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에

김지혜가 쓴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고, 아이리스 매리언 영 (Iris Marion Young) 의 책 <차이의 정치와 정의>를 주문하다.

연말 이리저리 할 일도 많다만, 어차피 시간이란 쪼개 쓰는 법이고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는데 쓰는 시간이 아까울 수는 없기 때문에 또 질러 본 일이다.

무엇보다 김지혜가 소개하는 아이리스 영의 이야기에 빠졌기 때문이다.

<아이리스 영은 ‘차이’라는 단어의 용례에 주목한다. ‘다르다’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사용되지 않는다. 배제되고 억압된 사람들 만이 ‘다르다’고 지칭되고, 주류인 사람들은 중립적으로 여겨진다. ‘중립’의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가능성이 펼쳐져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몇가지 가능성만 있을 뿐이다. 결국 ‘다르다’는 말은 ‘서로 다르다’는 상대적 의미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고정된 특정 집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차이’가 낙인과 억압의 기제로 생성되는 것이다.

마치 한국사회에서 ‘다문화’라는 말이 모든 사람이 다양한 문화를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문화적 소수자만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때의 차이란 주류 집단인 ‘한국인’을 기준점으로 삼아서 다르다는 것으로서, 사실상 ‘정상’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다양성을 강조하는 말로 종종 사용되는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라는 흔한 구호도, 여기서 ‘다름’이 주류 집단의 기준에서 ‘일탈’된 무언가를 지칭하고 있다면 그 자체로 ‘틀림’을 전제로 하는 형용모순이 된다.>- 김지혜의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나는 이 글을 읽다가 문득 고대 성서 이야기를 생성한 옛 히브리 신앙 공동체가 떠올랐다. 원천적으로 차이를 배제하는 신이 온전히 개입하는 세상을 꿈꾸었던 출애굽 시대 광야에서 이루었던 신앙공동체 말이다.

어쩌면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이란 신 없이도 신이 온전히 개입하는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아닐까? 아이리스 영이나 김지혜가 던지는 질문들은 그 과정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앞에 던져지는 것 들일게고….

꾸어야 할 꿈은 꾸되 현실은 내가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모습일 터이니…

내 아이들과 함께 멋진 곳에서 배 불린 안식일에.

사고(事故) 그리고…

WireAP_e63875bb4502421b80264aebafe516fd_16x9_992지난 화요일 제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필라델피아 인근에서 열차사고가 있었답니다. Amtrak 열차 탈선 사고라고 이미 널리 알려진 사건입니다.

워싱톤과 뉴욕을 오가는 이 열차편을 저도 종종 이용한답니다. 특히 뉴욕 맨하턴에 볼 일이 있는 경우에 제가 즐겨 이용하는 열차편이랍니다.

제가 사는 곳에서 뉴욕 맨하턴 펜스테이트 역까지 주말 편도요금이 백불 내외이니 서비스에 비해서는 좀 비싼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거리로는 서울서 대구사이는 좀 못되고, 서울서 전주 구간쯤 될듯하니 비싼편이지요.

몇년전에 KTX를 타 본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비싸고, 서비스와 속도 모든 면에서 한참 아래질이라고도 말씀드릴 수 있답니다.

Grayhound 버스를 이용하면 약 반값에 뉴욕을 오르내릴 수 있지만 아무래도 쾌적한 것은 열차편이랍니다.

차를 끌고 가는 경우 고속도로 이용료와 뉴욕 통과비, 제가 사는 델라웨어 다리 통행료에 더해 개스비, 그리고 악명높은 맨하턴의  주차비등 합치면 Grayhound와 열차비의 중간쯤 경비가 든답니다.

그러니 혼자가는 경우에는 버스가 가장 싸고 열차가 좀 비싼 편이지만 운전하지 않는 장점을 더한다면 아무래도 열차가 제일 낫기에
그걸 이용하는 편이랍니다.

바로 그 열차가 탈선을 해서 8명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다쳤답니다.

문제는 제가 종종 이용한다는 사실보다는 이젠 뉴욕 맨하탄에서 일하는 제 딸아이가 사용하는 제 일순위 교통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 아무래도 이 사건 사고 뉴스에 촉각을 세우고 지낸 한주간이었답니다.

연관뉴스들과 사고의 경위, Amtrak 및 정부의 대응 등에 대한 기사들을 놓치지 않고 보는 것이지요.

만일 같은 사고라도 서부나 중부지역에서 있었다면 “음, 이런 일이 있었군”하고 지나칠 법하겠지만 이건 거의 바로 제 일이기 때문에 관심이 높아진 것이지요.

초기에 과속(급커브 길에서 거의 두배에 가까운 속도)운행이 사고의 원인이었다는 보도에서부터 오늘은 어떤 방해물이 운전 구간에
있었다는 보도도 있답니다.

19세기 철도 운영체계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미국의 철도 운영방식에 대한 비판기사도 있고, 국가가 지원해 주는 사기업 형태의 열차 운행 시스템에 대한 해부기사도 있고, 각 기사마다 저마다의 이견들이 넘쳐나는 댓글들이 있답니다.

그런 기사나 글들을보면서 확인할 수 있는 것 한가지는 적어도 같은 공동체에 살고 있구나하는 것이랍니다. 의견은 서로 다르지만 사고 원인을 찾아내고, 해법을 찾자는데는 이견이 없는 것같은 분위기 때문이랍니다.

엇비슷한 사고를 경험하면서 국가공동체 안에서 적을 만들어서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는 그래도 낫다는 생각이 드는 까닭이랍니다.

70주년의 차이

메르켈  독일 총리

<나치 만행을 기억하는 것은 독일인의 영원한 책임이며 아우슈비츠는 인간성 회복을 위해 독일이 해야 할 일을 일깨워준다.> – 아우슈비츠 해방 70주년 기념식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한 말.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70년 전, 우리 민족 모두는 하나된 마음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고, 함께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광복을 기다리던 그 때의 간절함으로 이제 분단 70년을 마감하고 우리의 소원인 통일을 이루기 위한 길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대한민국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문에서

무릇 역사란 돌아보는 자들의 몫입니다. 그 몫이 그들의 미래를 결정하기 마련이고요.

나치는 독일이었다는 고백으로 미래를 맞는 공동체와 반민족 친일분자였던 조상을 독립투쟁가로 둔갑시켜 우상화하며 미래를 여는 공동체의 차이.

역사란 오늘을 사는 이들의 고백이지요.

분단을 극복한 공동체와 분단에 얽매인 공동체의 결정적 차이일 겝니다.

70주년을 해석하는 차이 말입니다.

과거에 (해방에 대한)간절함이 애초 없었던 이들이 말하는 (통일에 대한)미래란 그저 공허할 뿐이고요.

그들의 차이

제가 살고 있는 델라웨어주는 한적한 시골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해가 떨어지면 캄캄하답니다. 가로등을 거의 볼 수가 없답니다. 물론 시내 중심가나 상점가들에는 가로등이 밝게 빛나지만 저녁 9시즈음이면 대부분 상가들이 문을 닫고 조용하답니다.

그저 무덤덤하게 이번 분위기에 맞추어 살다보니 이런 풍경이 몸에 아주 익숙하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웃 대도시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날이면 제가 촌에 살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답니다.

그러다보니 아주 급격한 변화도 없는 곳이랍니다. 미국 남부 여행을 하다가 돌아오면 이 곳 사람들도 급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긴 합니다만, 1970년대 서울 풍물에 익숙한 제 눈에는 여전히 느긋한 촌냄새가 풍기는 곳이랍니다.

이 마을에서 제가 세탁소를 하며 밥먹고 살기 시작한지도, 거하게 말씀드리자면 사반세기가 흘렀습니다.

그런데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답니다. 손님들의 모습들과 그들이 맡기는 세탁물 역시 크게 변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유행의 변화는 있어왔지만 그저 이 곳 분위기(제 가게가 위치한 동네 분위)에 맞을 성 싶은 가격대의 옷들을 세탁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젠 제법 경륜이 쌓인 세탁소 경험 가운데 딱 두번 제 세탁소와 이 지역 형편에 맞지않는 고가품의 옷들을 세탁한 때가 있답니다.

한 때는 약 십오륙 년 전의 과거 일이고, 또 다른 한 때는 바로 이즈음이랍니다. 제 가게 근처에 대학교가 있고 이 대학교의 어학연수원에 해마다 외국인 학생들이 많이 들어와 배우고 간답니다.

십 오륙년 전, 한국에 IMF사태가 터지기 직전 한 때 한국에서 온 어학연수원 학생들이 들고 온 세탁물들은 동네 사람들의 세탁물과는 차원이 다른 가격의 옷들이었답니다. 한 때 그랬다는 말씀입니다.

이즈음에 세탁료는 묻지도 않고 고가의 옷들을 맡기고 가는 젊은이들의 거의 백프로가 중국에서 온 연수원 학생들이랍니다.

“중국” – 이제 가히 미국과 더불어 세계를 양분하는 세력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오늘 CNBC 뉴스는 그런 중국에 대해 다루는 프로를 내보냈답니다. 초강대국인 중국이 이미 경제, 군사적으로 막강한 힘을 갖고 있지만 세계는 물론 아시아를 지배하지는 못한다는 내용입니다. 미국에 비해 아직은 20년 이상 쳐져 있다는 이야기도 덧붙입니다.

그 뉴스를 보다가 생각난 미국과 중국에 대한 생각, 그리고 한국, 한국민에 대한 생각 하나 적어보려고 합니다.

제가 중국의 영향을 받는 문화 관습속에서 자라고 사고하며, 미국에서 미국인으로 사는 한국사람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중국적 사고와 미국적(또는 서구적) 사고방식의 근원적인 차이는 “신(神)을 바라보는 시각과 생각”일 것입니다.

오랜 기간 기독교 영향 아래서 역사발전을 이룩한 서구 및 미국적 사고의 바탕에는 창조주(創造主)이자 자연과 인간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신(神)이 있습니다.  나아가 인간은 자연에 대해 신의 대리자 역할을 하는 수준의 위치에 놓여 있다는 사고의 틀에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에 반해 중국의 전통적 사고에는 이런 서구적 개념의 신(神)이 없습니다. 물론 하늘(天)이라는 개념이 있지만 이 역시 서구적 신의 개념은 아닙니다.

세상 모든 것들은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이 중국적 사고의 시발입니다. 해, 달, 별은 물론이거니와 인간, 소, 개, 말에서 신(神)조차도 자연를 이루고 서로 상생하는 일부분들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의 중심에는 바로 그런 생각을 하는 인간이 있습니다.

서구적 사고의 윤리 또는 도덕적 기준이 신(神)에게 있다면, 중국적 사고의 도덕적 윤리적 기준은 바로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윤리(倫理)의 윤(倫)이 사람 인(人)변으로 시작하는 것이나 도덕(道德)의 덕(德)이 마음 심(心)변으로 시작하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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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흐름과 믿음이 바로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하고 끝난다는 것이 중국적 사고라는 것입니다.

미국이 소련을 상대하며 세계를 이끌었던 시대와는 사뭇 다른 까닭입니다.

군사, 경제적인 힘으로만 양국을 가늠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생각의 바탕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유교적인 틀로 기독교를 해석하고 벼락부자들의 천민 자본주를 신이 주신 복으로 믿고 사는 일부 한국인들도 곁들여 생각해 보면서…

촌구석 세탁쟁이가 모처럼 중국 아이들이 맡긴 고가의 옷들과 CNBC의 방송을 생각하며 몇 자 적어 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