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에

봉준호의 영화 기생충을 보다.

한인들이 많이 사는 대도시에서 상영한다는 소식을 듣고 보게 되었다. 영화 한편 보자고 몇 시간을 달려 도시를 찾아갈 만큼 광(狂)이 아니므로 그저 집에서 보았다. 이럴 때 도움을 주는 친구는 큰처남이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하면 그는 늘 그 길을 열어준다. 이 또한 내 복이다.

영화를 본 후 떠올린 소설들이 있다. 1950대 소설인 손창섭의 ‘잉여인간(剩餘人間)’과 1970년대 소설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다.

두 소설과 영화의 같고 다른 점들을 생각하며 흘러 간 반세기 시간을 덧붙여 보았다.

그 세월 동안 빠르게 변한 것들도 무수히 많지만, 어쩜 그리 예나 지금이나 똑같을까?라는  탄식이 일 정도로 변하지 않았거나 더디게 변한 것들을 생각케 한 영화였다.

‘냄새’ 와 ‘계단’으로 상징되는 불평등한 사회 – 그 불평등의 간격이나 폭의 크기는 접어 두더라도- 내가 코흘리던 옛 시절이나 노년의 문턱에 서 있는 지금이나 변함 없다.

영화 기생충 속 ‘박사장’의 모습은 이즈음 내가 접하는 뉴스 속 권력자 또는 가진 자들의 모습에 비하면 차라리 1950년대 인물처럼 낭만적이다. 이제 겨우 영화 개봉일에서 몇 달 지났을 뿐인데….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또 한가지. ‘냄새’로 인한 차별을 받지 않은 세상, ‘계단’이 없는 평평한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언제 어느 곳에나 살고 있다는…

지하실의 사내들이 사람대접 받으며 빛을 함께 쐬며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는. 딱히 밝은 햇빛만이 아닐지라도.

*** 떠오르는 해를 보며 가게 문을 열던 게 엊그제인데, 어느새 가로등불과 달빛 아래 가게 문을 열다.

평등 – 신(神)의 무상급식법-4

(당신의 천국-  다섯 번 째 이야기)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요한계시록 21: 3-4, 공동번역) 

탈애굽한지 달 반이 지나서부터 탈출 노예부족인 히브리족들은 하나님께서 차려 주시는 밥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메추라기 고기가 곁들여진 만나로 차려진 밥상입니다.  그리고 이 밥상 메뉴는 그들이 가나안 지경에 이를 때까지 약 40년 동안 이어졌다고 합니다.(출 16:35)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는 누구도 굶어 죽지 않도록 먹을 것을 거저 주는 나라라고 이미 말씀 드린바 있습니다. 

거저 주되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절대 공평한 밥상에 둘러 앉는다는 것이 출애굽 후 광야에서 히브리족들에게 보여주신 천국 곧 신의 나라 모습입니다. 

equality-and-diversity

탈출 노예들인 히브리족의 수는 당시 군인이 되어 싸울 수 있는 장정의 수만 약 60만이 넘는 무리였다는 성서의 기록입니다. (민수기 1:46) 민수기의 기록에 따르면 12지파별로 수를 셉니다. 레위지파를 제외한  11지파의 군대 종사 가능한 인력들의 수를 세고 대표를 뽑습니다. 

무리들 가운데 총 우두머리인 모세와 부장이자 최고 참모이자 대변인이었던 아론을 위시한 지도부가 있었고 그 아래로 12지파로 나누인 지파 지대장들과 참모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 가운데는 분명 야훼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의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바로 권력 소유의 차이가 존재했고, 지위의 차이가 존재했고, 권력 소유와 지위 차이에 따른 해야 할 일들의 명확한 규정과 책임들이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먹는 것에 관한한 누구도 특별한 대접을 받지 않는 절대 평등의 밥상을 나누었다는 것이 성서의 기록입니다.

음식의 질 뿐만 아니라 먹는 양에 이르기까지 하루 하루 각자가 배부를 정도까지만 똑같이 먹을 수 있는 무상급식을 신이 베풀었다는 애굽탈출 노예들의 고백이 바로 성서의 기록입니다. 

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두번 째 모습은 바로 누구에게나 공평한 밥상입니다. 

성서는 우리들에게 이런 아주 공평한 밥상의 모습을 두군데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만나 이야기와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모습에서 입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만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나누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사도행전 2장 44-46, 공동번역) 

여기에서 우리가 아주 눈여겨 보아야할 지점이 바로 출애굽기 16장 35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착지에 이르기까지 사십년 동안 만나를 먹었다.” 

끝나는 기간이 있었다는 말이고 그 기간이 사십년이라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의 죽음, 부활, 승천 이후에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초대교회의 모습도 이와 똑같습니다. 그들의 공동체 생활 곧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먹고 나누는 모습도 한정적인 기간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모세의 시내산 십계명과 광야에서 이루어진 여러가지 신과 히브리족 사이에 이루어진 계약들과 신약시대 초대교회 신도들의 공동생활이 한세대나 두세대에 걸쳐 철저히 믿고 지켜졌을 것이라는 추론에 많은 학자들이 동의를 하거니와 저 역시 그랬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일정 기간이 지나서 사람사는 사회에서 이런 절대 평등의 모습은 사라졌다는 성서의 기록입니다. 

성서에 기록된 이 두가지 경우의 절대평등의 모습 이외에도 사람들이 만들어 온 역사 가운데는 유사 절대평등의 노력들이나 시도들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이 있었답니다. 그러나 어떤 노력과 시도들도 한세대나 두세대를 넘어선 경우는 없습니다. 

이 절대평등의 역사적 경험은  종말론적 삶에 대한 공동의 인식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시기에서만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종말론적 삶의 공동체가 무엇일까? 

우리들이 나누어야 할 다음 이야기입니다. 

신의 무상급식법은 하나님 나라 곧 천국,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의 밥상을 지배하는 법입니다. 바로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공짜와 절대평등의 밥상법이랍니다. 

이제 당신의 천국 이야기는  종말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