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짐 – 포로기 1

(당신의 천국 – 쉰 한 번 째 이야기) 

야훼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바빌론 왕은 야훼의 전과 왕궁에 있는 모든 보화를 털어 갔고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야훼의 전에 만들어 두었던 온갖 금기물을 다 부수었다.  또한 예루살렘 전 시민과 고관들과 군인 일만 명, 그리고 은장이들과 대장장이들을 사로잡아 가고 가난한 지방민만 남겨 두었다.  그는 여호야긴도 그의 어머니와 왕비들과 내시들과 나라의 권력층과 함께 사로잡아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데려 갔다. – 열왕기하 24 : 14 – 15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  제십 구년 오월 칠일, 바빌론 왕의 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들어 와  야훼의 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성 안 건물을 모두 불태웠다. 큰 집은 모두 불탔다.  그  친위대장을 따르는 바빌론 군인들은 예루살렘을 둘러 싸고 있는 성벽을 죄다 허물어 버렸다.  친위대장 느부사라단은 예루살렘성에 남은 사람들과 바빌론 왕에게 항복해 온 자, 그리고 기타 남은 백성들을 포로로 데려 갔다. – 열왕기하 25 : 8 – 11 

수민원의 총재는 민영환이요, 이민 모집에 관한 일은 인천에 거류하고 있던 데쉴러에게 위탁하여 동아개발회사를 창설하였다.  –  중략  – 이 때에 그 교인 남녀 50여 명과 항내 노동자 20명이 이민가기를 자원하고 나섰다.  – 현순(玄栒)목사의 포와유람기(布哇遊覽記) 에서 (1909년에 쓴 책) 

제가 명동거리를 출입하기 시작한 때는 1960년대 초중반 쯤 부터였습니다. 당시 명동성당 옆에 있었던 시사문화사라는 인쇄 활자 판매 회사를 들락거렸던 까닭입니다. 제가 국민학교(초등학교)때 일입니다. 

신촌에서 작은 인쇄소와 도장포를 운영하시던 아버지의 심부름은 당시의 제 몫이었기 때문입니다. 명함, 청첩장 등 작은 활판인쇄와 등사 프린트와 도장포를 겸했던 아버지의 가게의 원재료 구입처는 명동의 시사문화사와 종로 단성사 뒤의 청조사(?) 가 있었고 을지로의 지물포가 있었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적 부터 명동 출입을 하게 된 이유랍니다. 

그리고 머리 굵어서 명동을 드나들 무렵에는 국립극장이 막 남산으로 이전하려던 무렵이었고 오래 전에 고인이 된 추성웅이라는 배우가 ‘빨간 피터의 고백’이라는 연극을 장기간 공연하던 곳이었고, 몇 해전 추억의 무대로 인기를 끌었던 쎄시봉이 아직 문을 열였던 시절이었답니다. 

그리고 70년대 말, 몇 개의 사건들이 일어났던 현장인 명동성당과 YWCA 등에 있었던 기억들이 남아 있답니다. 

덤으로 군대시절이었던 70년대 중반 명동 성당 앞 골목길 막걸리집들이 기억에 떠오르는군요. 

그리고 다시 명동을 찾았던 것이 2011년이었답니다. 많이 변해 있었답니다. 거리와 골목들을 옛 생각들을 떠올리게 하는데 일본인들과 중국인들을 호객하는 간판과 소리들이 아주 낯설게 다가왔었답니다. 

세월의 변화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낯섬의 크기는 아주 컸답니다. 

자!  이쯤 조선족, 고려인, 재일동포, 미주 및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는 한국인들과 대한민국인,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민으로 사는 한국인들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실까요. 

19세기 말엽 까지 거의 대부분의 한국인(조선인)들은 한반도 안에서 살았지요. 당시만해도 자기 조상들이 누워있는 땅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한다는 것은 죄짓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때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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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중국의 간도지방에는 19세기부터 일부 조선인들이 강(압록, 두만)을 넘어가 농지를 경영하기도 했지만 본격적으로 한국인들이 한반도를 떠난 사건들이 연이어 진 것은 20세기 들어와서의 일입니다. 특히 일본의 한반도 침략 이후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 일이지요. 

1912년 12월 22일 인천항을 떠난 이민단 121명이 하와이로 떠난 미주 이민의 시작부터 1905년 1033명의 조선인들이 역시 인천항을 떠나 유카탄 반도로 향한 남미 이민의 시작, 그리고 1910년 이후 중국 간도 지방으로의 대규모 이주, 그리고 1930년대 이후 벌어진 대규모 일본 및 러시아 이주, 1940년대 남북분단으로 이어지면서 생긴것이 조선족, 고려인, 재일동포, 재외 동포의 시원이 될 것입니다. 

이쯤 한 번 생각해 보지요. 

다 같은 한반도의 조상을 뿌리로 한, 한민족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지금 한반도 남에 사는 사람들과 북에 사는 사람들, 미국에 사는 사람들과 중국, 일본, 러시아 중앙아시아에 사는 사람들, 남미와 유럽, 아프리카 등지에 사는 한민족들의 공통점들과 다른 점들은 무엇일까요? 

제가 경험했던 1960, 70년대의 명동과 2013년 지금의 명동을 명동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차이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지난 약 백년간 일어난 변동들입니다. 

약 백년 전 한국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졌던 어떤 가치관이랄까 같은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생각들과 지금의 한국인들이 느끼는 그것들(생각이나 가치관)이 다를 수 밖에 없는 까닭이지요. 

이제 우리들은 유다인들이 약  70년 동안 겪게되는 이런 유사한 경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남왕국 유다가 망하고  바벨론 포로 시대가 시작됩니다. 이 시대에 유다민족들이 겪게되는 일대 변화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라고 한다고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사는 21세기에 흔히 말하는 유대인들 곧 Jewish 라는 말이 시작된 된 때가 이 무렵의 일입니다. 한마디로 민족이 갈라져 갈갈히 찢기면서 민족의 이름과 영역이 훨씬 커지는 정말 이상한 일이 발생한 때입니다. 

또한 우리들이 지금 하나님 나라를 찾아가기 위한 길잡이 도구로 읽고 있는 구약성서의 대부분의 책들의 이야기들이 완성되어지는 때이기도 합니다. 

가나안이라고 불리우던 땅에서 이스라엘과 유다라는 왕국의 이름으로 모여살던 한줄기 같은  민족이 바벨론, 이집트와 인근의 작은 나라들로 흩어질 수 밖에 없는 역사적 경험은 민족의 정체성을 바꾸어 놓는 지경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기의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이어가기 전에 우리들이 먼저 그 상황에 대한 이해를 해야만 하는 까닭입니다. 

유다의 멸망과 함께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사건은 두 차례(엄밀하게 따지자면 세차례이지만)일어납니다. 첫번 째는 기원 전 597년에 유다와 여호야긴이 끌려가던 때에 포로가 된 사람들입니다. 두번 째는 예루살렘이 완전히 무너지고 마지막왕 시드기야와 함께 끌려간 기원전 586년 일입니다. 

바벨론 포로라고 하여도 이렇게 끌려간 시기에 따라 다른 집단이 생깁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은 대부분 왕족, 고급 관료들과 제사장들, 당시 유다 왕국 시절 사회 상층부를 구성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즈음 말로 하자면 있고, 누리고, 배운 사람들이 주로 바벨론 포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집트로 피난을 간 집단도 있었습니다. 이미 우리들이 이야기했던 예레미야도 이 집단에 함께 했던 것입니다. 그들 중 일부는 후에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지만 그 곳에 정착한 집단이 있습니다. 

또한 인근 작은 나라들로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무리들은 가나안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서는 이들을 가리켜 “땅의 사람들”, “가난한 지방민”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집단으로 나뉘여져서 서로 다른 지방과 문화 속으로 분리되어 사는 시대로 접어 든 것입니다. 그렇게 약  70년을 사는 시간 동안 야훼 하나님께서 그 민족에게 내린 예언들을 대행했던 사람들을 이제 만나려는 것입니다. 

그 첫번 째 인물 에스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