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 – 기적 7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34 

“최근 일주일 사이 네 가정이 생활고와 병에 시달리다 세상을 버렸다. 이들은 행복했던 서민층 가정이었으나 병마와 실직으로 졸지에 ‘틈새 빈곤층’이 됐다. 그중 대부분은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이 아니어서 일반적인 정부 지원 대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은 최근 신설된 복지제도에 따라 긴급 지원을 받을 수 있었는데도 이를 배제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 2014년 3월 5일자 동아일보 인터넷판 사회면 

“추정소득 180만원 ‘송파 세 모녀’ 받을 수 있는 혜택은 없었다.” 

“정부는 국민들의 복지 체감을 높이겠다며 오는 10월부터 기초생활보장제도를 전면 개편하기로 했다. 최저생계비를 없애고 별도의 소득 기준으로 생계·주거·교육급여를 따로 지급하는 맞춤형 급여제도를 설계했다. 서울 송파구의 세 모녀가 살아있었다면 새 기초생활보장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을까. 제도가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 까다로운 조건들 탓에 여전히 사각지대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다.” – 2014년 3월 5일자 국민일보 인터넷판 사회면 

“그 때 어떤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들고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께 가까이 데려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가 계신 바로 위의 지붕을 벗겨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를 요에 눕힌 채 예수 앞에 달아 내려 보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사람이 어떻게 감히 이런 말을 하여 하느님을 모독하는가? 하느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중얼거렸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알아 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는 것과 ‘일어나 네 요를 걷어 가지고 걸어 가거라’ 하는 것과 어느 편이 더 쉽겠느냐?    이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 그리고 나서 중풍병자에게  “내가 말하는 대로 하여라. 일어나 요를 걷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중풍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곧 요를 걷어 가지고 나갔다. 그러자 모두들 몹시 놀라서 “이런 일은 정말 처음 보는 일이다”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 마가복음 2 : 3 – 12 

“예수 당시의 가난한 사람들이란, 그들이 처한 물질적, 도덕적, 사회정치적 상황에서 상류층의 사람들에 의해 경멸받고 벌받고 경원시 당하면서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사람들 모두를 말한다. 가령 하급 재정관리, 즉 강제로 로마 수비군에 협력했던 세리를 말한다. 그리고 그들의 물질적, 이데올로기적 수준으로인해 양심적으로 율법을 준수할 수 없는 나머지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 불리웠던 사람들 모두를 말한다. ‘죄인’이라는 말은 종교적으로 세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결과 공동의 도덕을 수립했던 자들이 그러한 사람들에게 붙여준 상표임이 분명하다.” – Georges Casalis의 가난한 자들의 복음에서 

1970년대 까지만해도 동아일보 이름값 좀 했었답니다. 한겨레신문 초대사장이신 청암(靑巖) 송건호(宋建鎬)선생도 동아일보 편집국장 출신이시지요. 

송선생님께서 동아일보를 그만 두시고 한국 현대사에 대한 연구에 정열을 쏟으시던 무렵에 하셨던 말씀이랍니다. 

“일제시대에 자란 나는 경성제국대학이 꿈이었다. 해방이 되서 서울대학으로 바뀐 경성제국대학 법대에 입학하였다. 언론에 관심이 있어 그 길로 들어섰고, 조선 동아 등의 기자생활을 하면서 사회 엘리트로서 당연히 누릴 수 있는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누리며 큰 고민없이 편집국장 자리까지 갔었다. 1975년 동아투위 사태이후 신문사를 그만 두고 한국 현대사를 다시 돌아보면서 내가 누려온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서울대를 다니고 사회 엘리트로써 승승장구 하며 살아오는 동안 내 동족들이 앓고 있던 터무니 없는 아픔을 외면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이다. 아니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그 동족의 아픔을 거름 삼아 내가 살아 온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송건호선생님이 일한던 곳, 동아일보의 오늘자 신문 기사를 보면서 “참 망가져도 더럽게 망가졌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모든 책임을 죽은 이에게 돌리는 뻔뻔스런 모습은 비단 동아일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닐겝니다. 

삶의 모든 궁극의 목표나 가치 판단의 사회적 기준이 “돈”이 된 일은 박정희시대의 “잘 살아 보세” 깃발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물론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습니다. 다만 “더불어 함께 잘살아 보는” 고민과  과정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잠시 그런 과정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이른바 민주정부 10년이 바로 그런 시대였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가 옳고 그름도 문제도 아닙니다. 역사의 발전과정은 분명 “사회 공동체가 더불어 함께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향해 전진해 왔고 앞으로도 그 방향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어떤 공동체에서는 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핏값을 치루기도 합니다. 또 어떤 민족은 이미 조상들이 치룬 피값과 오랜 경험을 토대로 토론과 흥정을 통해 그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솔직히 우리 민족은  이런 “더불어 함께 사람답게 사는 세상”에 대한 고민의 역사가 짧습니다. 이런 문제로 피흘려 본 경험도 일천합니다. (사실 이 부분을 이야기하자면 깁니다. 그래 이런 이야기를 제 나이에 맞게 옛날 화롯가에서 이야기해 주시던 할아버지 흉내내며 해 보고 싶은 마음으로 “예수쟁이, 예수로 세상보기”라는 팟캐스트를 시작했는데… 이런 저런 일들로 이즈음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답니다.) 

아무튼 “돈” 뿐만 아니라 “실리”, “권력” 등을 손에 쥐는 것만이 “승리”하는 것이라는 이즈음 잘 쓰는 “공학적” 사고들을 성서적 관점, 예수의 기적행위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지탄받아 마땅한 것들입니다. 

이런 모습들은 이즈음 한국의 정치세력이나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 또는 사회의 아젠다를 만들고 이끄는 언론과 경제주체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일겝니다. 

그래 아파야합니다. 이 세대를 한글을 사용하며 사는 모든 사람들이 말입니다. 특히 성서를 읽고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민하고 아파해야만 합니다. 그게 기독교인의 바른 길입니다. 

신문기사

 

이제 성서로 돌아갑니다. 

예수가 기적을 통해 고쳐준 사람들이 앓고 있던 병이란 당시 사람들에게는 병일 뿐만 아니라 죄였습니다. 

뭐 멀리 갈 것 없습니다. 이즈음은 그런대로 많이 좋아져서 장애우니 장애인이니 하는 말을 쓰지만 제가 어릴 때만 하여도 “병신”이라는 말로 아픈 사람들을 욕보이게 부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예수시대에는 병(문둥병, 맹인, 농아, 앉은뱅이, 광인 등등)은 곧 사회에서 격리되어야먄 하는 죄인이었습니다. 문제는 누가 이런 병에 걸렸느냐는 것입니다. 과중한 세금, 불공평한 나눔은 가난한 이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며 영양실조에서부터 각종 질병 나아가 불구자가 되는 곳으로 밀고 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정치적 또는 종교적 지배계층들은 과중한 세금이나 불공평한 나눔 같은 사회적 문제를 고민하거나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아픈 이들을 향해 죄인이라는  팻말을  걸게하고는 그들을 희생삼아 자기 뱃속을 채웠던 것입니다. 

마치 2014년 오늘날 동아일보와 그 세력처럼 말입니다. 

예수의 치유기적은 바로 “아니다! 지금 아픈 너희는 단연코  죄인이 아니다!”라는 선언이었습니다.“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는 이웃들을 죄인으로 만드는 사회는 반성서적인 사회입니다. 그 사회에서 입다물고 있는 교회는 예수와는 아무 상관없는 헛것입니다. 

유언비어– 전야(前夜) 5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7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마가복음 4 : 21 – 25, 개역개정본에서 

‘강남’이라는 말이 세계 여러나라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게 다가가게 된 까닭은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라는 노래 덕이고, 그  배경에는 구글과 유튜브라는 현대판 통신수단이 있습니다. 십여년 전만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강남의 일부인 잠실을 제가 어릴 적에 어떻게 갔는지 알려 드릴까요.  제 어머님의 외가가 당시 잠실이었답니다. 제가 살던 신촌에서 잠실을 가려면 우선 신촌에서 버스를 탑니다. 지금의 신촌노타리가 당시 버스의 종점이었습니다. 동대문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그 곳에서 전동차를 갈아 탓습니다. 전동차로 광나루까지 가서 나룻배로 갈아 탓습니다. 나룻배로 한강을 건너고 모래사장을 걸어 올라가면 논밭이 이어졌답니다. 그리곤 어머니의 외갓댁 잠실에 가 닿을 수 있었답니다. 꼬박 하루길이었습니다. 언젠 적 이야기냐고요?  1960년대 초였답니다. 

느낌은 옛날 고려적 이야기지만 고작 50여년 전의 일이지요. 

자!  이즈음의 시간 차이는 빠르게 변하지만  옛날 정말 고려적에는 그런 빠른 변화가 있었을까요? 칠백 여년전 고려 말이나 천이 백여년 전 고려 초나 아마 생활의 변화 속도란 이즈음 십년에 미치지 못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하물며 이천 여년 전에는 어땠을까요. 

이런 저런 역사적인 사건들이 이어지지만 실제 보통 사람들의 삶의 변화란 백년 전이나 백년 후나 크게 변한 것들이 없었던 시절이었을겝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삶이 급변하는 어떤 계기들이 있게 마련이랍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보면 제가 중학교 들어가던 해인 1965년에 개통한 제2한강교를 들수 있겠습니다.  이 다리를 놓는데에 약  2년 6개월이 걸렸다면 이즈음 사람들은 “정말이래?” 할 수도 있겠는데 정말 그만큼 걸렸거니와  당시 신촌사람들에게는 정말 신촌(新村)이  새 마을이 되는 새로운 역사의 계기였답니다. 신촌이 더 이상 버스 종점이 아니라 시내 중심가가  되기 시작한 때랍니다. 

다시 이천년 전 팔레스타인으로 넘어갑니다. 

팔레스타인에 살던 다시 유대인들의 삶이 급격한 변화를 격게되는 시초는 헤롯1세가 왕위에 오른 때로부터 로마의 총독시대가 이루어지던 무렵이었습니다.  이로부터 약 70여년에 이르는 동안 그 땅에서는 무수한 반란과 도적(이 도적을 의적 또는  혁명가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들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자칭 메시야라고 하면서 사회 혁명을 꿈꾸거나 사람들을 규합하여 테러를 일삼거나 하는 무리들이 넘쳐나던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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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알렉산더대왕이 “당신의 소원을 말해보시요. 내가 다 들어 드리겠오.”라는 말에 거적깔고 드러누운 노숙자인 주제에 “좀 비켜 주시겠오, 햇볕 가리지 말고….”라고 대답했다는 전설적 이야기의 주인공인 디오게네스로 유명한  견유철학자(犬儒哲學者)들도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많았답니다. 

견유철학들자들의  삶의 태도를 잘 나타내는 유명한 말이 있답니다. 

“나는 내가 배고프지 않을 만큼, 목마르지 않을 만큼 가졌다. 벗지 않을 만큼 입었다. 밖에 있을 때는 저 부자 칼리아스보다도 더 떨지 않고 안락하다. 안에 있을 때는 따듯한데 왜 옷이 필요한가?”  견유철학자(犬儒哲學者)의 시조인 안티스테네스의 말입니다. 

빈정거리며 사회와 등을 지거나 저항하거나 하는 무리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유대는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젖과 꿀이 흐르는 기후는 아니랍니다. 특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쪽 유대 지방은 그리 농사에 적합한 땅은 아니었답니다. 그에 반해 갈릴리 호수 주변의 땅들은 농사에 적합했다고 합니다. 그 지역의 농산물들이 유대의 젖줄이 되었던 셈이지요. 

그런데 로마시대 농사를 짓는 농민들의 수입은 수확물의 반도 가져가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이마저도 자기 농토를 가진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만큼 각종 세금으로 이들에게 뺏어가는 것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농토의 많은 부분들은 예루살렘 중심의 권력자들의소유였고 농지는 대부분 소작농들이 경작을 하는 현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를 살던 소작농들을 더욱 어렵게 했던 것은 당시 부자들이 즐겨 사용한 매점 매석행위였다고 합니다.  농사가 잘 된 해에 마구 거두어 들여 창고에 쌓아 놓았다가 흉년이 들 때 엄청 높은 값에 파는 일들이었는데  당시 기록에 보면 16배 정도의 이득을 남기기도 하였답니다. 

당시 떠돌던 유언비어에는 이런 것들이 있답니다. 

“어떤 랍비의 일년 수확은 예루살렘 시민이 십년  동안 먹을 정도이었다.”, “마을 천개와 배 천 척을 가진 부자들도 있었다.”, “성전에 바치는 십일조가 송아지 만 삼천마리인 부자가 있었다.” (안병무가 쓴 갈릴래아의 예수에서) 등등이랍니다.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더 가질 것이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마가 4 : 25)라는 성서의 말이 그대로 적용되는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로마에게는 인두세 및 각종 간접세들을 내야하고 유대 종교 자치기관에게는 성전세(이 세금은 빈부의 차이없이 유대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냈답니다.) 와  십일조세(당시만 하여도 정확히 지켜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를 내야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점점 살기가 팍팍해 갔답니다. 

그렇게 하루살이조차 힘들어진 사람들에게 수많은 “하라”와 “말라”라는 율법들은 애초 지키기 힘든 굴레였을 뿐입니다. 

먹고 살기도 힘든 판국에 종교적, 전통적, 관습적 죄인이 되어 사는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