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 17

내 생각보다 빠르게 주지사의 결정이 내려졌다. 이번 주 금요일부터 그 동안 영업이 정지되었던 일부 업종들이 문을 열 수 있단다. 일부 업종이라고 했지만 거의 대부분의 업종들이 거리두기 등의 준수사항들을 지킨다면 영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 주부터는 내 세탁소도 정상영업을 해야겠다. 느낌이 왔었나보다. 아침 일찍부터 텃밭 만들기를 오늘로 끝내야겠다는 생각으로 부지런을 떨었다. 그리고 오후에 들은 주지사의 결정이었다.

열무, 배추, 고추, 파, 양파, 상추, 쑥갓, 들깨, 토마토, 오이, 가지, 시금치, 아욱 등의 채소와  백일홍, 금잔화, 데이지, 물망초, 칸나, 라벤다, 야생화 등의 화초 씨와 모종을 뿌리고 심는 일을 마치고 난 후 들은 소식이다.

이젠 평범한 일상 맞이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이런 저런 뉴스들을 훑다가 재밌는 기사 하나 눈에 뜨여 읽다가 문득 옛 생각으로 웃다.

내 눈길을 끈 것은 기사의 제목이었다. ‘듀퐁가(家)의 저택 돌담장 위엔 왜 둘쭉날쪽한 유리조각이  박혀 있을까? Why does a duPont mansion have a stone wall topped with jagged glass shards?’

내가 사는 델라웨어주는 한때 듀퐁주로 일컬어 질 만큼 듀퐁 가문의 위세가 한세기를 넘게 떨친 곳이다. 듀퐁가문의 시조격인 Alfred I. duPont이 유리조각들이 박힌 돌담장으로 둘러 쌓인 저택을 지은 때는 1901년, 당시 건축비가 2백만 달러. 오늘로 환산하자면 약 오천 삼백만 달러였단다.

제법 긴 기사를 소개할 필요는 없고, 10피트(약 3미터)나 되는 높은 담장에 유리조각들을 박은 까닭은 외부의 도적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내부의 가족들 간의 분쟁 탓이었다는 것이다. 스스로들의 감옥을 만들었다는 슬픈 이야기다. 듀퐁가는 오늘날에도 심심찮게 가족 분쟁기사들을 만들어 내곤 한다.

내가 기사를 읽으며 웃은 까닭은 내 어릴 적 기억에 남아 있는 담장 위에 박힌 유리조각들 때문이었다.

내가 살던 신촌엔 기와집들과 초가집들이 어우러져 있었고, 서교동으로 넘어가는 언덕받이에는 루핑집들 이른바 하꼬방집들이 들어차 있었다. 1960년대 중반, 제2한강교가 들어 설 무렵 그 하꼬방들은 이층 양옥집들로 바뀌면서 동네가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양옥집을 둘러싼 시멘트 담장 위엔 어김없이 유리조각들이 박혀 있거나 둥그런 가시철망들이 얹혀 있곤 했다.

내가 이리도 그 시절을 정확히 기억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내 첫사랑이 그 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갈래로 땋은 머리카락에 흰 얼굴이 잘 어울렸던 그 아이가 사는 집 담장에도 유리조각들이 박혀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십 수년 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델라웨어에서 다시 만났었다. 그 무렵 어느 날이었다. 교회를 갔다 온 아내가  뜬금없이 건넨 말이었다. ‘자기 첫사랑이 여기 온대! 곧 만나겠네.’

사연인즉, 그 얼굴 하얀 아이의 동생 부부가 교환교수로 이 곳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동생 부부를 방문하러 온다는 것이었고, 그 동생과 아내가 언니와 나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을 맞추다 보니 딱 맞아 떨어지더라는 것이었다.

그 얼굴 하얗던 아이와 그렇게 만나 저녁을 함께 했었다. 그 아이의 가족들과 내 아내는 놀리기에 급급했지만, 그 아이와 수 십년 전 유리조각 박힌 돌담장 집에 살던 아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래 웃었다.

다시 돌아가는 일상의 어느 날, 내 채마밭에서 밥상이 차려지고 화단의 꽃들을 바라보며 하루를 웃는 모습을 그리며….. 또 웃다.

5-5-20

안식(安息)에

일요일 오후, 아내와 함께 꽃과 대나무 향연을 펼친다는 늦가을 정원을 찾았다.

DSC08223

DSC08224

가을 꽃내음을 타고 떠오른 오래 전 친구 얼굴 하나. 고등학교 시절 원예반 활동을 하던 친구 K다. 키 작은 내가 친구하기엔 버거울 만큼 키도 훌쩍 컷거니와 늘 맑은 얼굴에 말수도 적고, 말도 느릿느릿 몇 살 터울 형같은 친구였다. 그가 속한 원예반 친구들은 국화를 참 멋지게 키우곤 했다. 당시에 이 맘 때 쯤이면 열리곤 하던 전국 국화 경연대회에서 원예반 친구들은 대상을 거머쥐곤 했었다. 원예반 여러 친구들이 함께 이룬 일일터임이 분명하지만 내 기억속엔 국화 하면 그 친구 K가 떠오르곤 한다. 옛 친구 얼굴 하나 떠올려 그 시절을 추억하는 일만으로도 오늘 산책은 그저 족하다.

DSC08234DSC08235DSC08239DSC08249DSC08257DSC08274DSC08294DSC08321DSC08347DSC08367

아내는salvia 꽃잎을 보며 말했다. ‘이 사루비아 우리 많이 먹었지? 참 달았는데…’ 사루비아, 아카시아, 까마중… 개미 똥꼬 까지. 지금처럼 복잡하고 까탈스럽지 않았던 시절 이야기로 오랜만에 이어진 손 잡고 늦가을 길을 느긋하게 걸었다.

DSC08369

오늘 이른 아침에 눈이 뜨여 손에 들었던 책 하나. 윤명숙이 쓴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제도>.

책을 쓴 윤명숙은 조선인 위안부 한 사람 한 사람 그 사람 마다 태어난 후 겪어낸 저마다의 이야기에 촛점을 맞추어 당시의 제도와 일제 식민주의의 폭력성을 들추어 나간다.

추억이란 결국 사람인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사람 얼굴 하나 떠올리는 일 아닐까?

역사 역시 뭐 거창한 게 아닐게다. 그 시절 거기 있었던 사람들을 돌아보는 일.

제도, 체제, 주의, 사상 등속이란 모두 헛 것일 수도… 어쩜 종교에 이르기까지.

그저 그 시절 가장 아팟던 사람들 이야기를 꺼내어 곱씹고 오늘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딱 한번 만이라도 눈길 줄 수 있다면 나는 역사 속 하루를 사는 게 아닐까?

늦은 저녁, 노부모 곁 지키느랴 애쓰는 누나에게 들고 간 생선 튀김 하나로 누나 얼굴에 함박 웃음 가득.

내가 누린 하루의 안식이여!

8.15 단상(斷想) 2 – 말(言語)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8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8.15 단상(斷想) 2 – 말(言語)

해방이 된 다음, 일본어가 그 땅에서 물러가고 대신 영어가 그 자리에 들어와서 미군정이 펼쳐지고 있는 동안 한국의 공용어(公用語)로 쓰였다.

말하자면, 일본이 강제로 한국에 퍼뜨려 놓은 일본어는 썰물처럼 그 땅에서 빠져나가고, 속된 말로 꼬부랑 말과 꼬부랑 글씨라고 하는 영어가 밀물처럼 밀려온 것인데, 코쟁이라고도 불리는 미군들이 말하는 것을 한두마디 알아듣고 그대로 비슷하게 흉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동대문194510-1

1945년 서울 동대문 – 어느 미군이 찍은 사진 1

지금은 신문이나 잡지에도, 뉴스 방송에도, 텔레비젼 연속방송극에도, 거리에 즐비한 상가(商街) 간판에도 영어가 쓰이고 있다.

<상가 간판에도 영어가 쓰이고 있다.>라고 한 것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 보려고 한다.

미군정 시대가 지나가고 대한민국이 탄생되어 회갑(回甲)을 지냈건만 아직도 그 땅엔 외래어(外來語)의 어문일치(語文一致) 또는 언문일치 (言文一致)에 관하여 정리할 것이 꽤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외래어(外來語)란 말하자면 외국어가 국어 속에 들어와서 국어처럼 쓰이는 것인데, 특히, 한자어(漢字語)를 제외한 여러 외국의 말이 국어화(國語化)한 것으로서 <들온말>이라고도 한다.

그러한 <들온말>에 관하여 예를 들어 보기로 한다.

디지털카메라시대인 요즘엔 볼 수 없지만, 필름카메라시대에는 유원지 나 관광지 등에 있는 매점들 중엔 필름을 파는 곳도 있었다.

영어로 film인 그것을 위에 적은 것차럼‘필름’이라고도 하고,‘필림’ 이라고도 하며, 또는‘휠름’이라고도 한다.

이런 것도 있다.   Center에 관한 이야기다. Center는 축구나 농구 등의 경기(競技)에서 center line, centering 등으로 흔하게 쓰이는 말이다.

동대문194510-2

1945년 서울 동대문 – 어느 미군이 찍은 사진 2

한편, center는 무슨 상호(商號) 뒤에 흔히 붙이는 말이기도 한데 예를 들면 xx분식 센터, xx치킨 센터, xx스포츠 센터, xx심부름 센터 등이다.  그러한 center에서 온 말이 센타, 쎈타, 센터, 쎈터 등으로 쓰이고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한데, 그러한 외래어도 한국에 토착되어 쓰이고 있다면, 그것도 일종의 국어다.

그러한만큼 같은 뜻을 지니고 있는 말을 위에 적은 센타, 쎈타, 센터, 쎈터 처럼 여러가지로 쓰이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하여간, 오늘날엔 그 예를 낱낱이 다 열거할 수 없을만큼 영어가 판을 치는 세상으로 변했지만, 해방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미군정시대 때 영어통역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들은 대개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때 해외유학을 했거나, 아니면 국내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라고 하면 될 것이다.

당시 그 정도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그 시절에 대지주 등 부유하게 살던 집안 출신으로서 해방 전엔 친일을 했고, 해방이 된 다음엔 친미 행위를 한 사람들이었다’라고 할 수 있다.

영어를 아는 한국인들이 모두 그러했다는 것은 아니고,“해방 당시나 또는 해방 후 얼마 동안은 오늘날처럼 영어를 아는 한국인들이 많지 않았다.”라는 이야기다.

어찌 되었건, 군정 당국은 점령지를 통치하는데 언어장벽(言語障壁) 이라는 걸림돌이 생겨서 영어를 아는 한국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고, <통역정치(通譯政治)>라는 것이 등장하게 되었다.

지금은 영어가 한국의 공용어는 아니지만, “그 땅에서 흔하게 쓰이고 있는 것이 영어다.”라고 할 수 있는데, 크게는 국가기관에서부터 작게는 일반 가정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생활 주변에 영어가 즐비하다.

물론 콩글리쉬(Konglish)를 포함해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콩글리쉬(Konglish)라는 말이 나온 김에 ‘가라오케’이야기를 적는다.

1970년대 이후부터 쓰이고 있는 <가라오케>라는 말은 일본어와 영어의 합성어(合成語)이다.   <비어 있다>는 뜻의 일본어인 ‘가라 (空)’와 오케스트라(orchestra) 의 ‘오케 (orche)’를 합쳐서 만든 일종의 조어(造語)다.

말하자면, 사람이 연주하는 대신 기계가 합성하는 반주음에 맞춰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기계나, 그 기계를 설치한 술집 등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그러한 <가라오케>라는 말이 오늘날엔 영어사전에도 나와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하여간 태평양전쟁이 끝난 다음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전에 없었던 새로운 말이 만들어지고 있다.

적선지대194510

1945년 서울  – 어느 미군이 찍은 사진 3

지금 내가 이런 이야기를 적고 있는 것은 가라오케의 뜻이나 콩글리쉬 에 관한 긴 설명을 늘어놓으려는 것이 아니고, 태평양전쟁 이후 조수 (潮水)처럼 한국에 밀려들어온 영어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꺼내본 것이다.

한국어 대신 일본어를 국어라고 하던 땅에서 조선총독부 자리에 걸려 있던 일장기(日章旗)가 내려지고, 성조기(星條旗)가 올라갔다.

바꾸어 말하자면, 일본이 그 땅에 뿌려놓은 일본어 대신 영어가 들어 온 것인데, 그 당시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영어는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내 자신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적는다. 앞에서 이미 밝힌 것처럼, 나는 태평양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지난 30년 세월을 미국에서 지내고 있다.

한데,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나에게 하나의 외국이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보기로 한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나에게 하나의 외국이다.”라고 했는데, 가령  내가 한국 어느 국제공항에서 입국수속을 하려면, 나는 국적법(國籍法) 때문에 외국인 신분으로 한국에 입국하거나 출국하게 된다.  내가 태어났고 자랐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의 병역의무를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적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한국이 나에게 외국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그런 것 뿐만 아니다.

0101200910082496100024961018159

1945년 8월 15일, 서울

지난 30년 동안 모국방문을 한 것이 모두 네 번인데(네 번째는 2004년) 다녀올 때마다 한 달을 넘긴 적이 없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지난 30년 동안에 내가 한국에서 먹고 자고 한 날 수를 합하면 100 일쯤 된다는 이야기다.

10년 전에 다녀온 것이 나의 마지막 모국방문이 될 지 모를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지난 날들이 주마등(走馬燈)처럼 내 눈앞을 스쳐 지나 간다.

하여간,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라는 말이 있지만, 요즘은 그렇게 변해가고 있는 속도가 전보다 더 빠르지 않은가?  그러하니, 2004년에 내가 직접 보았던 한국은 오늘날의 한국이 아니라 는 것을 길게 설명할 필요가 있겠는가?

내가 미합중국 시민이기 때문에 이렇게 긴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고, 요즈음 고국(故國)에서 들려오는 각가지 소식들 중엔 나에게 너무나 생소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8.15 당시 이야기를 계속한다.

 

신촌연가 8

탈신촌기(脫新村記)

대야성, 복지, 캠퍼스, 독수리…

찻값 꽤나 부조했던 다방 이름들입니다.

누나네 집, 페드라, 태정식당…

막걸리값 수월치 않게 건네 주었던 술집들 이름이지요.

꽉 찬 10년, 제 대학생활은 그렇게 신촌과 함께 했었지요.

대학을 다니던 그 어느 한 해도 제대로 수업을 다 해 본적 없는 학교생활이었지요.

큰 딸은 간호대학 나와 조신하게 있다가 시집 보내고, 아들놈은 대학교수를 시키고… 아버지의 소박한 꿈을 허문 것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누나와 제가 거의 동시에 벌린 일입니다.

대학 졸업을 코 앞에 두고 있던 누나는 탈신촌(脫新村)을 선언하였습니다.

“전 졸업하면 미국으로 취업이민 가요.”

고집 세신 어머니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누나는 그렇게 훌쩍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아버지의 머리칼이 세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들이닥친 형사들이 아들을 찾을 때만 하여도 아버지는 “큰 일 아니겠지”하셨답니다. 아들을 만나러 경찰서로 유치장으로 구치소로 들락거리시던 아버지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하얗게 세셨습니다.

학교도 짤리고 골방에서 쳐 박혀 있는 아들을 보시며 아버지는 아직 꿈을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이 바뀌고 아버지의 꿈을 다시 살리시던 1980년 5월.

피신한 아들 덕에 평생 처음 무서운 곳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하셨던 아버지는 그렇게 자랑스러워 하시던 화랑무공훈장을 탓하시며 이민짐을 꾸리셨습니다.

그 해 벌어진 어머니, 아버지의 탈신촌입니다.

이따금 신촌거리를 배회하던 제게 신촌은 이미 제 어릴 적 신촌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신촌을 떠나신 지 7년 후.

요식행위일 뿐이라며 내어민 종이에 각서라는 것을 쓰고 받아 든 대한민국 여권이었지요. 그날 밤 미국에 계신 어머니는 전화통에 대고 신신당부를 하셨지요.

“이 눔아! 책 같은 걸랑 하나도 갖고 오지 말어! 일할 수 있는 작업복만  챙겨 가지고 와!”

그렇게 신촌을 떠났답니다.

<그리고 13년 후>

11박 12일.

13년만의 귀향이었다. 아기자기한 반도의 산하(山河)모습을 한 창 밖 구름들을 보며 서울이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크고 깨끗한 영종도 새 공항과 빠르고 친절한 입국절차에서 엄청나게 변한 도시를 예감할 수 있었다.

새벽, 시원히 뚫린 공항로를 달리며 바라 본 낯 익은 산들과 거기 휘며 춤추듯 자라는 나무들이 열 세해의 공백을 메워버렸다. 김포쯤해서 눈에 들어 온 거대한 아파트군(群)들은 한강 호위병처럼 서서 강변을 따라 끝없이 이어졌다. 강 건너 난지도에 솟아 오른 두 개의 산봉우리는 흐른 세월이 만만치 않았음을 말하고 있었다. 잘 꾸며진 강변 고수부지 공원들과 제법 푸른 도시 녹지공간들은 남산을 가로 막은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들의 삭막함을 덮기에 충분하였다.

그 뿐이랴! 짐을 풀기 바쁘게 나선 서울거리는 정말 깨끗하였다. 담배꽁초 하나, 휴지 한 조각 찾을 수 없는 거리는 매우 낯 선 것이었다. 시내는 물론 외곽도시까지 잘 연결된 깨끗하고 시원한 지하철은 그 끈끈하고 무더운 날씨를 잊게하기에 충분하였다. 모든 거리를 뒤덮은 자동차의 행렬은 이미 나를 주눅들게 하였지만 그 복잡함에 비해 제법 질서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서울은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튿날, 내 고향 신촌을 찾아 가는 길에서 나는 급작히 무너지고 말았다. 지하철 신촌역에서 내리자 이십대 아니 십대들의 물결에 휩쓸리고 말았는데 그들을 뚫고 친구들과의 약속장소로 가는 채 1Km도 안되는 그 짧은 거리에서몇 번이고 주저앉고 싶었다. 아아! 내 유년과 소년, 청년을 보냈던 그 거리 어디에서도 낯 익은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차라리 슬픔이었다.

스무명 남짓한 옛 벗들의 만남의 장소로 갈비집을 택한 까닭을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이미 그 곳을 떠나 사는 친구들모두가 기억할 수 있는 장소란 스무 해 넘게 한 곳에서 장사하는 그 갈비집밖에 없었으므로.

완전히 변모한 거리 모습에 비해 벗들의 모습은 거의 변하지 않은 반가움으로 다가왔다. 더러는 흰머리를 이고 더러는 대머리를 겸연쩍어 하며 악수를 나누었지만 세월의 두께로도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잊게 할 수는 없었다. 바쁜 서울생활에 나 뿐 아니라 그 곳에 사는 친구들끼리도 오랜만인지라 서로의 근황과 옛 시절을 이야기하며 우리는 그 도시의 복잡함을 쉽게 잊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우리들이 어린시절 드나들던 목로주점이 그 시절 그 모습대로 있다는 것을 떠 올렸고 우리는 한 목소리로 그것이 사실이야고 되묻곤 일어나 우르르 그 집을 찾아 나섰다.

그랬다. 이제는 없어진 신촌시장 한 귀퉁이 바로 그 자리에 옛날 모습을 안팎으로 고스란이 간직한 채 막걸리와 소주그리고 동태찌게 안주를 파는 목로주점이 있었다.  그 밤 우리는 “이 곳을 역사 보호구역으로 정하자”는 흰소리를 해가며 마시고 마시고 그렇게 취했다.

그 밤 그 곳에서 함께 취했던 벗들은 모두 서울을 버티는 중년들이었다. 정치인, 회사중역, 대학교수, 행정가, 변호사,목사, 성공한 자영업자 – 서울을 버텨 내야만 하는 계층이었다. 그러나 그 밤 나는 그들이 지쳐 있음을 보았다. 그들의얼굴 어디에고 서울의 버팀목으로서의 자부나 자신을 찾을 수 없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모습, 채울 수 없는 허탈, 마지못해 버티는 무력감들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그랬다. 그 밤 서울은 내게 내 벗들의 지친 얼굴처럼 다가왔다. 헤어져 돌아가는 길, 그 거리를 사랑하는 법을 생각해보았다. 그 어떤 모습일지라도 내 고향이므로. 내 조국이므로. 내 어머니의 땅이므로.

문질러도 문질러도 희어 질 수 없는 피부색처럼 끈질긴 인연의 땅이므로.

(2001. 7. 17)

그리고 다시 십년 후인 2011년의 추억들은 이어집니다.

DSC00262

 2011년 딸과 함께 옛 추억속으로

신촌연가 6

<말표 운동화>

신작로(新作路), 문(門)안.

신촌 우리 또래들이 쓰던 말 가운데 제2한강교가 들어선 후 빠르게 사라진 말들입니다. 사방으로 새로운 길들이 열리거나 넓혀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대문(四大門)안이라고 해서 “문안에 들어간다”던 말도 잃게 되었습니다. 이젠 시내(市內)라는 말을 쓰게 되었고 신촌은 이미 시내 중심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딱지치기, 구술치기(다마치기라고했지요), 다방구, 술래잡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비석치기등 동네 놀이에서도 졸업을 하게되었습니다.

중학교시절엔 이렇다 할 추억이 별로 없습니다.

중학교 정문 앞에서 일어난 1.21사태라는 무장공비 사건이 있었군요. 자하문 앞이지요. 저희 학교 학생 하나가 목숨을 잃었지요. 지금 그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해 여름에 그 친구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반공영화를 학교에서 찍은 기억이 납니다. 땡볕에서 몇 시간이나 전교생들이 서 있었지요. 몇몇 아이들은 더위에 지쳐 쓰러지기도 하고…

그즈음에 제 즐거움은 서대문에 있는 4.19도서관에 가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인쇄소는 날이 갈수록 번창했습니다.

옵셋 인쇄기가 들어오고 부터는 총천연색 인쇄물을 찍는 진짜 인쇄소가 되었답니다. 그즈음부터 아버지의 인쇄소는 제게서 멀어졌습니다. 제 또래의 사환 아이도 들어오고 인쇄기술자와 도장을 파는 견습생까지 달린 아버지의 가게에서 마땅히 제가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상태라는 단짝 친구가 있었습니다.

친구의 집은 독립문 부근이었지이요. 아직 사직터널이 생기기 전이었으므로 상태와 저는 방과후 신문로까지 꼭 함께 걸었답니다. 그리고 거기서 각자 신촌과 독립문으로 가는 버스를 탓었지요.

어느 날인가 누구랄 것도 없이 서대문까지 걸어가자는데 뜻이 통해 좀 더 걷다가 발견한 곳이 바로 4.19 도서관이었습니다.  거기서 만난 것이 소설책들입니다. 학교가 파하자마자 그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친구 상태와도 멀어졌지요. 춘원 이광수에서 시작하여 정비석, 장용학에 이르기까지 학교 수업시간에도 어제 읽었던 그 소설에 빠져 있곤하였답니다. 뭔 소리인지도 모르고 읽은 헷세의 데미안에서부터 카네기 인생론, 간디… 제 즐거움이었지요.

신촌 동네친구들은 주로 교회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동네친구들 사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층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국민학교 때까지는 몰랐는데 일류학교, 이류학교, 삼류학교의 계층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거기 더하여 잘 사는 아이들, 못 사는 아이들이라는 계층 형성이 시작된 것입니다.

운동화.

그즈음 제 신발은 줄기차게 까만 말표운동화였습니다.

물론 학교에서도 단화라고 부르던 학생구두를 신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저처럼 까만 말표운동화였답니다.

그런데 주일 날 교회에 가면 이야기가 달라졌지요.

단화에서부터 그 무렵 쏟아지기 시작한 각종 무늬의 이른바 이즈음의 스포츠 운동화들을 아이들이 신기 시작한 것이었지요. 교회 모임이 끝나면 아이들은 새로 생긴 분식집으로 몰려가곤 했지요.

저는 꾸준히 말표운동화이었고, 삼시 세 때 어머니가 해 주신 밥만 먹고 살아야 정석인 줄 알았지요.

어느 날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놀고 있는데 얼굴 하얀 계집아이가 저를 향해 한 마디 던졌답니다.

horse brand

“쟤는 촌스럽게 맨날 말표운동화야!”

아이들은 그 말 한마디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고요.

그래 어쨋냐구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말표운동화로 그냥 쭉 나갔답니다.

대학교 때는 말표 하얀 고무신 신고 학교를 갔고요.

 

신촌연가 5

<첫번 땡땡이에 대한 추억>

헐렁한 검정 무명제복 걸친 까까머리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코 앞에 있는 학교를 걸어 다니다가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하는 일은 썩즐거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대앞에서 신문로까지 버스를 타고 다시 광화문 네거리에서 효자동까지 전차를 갈아타야 하는 아침의 새로운 일상은 제겐 고역이었습니다. 특히 버스 타는 일은 전쟁이었습니다.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우르르 몰려 드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버스에 올라타는 일이란 작은 체구의 제겐 진짜 진을 빼던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막판에 간신히 버스 차문 한 쪽 끝을 잡고 한 다리를 올려 놓으려는 순간 억센 차장 아가씨가 머리에서 빙빙 도는 헐거운 모자를 홱 낚아 채서는 버스 밖으로 날려 버릴 때의 그 참담함은 그냥 슬픔이었습니다.

그래 그 전쟁 피하자고 제가 생각해 낸 꾀가 새벽밥 먹고 일찍 집에서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피해자는 제 어머니와 누나였습니다.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누나와 나는 이른 아침으로 배를 단단히 채우고 집을 나섰지요.

오호!  버스는 텅텅.

앉아 갈 빈 자리도 늘 있게 마련이었답니다.

이게 습관이 되어 결석은 꽤 있어으되 지각이라는 말은 제 사전에 없던 중,고등학교 6년 세월을 보냈답니다.  때론 학교 문이 아직 열려 있지를 않아 담 넘어 학교로 스며든 일도 제법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일찍 새벽에 서두르는 결심을 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제 첫 번째 땡땡이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버스를 타야하는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 지 얼마 안되어서의 일이었습니다.

버스에 올라타는 일에 몇 번이나 실패를 거듭한 후 가까스로 버스에 올랐답니다. 전차를 갈아타려 거의 뛰다싶이 했건만 효자동에 내렸을 때는 이미 등교시간을 넘긴 지각이었습니다.

학교에 들어 가기가 그렇게 싫었습니다.

“지각”이라는 게 무슨 붉은 딱지 이마에 붙이는 것 같은 낙인같았습니다.

그래 다시 전차 종점으로 돌아갔지요.

그 날 하루 효자동에서 마포 종점을 몇 번이고 전차를 타고 왔다 갔다 했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이 파할 시간에 맞추어 집으로 돌아갔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새로 만드는 전차 승차 패스포드가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게 주머니에 있는 전 재산이었으니까요.

아주 어렸던 시절 제가 새벽형 인간이 된 까닭이지요.

images (2)

그런데 그 경험은 제게 일석이조의 득이 되었답니다.

어느 날 전차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광화문에서 효자동까지도 다시 버스를 타야하게 된 것입니다. 전차는 한 달치씩 돈을 내고 패스포드를 끊었지만 버스비는 그날 그날 어머니에게 타서 썼었지요.

하루에 왕복 네 번 타는 버스비를 받게 된 것입니다.

신문로에서 내려 청운동까지 걷기 시작했지요. 방과 후에도 똑 같기 걸었지요. 버스비 삥땅을 치기 시작한 것이지요. 제 용돈 만들기였습니다.

    그 때의 전차 풍경

중학교 일학년 때 제2한강교가 개통이 되었지요.

신촌은 그 날 이후 더 이상 촌(村)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신촌연가 3

전쟁 후 쏟아져 나온 베이비 붐 첫 세대인 우리들을 모두 수용하기에 학교는턱없이 비좁았지요. 한 학급에 70명 가량이 그것도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하였으니까요. 교문을 들어서면 오른편 임시막사 건물에는 창천공민학교라는 간판이 따로 있었지요. 입학적령기를 놓친 늦깍이 학생들을위한 교실이었지요.

images (1)

대흥동 쪽으로는 창천국민학교 분교가 있었지요. 그만큼 교실이 모자랐던탓이었지요.

삼학년으로 올라가면서 학교는 분가를 했답니다. 신촌 노타리에서 연세대로 난 신작로를 경계로 왼편에 있는 동네 곧 서교동, 동교동쪽 아이들은 창서국민학교라는 새로운 학교로 옮기게 된 것이지요. 당시 잘 살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창서, 못살고 뒤쳐지는 아이들은 창천이라는 유언비어도 있었답니다. 그 쪽은 신흥동네이었으니까요.  제 아내가 다니던 학교였지요.

국민학교때 저는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아이였답니다. 뭐 특별하게 개구장이라거나, 그렇다고 뛰어나게 공부를 잘 했다거나 그런 눈에 띄는 것 없는 그저 고만고만한 아이들 가운데 하나였지요.

학교가 파하면 아버지의 인쇄소가 제 놀이터이었고요.

그즈음 이화여대, 연세대의 사무처에서 쓰는 각종 서식들과 고무직인들은 아버지의 독차지였습니다. 그거 배달하는 일은 제 몫이었지요. 인근의 한국전력도 아버지의 주고객이었고요. 당시 어머니는 밤을 새워 등사판을 밀곤 하셨지요.

국민학교 오학년 때의 일이었지요.

아버지는 며칠동안 출장길에 나섰답니다. 물론 조수인 저도 따라 나섰지요. 서대문 네거리에 있던 농협중앙회 로비 한쪽 구석에 아버지의 임시도장포가 세워졌답니다. 당시 무슨 일이었는지는 몰라도 농협과 거래가 있는 모든 사람들이 새로 꾸며야 하는 서류가 있었고 거기 도장 날인을 하게 되었던가 봅니다. 아버지는 아침 판을 벌리면서부터 농협이 문닫는 시간까지 며칠동안 쉬지않고 막도장을 파 대셨답니다.  저는 그 옆에서 손님들 이름을 받아 적어 아버지에게 건네고 손님들에게 돈을 받고 거슬러 주는 일을 했었지요.

그 일이 끝나고나자 우리 가족의 셋방시대도 막을 내리게 되었답니다.

노고산동에 방이 자그마치 네개씩이나 있는 우리 집을 갖게 된 것이지요.  대문가에는 우물도 있고, 앵두나무도 있었지요. 다만 수도가 연결되지 않아 물지게를 지는 일이 제 몫이긴 하였지만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지요.

무엇보다 저를 설레게 했던 것은 제 방을 갖게 된 일이었지요. 겨울이면 심심초를 즐겨 태우시던 할아버지와 동거를 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할아버지는 이른 봄이면 나가셨다가 늦가을이면 돌아 오시곤 했지요.

개도 키우고 닭도 치고 했었지요.

우리집이었으니까요.

그 시절에도 사교육 바람이 불어, 있는 집 아이들과 없는 집 아이들 편을 가르기 시작했지요. 우주당이니 지구당이니 그런 이름이 붙은 사설학원들이 생겼답니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앞 둔 아이들을 겨냥한 학원들이었지요.

턱걸이를 단 한 번도 하지 못하는 제게 아버지는 말씀하셨지요.

“너는 학원 안 다녀도 턱걸이 여섯 번만 하면 어느 중학교라도 갈 수 있다”

마당에 철봉이 세워지고 턱걸이에 제 중학교 입학 시험에 모든 것을 걸었답니다.

그러나 중학교 일차 시험에서 보기좋게 낙방을 하였답니다.

어머니는 지금까지도 제가 실력이 안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신 채 “그 놈의 턱걸이 때문에…”라고 굳게 믿고 계시답니다.

약수동 고모님은 재수를 시켜야한다고 강력히 훈수를 두셨지만 “애 버린다”시며 이차 시험을 보게 하셨지요.

저의 새로운 육년 –  청운동 학교생활이 시작된 것이었지요.

신촌연가 2

sc-2

1967년 신촌노타리

제 유년과 소년 그리고 청년을 보낸 신촌은 제 부모님들께는 네 남매를 키워 낸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지요.

아버지를 따라 나들이를 나선 제 최초의 기억은 네 살 무렵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신 상이군인이었지요. 안양유원지였습니다. 그 곳에서 도장포(圖章鋪)를 하시는 친구분을 만나러 나선 길이었습니다. 그 분도 상이군인이었는데 아버지보다 형편이 아주 안 좋으셨답니다. 두 다리를 다 쓰지 못하셨지요. 아버지는 그 친구 분에게 도장 파는 기술을 전수 받았지요.

굴레방다리 경기공업고등학교 정문 옆 굴레방 시장 입구에 아버지의 도장포가 들어 선 것은 그로부터 얼마 안되서의 일이었지요. 도장포는 이동식 간이 점포였습니다. 나무 상자 안에서 아버지는 도장 파는 도구들과 함께 온 종일을 사셨습니다. 저녁이면 이동점포는 시장안 안면있는 분의 가게에 맡겼지요.

아버지의 도장포는 일취월장이었습니다. 신촌 기차역 시장입구 버스 정류장 앞, 목  좋은 곳에 “신촌 도장포”의 간판이 올라간 것은 제가 국민학교  들어 갈 무렵이었지요.  그리고 간판이 “신촌 인쇄소”로 바뀌는데는 고작 이 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도장 새기는 일과 프린트라고 부르던 등사인쇄, 그리고 명함과 청첩장등을 찍을 수 있는 작은 활판인쇄기가 있었지요.

아버지는 엄청 부지런 하셨지요. 그리고 틈만 나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답니다. 일제시대 소학교  4학년이  교육의 전부이셨지요. “소야 영문법”이라는 일본인이 쓴 영어책과 한영사전, 영영사전을 그냥 통째로 외우는 일을 하셨지요. 당시에는 서예와 한자 공부에 아주 열심이셨습니다.

기억컨대 그런 아버지에겐 친구가 한 분도 안 계셨지요.

훗날  “너희들 키우려고….” 하시며 그까닭을 말씀하셨지요.

그 사이 우리 가족은 이사를 세 차례 하였답니다.

첫 번째 이사는 창천동 면철이네 문간방에서 안방 할머니 문간방으로 옮긴 일이지요. 지금도 있는지 모르지만 십년 전에 한국에 나갔을 때 형제갈비집과 맞은 편에 조선옥이라는 설렁탕집이 있었는데 바로 그 조선옥 뒷 골목에 있던 집들이었지요.

그리고 다음에 옮긴 집이 이대 후문 대신동에 있는 대신동장님 댁이었지요. 이 집에 살 때 그것도 꽤 큰 빽이었답니다. 쌀배급을 동회에서 했었지요. 그 집 셋방 사는 것만으로 순서가 바뀌는 빽이었지요.

다음은 이대 육교 건너 대흥동 태균이네 문간방이었지요. 한 반이었던 태균이보다 제 성적표가 조금 낫다는 이유만으로도 주눅들어 하셨던 어머니의 눈물이 밴 곳이지요.

우리 어머니.

그 때까지 한글을 깨지 못하신 그냥 억척이셨지요. 삼시 세 때 뜨거운 밥과 그날 그날 장을 보아 신선한 반찬, 어머니의 몫이었지요.

아! 프린트. 그 등사판 팔 떨어지게 미는 일도 어머니가 감당하신 일이랍니다.

그렇게 이사를 갈 때마다 식구들이 늘었답니다. 우선 제 아래로 동생 둘이 생겼답니다.  더하여  평생 한량, 노래와 춤을 좋아하시고 거기 마땅히 술이 있어야 좋으신 제 할아버님이 방랑을 멈추고 저희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지요.

아버지의 간판이 도장포에서 인쇄소로 바뀐 국민학교 이학년 무렵 문(門)안 출입은 제 차지였지요. 명동성당 옆에 있었던 시사문화사, 단성사 뒷골목에 있었던 청조사에 가서 활자 사오는 일과 을지로 지물포에서 종이 전지를 8절, 16절지로 재단해서 들고 오는 일들이었답니다.

꼼꼼하셨던 아버지는 명조체니 고딕체니 귀에 못이 박히게 설명을 하셨고, 한자(漢字)  하나 하나를 그려주시고 “꼭 확인해라”는 말씀을 후렴처럼 붙이셨지요. 제가 한자공부를 하게 된 건 다 아버지 덕이었지요. 그 문안 나들이는 제게 큰 즐거움이었지요. 사춘기로 접어 들기 전까지 말이지요.

그러다  어머니, 아버지의 꿈인 우리집을 갖게 되었지요.

아직 제가 국민학교(초등학교라고 하지만 자꾸 입에 붙어 놓질 못합니다. 이따금 제 아버님께서 아직도 소학교라고 하시는 것처럼) 졸업하기 전 일이었지요.

신촌연가 – 1

P080624001

오늘 가게 문 닫고 돌아 오는 길에 아내와 내기를 하였답니다. 제 세탁소에서 집까지는 평균시속 50마일로 달리면약 17분 정도의 거리입니다. 각자 다니던 초등, 중, 고, 대학교 교가를 얼마나 아는가 하는 시합이었습니다.

이 내기가 시작된 까닭은 제 블로그에 댓글을 남겨주신 분이 저희 부부의 고향인 신촌을 강력히 떠오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 옛날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하다가 그리 된 것이지요.

처음엔 우리 부부 둘 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였지요. 그러나 아무래도 음악적 소질이나 총기로 봐서 아내가 저보다 백배나 나았습니다. 아내는 그걸 거의 다 기억해 내었습니다만 저는 대학교, 고등학교, 중학교는 거의 한 소절도 기억해 내지 못했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국민학교(우린 그게 더 편하지요) 교가 처음 두 소절이 정확히 기억나는 것이었습니다.

“노고산 솟은 뫼는 튼튼한 몸을 창천의 맑은 물은 정직한 마음….” 그리곤 영영 감감이지만…

창천국민학교.

당시에 신촌에서는 유일했던 국민학교였지요.

염창동쪽으로 한서국민학교가 있었고, 염리동쪽으로 용강국민학교, 저쪽 수색쪽으로 수색국민학교 아마 그랬을 겁니다. 대현동 위쪽으로 이대부국이 있긴 했지만 그 때 거기 다니던 아이들은 아마 그 시절 특수층(?)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신촌이 버스 종점이었던 시절이지요. 제이한강교가 놓여지고 강 건너와 사통팔방이 된 일이 제가 그 국민학교를 졸업한 이후의 일이니까요.

1953년생들이니까 전쟁후 쏟아진 첫세대였지요.

그 땐 학기가 4월에 시작이 되어서 한 살 어린 저도 그 축에 끼게 되었지요.

당시 아이들 중에 사투리를 쓰는 아이들은 거의가 이북 사투리였지요. 충청, 전라, 경상 그 쪽 사투리는 거의 들어 본 기억이 아니 나지요. 그러니까 토박이들과 피난민들이 살던 곳이지요. 고래등 기와집과 초가집 그리고 루핑집이라거나 하꼬방이라고 부르던 집들이 공존하던 시절이었지요.

“노고산 솟은 뫼는…”하는 창천국민학교 뒷산에는 아카시아 나무들이 많았고, 때론 해골바가지들이 튀어나와 제법 용맹을 자랑하던 아이놈들은 그걸로 축구도 하곤 했었지요. 땅굴을 파고 가마니 거적대기를 대문삼아 살던 친구도 있었던 시절이지요. 물론 그 시절에도 이른바 지방토호들이 있었지요. 그 자식들과 땅굴에 살던 아이들과 다들 동무였지요.

“창천의 푸른 물은…” 신촌 창천동에는 창천 – 바로 맑은 물이 흘렀었지요.

아아! 아니에요. 당시만 해도 맑은 물은 아니었어요. 이화여대 쪽으로부터 신촌 기차역 앞을지나 신촌시장 쪽으로 흐르던 창천 위에는 통나무와 짚으로 엮은 다리들이 몇 개 놓여 있었지요. 개천 옆에서 까마중을 입이 까맣토록 따 먹곤 했지만 그 물에선 논 기억이 없으니까요. 당시 어머니와 동네 아주머니들은 빨래를 이고 모래내로 나갔지요.

가마솥에 양잿물 풀어 푹 삶은 옷들.

모래내 맑은 물에 빨아 이고 오시면 하룻길 이었지요.

신촌.

아직 현대판 새마을이 되기 전에 일이지요.

그래봤자 고작 사십 오륙 전의 일이지요.

삶이란?

참! 쩝! 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