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단상(斷想) 1 – 애국자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8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8.15 단상(斷想) 1 – 애국자

일제 강점기 때, 특히 태평양전쟁 당시엔 일제의 억압을 당할대로 당했고 굶주릴대로 굶주리면서 살아온 조선사람들이 8,15와 함께 그러한 굴욕(屈辱)의 멍에를 벗어나게 되었다. 어떤 형태로던지 일본에 협력하지 않고는 살아남기 어려웠고, 쇠사슬에 묶겨있던 것과 같은 상태였었는데, 그러한 것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람들이 된 것이다.

한데, 그 ‘자유’라는 말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눈앞에 닥쳐온 천지개벽(天地開闢)과도 같은 큰 변화의 앞뒤를 살펴볼만한 겨를도 없이 사회는 무질서하고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한 혼란과 무질서는 전쟁 때문에 억압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한국 사람들의 의식(衣食)생활에 바로 나타나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 전쟁이 끝난 다음 그 땅 곳곳에는 새로운 풍조(風潮)가 생긴 것인데, <우선 닥치는 대로 먹고 마시자는 사람들이 많았다.>  라는 사실이다.

일본이 그 전쟁에서 패전국이 되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생활 필수품은 배급제로 되어 있었다. 식생활에 관한 것만 아니고, 몸에 걸치는 옷도 마음대로 사서 입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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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자유, 생각하는 자유, 눈으로 보는 자유도 제한되었고, 심한 구속을 당하면서 지냈다. 그러한 생활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방심(放心) 상태에 빠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8.15 해방이 된 다음, 그렇게도 보기 힘들고 귀하던 물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디서 쏟아져 나왔는지 고무신, 양은그릇, 광목, 쌀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많은 물자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하여간 굶주렸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혼란과 무질서 중에 쏟어져 나온 물자는 어느새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식량난을 겪게 되었다. 그러할 때에 한동안 식량을 배급한 적도 있었다.

한편, 해방이 된 다음 그 땅엔 애국자들이 많이 나타났다.

어떤 형태로던지 일본에 협력하지 않고서는 살아남기 어려웠던 때에 그렇게 많은 애국자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일제가 시키는대로 일본을 위해 살아온 것을 <애국한 것이다.>라는 뜻으로 한 말인지는 모르나, 하여간 애국자 홍수(洪水)가 났다. 일본에 아첨하고 그들에게 빌붙어 살며, 별로 배곱프지 않게 지냈던  사람들도 “내가 바로 애국자였노라.”라고 하면서 거들먹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과는 반대로,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일제에 대항 하여 항일운동(抗日運動)을 하면서 목숨을 잃는 등, 몸 바쳐 애쓰며 살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 당시의 국내외(國內外)의 상황에 따라 여러 갈래의 항일운동을 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한가지만 적는다. 그러한 애국지사(愛國志士)들 중엔 ‘광복군(光復軍)’도 있었다.

광복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고, 공식 명칭은 한국광복군이다.

1940년에 중국 충칭(重慶)에서 창설된 광복군의 초대 총사령관은 지청천(池靑天, 1888-1957)이고, 참모장은 이범석(李範奭, 1900-1972)이다.

다음에 적는 글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실린 광복군에 관한 것을 설명한 내용 중에서 한 부분을 뽑은 것이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군사위원회(軍事委員會) 를 설치하고 광복군 창설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일본군의 점령 지역이 중국 대륙으로 확대되면서, 임시정부는 여러 곳으로 피난처를 옮겨다니는 상황에서 여의치 않았다. 비로소 1940년 9월 17일 중국의 임시 수도였던 충칭에 정착하면 서 광복군 총사령부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광복군 선언문을 발표하여 “광복군은 한국과 중국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광복군 창설을 천명하였다.

태평양전쟁 때엔 위에 적은 것과 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인 광복군도 있었다.

광복군엔 일본군 학도병(學徒兵)으로 중국에 파병되었다가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광복군이 된 사람도 있었는데, 장준하(張俊河)도 그러한 사람 이다.

그렇지만, 8.15와 함께 광복군이 환국(還國)하여 그 땅에 있던 일본군을 몰아서 밖으로 쫓아버린 것이 아니고,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들의 힘에 의해 <8.15 광복>이 이뤄진 것이었다.

어찌 되었건 삼팔선 이남 땅에 미군들이 들어왔고 세상이 바뀌었다.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을 비롯해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에게 생소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러한 것 중에서 몇가지를 골라 요약해보기로 한다. – 다음 이야기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