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

시간이 바뀐 첫 하루는 꽤나 길다. 한 시간이 주는 여유를 만끽하며 놀이에 빠진 하루였다. 일과 놀이가 잘 어우러진 삶은 그야말로 축복이다.

-오전-

어제와 똑같이 눈을 뜨니 아직 새벽 시간이었다. 시간이 바뀐 까닭이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계획했던 놀이를 시작했다.

막 이민을 왔던 무렵이었으니 우리 내외가 아직 풋풋했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아내가 김치를 담아 보겠노라고 했었다. 아내는 열심히 긴 시간을 부엌에서 보냈다. 그 날이었던가 이튿날이었던가? 내가 아내에게 건넨 말이었다. “앞으로 김치는 사 먹는 것으로…”

그 날 이후 오랜 동안 집에서 김치를 담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세월 흘러 내가 놀이 삼아 김치를 만들어 보곤 했었는데 번번히 실패를 거듭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틈나면 김치를 담곤했다. 어차피 놀이였으므로. 이왕 즐기는 놀이라면 즐거워야 하는 법, 김치 깍두기 총각김치 물김치 갓김치 동치미 등등 흉내 낼 수 있는 일들을 즐겼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제법 그럴듯한 김치를 만드는 일도 일어나곤 했다.

오늘 오전 내 놀이는 조청을 만들고 고추장을 담는 일이었다. 밖에는 추적추적 가을을 밀어내는 비가 추적이고 있어, 내가 놀이를 즐기기엔 마치 주어진 듯 딱 좋은 날이었다.

그렇게 고추장도 담고, 내친김에 거둔 후 어찌할지 모르고 돌보지 않았던 늙은 호박으로 호박조청도 만들고, 덤으로 식혜까지 얻는 즐거움을 누렸다.

이 즐거움을 얻기까지 내가 내 놓아야 했던 대가가 있었으니 점점 가늘게 높아만 가는  내 목소리, 바로 세월.

-오후-

추적이던 비 그치고 가을걷이 끝난 밭들조차 아직은 풍요로와 보이는 가을 오후, 벗의 농장을 찾아 가 한 나절 또 다른 놀이를 즐겼다.

이 나이에 만나서 좋은 친구와 함께 한 잔 술에 좋은 먹거리 더하여 계절을 즐기며 이야기하며 노는 즐거움에 더 할 게 무엇이 있을까?

벗이 잘 키워 넉넉히 넣은 매실로 담근 매실주에 먹거리는 그야말로 우리네 입맛에 달라붙는 내 어릴 적 어머니 맛, 눈으로 즐기는 농장의 가을 정겨운 풍경은 덤으로 누렸던 놀이의 즐거움이라니!

뭐 이야기라야 별게 있어야 하나? 그저 덤덤히 늙어가는 우리들 이야기.

친구 내외와 우리 내외 모두 아직은 일과 놀이를 즐길 수 있어 아직은 청춘. 암만!

세월을 타고 즐기는 놀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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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메기

친구 덕에 말로만 듣던 과메기 맛을 보았다. 과메기란 놈을 본 것도 처음이었다. 과메기라는 말을 들어 본 지도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내게 과메기 맛을 보게해 준 친구 역시 그의 지인에게서 선물을 받게 되어 처음 마주하게 된 음식이란다. 우리들이 즐겨 먹던 건조 생선으로는 오징어, 굴비, 북어, 양미리 등이었을 뿐 한국에서 살 때 과메기란 음식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기는 서울내기들인 친구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과메기 뿐만 아니라 친구 아내는 생태찌개, 김치 찜, 삼겹살 수육 등 맛깔스런 음식들로 한 상을 차려 내어 우리 부부가 호사를 누린 어제 저녁이었다. 친구는 그가 담근 매실주를 따라주며 말했다. “이게 뒤끝이 참 깨끗해요. 맘껏 마셔도 내일 아침 거뜬할 겝니다.” 그의 말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실로 간만에 권커니 잣커니 하며 마신 술자리였는데 오늘 아침 맞이는 정말 가뿐했다.

엊그제 친구를 만난 것은 거의 삼년 만 이었다. 비록 가까운 거리에 떨어져 살지만 코로나 탓도 있고 그저 무심히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먼저 인사 치레를 건넸다. “아이고 날 잡아 오랜만에 한 잔 합시다.” 이어진 그의 응답이었다.”아이 뭔 날을 잡아요? 그냥 오늘 하면 되겠구만!”

그렇게 마련한 어제 저녁 자리였다.

서로 못 본 사이에 그는 이사를 했다. 그의 새집은 그의 농장을 한 눈에 조망하는 자리에 작고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친구 내외의 노년을 보낼 집으론 정말 안성맞춤이었다. 일찌감치 노년을 즐길 준비를 마친 그가 크게 부러운 저녁이었다. 근사한 저녁상과 매실주 반주에 대한 감사는 부러움의 크기보다 훨씬 컸다.

길고양이 두 마리를 보살펴 키우는 재미도 듣고, 구십 대 쇠약해지신 그의 어머니와 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아이들 소식들도 나누고, 우리들의 노후에 대한 그저 쓰잘데없는 걱정도 나누며 적당히 오르는 취기를 즐긴 저녁이었다.

어쩌면 내게 과메기는 어제 밤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내겐 낯 선 음식이기도 하거니와 구태여 특별한 음식을 찾아 나서지는 않는 내 성정 탓으로 보아 그런 생각이 든다.

다만 과메기 없이도 숙취 없는 매실주 없이도, 그저 참 좋은 친구들과 이따금씩이라도 얼굴 마주 하고 여유로운 담소를 나누는 시간들을 즐길 기회를 누렸으면 좋겠다.

친구내외에게 고마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