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단상(斷想) 3 – 은인(恩人)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8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해방 후엔 이런 것도 있었다.

basic각가지 영어학습 책도 시중에 퍼지기 시작했는데, 노점에서도 책을 팔았다.   그러한 것 중엔 다음과 같은 책도 있었다.

영어학습에 필요한 최소 어휘만으로 (850 단어만으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말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책도 있었는데, 찰스 오그던 (Charles K. Ogden)의 Basic English가 바로 그런 책이다.

하여간, 8.15 해방 후, 미군들과 함께 그 땅에 들어온 것이 영어 뿐만 아니었다.  의약품의 경우 예를 들면, 페니실린(penicillin), 다이아찐(diazine), 스트렙토마이신(streptomycin), 디디티(DDT) 등이 8.15 후에 한국으로  들어온 것들이다.  그러한 의약품과 함께 미군의관(美軍醫官)들도 남한 땅을 밟게 되었다.

지금 내가 적고 있는 이 글의 내용이 8.15 전반(全般)에 관한 이야기가 되지 못하고 <8.15 단상(斷想)>이라는 제목처럼 단편적인 글이다. 사람마다 같을 수는 없겠지만, <8.15>라고 하면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 당시를 살아왔을 뿐만 아니고, 분단된 그 땅에서 동족상잔 (同族相殘)이라는 엄청난 비극이 일어난 6.25 전쟁 … 그리고 총과 칼을 들고 그 전장(戰場)으로 뛰어든 젊으이들 ,,,,,

총이면 총이지, 칼이라니?  그렇다.   대검(帶劍)이라고도 하는 칼을 총신(銃身) 끝에 꽂고 다녔다. 전투 상황에 따라 그 칼이 쓰여진다. 그러한 상황에서 적과 맞붙어 싸우다 전장(戰場)의 이슬이 되어버린 수 많은 전사자(戰死者)들 …

그리고, 적탄(敵彈)을 맞아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된 전상자(戰傷者) 들의 수는 얼마던가?  한국 젊은이들만이 아니었다. 국제연합(國際聯合, UN)회원국 군인으로서 그 전쟁에 참전하여 목숨을 잃거나 몸을 다친 군인들의 수는 얼마던가?

그러했던 전쟁 ……… 더 설명하자면,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북위 38도선에서 일제히 남한을 침공함으로 벌어지게 된 그 전쟁인데, 한국측에서는 그것을 6.25라고도 하고, 6.25전쟁이나 6.25 사변이라고도 하며, 한국전쟁 또는 한국동란이라고도 한다.

“그 전쟁이 일어난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하나의 공통된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있다.”라는 이야기다.

한편 북한에서는 그것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하는데, 그 말의 뜻은 ‘대한민국을 무너뜨리고 그들이 원하는 방법으로 통일을 하겠다.’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런가 하면, 그 전쟁에 끼어든 중국은 抗美援朝戰爭이라고 하는데, <抗美>를 <抗米>로 쓰기도 한다. 미국이나 일본도 그들나름대로 쓰는 <6.25 전쟁> 이름이 있다.

그러한 전쟁 이름이야 어찌되었건, 내가 자유롭게 걸을 수 있고, 마음 대로 뛰어다닐 수 있는 몸을 가지고 살 수 있었던 것은 그 전쟁 때  김화지구 전투에서 중공군(中共軍)과 교전(交戰)한 것을 끝으로 내 삶에서 떠나 버렸다.

휴전회담(休戰會談)이 시작되기 직전이고, 내 나이 스물다섯살 때 생긴 일이다.

이야기 장면(場面)을 앞에서 적은 <미군의관(美軍醫官)들도 남한 땅을 밟게 되었다.>로 돌려본다. 미군정 때 미군의관들이 여러 가지 새로운 의약품을 가지고 한국으로 왔었던 것처럼, 6.25 전쟁 때에도 그 땅에 미군의관들이 있었다.  미 공군대위, Dr. Feeny 라는 군의관도 그들 중 한사람이다.

내가 그를 알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런 것이다.

나는 전투중 중공군의 수류탄 파편으로 졸지에 부상병이 되었는데, 야전병원(野戰病院)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다음 제일육군병원으로 후송 (後送)되었다.

한편 내가 그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 휴전회담(休戰會談)이 시작되었 는데, 회담 중에도 그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입원한 지 며칠 후, 분대장 고광만 하사가 들것에 실려 그 병원에 들어 왔다.    그도 다리를 다쳤는데, 그는 나보다 더 심하게 다쳤다. 내가 있던 중대에서 전사자와 전상자가 많이 생겼다는 것을 그를 통해 알게 되었다.

왼쪽 다리뿐만 아니고, 왼쪽 팔목도 다친 나는 팔목에 석고(石膏)붕대 를 하고 지내다가 원호대(援護隊)로 옮겨졌고, 1951년 9월 14일에 나는 명예제대증을 받아 들고 군문(軍門)을 나오게 되었다.

제대한 다음, 그 당시 부산 해운대 근처에 있던 K-9이라고 하는 미군 비행장에 있는 17th Medical Group에 취직이 되어 그곳 입원실에서 가볍고 손쉬운 잡일을 했다.

20121203011957_2 당시 부산 수영(K-9) 비행장  모습

앞에 적은 Dr. Feeny라는 군의관을 내가 알게 된 것은 바로 그때였다. 하지만, 내가 거기서 지내는 동안 처음부터 그 군의관을 알게 되었던 것은 아니고, 그 직장에서 얼마동안 지낸 다음에 그는 내가 한국군 부상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걸음걸이가 보통사람과 다르다는 것에 관심을 가진 그는 다른 미군 의사들과 함께 내 상처를 고쳐주려고 무척 애를 썼다. 하지만, 고치질 못했다.

그들이 내 상처를 고쳐주진 못했지만, 그 고마움은 잊을 수 없다.

지금도 그때 다친 상처 때문에 몸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목숨을 잃은 사람 도 있고, 나보다 더 심하게 다친 사람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나는 불행 중 다행이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적성어(敵性語)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7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1부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적성어(敵性語)

오늘날은 ‘영어 전성 시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한 점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다를 것이 없다.  태평양전쟁 당시와 종전(終戰) 후에 있었던 영어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하는 말이다.

먼저 약 50여년 전인 1966년 4월 16일자 동아일보에 실렸던 영어에 관한 한 기사(칼럼/논단)의 일부를 이 글에 옮겨 적는다.

글의 제목은 영어훈장(英語訓長)이다.


日帝末 太平洋戰爭(일제하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무렵 英文科(영문과)학생들은 콧대를 세우지 못하고 기를 펼 겨를이 없었다.

英語(영어)는 敵性語(적성어)라는 刻印(각인)이 찍혀 이것을 공부하는 학생들까지도  半要視察人的(반요시찰인적)인 대우를 甘受(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英語(영어)를 배워 무엇을 하겠느냐는 핀잔을 받기가 일쑤였고 무엇을 專攻(전공)하느냐는 질문이 떨어질 때마다 얼굴을 붉히고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 중간 생략 –

해방을 맞이하여 事態(사태)는 일변하였다. 英語萬能時代(영어만능시대)가 당도한 것이다.

男女幼少(남녀유소)를 막론하고 英語(영어)를 한두마디 지껄이지 못하면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학생들도 많은 시간과 精力(정력)을 英語(영어)공부에 소비하게 되어 英語先生(영어선생)도 제법 어깨를 으쓱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커다란 문제가 제기되었다.

즉 이렇게 威力(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英語(영어)를 공부하는데 바치는 勞力(노력)의 代價(대가)를 우리들은 정당히 받고 있는 것인지?

혹자는 말하기를 解放前(해방전) 학생들에 비해 요즘 젊은 학생들의 英語(영어)실력 은 훨씬 나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것 같고 단지 英語(영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의 수가 많아졌기 때문에 出衆(출중)한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띄는 度數(도수)가 늘어 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語學(어학)공부는 일종의 훈련이기 때문에 배우는 사람은 가만히 앉아있어서 는 안되는 것이고 반면에 선생들이 할일도 대단히 많아서 훌륭한 訓長(훈장)이 되려면 여간 애를 쓰지 않으면 안된다.

– 이하 생략 –

*그 당시 신문은 대개 한자(漢字)를 섞어서 썼다.


앞에 적었듯이 ‘太平洋戰爭이 한창일’ 때 ‘英語는 敵性語’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런 것 뿐만 아니고, 영어를 공부하는 학생들까지도 半要視察人的인 대우를 甘受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했던 때가 있었는데, 전쟁이 끝난 다음부터 영어가 판치는 세상 으로 변했다.

내가 가노야 비행장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던 것도 영어를 알기 때문이 었다. 그 당시 내가 영어를 알 수 있게 되었던 이야기를 간단하게 적어보려고 한다.

english

나는 오사카 에서 지낼 때 그곳에서 오카모토 카나메 (岡本 要)라는     조선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그도 내가 있던 집에서 숙식(宿食)을 했고 같은 직장에서 일를 했다. 한데, 그는 전쟁이 끝나면 영어가 필요하게 될 것이니, 영어를 배우라 고 나에게 권했다.

<영어는 적국(敵國) 말이다.>, 또는 <영어를 배워 무엇을 하겠느냐?> 는 말이 있을 정도였던 때에, 나는 그의 권유에 따라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 그는 영어 자습(自習)에 필요한 책도 마련해 주었고, 영어 학습에 관한 기초를 가르쳐 주었다. 독학할 수 있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지냈는데, 내가 불시(不時)에 일본 경찰에 잡히게 되는 바람에 인사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그와 헤어지게 되었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오카모토 카나메 (岡本 要)라는 그 이름은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0 전후였고 늘 안경을 쓰고 지냈는데, 그도 나처럼 일본식으로 된 성명(姓名)을 쓰고 있었다. 따라서 다시 만나볼 수 없게 된 그에 관한 의문도 있다.

첫째는 그러한 학식이 있고,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 왜? 무엇 때문에 막노동자들 속에 섞여 그런 곳에서 지내고 있었느냐?라는 것이다. 아마 목적하고 있는 무슨 때를 기다리며 지내는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볼 뿐이다.

어찌 되었건, 전쟁이 끝나고 세상이 변했다. 영어도 그렇다.

전날까지‘英語는 敵性語’라고 하던 곳에‘영어 바람’이 불기 시작 하더니, 지금은‘英語萬能時代’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만한 세상 으로 변했다.  불과 70년 사이인데,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영어와는 상관 없는 것이지만, 오카모토 선생 이야기가 나온김에 이야기 한 가지를 덧붙인다.  그와 함께 나라(奈良)에 다녀온 이야기다.

그 당시, 오사카 에서 나라(奈良)까지는 전철로 한 시간쯤 걸린 것으로 생각된다.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이야기를 적어 보려고 꺼낸 이야기다.

동대사한 가지는 어슬렁거리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수많은 꽃사슴들과 그런 것을 구경하는 관광객들이 뒤섞여 있는 사슴공원이고, 다른 한 가지는 그 지역에 있는 도다이지 (東大寺)라는 절이다.

한데, 절터가 워낙 넓어서 정당(正堂)과 부속 건물들이 흩어져 있고, 그 절의 대불전(大佛殿) 안에는 청동불상(靑銅佛像)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건물이라고 하는 그 불당(佛堂) 건물의 규모도 대단하지만, 불당 안에 있는 청동불상도 세계에서 가장 큰 불상이라고 한다. 그 불상의 크기에 대한 예를 든다면, 불상 손바닥 위에 보통 어른들 열댓명이 설 수 있다고 한다.

위에 적은 것과 같은 특이(特異)한 점이 있는 나라(奈良)가 먼 옛날엔 일본의 수도였었는데, 그곳엔 지금도 백제(百濟) 문화의 영향을 받은  흔적들이 남아있다.

귀국선

나는 귀국선(歸國船)을 타려고 가노야 (鹿屋)를 떠나 하카타 (博多)로 갔다. 한데, 하카타 부둣가엘 가서 주위를 둘러보니 그때까지도 배를 타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그곳에서 며칠을 지낸 다음 어렵게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일본으로 갈 때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첫째로 갈 때는 생활환경 때문에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미지(未知)의 땅을 동경(憧憬)하며 밤 시간에 현해탄을 건넜는데, 귀국할 때는 밝은 낮 시간에 귀국하는 기쁨을 가지고 검푸른 바닷물결 등 바다 풍경을 보면서 그리던 고국 땅에 닿았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부둣가에는 태극기와 각가지 내용의 글자들  이 담긴 깃발들이 있었다.

한 마디로, 감개무량(感慨無量)이었다. 8.15 해방이 되니, 이런저런 이유로 타국에서 지내던 수많은 조선 사람 들이 너나할것 없이 그렇게 조국 땅으로 모여들었다. 돌이켜 보니, 1945년은 한국 민족에겐 잊을 수 없는 해였다는 것을 말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일본의 식민지시대가 끝난 해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조선 사람들에게 행했던 짓들을 길게 늘어놓지 아니 하더라도 그러한 사실들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미국의 원폭투하(原爆投下)라는 엄청난 충격파(衝擊波)를 받은 다음에 야 일본이 연합국에 무릎을 꿇었고, 한국에서 물러나게도 되었다. 나라 없는 설음을 안고 각가지 모욕(侮辱)을 당하며 전쟁 틈에서 살아 남은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일본땅을 떠나 그리워하던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했을 때에, 그 땅엔 귀국선(歸國船)이라는 해방가요(解放歌謠)가 생겼다.

1.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 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 꽃을/ 얼마나 외쳤던가 태극 깃발을/ 갈매기야 웃어라 파도야 춤춰라/ 귀국선 뱃머리에 희망은 크다

2. 돌아오네 돌아오네 부모형제 찾아서/ 몇번을 울었던가 타국 살이에/ 몇번을 불렀던가 고향 노래를/ 칠성별아 빛나라 달빛도 흘러라/ 귀국선 고동 소리 건설은 크다

3. 돌아오네 돌아오네 백의동포 찾고서/ 얼마나 싸웠던가 우리 해방을/ 얼마나 찾았던가 우리 독립을 / 흰구름아 날려라 바람은 불어라/ 귀국선 파도 위에 새 날은 크다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 돌아오네 돌아오네 부모형제 찾아서, 돌아오네 돌아오네 백의동포 찾고서 ……

그렇다.   일본이나 중국에서 또는 멀리 남방(南方) 어디에선가 고향 땅으로 돌아오는 귀국동포들의 감격이 담긴 이런 노래가 많이 불리던 때가 있었다.

조선신궁과 가미가제

태평양전쟁 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6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1부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일본인들의 토속신앙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조선사람들의 정신을 송두리째 없애고, 조선을 착취(搾取)하기 위하여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다.”라는 뜻으로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구호를 만들어, 그런 것을 조선사람들에게 강요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행위는 그런 것 뿐만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조선의 국권을 빼앗은 다음, 조선인들에게 일본어 교육을 점차 실시해 나갔고, 조선의 민족적인 모든 문화활동을 못하도록 막음으로써, 우리 민족의 고유성을 말살해버리려고 했다.

그러한 목적으로 일본은 <내선일체>라는 것을 내세워 조선사람도 일본  사람처럼 <신사참배(神社參拜)>라는 것을 하도록 강요한 적이 있었다.

이쯤에서 그러한 ‘신사’란 무엇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일본엔 그들의 고유한 토속신앙(土俗信仰)인 신도(神道)라는 것이 있는데, 그러한 신앙(信仰)의 대상이 되는 신(神, 가미)의 위패(位牌)가 있는 곳을 <신사(神社)>라고 한다. 그러한 <신사>란 일본 황실의 조상, 또는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을 신(神)으로 받드는 사당(祠堂)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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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 모습>

그 중엔 다른 신사보다 격(格)이 높은 신궁(神宮)이라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일제 강점기 때. 서울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朝鮮神宮)’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조선신궁의 주제신(主祭神)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메이지 (明治)천황이다. 일본 신화의 여신인 天照大神은 일본 황실(皇室)의 조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明治天皇은 일본이 조선을 빼앗을 당시의 일본 왕이다.

한데, 조선총독부 시절 특히 일제 말기 때, 그들은 조선사람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강요에 굴복하였다.

하지만, 그런 것에 굴복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고 반대운동을 하여 일제로부터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목숨을 잃은 주기철(朱基徹, 1897-1944) 목사도 그 중에 한 사람이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던 주기철 목사에 관한 기록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韓國民族文化大百科事典]에 실려 있으므로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각설하고, 신사(神社)엔 도리이 (鳥居)라는 일본 특유의 <기둥문>이 있는데, 그것은 불경(不敬)한 곳과 신성(神聖)한 곳을 구분 짓는 경계라고 한다.    달리 말하자면, 일반적인 세상과 성스러운 곳인 신사가 있는 곳은 그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그곳을 드나드는 경계에 도리이라는 문을 세우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한 도리이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고 몇가지 설(說)이 있을 뿐이다.

어떤 이론은 <닭이 머무르는 자리>를 뜻하는 한자인 <鷄居>에서 유래 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神道>에서는 닭이 <神의 전령(傳令)>이라고 여기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 것이야 어찌 되었건, 도리이의 기본적인 구조는 두 개의 기둥이 서 있고, 기둥 꼭대기를 횡목(橫木)으로 서로 연결해 놓는 형태이다.

도리이의 기본적인 구조와 거의 비슷한 모양으로 된 구조물(構造物)이 한국에도 있다. 홍문(紅門)이라고도 하는‘홍살문’이 바로 그런 것인데, 홍살문은 능(陵), 묘(廟), 궁전(宮殿) 등에 세우던 일종(一種)의 문이다.

홍살문의 구조는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이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놓았고, 그 중간에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홍살문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洪陵)에도 있는데, 홍릉은 조선 제26대 왕인 고종(高宗, 재위 1863 – 1907)과 비(妃)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 – 1895)를 합장한 무덤이다.

역사에 관한 이야기는 연대순(年代順)으로 또는 시간 수서대로 하나씩  수직(垂直)으로 늘어놓는 것이 보통이다.

한데, 태평양전쟁 이야기를 적다 말고, 느닷없이 일본 온천 이야기와 그들의 토속신앙에 관한 것을 적으면서 도리이 (鳥居) 이야기를 적었다.

그리고,“도리이 와 비슷한 모양으로 된 구조물이 한국에도 있다.” 라는 설명을 하면서 고종과 명성황후가 묻혀 있는 무덤에 관한 이야기까지 나왔다.

명성황후가 목숨을 잃게 된 이야기를 하자면, 미우라 고로 (三浦梧樓)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도 하지 않을 수 없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후 생긴 신정부(新政府)의 군인이 된 미우라 고로는 주한일본공사(駐韓日本公使)로 조선에 부임하여, 조선의 친로 (親露)정권을 무너뜨리고 친일정권을 세우고자, 1895년 10월 8일 새벽에 그는 일본 자객(刺客)들을 동원하여 명성황후를 시해(弑害) 하고, 그 시신을 불태운 국제적 범죄를 저지른 자다.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등 조선에 있는 러시아 세력을 없애고, 일본의 세력을 그 땅에 넓히기 위하여 미우라 고로 등 일본 자객들이 경복궁을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을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고도 한다.

그런 이야기가 담긴 텔레비전 연속극도 있고, 명성황후에 관한 이야기 는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므로 줄이고, 태평양전쟁 이야기를 계속한다.

가노야 비행장

나는“오사카(大阪)에서 지낼 때 일본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유치장 생활을 하다가 후쿠오카 탄광으로 되돌아가게 되었고, 그 탕광에서 또 탈출하여 다루미즈(垂水)라는 곳에서 전쟁이 끝나는 것을 보게 되었다.”라는 이야기까지 적었다.

나는 전쟁이 끝난 다음 바로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서 더 지내게 되었다.

시모노세키 (下關)나 하카타 (博多)항 부두엔 한국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배를 타기가 쉽지 않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귀국을 서둘지 않고, 다루미즈 근처에 있는 가노야 (鹿屋)라는 곳으로 갔다.

그곳엔 가노야 비행장이 있다.   마침 그 비행장에 들어와 있는 미군부대에서 현지인을 고용인으로 채용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가노야 시청 앞에서 그런 광고문이 있는 것을 본 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귀국할 때까지 임시로 그 비행장에 취직했다. 내가 맡은 일은 자동차 타이어를 수리하는 미군들의 일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조수(助手)다.

그 비행장은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 자살특공대인 가미가제(神風)의 기지(基地)였다. 특히, 그 전쟁이 끝나게 될 무렵엔 전체 가미가제 수의 약 반(半)이 그 비행장에서 출격(出擊)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 나는 70년 전에 있었던 것들을 더듬어 생각해보면서 이 글을 엮고 있는데, 내 기억을 더 생생(生生)하게 하려고 인터넷 검색도 해본다. 하지만‘오늘날의 일본은 내가 그곳에서 지내던 때의 일본이 아니다.’ 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

말하자면,‘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 세상이다.’라는 뜻이다.  예를 들면, 지명(地名)도 그런 것 중 하나다.

내가 한국을 떠나던 해인 1984년엔 없었던 지명이 지금은 한국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듯이,‘ 일본도 그렇다.’라는 것이다.

몇 해 전에 일본 큐슈(九州)지방에 미나미큐슈시(南九州市)라는 도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지람특공평화회관(知覽特攻平和會館)이 라는 것이 그곳에 있다. 지람(知覽, 일본발음 지란)은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 육군 특공기지가 있었던 곳이다.

그 회관은 태평양전쟁 당시 폭탄을 실은 비행기 전체가 육탄(肉彈)이 되어 적함(미국 군함)에 몸으로 타격(打擊)한 특별공격대원의 유영(遺影), 유품(遺品), 기록 등 자료를 수집, 보전,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태평양전쟁 때 가미가제 특공대의 기지였던 가노야와 지란에 관한 이야기를 적고 있는데, 그 전쟁이 절정에 달하자 일본은 자살특공대인 가미가제 특공대까지 내세워 그 전쟁을 버텨보려고 했다.

그러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知覽特攻平和會館 앞뜰엔, 다음과 같은   비문(碑文)이 있다.

‘아리랑 노래 소리로 / 멀리 어머니의 나라를 그리워하며 …..’ (원문은 일본어다.)

가미가제 특공대 …… 그들 중엔 조선 젊은이들도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비문이다.

***지람특공평화회관(知覽特攻平和會館)에는 조선인 대원도 11명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1945년 3월 29일 당시 17세였던 박동훈은 유서에 큼직하게 ‘결사(決死)’라는 단어와 함께 “몸을 던져 적함과 함께 옥쇄해 영원히 황국을 지키겠다”고 썼다. 하지만 그는 ‘육군이 가족을 책임져 준다고 해 어쩔 수 없었다. 동생은 절대 군대에 보내지 말라’며 아버지를 안고 울었다고 가족은 증언했다. 그는 오카와 마사아키(大河正明)라는 일본 이름으로 올라 있다.

24세 탁경현은 출정 전날 밤 식당 아주머니에게 “마지막으로 조국의 노래를 부르겠다”고 했다. 그는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아리랑’을 불렀다.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그는 교토 약학대 재학 중 학도병으로 차출돼 왔다.

가고시마(鹿兒島)로

태평양전쟁 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5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1부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가고시마(鹿兒島)로

경찰서에서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탄광으로 돌아간 나는 또 갱 안에 들어가 전과 같이 막장에서 석탄 가루를 마시며 석탄덩이를 운반차에 싣는 일를 했다. 그런 생활을 얼마동안 또 하게 되었는데, 더 견딜 수가 없었다.

탈출할 궁리를 하면서 얼마쯤 지내다가 또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오사카에서 일본 경찰에게 불심검문(不審檢問)을 받았던 경험도 있고 하여, 신변안전에 경계를 하면서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다. 그러던 중, 내가 찾아간 곳은 구마모도(熊本)지방에서 토목공사업을 하고 있는 하시모도(橋本)라는 조선사람의 집이었다.

당시 그는 조선인 노무자를 데리고 군용비행장 확장공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다른 노무자들과 함께 그 집에서 숙식을 하며 지내게 되었다.

앞에 오사카 이야기에도 적었듯이, 당시 일본에서도 식량과 옷 등 일상생활용품의 거래가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군수품(軍需品)을 다루거나 군사용(軍事用) 시설을 만드는 곳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편이었다.

내가 머물고 있던 집 주인은 가끔 노무자들에게 막걸리잔치도 베풀었는 데, 그럴 때 누군가 아리랑이나 타향살이 등 향수에 젖은 노래를 선창 하면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도 함께 불렀다.

그곳엔 나처럼 막연한 기대를 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도 있었고, 고향에 부모처자를 두고 징용으로 갔다가 그곳으로 옮긴 사람 등, 일본으로 가게 된 여러 가지 사연을 가지고 지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거기서 얼마쯤 지내다 가고시마(鹿兒島)로 갔다.

내가 보통학교(초등학교)에 다닐 때, 교장 겸 담임선생이었던 일본사람인 사토나카 죠기찌(里中長吉) 선생의 고향이 가고시마(鹿兒島)라고 했다. 사토나카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나는 가끔 가고시마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왕에 일본까지 온 것이니, 구경이나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그곳까지 가게 되었다.

가고시마(鹿兒島)에는 화산(火山)이 있다. 내가 간 곳은 사꾸라지마 화산(櫻島火山) 남쪽 해안에 있는 다루미즈 (垂水)라는 곳이다. 사꾸라지마 화산은 오늘날에도 화산활동(火山活動)이 진행 중이다. 그 화산은 하루에도 몇번씩 분화(噴火)하는 일본의 대표적인 활화산 (活火山)이다.   그리고, 가고시마의 상징(象徵)으로 되어 있다.

<2015년 5월 26일에 있었던 사쿠라지마(櫻島) 화산 폭발 영상>

따라서 많은 관광객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한데, 내가 다루미즈에서 지내던 때엔 사정이 달랐다. 나는 그러한 화산 근처에서 한동안 지낸 적이 있었다.

내가 구마모도(熊本)지방에서 지내다가 그곳을 떠나 가고시마(鹿兒島) 현에 있는 다루미즈(垂水)에 갔을 때, 그곳엔 하다데구미(旗手組)라는 토목건설회사에서 일본군의 군용시설인 땅굴을 만드는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전쟁이 끝날 때까지 거기서 버틸 수 있었다.  그 공사장에서 일하는 일본인 부녀자(婦女子)들도 꽤 있었다.

하여간, 그 전쟁 때문이 수많은 사람들이 시달림을 받았고, 결국은  일본의 패전(敗戰)으로 그 전쟁이 끝나게 되었는데, 그 부분에 관한 것은 앞에 이미 적었기 때문에 다음 이야기로 넘어간다.

온천의 나라 일본  

이번에는 일본 온천에 관한 이야기 몇 가지를 적어보려고 한다.  일본으로 가기전부터 그곳에 온천이 많다라는 것을 알고 있긴 해지만, 그곳에 가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지내보니 과연 <일본은 온천의 나라다.>”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한데 온천이 많은 것뿐만 아니고, 일본 사람들은 혼욕(混浴)이라는 기괴망측(奇怪罔測)한 풍속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물론 일본인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하여간 일본 땅에 그러한 괴상한 풍속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오사카에서 지낼 때는 그런 것을 본 적이 없었는데, 규슈(九州)지방 에는 그런 풍속이 있었다.

우선, 일본엔 왜 온천이 많은가를 알아보기로 한다.

지구과학사전에‘환태평양 지진대(環太平洋地震帶, Circum-Pacific Seismic Zone)’이라는 지리학 용어(地理學用語)가 있다.  쉽게 말하자면 그것은 태평양을 들러싼, 세계에서 지진 활동이 가장 활발한 지진대로서 화산대(火山帶)와 지진대가 겹쳐 있고, 습곡산맥 (褶曲山脈, 참조 보기 1.)이 발달하고 호상열도(弧狀列島, 참조 보기2.) 가 분포되어 있는 지대다.

보기 1 : 지각(地殼)에 작용하는 횡압력(橫壓力)으로 인하여 지층이 물결모양으로 주름지어 이루어진 산맥.

보기 2 : 활등처럼 굽은 모양으로 죽 늘어서 있는 섬들.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화산 지대에 속해 있는 일본열도(日本列島)는 화산이 많고, 따라서 온천도 많다.

일본열도는 北海道, 本州, 四國, 九州 등의 큰 섬과 3,500여개의 작은 섬으로 되어 있는데, 규슈(九州) 남부지방인 가고시마(鹿兒島)에도 화산과 온천이 있다. 그곳엔 활화산(活火山)인 사쿠라지마(櫻島)화산과 기리시마(霧島) 화산이 있다.

일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온천에 관한 이야기를 적기 위해 화산 이야기를 늘어 놓았는데, 일본 온천 이야기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미 앞에 적은대로 그곳엔‘혼욕(混浴)’이라는 별스러운 풍속(風俗)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混浴’이라는 글자가 말해주듯이 섞여서 목욕한다는 뜻이 아니던가? 남녀가 같은 욕탕에서 목욕하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그것도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옷을 훌렁 벗은채 나체로  함께 같은 탕에 들어가다니?

하지만, 그 땅에 그런 별난 풍습(風習)이 있게 된 데에는 그곳의 풍토 (風土)와 그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민속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들의 풍속이 그러한 것을 어찌하랴?

한데,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는 곳에서 자란 사람이 <남녀가 같은 욕탕(浴湯)에 몸을 담그는> 그러한 풍속이 있는 나라에 가서 <혼욕>이라는 것을 처음 대했을 때, 그것은 기절초풍  할 정도로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에서 자란 사람인 내가 어찌하다가 그런 망측스러운 행동을 스스럼 없이 하는 사람들 속에 섞인 적이 있었다.

요즘에도 그런 풍속이 그 땅에 남아있는지?

하여간, 일본은 온천이 많은 나라다.

일본의 항복

태평양전쟁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2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1부 :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그들의 야욕

일본은 진주만 기습에 이어, 서남 태평양에 있는 수 많은 섬들과 동남 아시아 여러나라를 단숨에 휩쓸었다.    그들은 전쟁이 시작된 지 반년만에 필리핀, 말레이 반도, 싱가포르. 버마등도 점령했고, 이어 솔로몬 군도, 뉴기니, 자바, 수마트라에도 그들의 세력을 넓혀 나아갔다.

1미국과 영국을 멸망시킨다는 뜻으로 미영격멸(美英擊滅)이라는 구호도 외쳤던 일본은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만드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런 전쟁을 도발했다.

대동아 공영권은 당시 일본 정부와 일본군에 의해 만들어지고 보급된 개념으로, 일본제국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면서 그들이 내세운 표어 중 하나다.   <대동아>란 일본(한국 포함), 만주, 중국에 동남 아시아를 더한 지역 이라는 뜻으로 쓰인 말이다.

대동아 공영권의 요지는 위 아시아 지역에서 서양 세력을 몰아내고, 그 지역의 공존(共存)과 공영(共榮)을 이루어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것과 일본의 이익을 위해 일본이 만들어낸 한 구상이었다.   <태평양전쟁>을 <대동아전쟁> 이라고도 부른 일본이 그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대동아공영권은 일본 의 헛된 꿈과 표어로 끝났다.

각설하고, <그런 전쟁이 있게 되기까지 일본은 어떤 나라였나>에 관한 이야기를 간추려 본다.   19세기 후반, 일본은 쇼군(將軍)이 정무를 맡아보던 바꾸후(幕府)가 무너지고, 중앙 집권 통일 국가의 건설과 자본주의 형성의 기점이 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시대로 변했다.

그후 그들은 군사적이거나 경제적으로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큰 나라를 건설하려는 침략적인 야욕(野慾)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한 <영토 확장>의 꿈을 꾸면서 그들은 조선의 국권을 빼앗는 등 제국주의 나라로 변했다.

역전승(逆轉勝)

역전승은 처음에는 지다가 나중에 가서 이긴다는 것인데, 태평양전쟁 때 있었던 미국과 일본과의 전쟁이 그런 것이다.

일본 비행대들이 진주만에 정박 중인 미국 군함들을 기습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일어난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은 연전연승(連戰連勝)을 거두며 파죽지세(破竹之勢)로 그들의 점령지역을 넓혀나갔다.

하지만, 그 전쟁이 일어난 지 반년만에 전황(戰況)은 바뀌어 일본군의 기세가 꺾기게 된 것이다.

태평양전쟁의 한 부분이고 일본이 태평양에서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제압(制壓)당하게 된 <미드웨이 해전 (Battle of Midway)>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다.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여 기세(氣勢)를 떨치던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그들의 기(氣)가 꺾이기 시작했다.

약 반년동인 거침없이 그들의 점령지역을 넓혀나가고 있던 일본은 1942년 6월 4일(미드웨이 현지 시간), 하와이 군도(群島) 멘 서쪽 미드웨이에서 펼쳐진 미국과의 해전(海戰)에서 되돌릴 수 없는 패전을 하게 된다.

일본 함대의 주력 항공모함 4척이 침몰한 데다 3500명의 병력과 300대 의 항공기를 잃었다.

태평양전쟁의 주도권(主導權)이 하루아침에 미국으로 넘어간 것이다.

일본의 패전은 그럴 수박에 없는 복합요소들이 한꺼번에 작용헸기 때문이었다.

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의 전략 요충지(要衝地)인 미드웨이 섬을 공격하려던 일본 군함들이 벌떼처럼 달려든 미국 전투기들의 공격을 받아 태평양전쟁의 판도(版圖)를 바꾼 해전이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이 크게 승리한 후, 전세(戰勢)는 역전되어 일본군이 퇴각하거나 전멸하기 시작했다.

전쟁 초기에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던 곳의 범위가 점점 줄어들었고, 결국은 미국 비행기들이 일본 본토 하늘을 떼지어 날아다니며 곳곳에 폭탄과 소이탄(燒夷彈)을 떨어뜨렸다.

  • 소이탄은 화염(火焰)이나 고열(高熱)로 사람이나 건조물 등을 살상한다.

미군이 오끼나와(沖繩)를 점령한 다음부터 미국 비행기들의 일본본토 공습이 더욱 심해졌다.  오끼나와에서 가장 가까운 현이 가고시마(鹿兒島)다. (현은 한국의 도와 같은 일본의 행정구역 단위 이름이다.)

가고시마 상공은 그런 비행기들이 날아다니는 길목이 되었다.

가고시마에 다루미즈(垂水)라는 곳이 있다.

그곳엔 일본군의 군사용 땅굴을 만드는 공사장과 군용물자를 저장하는 시설이 있었는데, 미군 비행기가 그곳에 전단(傳單)을 뿌렸다.

바람에 날려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수많은 전단엔 여러 가지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a02대개 만화그림이 섞인 것이다.    그 전단 중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것도 있었다.

11시 55분을 나타내는 시계가 그려진 그림인데, 1부터 11까지는 숫자 대신 미군들이 점령한 섬들이고, 각 섬에는 부러진 깃대에 달린 일본 국기들이 있다.

11은 오끼나와다.

도쿄(東京)를 상징하는 12엔 부러지지 않은 일장기 깃대가 있다.  그것은“곧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게 될 것이다.”라는 암시가 담긴 전단이다.

일본의 패전

<곧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게 될 것이다.>라는 암시가 담긴 전단이 뿌려진 다음,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끼(長崎)에 각각 원자탄이 떨어졌다.

때는 1945년 8월 6일과 9일이었다.

태평양전쟁 초기에 일본은 그들이 원하던 섬들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으 나, 연합군의 해군과 공군력을 완전히 없앨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본 비행기들의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미태평양함대가 일본에게 당하 는 등, 일본군이 연전연승(連戰連勝)을 거듭하며 기고만장(氣高萬丈) 하여 동남 아시아 일대와 태평양 일부를 휩쓸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결국 그 기세는 꺾이고, 일본 본토가 ‘원자탄 세례’를 받은 것이다.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대동아전쟁>이라는 것을 일으킨 제국주의 일본은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했고, 마침내 전쟁을 일으켜 미국에 대들더니 결국은 그들 머리 위에 원자탄이 떨어지게 되었다.

앞에 적은대로 가고시마에 다루미즈(垂水)라는 곳이 있고, 그곳엔 일본군의 군사용 땅굴을 만드는 공사장이 있었다.

1945년 8월 15일에 나는 그곳에서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날, 히로히토(裕仁) 일본 천황이 무조건항복을 한다는 방송을 했는 데, 전쟁을 시작한 지 3년 9개월만에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한 것이다.

거의 70년 전에 있었던 이야기다.

그리고 새로운 두 세대(世代)가 생겼다.   패적국이 되었던 일본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 세우고 있다.

그러한 것을 보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