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의 역사추리소설 <장미의 이름> 끝부분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나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 중략 –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들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소설속에서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던 연쇄 살인 사건의  진범(호르헤)이 드러나자, 범인  호르세는 모든 살인 사건들의  비밀이 담겨 있는 도서관에 불을 지르고 도서관과 함께 재로 변한다. 이 광경을 바라보면서 윌리엄 수사가 그의 제자이자 소설의 주인공인  아드소에게 건네는 말이다.

중세 교회시대에 신학적 교리와 교회의 권위라는 권력은 진리 또는 진실이라는 이름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당시 진리와 진실을 가리는 단순한 잣대는 선과 악이었다. 그리고 권력은 늘 선의 자리에 놓여 있었다.

소설 <장미의 이름>의 무대는 1327년 11월, 이탈리아에 있는 수도원이다.

2017년 3월 탄핵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했다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는다”는 말에 떠올린 소설 <장미의 이름>이다.

20세기 이래, 일본 식민 지배를 근대화로 위장하고, 남북 분단을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삼는 무리들이 내세운 진리 또는 진실이라는 깃발 아래서 그 무리들 대신에 먼저 간 이들을 생각해본다.

‘진실’ 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헛된 꿈을 이어가는 이가 어찌 박근혜  하나 뿐일가? 이제 ‘진실 또는 진리’라는 이름으로 한반도를 지배해 왔던 거짓 권력들을 불태워 재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장미의 이름으로.

개에게 길을 묻다

당(唐)나라 고승(高僧) 조주선사(趙州禪師: AD:778-897)의 일화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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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학승(學僧) 하나가 선사에게 물었답니다.

“개(犬)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개도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지요.

선사 왈. “없다”

그런데 어느 날 다른 제자가 와서 똑같이 물었답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이번엔 선사 왈. “있다”

제자가 다시 물었답니다.

“아니 그럼 부처는 그만 두고 사람이 되지 왜 개로 그냥 있습니까?”

조주선사 호통을 치시며 “얌마! 그건 개한테 가서 물어 봐!”

뭐 당나라 때 뿐이겠습니까?

제 맘 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제 안에 있는 부처 하나 느끼지 못하는 처지에 남이 무얼 하건, 개새끼가 무얼하건 그게 도(道)닦는 것과는 뭔 상관이냐는 조주선사의 가르침은 오늘에도 그대로 유효한 것이지죠.

순례자든 방랑자든 아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저 같은 사람이든

진리가 뭐 별거 있겠어요.

때론 화살이 되기도 하고 과녁이 되기도 하고

그게 삶이지요.

눈 뜨면 일어나 세탁소로 나가 보일러를 켜고, 일하며 배고프면 먹고,

집에 들어와 아내와 함께 가요무대 보며 세월도 한탄하고 흥얼거리기도 하고, 그러다 자고…

그 일상적인 바로 나의 삶에 도(道)가 있는 것이지요.

따지고 보면

심심하면 제가 글질하는 이 짓도 다 저를 위한 것이고요.

그게 때로는 누군가에겐 화살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따듯한 모포 한 장이 될 수도 있고…

과녁이 된 그가 하지 말란다고 아니 할 수도 없고

모포 한 장 더 달란다고 줄 여유도 없고

나도 때론 과녁이 되고

내미는 손도 되고…

그렇지 아니한가요?

무릇 도(道)라는 놈이….

그러다 다투기도 하고 표표히 떠나기도 하는.

다시

화살이 되고

과녁이 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