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40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 누가복음 17장 20 – 21
제자들이 예수께 가까이 와서 “저 사람들에게는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일찌기,’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알아 듣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 보지 못하리라.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은 탓이니, 그렇지만 않다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 서서 마침내 나한테 온전하게 고침을 받으리라’ 고 말하지 않았더냐?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많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이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 – 마태복음 13장 : 10- 17
예수가 주로 한 일은 기적행위와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바로 말씀입니다. 그 말씀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이른바 “비유”라는 형태의 이야기들입니다. 특히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들은 많은 경우 이 비유라는 형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오늘부터 몇차례 예수가 했던 비유말씀에 대해 써보려고 합니다.
비유란 예수 당시 사람들과 그 이전 구약시대 이스라엘인들에게 아주 익숙한 이야기 방식의 한 형태입니다. 비유라는 말의 히브리어( ‘마샬’lvm, mashal)은 잠언, 속담, 풍자(satire), 비웃음(taunt), 조롱(derision), 수수께끼(riddle), 풍유 또는 비유(allegory) 등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답니다.
그런데 예수는 스스로 왜 이런 비유를 사용해서 말씀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마태복음 13 : 10- 17, 마가 4: 10-12, 누가 8: 9-10)
바로<보고 또 보아도 알아 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알아 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들이 알아 보고 알아 듣기만 한다면 나에게 돌아 와 용서를 받게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되새기고 넘어갈 일이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은 예수가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예수가 떠나고 난 뒤 한 세대 후쯤부터 글자화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비유로 이야기하는 까닭을 설명하는 말은 예수의 말이 아니라 구약의 이사야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사야가 야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언자로 나서기 전에 야훼 하나님께 들은 음성입니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일러라. ‘듣기는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말아라(못하리라). 보기는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말아라(못하리라).’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를 어둡게 하며 눈을 뜨지 못하게 하여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 와서 성해지면 어찌 하겠느냐?” – 이사야 6: 9- 10
이사야에 나오는 말과 예수의 말을 곱씹어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비유로 이야기하는 까닭은 바로 “모르게 하기 위해서”라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 아닌지요? 조금 우스꽝스럽지 않으신지요?
제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까닭은 제 생각을 누군가에게 이해시키고, 읽는 이들로 하여금 제 생각을 잘 드러내어 알게 하기 위해서 인데요, 읽는 사람들이 읽을수록 모르게 쓰는 글이라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런데 비유란 역설 곧 패러독스(paradox)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의 이런 비유에 대한 설명은 바로 역설이지요.
바로 믿음을 전제하고 들어야만 들리고,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가짜 믿음”이 끼여들 여지가 너무나 많거니와, 실제 지난 이천년 동안 숱한 가짜들이 판을 쳐서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한 채 전혀 엉뚱한 예수만 바라보다가 간 사람들이 넘쳐나지요, 그리고 오늘 여기에서 마찬가지고요.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라는 말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이천년 동안 “여기있다, 저기있다”, “내가 보았다, 갔었다.” 등등 숱한 유혹들이 넘쳐났거니와 지금 오늘도 마찬가지랍니다.
예수의 비유는 자칫 이현령 비현령(耳懸鈴 鼻懸鈴), 곧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의 이해하기 쉬습니다.
이제 예수의 비유에 대해 이야기하렵니다. 저도 바르게 쓰고 읽는 이들도 바르게 이해하려면 바른 믿음의 잣대가 전제되어야 한답니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라는 말씀에서 “바로 너희가운데 있다”라는 말에 원뜻은 “바로 너희의 손이 미치는 곳에 있다.”라는 의미라는데는 성서학자들의 의견이 일치된답니다.
예수의 비유, 예수의 말씀은 바로 저나 당신의 손길이 닿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