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연가 3

전쟁 후 쏟아져 나온 베이비 붐 첫 세대인 우리들을 모두 수용하기에 학교는턱없이 비좁았지요. 한 학급에 70명 가량이 그것도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하였으니까요. 교문을 들어서면 오른편 임시막사 건물에는 창천공민학교라는 간판이 따로 있었지요. 입학적령기를 놓친 늦깍이 학생들을위한 교실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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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동 쪽으로는 창천국민학교 분교가 있었지요. 그만큼 교실이 모자랐던탓이었지요.

삼학년으로 올라가면서 학교는 분가를 했답니다. 신촌 노타리에서 연세대로 난 신작로를 경계로 왼편에 있는 동네 곧 서교동, 동교동쪽 아이들은 창서국민학교라는 새로운 학교로 옮기게 된 것이지요. 당시 잘 살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창서, 못살고 뒤쳐지는 아이들은 창천이라는 유언비어도 있었답니다. 그 쪽은 신흥동네이었으니까요.  제 아내가 다니던 학교였지요.

국민학교때 저는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아이였답니다. 뭐 특별하게 개구장이라거나, 그렇다고 뛰어나게 공부를 잘 했다거나 그런 눈에 띄는 것 없는 그저 고만고만한 아이들 가운데 하나였지요.

학교가 파하면 아버지의 인쇄소가 제 놀이터이었고요.

그즈음 이화여대, 연세대의 사무처에서 쓰는 각종 서식들과 고무직인들은 아버지의 독차지였습니다. 그거 배달하는 일은 제 몫이었지요. 인근의 한국전력도 아버지의 주고객이었고요. 당시 어머니는 밤을 새워 등사판을 밀곤 하셨지요.

국민학교 오학년 때의 일이었지요.

아버지는 며칠동안 출장길에 나섰답니다. 물론 조수인 저도 따라 나섰지요. 서대문 네거리에 있던 농협중앙회 로비 한쪽 구석에 아버지의 임시도장포가 세워졌답니다. 당시 무슨 일이었는지는 몰라도 농협과 거래가 있는 모든 사람들이 새로 꾸며야 하는 서류가 있었고 거기 도장 날인을 하게 되었던가 봅니다. 아버지는 아침 판을 벌리면서부터 농협이 문닫는 시간까지 며칠동안 쉬지않고 막도장을 파 대셨답니다.  저는 그 옆에서 손님들 이름을 받아 적어 아버지에게 건네고 손님들에게 돈을 받고 거슬러 주는 일을 했었지요.

그 일이 끝나고나자 우리 가족의 셋방시대도 막을 내리게 되었답니다.

노고산동에 방이 자그마치 네개씩이나 있는 우리 집을 갖게 된 것이지요.  대문가에는 우물도 있고, 앵두나무도 있었지요. 다만 수도가 연결되지 않아 물지게를 지는 일이 제 몫이긴 하였지만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지요.

무엇보다 저를 설레게 했던 것은 제 방을 갖게 된 일이었지요. 겨울이면 심심초를 즐겨 태우시던 할아버지와 동거를 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할아버지는 이른 봄이면 나가셨다가 늦가을이면 돌아 오시곤 했지요.

개도 키우고 닭도 치고 했었지요.

우리집이었으니까요.

그 시절에도 사교육 바람이 불어, 있는 집 아이들과 없는 집 아이들 편을 가르기 시작했지요. 우주당이니 지구당이니 그런 이름이 붙은 사설학원들이 생겼답니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앞 둔 아이들을 겨냥한 학원들이었지요.

턱걸이를 단 한 번도 하지 못하는 제게 아버지는 말씀하셨지요.

“너는 학원 안 다녀도 턱걸이 여섯 번만 하면 어느 중학교라도 갈 수 있다”

마당에 철봉이 세워지고 턱걸이에 제 중학교 입학 시험에 모든 것을 걸었답니다.

그러나 중학교 일차 시험에서 보기좋게 낙방을 하였답니다.

어머니는 지금까지도 제가 실력이 안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신 채 “그 놈의 턱걸이 때문에…”라고 굳게 믿고 계시답니다.

약수동 고모님은 재수를 시켜야한다고 강력히 훈수를 두셨지만 “애 버린다”시며 이차 시험을 보게 하셨지요.

저의 새로운 육년 –  청운동 학교생활이 시작된 것이었지요.

신촌연가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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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가게 문 닫고 돌아 오는 길에 아내와 내기를 하였답니다. 제 세탁소에서 집까지는 평균시속 50마일로 달리면약 17분 정도의 거리입니다. 각자 다니던 초등, 중, 고, 대학교 교가를 얼마나 아는가 하는 시합이었습니다.

이 내기가 시작된 까닭은 제 블로그에 댓글을 남겨주신 분이 저희 부부의 고향인 신촌을 강력히 떠오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 옛날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하다가 그리 된 것이지요.

처음엔 우리 부부 둘 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였지요. 그러나 아무래도 음악적 소질이나 총기로 봐서 아내가 저보다 백배나 나았습니다. 아내는 그걸 거의 다 기억해 내었습니다만 저는 대학교, 고등학교, 중학교는 거의 한 소절도 기억해 내지 못했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국민학교(우린 그게 더 편하지요) 교가 처음 두 소절이 정확히 기억나는 것이었습니다.

“노고산 솟은 뫼는 튼튼한 몸을 창천의 맑은 물은 정직한 마음….” 그리곤 영영 감감이지만…

창천국민학교.

당시에 신촌에서는 유일했던 국민학교였지요.

염창동쪽으로 한서국민학교가 있었고, 염리동쪽으로 용강국민학교, 저쪽 수색쪽으로 수색국민학교 아마 그랬을 겁니다. 대현동 위쪽으로 이대부국이 있긴 했지만 그 때 거기 다니던 아이들은 아마 그 시절 특수층(?)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신촌이 버스 종점이었던 시절이지요. 제이한강교가 놓여지고 강 건너와 사통팔방이 된 일이 제가 그 국민학교를 졸업한 이후의 일이니까요.

1953년생들이니까 전쟁후 쏟아진 첫세대였지요.

그 땐 학기가 4월에 시작이 되어서 한 살 어린 저도 그 축에 끼게 되었지요.

당시 아이들 중에 사투리를 쓰는 아이들은 거의가 이북 사투리였지요. 충청, 전라, 경상 그 쪽 사투리는 거의 들어 본 기억이 아니 나지요. 그러니까 토박이들과 피난민들이 살던 곳이지요. 고래등 기와집과 초가집 그리고 루핑집이라거나 하꼬방이라고 부르던 집들이 공존하던 시절이었지요.

“노고산 솟은 뫼는…”하는 창천국민학교 뒷산에는 아카시아 나무들이 많았고, 때론 해골바가지들이 튀어나와 제법 용맹을 자랑하던 아이놈들은 그걸로 축구도 하곤 했었지요. 땅굴을 파고 가마니 거적대기를 대문삼아 살던 친구도 있었던 시절이지요. 물론 그 시절에도 이른바 지방토호들이 있었지요. 그 자식들과 땅굴에 살던 아이들과 다들 동무였지요.

“창천의 푸른 물은…” 신촌 창천동에는 창천 – 바로 맑은 물이 흘렀었지요.

아아! 아니에요. 당시만 해도 맑은 물은 아니었어요. 이화여대 쪽으로부터 신촌 기차역 앞을지나 신촌시장 쪽으로 흐르던 창천 위에는 통나무와 짚으로 엮은 다리들이 몇 개 놓여 있었지요. 개천 옆에서 까마중을 입이 까맣토록 따 먹곤 했지만 그 물에선 논 기억이 없으니까요. 당시 어머니와 동네 아주머니들은 빨래를 이고 모래내로 나갔지요.

가마솥에 양잿물 풀어 푹 삶은 옷들.

모래내 맑은 물에 빨아 이고 오시면 하룻길 이었지요.

신촌.

아직 현대판 새마을이 되기 전에 일이지요.

그래봤자 고작 사십 오륙 전의 일이지요.

삶이란?

참! 쩝! 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