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여행 – 1

<그 사이>

신촌역에서 연세대앞 철다리까지 철길부근은 어릴적 놀이터였다. 산딸기, 뱀딸기, 까마중, 도토리 등 먹을거리와 강아지풀, 채송화 등의 놀이기구,  계집아이들 손톱 물들이던 봉숭아 같은 화장품까지 아이들이 하루를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신촌역

철길 위에 대못을 올려놓고 침을 잘 발라놓은 뒤 기차를 기다리곤 하였다. 못은 기차가 지나간 뒤면 납짝하고 날렵한 모습으로 바뀌여 땅따먹기나 못치기 놀이 도구가 되었다. 연세대 앞 철다리는 사내아이들의 간크기를 재는 시합장이었다. 기차가 오기 직전에 누가 먼저 철다리를 건너냐는 시합에 나는 늘 그저 구경꾼이었다.

머리가 조금씩 굵어지면서 신촌역에서 수색이나 능곡역까지 몰래 기차를 훔쳐(쎄벼) 타서 오가는 것이 놀이가 되던 때도 있었다.

신촌역에서 기차표를 끊어 교외선을 타고 송추, 일영, 벽제 등지로 하루길 소풍을 오가던 때는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의 일이다.

신촌역에서 이대쪽으로 들어선 막걸리 작부집들이 눈에 들어올 무렵엔 나는 이미 스물이 넘어있었다. 신촌역 앞에 인력시장이 서고, 그 곳에서 하루 몸팔이에 실패하고 빈속에 막걸리 기운으로 고함 한번 지르다가 막걸리 반공법에 걸려 잡혀온 사내와 함께 유치장에서 밤을 보낸 이후 신촌역과 철길은 내게서 멀어졌다.

기차를 타고 제법 먼 여행길에 나섰던 추억이 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청량리에서 동해안 북평까지 열시간 넘게 걸렸던 중앙선 기차여행이었다. 그해 초가을 심한 폐렴으로 병원신세를 지게되었는데 그때 병실에서 듣던 기차소리는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아있다. 그리고 그해 겨울, 나는 처음으로 홀로 집을 나서 경부선을 탓었다.

열 여덟을 넘기던 그해 여름부터 여름과 겨울이면 쌀과 모포 한장으로 꾸린 배낭을 메고 기차를 타곤하였다. 경부, 호남, 전라, 장항, 중앙선을 타고 산과 강과 바다를 쏘다녔다.

기차와 배를 타고 몇차례 제주행을 하고 열시간 넘게 배를 타고 울릉도를 다녀온 뒤로 나는 기차소리를 잊었다. 이미 서른이 넘어 일상에 매인 나이가 되었으므로

벌써 몇 해 전이 되었는지 – 먼 옛일들에 대한 기억들은 새록새록 떠오르건만 가까운 최근의 일들 일수록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은 나이 탓일 것이다.- 한국에서 경부선 KTX를 타 본 일이 있다. 그날 일은 내 어릴 적 기억 속에 한국도 아니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미국도 아닌 어느 외국에서의 경험으로 기억되고 있다.

아직 인터넷을 모르던 때에 뉴욕을 오가던 하루길 기차여행은 내 이민생활에 누리던 호사였다. 고작 맥주 두어 캔 즐기는 사이 도착하는 짧은 기차여행이지만 맨하턴 서점에서 만나는 한글 신간서적들을 만나고, 입에 맞는 설렁탕이나 해장국 한그릇의 호사를 즐기고 돌아오던 날이면 그냥 여기가 신촌이었던 것이다.

빠른 세상의 변화로 이런 소소한 즐거움조차 잊은지도 제법 되었다. 오가는 기차값과 한끼 식사 값이면 내 방에 앉아서도 책 대여섯 권은 족히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오가는 길이 번거로운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다행일랄까? 뉴욕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딸아이를 보러 간다는 핑계로 이따금 기차여행은 이어지고 있다.

이번 계약기간이 끝나면 서른 해가 되어가는 내 가게 뒤편으로는 미국 동북부를 잇는 Amtrek 철도가 있다. 하루에도 몇번씩 기차는 경적을 울리며 그 길을 오간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늘 막연한 꿈을 꾸었었다. “언젠간 기차를 타고 미국 대륙여행을 해 보아야지”하는 꿈이었다.

그리고 올 여름, 비록 절반이었지만 그 꿈을 이루는 첫 걸음으로 나는 기차여행 길에 올랐던 것이다.

“더 늙기 전에…” 기차 안에서 아내가 한 말이었다.

그리고 여행이 끝난 후 인사차 들린 내게 구순 어머니께서 던진 말씀이다.  “아무렴, 아직 젊을 때 다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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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여름 기차여행 끝에,  나는 아직 “더 늙기 전에”와 “아직 젊을 때” 그 사이에 서있었던 것이다.

<멀리 산꼭대기에 하얀 천같은 것이 덮어 있는 모습을 처음 본 이후, 우리는 그것이 “눈이다! 아니다!”로 서로의 생각을 세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