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시작은 삶의 처절함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가족의 피에 펜을 찍어 써내려 가는…그러나 꾹 참고 써야했습니다. – 7쪽, 기막히고 황당했다. – 22쪽, (그들은)야비했다. -81쪽>
글은 벼랑 끝에 선 절박함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을 이어 전한다.
<서둘러야 했다. 집중해야 했다. …버텨야 했다. 237쪽>
글 곳곳에는 곤고한 삶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 같은 고백이 이어진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 101쪽, 고마웠다. 239쪽, 가슴 찡하게 감사했다. 278쪽>
그리고 글 말미에 적힌 주인공의 다짐이다.
<‘불씨’ 하나만 남아 있으면 족하다. 이 불씨 하나를 꺼뜨리지 않고 소중히 간직하며 주어진 삶을 살 것이다. 280쪽>
그렇게 책 <조국의 시간>을 덮었다.
책을 읽는 내내 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던 장면, 바로 ‘십자가 밑에서 침 흘리는 개떼들’이었다.
<형벌의 수단으로써 십자가는 고대에 널리 퍼져 있었다. … 그것은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형벌이었으며 또 그런 목적으로 유지되었다….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무엇보다도 … 특히 유대의 불순분자들에게 과해졌다. 그것을 사용한 주된 이유는 소위 그것이 가지고 있는 억제력으로서의 탁월한 효과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십자가들에 달린 희생자들이 야수들과 새들의 먹이로 제공된다는 것은 일반화된 상황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십자가에 달린 이)의 수치는 완전한 것으로 만들어졌다.> – 마틴 헹엘(Martin Hegel) 이 쓴 <고대 십자가 처형과 십자가 메시지의 오류Crucifixion in the Ancient World and the Folly of the Message of the Cross>에서
<로마의 극형 세 가지는 십자가와 화형과 야수였다. 이것들을 최악의 것이 되게 한 것은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비인간적인 잔인성이나 공개적인 명예 실추 때문이 아니라, 이런 처형의 마지막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아 매장할 수 없게 된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십자가형에 대하여 우리가 흔히 잊어버리는 것은 이미 죽은 자나 죽어 가는 자들의 위에서 울어 대고 밑에서 짖어 대는, 썩은 고기를 먹는 까마귀와 개의 존재이다.> –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이 쓴 예수 사회적 혁명가의 전기(Jesus A Revolutionary Biography) 에서
나는 글의 주인공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남길 ‘불씨’ 하나 품지 못하는 삶을 살아왔다.
다만 십자가 밑에서 침 흘리는 개떼들 같은 삶을 살지는 말아야 할 터이다. 비록 내 초라한 일상 속에서만이라도.
*** 책 <조국의 시간> 마지막 표지에 실린 도서출판 한길사 광고에 ‘한나 아렌트’의 명저들이 실린 발상에 탄성이…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삶은 쉽게 십자가 밑의 개떼들로 변할 수 있다는 아렌트의 가르침과 이어져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