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는 일 없이 분주하기만 하다더니 이즈음 내 모습이 딱 그 짝이다. 가게 일은 가게 일대로 집안 일들은 또 그것 대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마음만 어수선하게 분주할 뿐 딱히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그리 많지 않다.

추석이라더니 딱 그 옛날 내 어릴 적 추석 날씨다. 종종 일곤 하는 생각인데 지금 내가 사는 곳의 날씨는 오늘 날 서울 날씨보다 내 어릴 적 신촌에 훨씬 가깝지 않을까 싶다.

그랬다. 바람산 넘어 안산 꼭대기 바위 위까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펼쳐진 날, 추석 빔으로 차려 입었던 헐렁한 잠바는 아침 마른 바람에 안성맞춤이었다만 이내 뜨거워진 가을 햇살에 한나절 설레임에 그치곤 했다.

오늘이 딱 오래 전 내 고향 신촌 그 날의 날씨였다.

아버지의 식사량은 찻숟갈로  하나 둘이 고작일 정도로 줄어 들었지만 정신은 말짱하신 편이다. 어머니는 많이 다르셨다. 어머니는 시간을 많이 넘나 드시다 떠나셨었다. 그렇게 시간을 넘나 드셨던 어머니가 종종 내 손을 잡으시며 하셨던 하셨던 말씀이다. “얘! 이거 니 딸 줘라! 이 눔아! 행여 니 놈이 쓰지 말고!’

그렇게 어머니에게 건네 받았던 것들은 주머니 속에 꼬깃꼬깃 접어 두셨던 일 불, 오 불 지폐부터 동전 주머니 그리고 어머니가 간직하셨던 패물에 이르기 까지 하였는데, 그 때마다 어머니는 참말로 진지하셨다. 나는 내 딸아이에게 어머니가 하셨던 말씀, ‘이 눔아! 행여 니 놈이 쓰지 말고!’라는 말 까지 다 전해 주었다.

그리고 장모. 딸을 낳을 즈음 나는 이민이 아직 낯설어 몹시 헤매고 있었다. 내 딸아이의 어린 시절엔 장모의 사랑이 함께 했다.

몇 해 전만 해도 어머니 아버지, 장모 장인 모시고 추석상 차리곤 했었다만 이젠 더는 그럴 일도 없다.

추석을 맞아 하늘 높은 날, 어머니와 장인 장모께 인사 드리다. “우리 딸 결혼해요.” 어머니와 장모의 낯익은 목소리를 듣다. “감사하다!”, “고맙네!”

이 나이 먹도록 춤이라곤 추워 본 적 없는 내가 아내에게 춤을 배운다. 딸과 함께 출 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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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우리 동네 Chinese Festival은 제법 연륜이 쌓인 중국계 시민들의 큰 잔치이다. 중국계 뿐만 아니라 중국 문화나 음식에 관심 있는 동네 주민들의 잔치이기도 하다. 매해 이 맘 때 주말 이틀간 열리는 이 행사는 지역 언론들이 잘 다루어 주는 연례행사이다.

내가 이 행사를 주관하던 중국인 회장 임박사를 처음 찾았던 게 2000년도이니, 제법 세월이 흘렀다. 당시 동네 한인회장이었던 나는 임박사를 만나 Chinese Festival이 아닌 Asian Festival을 한번 열어 보자고 제안을 했었다. 그 해 처음으로 한국 무용, 서예, 태권도와 한국음식으로 그 행사에 함께 했었다. 일본계와 인도계 등에게도 제안을 했었는데 반응은 신통치 않았었다.

이후 Asian Festival이 아닌 Chinese Festival은 이어졌고 해마다 한국을 대표하는 팀이 함께 해 왔다. 한인회가 아닌 한국학교의 이름으로. 이 일엔 내 아내의 끈질김이 함께 했다.

세월이 흘러 이젠 해마다 추석이면 Korean Festival로 Chinese Festival에 버금가는 행사를 치루게 되었다. 이젠 한인회의 이름으로. 그 역시 한국학교가 함께 한다. 한인회나 한국학교의 이름으로 봉사하는 후대들을 보면 자랑스러운 동시에 안쓰럽다. 나의 자부심과 그 보다 크게 쌓인 부끄러움 탓이다.

아무튼 오늘 아내는 이 행사에서 춤을 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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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세대들에게 사물놀이를 가르치는 아내의 벗들은 쉬는 날에 흔쾌히 북채와 장구채를 잡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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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만난 임박사는 나와 아내가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나 우리나 많이 쇠했다. 허나 우리 동네 중국계나 한국계나 다음세대들은 활기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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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과 꿈 그리고…

아내는 북치며 춤을 추고 나는 상추를 씻고 고기를 굽는다. 오늘 저녁 내 집안 풍경인데, 이즈음 이따금 우리 부부가 저녁을 맞는 모습이다. 물론 북치고 춤추는 아내 모습은 한결 같지만, 나는 상추를 씻는 대신 된장찌개를 끓이거나, 고기를 굽는 대신 생선을 튀기기도 한다.

나이 육십대 중반으로 들어선 나는 아직도 꿈이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 철부지다. 어찌하리, 환갑 나이 아내도 여전히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은 것을.

아내는 더 늦기 전에 춤을 한번 추고 싶다며 춤을 배우겠다고 했다. 춤 배우러 한국에 갔다 오겠노라고도 했다.

올 봄 어느 날이던가, 아내는 동영상 두 개를 보여주며 어떤 춤을 추면 좋겠냐고 물었다. 태평무와 진도북춤이었는데 솔직히 나는 둘 다 마뜩치 않았다. 춤과는 거리가 아주 먼 내가 뭘 알아서가 아니었다.

태평무(太平舞)는 그냥 내 체질이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무릇 춤이란 흥이여야 하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그저 만들어낸 동작 같아서 ‘아니다’ 하였다. 진도북춤은 춤으로써는 대만족이었으나 아내가 저걸 과연 흉내낼 수 있을까?하는 의구를 떨칠 수 없어 차마 둘 중 어느 하나도 선뜻 집지 못하였다. 경쾌하고 빠른 춤사위가 이어지는 진도북춤을 아내가 흉내내다 자칫 자빠지거나 넘어질까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아무튼 아내는 그렇게 진보북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국까지는 아니고 주말이면 몇차례 왕복 하루길인 북부 뉴저지를 오가며 춤을 배우고 있다. 나는 운전 기사와 촬영 기사가 되어 그 길을 함께 한다. 녹화된 연습 동작들을 보며 아내는 저녁이면 춤 연습을 한다. 오늘 저녁도 그렇게 보냈다.

아내에게 춤을 가르치시는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었다.

‘진도북춤은 한 잔 마시고 세상사 희로애락을 춤으로 풀어내는 그런 춤인 것 같아요.’

이제 곧 아내는 자기 흥으로 진도북춤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추게 될 것이다. 그게 춤으로써는 그저 흉내에 불과할지라도 아내의 몸짓과 맘짓은 온전히 꿈을 이루는 행위라고 나는 믿는다. 아내의 꿈과 삶에 얽힌 희로애락을 풀어내는 춤으로써.

그리고 나는 춤추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한잔 그 힘만으로도 삶의 희로애락을 느낄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