 등 공공성이 강한 영역에서 일어나는 숱한 혐오표현들과 증오범죄들이 여전히 난무하는 오늘이기 때문이다.

다소 답답했던 마음을 풀어 준 것은 윌리엄 파워스(William powers)가 쓴 <속도에서 깊이로>이다.

<오늘날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는 보편화된 읽기가 개개인에게 부여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라는 말은 이 책에서 15세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혁명을 설명하며 저자가 한 말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문득 예수가 했던 <가라!>라는 명령을 떠올렸다.

간음한 여인을 비롯해 앉은뱅이, 소경, 절름발이들을 용서하거나 고치신 예수는 그들에게 그들이 본래 있었 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하셨다. 그들은 모두 당시 사회에서 혐오와 증오범죄의 대상자들이었다. 성서 기록에 따르면 그들의 후일담은 없다.

예수의 ‘가라!’라는 명령은 혐오와 증오범죄가 여전히 만연하고 있는 곳으로 가라는 명령이었다.

예수의 명령은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어쩌면 예수의 명령을 들은 이들의 귀가 열리기에 1500여년이 필요했고 이제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데 또 500년이 흘렀는지도 모른다.

내 집안에서 누리는 12월 초하루의 자유를 더불어 누리는 세상으로 넓혀 나가는 일은 작은 것일지라도 살아있는 한 지속해야 할 일이다.

미안하게도 나는 겨우 몇 번 얼굴 내밀었다만, 지난 두 달여 매 주말 마다 이어온 필라세사모 벗들의 꿈도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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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종일 비 내리는 12월 초하루, 집에서

배움에

살며 새로운 것들을 보여 주거나 알려 주고 가르쳐 주는 이들이 곁에 있음은 큰 축복이다. 늦은 밤 책장을 넘기다 든 생각이다.

함께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어 보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은 어쩌면 지극히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말)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생각의 차이가 컸기 때문이었다. (어쩜 이 생각 역시 나 혼자 만의 것일 수도 있겠다만…)

그렇게 함께 읽기로 한 첫 번 째 책이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다. 솔직히 내 관심을 크게 끄는 주제는 아니었다.

허나 시간에 따라 늙어가는 몸은 어쩔 수 없더라도, 몰랐던 것들을 새로 만나고 아는 기쁨으로 인해 생각하는 맘은 때로 젊어 질 수도 있는 법. 그 생각으로 넘기던 책장이었다.

<사회정의를 위한 혁명적 운동이 그러했듯이, 우리는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 문제를 규정하는 데 더 능하다.>

책장을 넘기다 번뜩 이즈음 세상 일들을 다시 생각케 한 배움이다.

결혼과 가정에 대한 이 책의 저자 Bell Hooks의 선언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는 나는 어쩜 이미 페미니스트 대열속에 서 있는 것은 아닐지?

<평등과 존중이라는 원칙 , 그리고 동반적 관계를 실현하고 오래 지속하려면 상호 만족과 성장이 필수라는 믿음의 원칙 위에 세운 동료애적 관계의 가치를 알리는 데 힘쓸 것이다.>

필라세사모 벗들에게 감사를.

혼자 걷기엔 숲길이 딱 제 격이다. 동네 Middle Run Valley 숲길을 걷다. 나무 사이를 헤집고 들어오는 햇살을 타고 가을이 숲속에 내려 앉았다. 아직 미련이 많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여름도 그 숲속에 함께 했다. 두어 시간 숲길을 걷는 사이에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다. 일주일 쌓인 노동의 피로와 이런저런 삶의 염려들을 땀과 함께 숲속에 내려 놓다. 오늘따라 인적이 매우 드물어 숲속을 홀로 향유한 즐거움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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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아내와 함께 필라 나들이를 다녀오다. 모국의 조국 정국에 맞추어 뜻 맞는 이들이 만든 행사에 머릿수 하나라도 채울 겸 해서 나선 길이다. 즉흥적으로 벌인 일이건만 준비들을 참 많이 했다. 생각이 엇비슷한 이들의 얼굴을 보는 일만으로도 살아있는 즐거움이다. 그 즐거움으로 또 한 주간의 삶을 맞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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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에 자문자답自問自答

어제 밤 미국의 검사 제도에 대해 배웠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겐 크게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이 땅에 살며 검사를 만나 본 적도 없고, 내 삶과는 특별한 연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솔직히 이제껏 이 땅의 검사 제도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몇 차례 법정에 서 본 경험은 있다. 삼십 년 넘는 이민 생활에서 손 꼽아보니 거의 열 번 가까이 법정에 가 본 듯하니 적은 숫자는 아니다. 대부분이 이민 초기에 있었던 일들이다 . 막 장사를 시작하고 손님들과의 분쟁으로, 또는 사업체를 사고 파는 과정에서 생긴 일들로 인해 서 보았던 법정 경험들이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두 차례 변호사를 선임했었다. 나머지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우리 부부가 함께 법정에 섰었다. 겁날 게 없던 젊은 시절 이야기다.

지금은 변호사, 의사를 만나지 않고 사는 삶이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물론 손님들과의 분쟁을 일으키지 않을 만큼 노회하기도 하거니와 사업체를 사고 파는 일을 만들 여력이 없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 땅의 검사제도에 대한 배움이였다. 배심원으로 불려 나갔거나 선거에서 Attorney General를 뽑거나 하면서도 솔직히 미국 또는 내가 살고 있는 주 정부의 사법체계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내게 뒤늦게 미국 사회를 새롭게 알게 해 준 귀한 시간이었다.

어제  가르쳐 준 변호사 선생님과 함께 배운 십 여명 우리들은 모두 하나의 이름으로 함께 하는 시간을 나누는 이들이다. 그 이름은 ‘필라 세사모’다. 필라델피아 인근에 살며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 살자는 뜻으로 함께 하는 이들이다.

몇 주 전에 이 모임에서 나눈 대화 가운데 이런 질문이 있었다. “왜 우린 아직도 세월호인가?” 질문만 던져 놓은 채 우린 아직 그에 대한 공동의 답을 마련하진 못하고 있다.

오늘 낮에 일을 하면서 문득 내게 떠오른 질문이었다. “왜 난 아직도 세월호인가?” 아마 어제 밤 공부 탓이었을 게다.

어제 밤 선생님은 미국의 형사 사법 제도에 있어 피고인과 검사가 다투었을 때, 만일 일심에서 검사가 패소하면 검사는 항소권이 없다고 했다. 다만 피고인이 패소했을 때는 항소권이 부여된단다.  국가와 시민과의 다툼을 다루는 룰이란다.

국가와 시민과의 다툼을 다루는 법칙을 새롭게 만들어 보자는 지속적인 싸움이야말로 바로 세월호 참사 가족들 이야기가 아닐까하는 생각에 이르러 그 숙제가 풀리기 시작했다.

다섯 번 째 한(恨)으로 맞는 한가위 명절을 보내는 가족들에게 아무 것도 못하지만 그저 함께 기억하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 만으로…

““왜 난 아직도 세월호인가?”에 대한 소심한 내 응답.

 

어느 소천(召天)

‘손할머님께서 7월 18일 소천하셨습니다.’

오늘 필라델피아에서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모임 대화방에서 본 공지다.

이즈음 나는 노인들의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며 산다. 노부모들의 이즈음 생활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제 아무리 백세 시대라 하여도 이젠 남 일만이 아닌 가까이 다가오는 내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 손정례. 전남 강진 사람. 세월호 참사 이후 그녀를 만났을 때 나이 구십이었다. 필라델피아 인근 한인들 몇몇이 모여 세월호 참사 일주기를 되새기는 날, 그녀는 한풀이 춤을 추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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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얼핏 그녀의 지나온 삶에 대한 이야기를 스치듯 들었다만, 내 기억에 깊이 새겨진 것은 그녀의 춤이었다.

그리고 지난 해 그녀가 병원과 양로원을 오가며 마지막 길에 접어들 무렵 양로원에서 잠시 함께 했던 시간,  그녀의 신산했던 삶을 가늠할 수 있었다. 세월호 가족들의 아픔이 오롯이 그녀의 가슴에 새겨져 춤사위로 풀어낼 수 있었던 까닭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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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또는 기억들.

필라 인근에 살며 세월호에 담긴 아픔들을 잊지 말자며 함께 해 온 이들의 기억 속에  세월호 아픔과 함께 남을 여인 손정례.

그녀의 못다 푼 한들과 지금 살아 기억하는 자들이 풀어야 할 한들이 얽혀 이어지는 우리들의 삶 가운데 그녀의 꿈들이 이어지기를….

 

봄 나들이

어머니나 장인이나 아직 현실과 꿈 사이를 이따금 오락가락 하시지만 두 분 모두 계셔야 할 곳에 계서 모처럼 마음이 편하다.

어제 한 달 만에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 온 어머니는 ‘얘야, 오이 김치 담궈 줄테니 밥 먹고 가라!’셨다. 아직 밥 두어 술 넘기기도 벅차신 양반이 오이 김치를 잡숫고 싶으셨나 보았다. 엊저녁엔 병원에서 요양시설로 다시 돌아오신 장인 방을 장식할 사진들을 찾아 골랐다.

아침 잠자리에서 뭉개 보기는 참 오랜만이다.

평소 어머니의 바램 대로라면 주일인 오늘 아침, 나는 교회에 나가야 마땅할 일이었다만 필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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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이 꼬리를 이어 달리는 도시 나들이는 내게 그리 즐거운 일은 아니었지만 다 내 맘 하나 편하자고 나선 길이었다.

<세월호 참사 5주기 – 필라델피아 추모/ 기억 공간>라는 이름으로 모이는 행사에 머리 수 하나라도 채워야 맘이 편할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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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한국 소식들 가운데 내 관심을 끈 것들 중 하나는 도올 김용옥이 나서 이끄는 일련의 한국현대사 해석이다. 딱히 김용옥선생이 새롭게 꺼낸 목소리는 아니다. 김용옥선생의 목소리로 하여 조금은 더 넓게 ‘그 때 그 시절의 진실’들이 퍼져 나갈 수 있는 오늘은 ‘그 시절을 그저 기억하고 살아 온’ 이들 때문에 맞이하게 된 것 일게다.  그 생각에 이르러 편해진 마음이다.

어머니는 오락가락 하시는 자신의 모습이 아직은 많이 낯 선 모양이다. 나는 ‘엄마, 다 좋아, 괜찮아, 이젠 넘어지지만 않으면 돼!’를 반복한다.

집에서 낮잠은 정말 오랜만이다. 내 방 창 밖에도 어느새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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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쩜 내가 사는 오늘이 늘 봄이 아닐까? 감히 역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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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죽

갓 태어난 아이부터 마지막 숨을 내쉬는 이들에 이르기 까지 모든 삶엔 뜻이 있다. 하여 모든 삶은 소중하고 귀하다.

팥죽을 끓여보긴 처음이다. 어머니는 팥밥, 팥떡, 팥죽까지 팥을 참 좋아신다. 내친 김에 좋아 하시는 비린 생선도 굽고 우족과 사골을 푹 고았다. 어머니 덕에 아버지와 장인까지 우족탕과 비린 생선과 팥죽 상을 받으셨다.

어머니 계신 병원에 가면 환자들이 정상이고, 아버지 계신 노인 아파트엔 온통 노인들 뿐이고, 장인 누워 계신 노인 요양원에 가면 기력 쇠한 노인들 세상이다.

모든 삶엔 뜻이 있다는 생각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 온 것이지만 이즈음에 들어 그 생각을 많이 곱씹는다.

제 삶에 뜻 있음을 알아야 가족과 이웃들 삶에 뜻을 새길 수 있다. 삶에 공감을 이루는 일이다.

아버지를 잠시 뵙고 나오는 길에 노인 아파트에 먼저 온 봄을 만나다. 바람은 아직 찬데 어느새 4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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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을 맞아 분주한 내 참 좋은 벗들이 전하는 소식에 좋은 세상을 그리며, 그저 생각 뿐인 나는 또 부끄럽고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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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세사모

월요일에 만나는 손님들은 종종 ‘주말 잘 지냈니?’, ‘주말에 뭐했니?’라고 묻는다. 이런 물음에 이즈음 내 대답은 ‘응,걸었어!’이다. 이따금 내 몸보다 족히 두 배가 넘는 이들은 말한다. ‘아니 너처럼 삐쩍 마른 애가 왜 걸어?’ 이럴 때면 나는 그저 빙그레 웃는다. 운동이 아니라 걸으며 나를 만나는 즐거움을 딱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산책의 즐거움을 깨달은 것은 최근 일이다. 내 삶이 산책길 같았으면…하는 소망을 품은 것도 물론 근자에 이르러서 이다.

산책길 같은 내 삶에서 만난 이들이 있다. 필라 세사모 벗들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 만난 이들이니 채 오 년이 안되었다.  더러는 그 이전부터 연을 이어온 이들도 있지만  ‘세월호’라는 이름으로 다시 만난 그들은 그 이전과 달랐다.

어제, 그 벗들과  새해 맞이를 함께 했다. 족히 다섯 시간에 걸친 이야기 마당이었는데 내게는 모처럼 큰 공부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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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 전체 진행을 맡은 권오달님은 매사 진중하지만 언제나 여유로움을 풍긴다. 어제 행사를 진행하는 그의 머리 속엔 이미 필라세사모의 상반기 계획들이 자리잡았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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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그저 평범한 나같은 아줌마들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는 이현옥님은 필라세사모에서 그 ‘평범한 아줌마의 위력’을 보이는 이다. 그가 정리해 낸 필라세사모가 해 온 일들을 보고 들으며 든 생각 하나. ‘참 꾸준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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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공돌이’인 김태형님은 엉터리 문과 출신인 내게 부끄러움을 안기곤 한다. 다만 마이크를 잡으면 시간 조절이 잘 안되는 흠이 있긴 한데,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참 좋았다. 지난 이년 여 짧은 시간동안 벌어졌던 그 엄청난 일들을 쉽게 잊고만 나를 깨우쳤기 때문이다. 한반도를 에워 싼 운기에 대한 설명은 그저 덤이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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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으로 말하자면 모임 장소로 흔쾌히 집을 내준 안주인의 장구소리에서 뿜어 나오는 소리와 가락이 으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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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백년을 돌아보며 한반도의 새해를 바라보는 이선아님이 던진 화두는 민중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3.1 운동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공동체가 걸어 온 진보적 걸음의 주인이자 추동력은 바로 밑바닥 민중이다라고 받았다. 그런 뜻으로 그가 던진 그 시대의 만세꾼으로서의 필라세사모를 잠시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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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동작, 손동작에서 머리 회전까지 느려지기 시작한 내게, 이른바 미디어의 변화는 따라잡을 수 없는 세태 변화이다. 비단 나이 탓으로 느려진 나같은 세대 뿐만 아니라 제 고집만으로 좁은 세상에 사는 이들에게 던진 이호정님의 ‘뉴스를 읽는 혜안 찾기’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모두 유효하다. 어쩜 우리들의 삶이란 귀 쫑긋 세워 참과 거짓 사이 선택을 이어가는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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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유일한 초대손님 정성호님은 ‘촛불시위가 한국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첬나?’하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던졌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조금 삐딱한 마음이 되어 기도를 했다. 이 땅에서 공부하거나 잠시 머무르다 다시 한반도로 돌아가는 이른바 지식인들이 자신의 진정한 삶의 자리에서 함께하는 공동체를 위해 일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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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공부방은 시종 열공 분위기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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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 그룹 토의는 진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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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시간 손님들을 위한 밥상 준비에 홀로 애쓰는 안주인에게서 그 순간의 민(民)을 보다. 집 주인 장석근님은 평소 쉽게 드러나지 않는 필라세사모의 든든한 뒷배다.

DSC04674DSC04593걷지 않고 느낀 어제 산책의 즐거움이라니!

어제 그 자리에 반드시 있어야 할 사람 이종국님. 긴급한 가정사로 짧은 일정으로 한국에 나간 그가 전해 온 사진 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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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참여, 연대에 앞장 선 오늘의 만세꾼!

손 할머니

오랜 옛 일들은 또렷한데 최근의 일일수록 기억이 희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나는 내 나이를 수긍하곤 한다. 이즈음 제 아무리 ‘신 중년’이라는 말로 치장하더라도 그저 화장일 뿐, 모든 일에 내 나이에 걸맞는 생각과 행위로 측정해 보자면 어쩔 수 없이 나도 이미 노년이다.

모처럼 아무 생각없이 즐기던 연휴 오후,  게으른 긴 낮잠에서 깨어 일어나 아내를 재촉했다. 아내 편에서 보면, 목소리 톤만 높아가는 주제에 제 생각에 빠져 재촉하기 일쑤라고 핀잔주는 일이 당연하고 마땅할 것이다. 솔직히 이런 아내의 모습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내 피곤을 더할 만큼 미련하지는 않은 나는 조용히 차 시동을 걸고 기다릴 뿐이었다.

그렇게 아내를 재촉해 집을 나서 찾은 곳은 필라 외곽 지역에 있는 노인 요양원이었다.

벌써 너 덧 해가 지났나 보다.  당시 어머니는 곧 돌아가실 듯 하셨다. 응급으로 병원에 실려 가셨던 어머니는 평소에 ‘난 죽거든 화장으로’라는 말씀을 ‘매장으로’ 바꾸셨다. 유언처럼.

그 때 그렇게 마련한 것이 어머니 아버지 묘자리부터 우리 형제들 묘자리 까지, 누울 순서까지 다 정한 우리 가족 장지였다. 누울 묘자리 순서를 정하는데 가장 입김이 센 것 역시 어머니셨다.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 자리가 정해진 나는 혼잣 말로 웅얼거렸었다. ‘죽어서도 이 자리라니, 피곤하고만…’

그러다 병원에서 퇴원하셨던 어머니가 일주일 가량 머무르셨던 곳이 동네  요양원이었다.

올 초엔 동네 지인 한 분이 계신 뉴저지 양로원에 위로 방문을 다녀 오신 후, 어머니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 저으시며 선언하셨었다. ‘얘야, 우린 요양원이나 양로원에는 안 갈란다!’ 그 선언으로 우리 형제들은 언젠간 맞게 될 시간에 대한 준비를 마치었다.

어머니는 오늘도 정정하신 모습으로 내 오른 편에,  아내는 당연히 팔팔하게 내 왼 편에서 나를 지탱한다.

그리고 어제 찾았던 요양원에 누워 계신 분은 손 할머님이시다. 할머님은 어제 또렷하신 목소리로 아흔 둘이라고 하셨다. 그게 만 나이라면 내 어머니와 같다.

손 할머님은 필라세사모 모임의 최연장자이시다. 나는 아흔 두 해 그녀의 삶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다만 이웃의 아픔에 대한 진한 공감으로 살아오셨음은 몇 번의 만남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갑작스런 통증과 함께 병원에 실려갔던 손 할머님이 요양원으로 옮겨지신 것은 이틀 전이었다. 손 할머님 곁을 지켰던 젊은 필라세사모 친구들이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손 할머님을 위로 방문해 달라는 통문을 보내 온 것도 그 때 쯤이었다.

아내와 내 손을 꼭 잡으시고 ‘고맙다’를 몇 번이고 되뇌이시던 할머니는 ‘이젠 곧 일어날 것 같다’고 하셨다.

한 시간 여 짧은 자식 노릇을 마치고 나온 요양원 앞 뜰에는 꽃밭을 바라보며 어린 사슴들이 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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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할머니는 몇 해 전 내 어머니처럼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건 우연이다. 노년과 죽음 그리고 오늘을 살아야 하는 까닭들에 대한 책들을 내게 권하는 호주 홍 목사님의 편지를 받은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