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 -5, 함께

옛 벗들과 함께 나섰던 강화 나들이는 우연히 따라 나서게 된 까닭도 있거니와 이번 여행의 마지막 일정이기도 하여 많은 여정(旅情)을 쌓은 하룻길이었다.

그 하룻길 나들이 길잡이를 자처한 김환조목사와 강화 지킴이 송가감리교회 고재석목사님과 그의 부인이자 동역자인 우리들의 옛 친구 손명희사모 그리고 아직도 예전 십대 청춘을 구가하며 사는 듯한 차용철형님 그 모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어린 시절 교회생활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 몇 십 년이 흐른 뒤, 노년의 초입에 들어선 마당에 우연치 않게 만나 하룻길 나들이를 함께 하는 경험을 나눈다는 것은 그리 흔치 않은 일일 터. 바로 그날 우리들이 누린 은총이었다.

강화에 들어서서 첫 번 째 치룬 행사는 <강화 기독교 역사 기념관> 방문이었는데, 기념관 안내와 전시장 해설을 맡아 주신 이의 지나친 친절로 인해 ‘아뿔사! 혹시 오늘 하루는…’하는 염려가 그득히 밀려 왔었다. 허나 고재석목사님으로 하여 내 염려는 다행히 기우에 그쳤다. 지나친 친절은 기념관에서 끝났음으로.

기념관에서 내가 담고 온 두가지 <신학지남 (神學指南)>과 , <죽산(竹山) 조봉암>이었다. 한국 초기 기독교 역사 속, 당시 일천했던 신학 토대의 발판을 자처했던 <신학지남 (神學指南)>의 정신을 오늘의 한국교회와 이민교회가 잇고 있을까?하는 물음을 담고 왔거니와, 조봉암선생이 성공회 신자였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는 것, 그이에 대한 설명이 너무나도 자의적 또는 작의적이었다는 안내자에 대한 아쉬움도 함께.

역사 기념관 빡센(?) 공부를 마치고 이어진 송가 감리교회 고재석 목사님과 오랜 시간을 한국여성의 전화와 함께 사람 평등 운동과 사모 사역을 함께 해 온 손연희사모의 그 날 그들이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느낌으로 담으며 즐긴 강화 여행이었다.   

멋진 카페와 진한 국물의 꽃게탕과 오래 전 추억들을 추려 꾸민 곳에서 이어진 끝 모를 지난 이야기와 오늘을 살아가는 이야기들로 이어진 하루였다.

내게 아주 특별한 경험, 바로 김환조목사의 축도였다. 환조는 늘 밝고 활기 찬 후배인데,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야말로 배꼽이 빠질 정도로 웃음이 이어지게 마련이었다. 허나 그 웃음 뒷끝은 늘 쌉쌀하게 무언가 꼭 곱씹어야 마땅한 뒷끝이 남아 있곤 했다. 그가 목사가 되었고 오늘도 여전히 환조답게 목회를 이어가고 있다.  그날 송가 감리교회에서 엣 친구들과 송가 감리교회를 위해 드린 비나리는 내게 진한 감동이 되어 남아 있다. 김환조목사님을 위하여!

그리고 속히 유물이 되어야 할 망향대 또는 전망대 이야기.

그야말로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땅 북한과 멀리 남쪽 일산의 아파트 촌을 번갈아 바라보며 드려본 기도, 우연히 어느날 문득 여기서 저기까지 이어진 산들이 하나가 되기를… 아님, 내 믿음의 언어인 그의 섭리로.

이번 시간여행길에서 만난 산들은 그저 아름답고 부드러웠다. 한국의 산세이다. 거의 팔십년 가깝도록 아직도 꿈 같은 일이다만, 백두에서 한라까지 그 아름답고 부드러운 산들이 이어 달리는 세상을 아마…

내 어릴 적 대현교회 친구들 몇몇은 할머니 또는 아버지 따라 이북 사투리를 쓰곤 했다. 이즈음도 아내는 종종 “엄마 친척들 만나러 한 번 갈 수 있으려나?’하는 꿈 같은 이야기를 하곤 한다.

이쯤 이제 노회한 노인이 된 나는 기도를 바꾼다.  “정말 산들이 이어지는 게 어려운 일이라면, 반도의 모든 산들에게 벙커와 교통호 없는고요한 평화를…”

그렇게 함께.

기도

주일 아침 기도처럼 이 땅에 함께 사는 이웃들에게 편지를 띄우다.


어제는 제 어머니의 92회 생신이었습니다. 93세로 나이가 제일 많으신 제 아버지부터 지난해 태어난 어머니의 증손녀까지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어머니의 생일을 축하했습니다.

보행기 없이는 걷기 힘드신 아버지는 한국전 참전용사입니다. 그 전쟁에서 수류탄 파편이 다리에 박힌 채 평생을 살아오셨습니다. 이제는 홀로 사시는 장인 역시 한국전 참전용사입니다. 장인은 전쟁 당시 KATUSA라고 미군에 배속된 한국군이었습니다. 이젠 은퇴한 노인이 된 매형은 월남전 참전용사입니다.(모두 한국군으로 전쟁에 참여했었습니다.)

DSC01430A

모두 함께 모여 오늘도 여전히 우리 가족의 중심축인 어머니의 생신을 축하한 것이지요. 많은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던 중 지난 주에 있었던 남한의 대통령 문재인과 북한의 리더인 김정은 두 정상의 회담이 화제에 올랐답니다.

저는 문재인 대통령과 학교는 다르지만 같은 해 대학에 입학을 했었고, 당시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로 인해 학교에서 제적 당하고, 구속되었다가 군대에 강제 징집되는 같은 경험을 했답니다. 물론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랍니다. 당시엔 그런 젊은이들이 많았답니다.

미공군에 다녀온 제 아들과 북의 김정은은 같은 나이 또래 랍니다.

북한이 고향이었던 장모는 고향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평생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두 해 전에 돌아가셔 Kirkwood highway 선상에 있는 묘지에 누워 계시답니다.

남북의 정상들은 이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전쟁을 끝내고 평화로운 시대로 나가자고 선언을 했습니다만 그 일이 이루어지기 까지는 많은 난관들을 풀어 나가야 합니다. 그 중 하나이자 가장 중요한 이벤트는 곧 다가올 북의 김정은과 트럼프 대통령과의 만남입니다.

어머님의 생신에 함께 모인 가족들이 바라본 남북정상의 회담에 대한 생각들은 서로 같지는 않았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점에서는 모두가 같은 의견이었답니다. 바로 평화로운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는 같았습니다.

비단 한반도 뿐만 아니라 사람사는 세상 어디나 평화가 넘치는 세상이면 좋겠다는 바램이었답니다.

참 좋은 4월의 마지막 일요일 아침입니다. 평화로운 하루, 평화로운 한 주간, 한 달, 한 해 온 삶이 되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 이번 남북정상회담의 마지막 순서로 평화를 소원하는 영상쇼 상영이 있었답니다. 그 영상쇼를 당신과 함께 나눕니다.

DSC01425A

Yesterday was my mother’s 92nd birthday. From my father, who is 93 years old, the oldest, to a great-granddaughter, who was born last year, all the family members gathered together and celebrated my mother’s birthday.

My father, who has difficulty in walking without a walker, is a Korean War veteran. He has been living with shrapnel lodged in his leg from a grenade during the war. My father-in-law, who is widowed, is also a Korean War veteran. During the war, he was a member of KATUSA (Korean Augmentation To the United States Army) which consisted of Korean soldiers who augmented US forces. My brother-in-law, who is retired now, is a Vietnam War veteran. (All of them served in the wars as Korean soldiers.)

All of them gathered together to celebrate my mother’s birthday. She is still the central axis in the family. While we talked about many things, the South-North Korean summit between South Korean President Moon Jae-In and North Korean leader Kim Jong Un, which was held last week, came up in conversation.

Although the universities were different, I entered the university the same year in which President Moon did. While I was in college, I participated in student demonstrations against the late President Park’s dictatorship. For that reason, I was expelled from the university, was placed under arrest, and was conscripted into the army. Though President Moon had a similar experience, I don’t know him personally. In fact, quite a few young people in those days had a similar experience.

North Korean leader Kim is the same age as my son, who served in the US Air Force.

My mother-in-law, whose hometown was in North Korea, passed away two years ago and was placed in the cemetery on Kirkwood Highway without attaining her life-long dream of visiting her hometown once.

Though the leaders of South and North Korea announced their agreement, which commits the two countries to the complete denuclear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and continuing talks to bring a formal peace treaty ending the Korean War, there may be many hurdles to overcome, I think. One of them, and the most important event, may be the meeting between President Trump and North Korean leader Kim which will be held in the near future.

All the family members at my mother’s birthday party didn’t have the same views and thoughts about the South-North Korean summit. However, all of them agreed on one thing which was the hope of peace in the Korean Peninsula.

It was the hope of peace, not just in the Korean Peninsula, but also everywhere in the world.

It is a really pleasant morning on the last Sunday in April. I wish that you will have a peaceful day, a peaceful week, month, year, and life.

From your cleaners.

*** The last segment of this South-North Korean summit was the performance to express the wish for peace. I’d like to share it with you.

잔치 그리고 숙제 – 평화

마치 잔치가 끝난 듯한 분위기입니다. 약  100시간에 달했다는 프란치스코  천주교황  방한 이후의 한국언론들 모습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교황이 남긴 말씀들의 의미를 꼽는 기사들도 차고 넘치거니와 말씀들이 누구를 향한 것이라는  나름의 해석들도 넘쳐납니다.

짧은 한국방문 기간동안 보여주었던 교황의 언행을 보고 들으며 저마다 자기 생각 한자락쯤 있을 것입니다.

물론 전혀 관심 밖이었던 사람들도 많았을 터이고, 애써 무시하려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교황의 방한과 그의 언행들이 행여 자기 밥그릇에 도움이 될지 해가 될지를 저울질하던 이들도 있었을 것이며, 자신들의 맺힌 한과 숨통을 풀어줄 수 있는 능력자로 기대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터입니다.

날라리 기독교인(개신교)인 저는 어제 주일을 맞아 모처럼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한 두어 달만의 일인 듯 싶습니다.

예배순서가 거의 마칠무렵에 찬송을 부르다가 문득 프란치스코교황이 방한 중에 하셨다는 말씀 하나가 머리 속에 뱅뱅 돌았답니다. 그 연유로 잔치가 끝난 마당을 돌아보며 제 생각 한 자락 풀어 놓습니다.

먼저 어제 제가 교회에서 불렀던 찬송가의 내용이랍니다. 교회생활 조금 하신 분들이면 익히 잘 아는 찬송입니다.

<내 마음속에 참된 평화있어 주 예수가 주신평화/시험 닥쳐와도 흔들리지 않아 과연 귀하다 나의 평화/ 주 항상 계시네 내 맘속에 주 가 항상 계셔 아 기뻐라/ 주 내 맘속에 계셔 위로 하신다 / 어찌 내가 주를 떠나 살까>

이런 내용의 찬송입니다.

사람 일반이 종교에 귀의하여 의지하고자하는 일차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는 가사입니다. 그리고 종교는 당연히 귀의한 사람들에게 평안과 안식과 평화를 보장합니다. 적어도 인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온 종교들 일반의 모습입니다. 원시종교의 원형이기도 합니다.

비록 날라리일지언정 기독교인인 저는 예수가 유일한 구세주로서 제게 평안과 평화를 주시는 분임을 정말 자랑스럽게 어느 자리, 누구에게라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다른 사람들이 저와 같아야 한다고 말하거나 주장하지도 않거니와 그런 일에 시간과 정열을 허비할 생각은 추호도 없답니다.

아무튼 “주 예수가 내 마음에 평화를 주신다”는 찬송을 부르는 일은 신자로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그 믿음에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데 어제 저는 그 찬송을 읊조리며 영 편편치 못한 제 마음 한구석을 다스릴 수가 없었답니다. 바로 교황이 던진 평화에 대한 뜻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  <평화란 상대방의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대화를 통해 이뤄질 수 있다는 확고부동한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정의는 과거의 불의를 잊지는 않되 용서와 관용과 협력을 통해 그 불의를 극복하라고 요구한다>

교황이 남긴 말씀들입니다.

교황과 김용오그가 말한 평화는 신과 나와의 관계가 아닌 나와 이웃간의 관계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신과 나와의 관계란  믿음의단계에 있어 아주 깊은 곳에 이를 수도 있는 관계설정일 수가 있는 동시에 가장 저급하고 천박한 신앙의 기초가 되기도 합니다. 내가 신을 쫓아가면 신앙의 깊이는 깊어질수 있지만 신이 나를 쫓게 만들면 천박하기 그지없는 장사속  종교가 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나와 이웃간의 관계 설정에서 신의 존재를 묻는 물음은 자못 경건해 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싸움과 다툼의 시작이고 목숨을 걸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교황은 바로 그 지점에서의 평화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평화는 바로 정의가 세워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너와 나 사이,  우리와 너희 사이에 정의가 이루어 진 결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의를 세우는 일을 민주적으로 풀어나가라는 조언을 덧붙인 것입니다.

대다수의 언론들이나 글쟁이들이 이런 언행을 풀고 간 프란치스코교황에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들을 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잔치가 끝났습니다.

이제 교황이 말씀하신 평화에 대한 참된 뜻을 제대로 알려면 프란치스코 교황이 오늘 서 있는 자리를 바로 보아야만 합니다. 그가 어느 순간 하늘에서 툭 떨어져 2014년 8월 한반도 남쪽에 현현했던 것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프란치스코교황이 2014년 8월 세월호 집단 생수장 이라는 사건을 통해 그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난 한반도를 향해 평화라는 화두를 던질 수 있었던 것은 최근 천주교 반세기사(50여년)의 고뇌와 교황 개인이 걸어 온  77년사라는  고뇌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50여년 전(1962년 10월 –  1965년 9월)에 있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있었던  천주교의 일대 회개운동이 없었다면,  그의 신앙을 키워낸 아르헨티나라는 척박한 환경이 없었다면 아마 오늘 프란치스코 교황은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정의의 결과물로 얻을 수 있는 평화”란 잔치 끝마당에 저절로 떨어지는 열매가 아니라 앞으로 50년이 더 걸릴지라도 한국민들이 노력해 얻어야만하는 숙제라는 것입니다.

평화 – 예언자 16

(당신의 천국 – 마흔 다섯 번 째 이야기)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신세를 걱정해 주는 자가 어디 있었느냐그렇다그는 인간사회에서 끊기었다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 이사야 53 : 7 – 8, 이상 공동번역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였다. “예언자가 여기서 말한 것은 누구를 두고  말입니까자기를 두고  말입니까아니면 다른 사람을 두고  말입니까빌립은 입을 열어서 성경 말씀에서부터 시작하여예수에 관한 기쁜소식을 전하였다. – 사도행전 8 : 34 – 35

이사야가 살았던 당시 남왕국 유다의 형편(아사야 1장에서 39장까지의 이야기) 이사야가 죽은  일어난 바벨론 포로 시절(이사야 40장에서 55이야기그리고 포로에서 풀려나 예루살렘 재건을 하던 무렵(이사야 56장에서 66) 이야기가 합쳐진 책이 성서의 이사야서입니다.

그래 첫째 이야기를 이사야둘째 것을 2이사야,  세째 이야기를  3 이사야라고 부른답니다.

기간으로 보면  이백  정도의 역사적 사건들과 고백들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백  동안은  유다인들에게는 간난(艱難) 질곡(桎梏) 세월이었습니다.  이사야가 활동하던 히스기야왕 시절에 성서는 그가 다윗 못지 않게 복을 받은 왕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그의 말년이 가까워 오면서  유다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합니다.

예루살렘이 멸망 직전의 위기에 놓입니다이미 말씀드렸듯이 당시 팔레스타인의 국제적 정세는 북의 아시라아와 남의 이집트동쪽의 신흥 세력 바벨론과의 힘의 역학에 따라 땅의 주인이 바뀌던 때였습니다유다왕국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여러 약소 왕국이나 도시국가들은 살기 위해 줄을 서거나 힘을 합쳐 연합을 하되   강국이라고 생각되는 세력에 붙곤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히스기야도 독립노선을 표방하면서도 일견 이집트에 붙기도 하고바벨론과 붙기도 하고 왕국의 안녕을 도모하기 위해 갖은 외교적 수단들을 동원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아시리아를 표방하던 때에 아시리아의 강력한군주가 나타납니자산헤립이라는 왕입니다예루살렘 성이 완전히 포위되어 산헤립의 손에 넘어가기 직전인 상황들이 두번이나 연속됩니다이사야의 예언들이 쏟아지던 때입니다.

기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야훼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산헤립의 군사  팔만 오천 명을 야밤에   숨에 없어버립니다.(이사야 37 : 36)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산헤립이  이길  있었던 싸움을 앞두고 까닭없이 철군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사야 당대에는 멸망의 위기를 넘기지만 끝내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  이후의 이야기는 예레미야 이야기를 하면서 잇기로 합니다.)

현실적으로보면 좋은 일이란  전혀 일어나지 않을  같은 상황이었습니다그러한 때에 이사야는 메시아 왕국메시아가 통치하는 세상을 봅니다그리고  세상을 노래합니다.

이쯤이사야 시절부터 아주 오래  이야기를 되돌아 보기로 하지요 700 전의 일입니다.

히브리족들이 탈애굽을 하여 광야 사십년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시작하던 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는 것이지요야훼 하나님과 히브리족들이 광야에서 계약을 하고 들어  땅은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고평등한 사회를 이루는 곳이었다는이야기를 우리가 함께 했던 생각을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히브리족들이 꿈꾸었던 하나님의 나라였지요그러나 시간의 흐름과 함께 젖과 꿀이 흐르는 땅도 평등이 이루어지는 세상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사야가  메시아 왕국 하나님의 나라는 평화가 넘치는 세상입니다.

  평화가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이사야는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HicksPeaceable2

늑대가 새끼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수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으리니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친구가 되어  새끼들이 함께 뒹굴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리라.  젖먹이가 살모사의 굴에서 장난하고 젖뗀 어린아기가 독사의 굴에 겁없이 손을 넣으리라.  나의 거룩한  어디를 가나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다시는 없으리라바다에 물이 넘실거리듯 땅에는 야훼를 아는 지식이 차고 넘치리라. – 이사야 11 : 6 – 9”

사람과 사람사이의 싸움  전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온갖 만물들이 더불어 함께 누리는 평화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바로 뱀의 유혹이 일어나기 선악과에 대한 유혹이 일어나기  태초 에덴으로의 회귀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사야에서    하나님 나라의 원형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바로 하나님의 공의가 넘치는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남왕국 유다가 망해가는 시점그리고  망한 후의 시점남의 나라에 포로 생활을 하는 시점그리고 풀려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피와 땀을 흘리던 시점 이백 년의 세월 동안 유다인들이 꿈꾸었던 메시아 왕국하나님의 나라입니다바로 누구나 공평한 평화로운 세상 말입니다.

그리고 언젠간 반드시 그런 하나님의 나라메시아 왕국을 이루어  메시아가 온다는 예언을   사람바로 이사야입니다.

이사야가 그린 메시아의 모습이 바로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고난받는 종으로 오시는 메시아는 온갖 고초와 멸시를 당하고 채찍질과 찔림을 당하여 죽습니다그의 죽음은 후손들이 오래 오래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기 위한 제물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700  이사야의 예언이 어떻게 실현되고,어떤 이해와 해석들이 이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예수의 생애와 바울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어질 것입니다. 

이사야를 통해 우리들의 머리 속에 깊이 새기고 넘어가야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모습바로 평화가 넘치는 세상입니다.  전쟁과 다툼이 없는 세상입니다.

히브리족들이 가나안에서 꿈꾸었던 젖과 꿀이 흐르는 평등한 세상은 정복과 전쟁을 전제로  세상이었습니다.

이사야가 꿈꾸던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온갖 무기들이 생산의 도구로 바뀌어 평화가 넘치는 세상입니다.

21세기 오늘날에도 여전히 빈번한 모든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일어나는 다툼싸움전쟁들이 얼마나 후진적 신앙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사야로부터    후에 오신 메시아 이야기를 향해 이야기를 진전시키면서 이제 우리들이 만날 인물들은 예루살렘과 유다가 멸망하는 시기에 활동했던 예언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