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추석 또는 한가위 – 이제 내겐 거의 잊혀져 가는 명절이다. 누워 계신 아버지에게 ‘추석이예요!’라고 해도 ‘음, 그렇구나…’ 그저 덤덤하실 뿐이고, 함께 명절 밥상 나누시던 어머니와 장인 장모에겐 꽃 들고 인사 드리러 가는 날 일 뿐.

다들 살기 바쁜 아이들 뿐만 아니라 나 역시 아직은 살기 바쁜 탓에 한가위 명절은 그저 옛 생각 이나 더듬어 보는 시간일 뿐.

초저녁, 뒤뜰을 환하게 비추는 보름달은 그저 차분히 고요할 뿐.

보름달을 향해 속삭이는 풀벌레 소리도 요란하지 않고 그저 단순하고 작은 기도소리로 들릴 뿐.

* 사위, 며느리 사돈들께 그저 인사라도 나눌 수 있어 아직은 좋은 명절에.

** 단순함과 감사를 일깨우는 명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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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일 없이 분주하기만 하다더니 이즈음 내 모습이 딱 그 짝이다. 가게 일은 가게 일대로 집안 일들은 또 그것 대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마음만 어수선하게 분주할 뿐 딱히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그리 많지 않다.

추석이라더니 딱 그 옛날 내 어릴 적 추석 날씨다. 종종 일곤 하는 생각인데 지금 내가 사는 곳의 날씨는 오늘 날 서울 날씨보다 내 어릴 적 신촌에 훨씬 가깝지 않을까 싶다.

그랬다. 바람산 넘어 안산 꼭대기 바위 위까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펼쳐진 날, 추석 빔으로 차려 입었던 헐렁한 잠바는 아침 마른 바람에 안성맞춤이었다만 이내 뜨거워진 가을 햇살에 한나절 설레임에 그치곤 했다.

오늘이 딱 오래 전 내 고향 신촌 그 날의 날씨였다.

아버지의 식사량은 찻숟갈로  하나 둘이 고작일 정도로 줄어 들었지만 정신은 말짱하신 편이다. 어머니는 많이 다르셨다. 어머니는 시간을 많이 넘나 드시다 떠나셨었다. 그렇게 시간을 넘나 드셨던 어머니가 종종 내 손을 잡으시며 하셨던 하셨던 말씀이다. “얘! 이거 니 딸 줘라! 이 눔아! 행여 니 놈이 쓰지 말고!’

그렇게 어머니에게 건네 받았던 것들은 주머니 속에 꼬깃꼬깃 접어 두셨던 일 불, 오 불 지폐부터 동전 주머니 그리고 어머니가 간직하셨던 패물에 이르기 까지 하였는데, 그 때마다 어머니는 참말로 진지하셨다. 나는 내 딸아이에게 어머니가 하셨던 말씀, ‘이 눔아! 행여 니 놈이 쓰지 말고!’라는 말 까지 다 전해 주었다.

그리고 장모. 딸을 낳을 즈음 나는 이민이 아직 낯설어 몹시 헤매고 있었다. 내 딸아이의 어린 시절엔 장모의 사랑이 함께 했다.

몇 해 전만 해도 어머니 아버지, 장모 장인 모시고 추석상 차리곤 했었다만 이젠 더는 그럴 일도 없다.

추석을 맞아 하늘 높은 날, 어머니와 장인 장모께 인사 드리다. “우리 딸 결혼해요.” 어머니와 장모의 낯익은 목소리를 듣다. “감사하다!”, “고맙네!”

이 나이 먹도록 춤이라곤 추워 본 적 없는 내가 아내에게 춤을 배운다. 딸과 함께 출 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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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세월에 대하여

송편 대신 만두를 조금 빚었다. 솔직히 ‘송편 대신’이라는 말은 애초 가당치 않은 수사이다. 아무리 미국사람 다되어 산다하지만 노인들이 계시고, 그래도 명색이 추석인데 덕담 한마디로 넘어가기엔 예가 아니다싶어 만두를 빚게되었다.

“어제 막내네가 필라에 장보러 간다고해서 따라갔는데 파는 송편도 없더구나. 다 팔린건지…. 찾는 사람이 없는건지…. 이젠 추석도 없나보다.” 만두를 들고 찾아간 내게 어머니가 건넨 말씀이다. 노모는 손수 만들지는 못할망정 사서라도 송편 몇 점 아들과 나누고 싶었던  모양이다.

또 한번의 추석이 그렇게 지나간다. 참 신기한 일이다. 해마다 이맘 때면 날씨만큼은 내 어릴적 추석날 같다. 창문을 여니 벌레소리가 벌써 가을이다.

무심코 손에 든 책이 아주 오래 전 것이다. <성서와 인간> –  1972년도이니 내가 대학을 들어가던 해에 나온 책이다. 그해 외할머니께서는 내게 손수 한복을 지어 주셨다. 나는 그 옷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책장을 넘기다 눈에 들어 온 대목이다.

“돌이켜 우리는 혼란을 거듭하는 조국의 처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 조국의 발전의 길은 지도층의 영웅화를 배제하고 대중이 참되게 계발되는 데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일석이조에 이와 같은 과업이 완수될 수는 없지만, 질서화를 위해 암중모색한 소크라테스의 인생관과 그의 논리성은 곧 우리의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소위 아테네의 영웅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그는 ‘궤변의 논리’를 앞세우는 특권층을 ‘성실의 논리’로 막아냈으나 유감스럽게도 우매한 대중에 의해 사형당한 아테네의 선량한 평민이었다.”

예전 숭실대 총장을 지내신 조요한(趙要翰)선생님의 글이다.  글제목이  < 혼란과 질서 – 궤변론자들과 소크라테스>이다.

변한 추석풍경과 다르게 여전한 ‘궤변의 논리’들이 무성한 한반도 뉴스들이 마구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성실의 논리’들은 더욱 거세게 꾸준히 발전되어 왔다는 생각으로 넉넉한 한가위 저녁을 물린다.

따져보니 그 무렵 한복 지으시던 외할머니가 이고 있던 세월의 짐을 내가 이고 있다.

2014년 추석, 그리고 어느 민란

삼의사2“여기 세우는 이 비(碑)는 종교가 무릇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식이 될 것이다.” – 대한민국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 있는 제주대정삼의사비(濟州大靜三義士碑)에 적혀있는 비문입니다.

어느새 잊혀져가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어록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유족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그가 한국땅을 이륙한 비행기 안에서 “세월호 추모 행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답으로 던졌던 말입니다.

그리고 며칠후 천주교 서울 대교구장인 염수정추기경은 “(세월호 참사)가족들이 생각하는대로 이루워지면 좋겠지만 어느 선에서는 양보해야 서로 뜻이 합쳐진다.”라는 말로 잠시 뉴스 촛점 인물이 되었었습니다. 마치 교황과는 뜻이 다른듯한 뉴앙스를 풍기는 말이였기 때문입니다.

염추기경의 발언을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있는 가운데 눈에 뜨인 글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오마이뉴스에 실린 백찬홍의 주장 “박근혜 편드는 염수정 추기경, 프란치스코 교황 때문?”입니다.

자신(염추기경)의 재임시 남길 또는 남겨야할 업적에 대한 욕심(?)때문에 권력지향성 발언을 했다는 내용입니다.

염수정추기경은 제14대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겸 평양교구 교구장 서리라는 직함을 갖고 있는 이입니다. 한국천주교 또는 서울대교구하면 떠오르는 상징은 명동성당입니다.

천주교인도 아닌 제가 명동성당을 들락거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1978년 이 무렵이었습니다. 오원춘사건 또는 안동교구 카톨릭농민회 사건으로 알려졌던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해 8월 말,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겼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카톨릭 농민회 사건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특별조사령을 발동했을만큼 권력과 천주교가 일대 맞싸움을 벌였던 큰 사건이었습니다. 카톨릭을 빨갱이로 몰았거니와 명동성당을 들락거리는 것만으로도 불순세력이 되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후 고작 일년이 조금 지나서 박정희는 끔직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명동성당 – 한국천주교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상징입니다. 그 명동성당을 세운 사람은 민덕효(閔德孝)입니다. 본명이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인 프랑스 신부입니다.  그는 명동성당 건립뿐만 아니라 신학교 건립 등 한국천주교 발전에 지대한 공로를 남긴 이입니다.

그가 남긴 일기 몇 구절을 인용합니다.

“토마스(안중근)의 사형 집행이 26일에 있었다. 일본인들은 그 시신을 유족에게 넘기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나를 붙잡고 나라가 이렇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울기도 하고 발을 구르기도 하고 정말로 무서운 모습이었다. 마침내 그들에게 질서를 지키라고 간청했고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신학교를 떠나라고 했다.”(3.1운동 당시 천주교 신학생들을 언급하며 남긴 일기)

그의 일기에서 보듯 그는 조선의 독립을 반대하고 독립운동가들을 밀고하기도 했던 철저한 친일주의자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친일행각은 바로 그가 생각하는 한국천주교의 발전, 또는 천주교의 발전에 닿아 있었던 것입니다.

염수정추기경의 발언에서 떠올린 뮈텔 곧 민덕효신부였습니다.

그(뮈텔)가 제 8대 조선교구장으로 있던 때인 1901년 제주도에서는 큰 민란이 일어납니다. 이 민란으로 약 300명이 넘는 천주교도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이를 ‘제주신축교란(濟州辛丑敎亂)’이라고 부르는데 ‘이재수의 난’으로 알려진 민란입니다.

제8대 조선교구장인 뮈텔이 제주도에 프랑스 선교사 페네와 그의 보좌로 조선인 김원영신부를 파견하여 제주에 성당을 건립한 때는 1899년 5월이었습니다.

그리고 약 일, 이년 사이 제주도에 새로 늘기 시작한 천주교도들은 당시 제주도의 권력자들과 손을 맞잡고 행세를 부립니다. 물론 천주교도들의 뒤에는 프랑스라는 외세의 힘이 있었습니다. 아주 짧은 기간동안 제주도에서 천주교도들이 저지른  살인, 강간, 유부녀 윤간 등 악행과 만행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일설에 따르면 이들은 진정한 천주교인들이 아니라 당시 권력과 배를 맞춘 현지깡패들이 행한 일들이라고도 합니다.

천주교도(또는 교도를 빙자한 이들)들의 만행과 이들을 보호하는 권력에 항거하여 일어난 민란이 바로 이재수의 난입니다.

이재수를 비롯한 민란의 주인공들은 제주를 장악하고 삼백명이 넘는 천주교인들과 프랑스 신부들을 참수(斬首)합니다.

이에 프랑스 군대가 움직입니다. 제주도에 프랑스군대가 들어오자 깜작놀란 조선조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경에 빠집니다. 민(民)을 향해  큰소리치고 각종 조세를 부과하며 군림하던 모습은 간데없이 외국군대 앞에서 속수무책인 조선조정이었습니다.

노예-관노(官奴)- 출신이었던 이재수는 프랑스군대에 짓밟힐 제주도민들을 생각하며 약 일만 여명에 달했던 민란의 주인공들인 저항군을 자진 해체하고 자신은 자수를 합니다. 그리고 그해 10월 9일 사형을 당합니다.

후에 제주의 시인(詩人) 문무병은 이 사건을 “날랑 죽건 닥밭에 묻엉…”이라는 장시로 풀어 놓습니다.

그 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재수는 긴 한숨, 뜨거운 눈물을 마셨다.

끝까지 싸워야 한다. 그러나 장두(장수)는 외로웠다.

뿔뿔히 흩어지는 군중들. 그러나 당당하게

재수는 관덕정 마루에 올라 외쳤다.

어르신네들, 내 말 들읍서.

이제 우리의 꿈은 이루어집니다. 싸움은

이 한 목숨 버리면 그만이주마는

태 사룬 땅에 의지가지 없는 것들 배곯아 울고,

늙은 할망은 병들어 누었우다. 우리가

오늘, 이 다 이긴 싸움을 그만 두는 것은

배고프고  병든 식솔들을 살리는 일이고

조상의 땅을 지키는 일이라마씸

다들 집으로 돌아갑서, 헤어지는 마당에

서러운 것은 이 한 목숨 아깝지 않으나

저 불국(프랑스) 잡귀들을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 될 뿐이우다. 다시는 우리 땅을

아무도 범접하지 못할 거우다. 이 재수의 눈알은

죽지 않고 살아서 제주땅을 넘보는

축산이들을 지켜볼꺼우다. (축산이: 저승도 못가고 떠도는 배고픈 원귀)

날랑 죽건 펄에다 묻어 줍서.

날랑 죽건 닥밭(닥나무밭)에 묻엉… >

 (*** 이 시에서 닥나무는 양반을 비유해서 쓴 말입니다.)

삼의사 1그리고 그들을 기려 세운 비(碑)가 바로 제주대정삼의사비(濟州大靜三義士碑)입니다.

2014년 음력 팔월 한가위, 대한민국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이 명절을 기리는 세월호 집단 생수장 사건의 피해 유가족들에 대한 소식을 보며 떠올린 우리네 지난 이야기 하나였습니다.

당시 조선(대한제국) 조정처럼 광장의 유가족들을 이제 곧 흩어질 “이재수의 무리”로 여기는 대한민국의 권력가들을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