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그리고 저녁

종종 신비로운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오늘 같은 날이다.

1.

아침 눈을 뜨고 제일 먼저 마주친 것은 호주에 계신 홍길복목사님께서 보내주신 설교문이었다. 은퇴후 그가 행한 <죽음 – 제 3의 이민>라는 주제로 이어지는 설교문 중 하나로 <끝이 좋아야 합니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양 옆에서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 이야기를 주제로 한 설교였다. 설교문의 마지막 문단 중 몇 개의 문장들이다.

<인생의 마무리는 죽음입니다. 잘 죽어야합니다. 우리 모두 다 잘 죽기를 바랍니다. 끝내기를 잘해야 합니다. ……. <유종의 미>를 영어로는 Crowning glory, <면류관을 쓰는 기쁨>이라고 표현합니다. 맨 나중에 웃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인생의 최고 정점, 최대의 peak time은 죽음입니다. 죽을 때 잘못 죽으면 일생을 망치게 되고, 죽을 때 아름답게 마무리 하면  그의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지만 끝이 나쁘면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우리는 이제 점점 죽음의 순간을 가까이 대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갑니다. 주 나를 외면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갑니다> 찬송하면서 이 땅에서의 삶을 가장 아름답게 마무리 할 수 있기를 기도 드립니다.>

2.

오전엔 아내가 읽어 보라고 권한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가 쓴 장편소설 <아침 그리고 저녁>을 손에 들었다.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며 아내가 건네 주었던 책인데 그 이유 때문에 차일피일 내 독서목록에서 밀려 있던 책이었다. 무슨 수상자나 수상작품이라는 치장이 달린 글들은 내게 썩 다가오지를 않는다.

말이 장편이지 고작 135쪽일 뿐인 중편으로도 짧은 축이었다. 그저 잠시 훑을 요량으로 들었던 책인데 책장을 덮을 때까지 엉덩이를 떼지 못하고 단숨에 읽어 내린 마치 단편 같은 소설이다.

소설은 주인공 요한네스가 태어나던 날 몇 시간과 그가 죽던 날 하루에 대한 기록인데 그의 할아버지부터 손자에 이르기까지 오대에 걸친 이야기들이 녹아있다. 하여 단편인 동시에 장편이다.

생명의 탄생에 대한 두려움과 신비로움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죽음의 일상성이랄까 죽음이란 마치 평범한 삶들이 평범한 일상 속에서 겪는 일 가운데 하나의 과정인 듯 이야기한다.

요한네스를 다음세상으로 데려가기 위해 잠시 이 세상으로 돌아온 먼저 죽은 그의 절친 페테르가 전하는 다음세상을 설명하는 말이다. <자네가 사랑하는 것은 거기 다 있다네. 사랑하지 않는 건 없고 말이야>

3.

오후에 누워 계시는 아버지를 찾아뵙다. 나를 보자마자 하시던 말씀.

“아이구, 내가 너를 기다렸어요. 이제 내가 떠날 준비를 해야되요. 내 장례식때 말이야… 니 엄마가 해 준 한복을 입고 가려고 했는데…. 그게 아무래도 오줌 눌 때 아주 불편할 거 같애서… 그냥 양복하고 …여름철 거든 겨울철 거든 철은 따질 거 없어요…. 그거 입히고 니 엄마가 해준 반코트 있어… 그거 좀 입혀 줘.”

이즈음 들어 많이 오락가락하시는 아버지의 부탁이었다.

날은 여전히 쌀쌀한데 햇볕은 아주 따스한 날이다. 내 뜰에는 어느새 수선화 튜립  등이 싹을 틔어 오르고 크로커스는 이미 활짝 웃고 있다. 보라색 크로커스의 꽃말이란다. ‘누군가를 후회없이 사랑한다’라던가….

살아가는 날까지 끊임없이 사랑하고 볼 일이다. 그게 가는 날까지 천국에서 사는 일이고, 떠나서 만나는 이들은 어차피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들 뿐이기에.

죽음을 논하는 아침에서 삶을 노래하는 저녁까지…

오! 이 신비한 하루에 감사.

홍목사님을 비롯한 모든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며 살아가는 내일을 위하여….

내 쉬는 날 일상의 하나… 오늘은 달콤한 사과빵을 만들어 아내에게 맛보이다.

기도

1.
오랜만에 세탁물을 찾으러 온 그의 얼굴은 텁수룩하게 기른 턱수염 탓인지 매우 수척했다. “장사는 좀 어때?”라며 묻는 그의 목소리와 표정은 좀 공허했다. “뭐, 그저 그렇지만 아무래도 여름철이라 한가한 편…”이라는 내 대답에 그가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 틈새로 아내가 그에게 물었다. “어떠세요? 부인께선….”

잠시 두 눈을 껌벅 이던 그가 입을 뗀 말, “떠났어요.”

나보다 몇 살 위인 Charlie는 삼십 년 가까운 내 단골이자 내 이민생활의 좋은 멘토였다. 큰 회사의 중견간부로 있다가 은퇴한 후 그와 그의 아내는 이런저런 병마와 싸우며 지냈다. 그는 지팡이를 벗삼아 내 가게를 들락이면서도 늘 여유로움을 잃지 않았었다.

어제, 아내가 세상 떠난 짧은 인사를 던지고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이 남긴 그 공허한 잔상이 아직 내게 이어지고 있다.

2.
이번 주말, 살아 생전에 후배들의 존경을 받으며 외길 걸었던 선배의 삼주기 기일을 맞아 필라 인근에 사는 그의 후배들이 함께 하려 했었다.
그러다 듣게 된 참으로 느닷없는 부음(訃音). 선배의 아들 노릇했던 아직 쉰 나이에 이르지도 못한 맏사위의 갑작스런 떠남.

그 부음을 알리는 선배 가족의 알림. “……..정말 통탄스럽게도……담에 연락할 때는 정말 더 밝은 소식으로 만나기 바래요.”

아직 내 속 아림이 이어지고 있다.

3.
죽음 앞에 서면 나는 예수쟁이가 된다. 더욱 예수쟁이가 되고 싶다. 죽음이란 단지 어딘가 닿을 또 다른 떠남이기에. 하여 오늘을 다시 되새기게 하는 종말론적 삶을 재촉하는 깨침이기에.

… Charlie와 선배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밤에.

시간에

초침은 분침이 되고, 분침은 시침이 된 듯한 한주간이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는 온전히 내 마음에 달렸다.

조금은 더 버틸 듯 하시던 장인 어른이 맥을 완전히 놓아 버린 것은 지난 화요일 밤이었다. 아내와 나는 준비했던 대로 조촐히 그를 떠나 보내는 순서를 진행했다.

생각할수록 죽음은 삶과 닿아 있다.

나는 어제 모처럼 추운 겨울 밤, 함께 했던 이들 앞에서 내 장인 어른을 기렸다.


제가 장인어른에게 받았던 가장 큰 크리스마스 선물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것으로 제 장인 어른의 약력 소개와 추억을 대신 하렵니다.

장인과 사위 사이로 산지 거의 사십년이 다 되어 갑니다. 서로 알만큼 알만한 시간이 흐른 셈입니다. 장인 어른과 제가 닮은 게 딱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즈음 세상과 달리 아들을 딸보다 귀하게 생각했던 시절에 딸 셋, 아들 하나로 태어나 자랐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아들 바라기가 심한 부모의 외아들이었습니다.  이쯤 말씀드리면 장인과 제 성격이 닮은 거 빤하게 드러나게 마련이지요. 고집 세고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서로 마주하면  자기 모습이 빤히 보이는데… 뭐 애틋한 정을 쌓는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거 이해들 하실겝니다.

물론 장인 어른이 저하고 다르거나 뛰어나신 것들이 많으셨습니다. 우선 제가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잘 생기셨고, 하나님께 받은 재능들이 참 많으셨던 분이십니다. 특히 예술적인 감각이랄까 이런데 아주 뛰어나신 분이셨습니다. 주색잡기 중에 주색은 모르겠지만 잡기에는 여러모로 뛰어나셨던 분이셨습니다.

그가 Diana 노래를 부를 땐 영락없이  Paul Anka 였고, Green Green Grass Of Home을 부를 땐  Tom Jones 인 듯 할 정도로 노래도 잘 했답니다.

그러다 어르신 떠나 가신 후 어른의 약력을 정리하다가 제 장인에 대한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또한 제가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삶의 모형이었습니다. 바로 이타심, 이웃에 대한 배려, 약자에 대한 삶의 자세 그런 것들이었지요.

제 장인은 유머에 매우 능했고 이야기 거리가 참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유머가 때론 너무 과해 이른바 블랙 코미디를 즐겨하셔서 함께 있던 이들이 미처 그 웃음 코드를 이해 못해서 종종 난감해 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지만, 그 바탕엔 그저 아이같은 순진함이 깔려 있었답니다. 제 아내가 딱 이런 점을 닮아서 제가 잘 이해를 한답니다. 제 아내가 참 순진하고 착하다는 말씀입니다.

아무튼 장인이 즐겨 하셨던 이야기거리의 두 중심축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18살에 이른바 카투사라는 미군 배속부대 제 1기 로 한국전쟁에 참여하여 지낸 6년여 동안의 군생활 이야기가 하나였답니다.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한 공로로 한미 양국에서 무공훈장을 받았으니 그 시절 이야기를 그가 질리도록 하여도 들을만 했답니다.

둘째는 제대 후에 거의 그의 전 생애 황금기를 이룬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바로 소방대장이었습니다. 주한 미군병연내 소방대와 주베트남 미군병영내 소방대장을 비롯해 사우디아라비아 공항소방대장을 보낸 세월 이야기였습니다. 제 장인 어른의 별칭은 이대장이었답니다. 그 호칭을 자랑스러워 하셨고요.

그런데 제가 이번에 새로 알게 된 제 장인의 이력으로 그의 삶을 다시 새겨 보게 되었습니다. 한국전쟁 이전에 그가 공부한 사회사업과 전쟁이후 맹아학교 선생님 이력이었습니다. 그가 꿈꾸었던 삶의 한 단면을 새롭게 느낄 수 있었답니다.

은퇴이후 이곳 윌밍톤시에 사시면서 한 이십여년 동안 영어로 언어 소통이 어려운 이웃들의 일상적인 삶에 작은 도움을 베풀며 사신 삶도 다시 새기는 시간도 가져보았습니다.

장모 먼저 보내고 홀로 사셨던 3년간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제게 다가왔었습니다. 특히나 노인시설에서 그저 누어 지내셨어야만 했던 마지막 1년 동안, 그가 그의 삶의 마지막 시간들을 덤덤히 준비하고 맞았던 모습들은 제게 많은 가르침과 깨달음을 안겨 주었습니다.

자! 이제 제게 주신 장인의 큰 크리스마스 선물 이야기입니다.

몇 주 전이었던 크리스마스 이브였습니다. 모처럼 정신이 말짱하셨던 날이었습니다. 아내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가지고 간 셔츠를 입혀드리려고 하니 싫다며 짜증을 부리셨고, 아내는 굳이 입혀 드리려고 애를 썼답니다. 그 때 장인이 제게 하신 말씀. “김서방! 재랑 어떻게 그렇게 오래 살어?’

그리고 잠시 후 아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장인 어른 웃음 가득한 얼굴로 제게 말씀 하셨답니다. “김서방, 정말 고마워.”

장인과 제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 나눈 이야기랍니다.

바로 크리스마스 선물이었지요.

이제 내 장인 어른 영혼의 얼굴에 웃음 꽃이 끊이지 않을 것임을 믿고 기원하며…

성탄 또는 성서에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성서 베드로전서 1장 24절(새번역에서)

설교자는 말씀하셨다. ‘어느 날 떨어지는 꽃잎처럼 삶은 유한할지언정 우리네 삶을 꽃이라 비유하신 사도들의 신앙고백은 얼마나 감사한가! 또 그런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신 신의 은총은 얼마나 큰가! 우리 모두 언젠가 확실히 떨어지고 말 꽃들이다, 다만 그 언젠가를 우리는 가늠할 수 없기에 불확실한 존재들이다. 모든 생각들을 접고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들 모두는 꽃이다. 오늘을 꽃처럼 살자!’

그리고 설교자는  ‘아름다운 꽃처럼 설다 간 사람’이라고 내 장모를 기렸다.

장모가 세상 뜬지 오늘로 딱 만 삼년, 델라웨어 한인 침례교회 이홍목사님을 비롯해 교회 공동체들이 장모 삼주기 추모 예배 자리를 마련해 주어 함께 했다. 그저 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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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후 아내와 아들 내외와 함께 장모 쉬시는 공원을 찾다. 장모 계시는 곳, 바로 앞 묘지 터엔 오래 전 예약해 놓은 내 부모와 우리 부부가 누울 자리가 있다. 장인은 장모와 합장이 예약되어 있고… 묘지 공원엔 성탄이 이미 함께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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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날 시간을 쪼개어 준 아들 내외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해 보낸 후, 일흔 세 해  함께 사시며 이젠 오락가락하는 정신 줄 같이 붙들고 씨름하시는 어머니, 아버지를 뵙다. ‘이젠 진짜 갈 때가 됬는데… 왜 이리 안 데려 가신다니…’ 어머니 푸념에 그저 웃으며 답하다. ‘아이고 오늘 얼굴 좋으시네!’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장인 누워 계신 양로시설에 들리다. 대낮에도 한밤 중이시던 양반이 잠시 깨어 묻는다. ‘김서방 나이가 몇 이야? 김서방도 나이 많지?’ 나는 또 웃으며 말했다. ‘에이 장인보단 한참 젊지요!’

양로시설 성탄 장식은 정물화(靜物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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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 휴일 낮잠을 즐기려던 계획은 수포가 되었다.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으므로. 낮잠 대신 동네 한바퀴를 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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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도 늦은 걸음으로 성탄이 오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 해를 보내고 마주 한 컴퓨터 모니터가 전해 준 세상 소식 가운데 하나. 비록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엇비슷한 생각으로 이즈음 삶의 결을 같이 하고 있는 벗의 모친상 소식.

하여 다시 손에 들어 보는 성서. 그리고 떠오른 안병무선생님의 말씀 하나.

<성서는 묻지 않으면 침묵한다. 그런데 어떻게 묻느냐 하는 것이 대답을 유도한다. 우리는 성서를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이에 대답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성서 대신 아집에 정좌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려면 계속 성서를 향해 물어야 한다. 그런데 물을 때에는 언제나 어떤 관심이나 전제를 갖고 묻는다. 관심이나 전제 없는 성서해석은 없다. 까닭은 성서를 읽을 마음이 나는 것은 그것에 관심이 갈 때 가능하며 그 관심은 성서가 이런 대답을 줄 수 있으리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관심이나 전제가 묻는 자의 삶과 최단 거리에 있으면 있는 만큼 그 물음이 진실하며 그것에서 얻는 대답은 우리를 살리는 것이 된다.>

오늘, 삶 또는 죽음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