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 소리

한낮에 내 일터는 여전히 눅눅한 더위와 겨루는 싸움터이지만 일터로 향하는 이른 아침 바람엔 이미 마른 찬기가 담겨있다.

이 나이에도 아직 급한 성정을 버리지 못하고 저녁 나절 매미 소리 가득한 내 뜨락에서 가을맞이를 궁리한다.

장자(莊子) 왈 부지춘추(不知春秋)라 했다던가.

하루살이가 한 달을 알지 못하고, 여름 한 철 울다 가는 매미가 일년을 어찌 알겠느냐는 가르침이라지만, 매미가 땅속에서 오랜 시간 짧은 생명을 위해 버텨낸 시간에 대해선 장주(莊周)선생은 알지 못했을지니.

하루살이는 하루살이, 매미는 매미 답게 제 삶을 사는 것이고.

내 생각속에서 꿈꾸고 즐길 수 있는 시간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길고 큰 것이니, 그를 즐기는 짧은 여름 날 저녁 한 때에 대한 감사함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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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餘裕)

모처럼 맞은 연휴, 습관으로 이른 아침에 일어나 서성이다가 창문을 여니 새소리와 풍경소리, 후두둑 떨어지는 비소리로 집안에 여유가 가득찬다.

무릇 신앙이란 치열해야 마땅한 일이지만 그 역시 삶의 한 부분일 뿐이니, 때론 소소한 감사에 취해도 족하다. 아침 뉴스 속 세상사가 온통 옳고 그름의 싸움처럼 다루어지지만, 사람살이가 매양 그렇게 치열한 것만은 아니다.

오늘 아침 내가 누리는 이 여유는 아마 엊저녁에 함께 시간을 보낸 벗들에게서 비롯 되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삶에서 누리는 소소한 감사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 이야기 속에서 신을 확인하고 고백했다. 한 주간 부딪혔던 일상의 치열함은 각자의 몫일 뿐, 서로가 털어놓은 아주 작은 감사에 모두가 여유로웠다.

그 여유로 우리는 이웃 마을 필라델피아로 진출하여 식도락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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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에 개업해 4대 째, 거의 백 년에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deli sandwich 식당의 sandwich 크기는 어마무시해서 허리띠를 풀고 즐겨야만 했다. 음식 뿐만 아니라 주인이나 종원업, 인테리어 까지 지나온 세월만큼 여유로웠다.

느긋한 포만을 즐기며 가는 비 내리는 도시의 밤거리를 걷는 재미를 누려본 적이 언제였던지 가물거렸다.

엊저녁 포만이 이어져 여유로운 아침에 장자 한편을 읽다.

무릇 눈과 귀를 밖이 아닌 안으로 통하게 하고 마음의 작용을 안이 아닌 밖으로 쏠리게 하면 귀신마저도 머무는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는 두말 할 나위도 없지 않은가!

夫徇耳目內通(부순이목내통) 而外於心知(이외어심지) 鬼神將來舍(귀신장래사) 而況人乎(이황인호)

 

봄눈(春雪)에 춘정(春情)을…

봄눈이 사방을 덮은 날, 장자를 읽다. 장자(莊子) 외편(外編) – 추수편(秋水篇)에 있는 이른바 호량지변(濠梁之辯) 이야기.

어느 날 장자와 혜시가 호(濠)라는 강의 다리 위에서 물고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장자가 말했다.  “피라미가 물에서 자연스럽게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데, 저것이 피라미의 즐거움이라네” 그러자 혜자가 말했다.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장자가 대답했다. “자네 또한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지 안단 말인가?” 혜자가 말했다. “나는 자네가 아니니까, 물론 자네의 마음을 모르지. 하지만 마찬가지로 자네도 물고기는 아니니까, 자네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도, 확실하지 않은가”

그러자 장자가 말했다. “그럼 처음부터 차례대로 알아보세. 자네가 방금 내게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겠는가’라고 물었네. 지금 그 물음에 대답하지. 자네는 내가 이미 알고 있음을 알고서 나에게 물었던 것일세. 그렇다면 물고기가 아닌 내가 물고기의 마음을 알았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지. 나는 다리 위에서 물고기의 마음을 알았던 것일세”

이 이야기에 대한 자오스린의 해석이다.(자오수린저 허유영번역, 사람답게 산다는 것에서)

논리상으로 보면 이 변론의 승자는 혜시다. 장자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단 말인가? 라는 혜시의 논리적인 질문을 회피했다. 불교에서는 “물이 차가운지 뜨거운지는 마셔 본 사람만  알 수 있다”고 했다. 감정이란 온전히 개인적인 것이며 남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감정이란 온전히 개인적인 것이며 남은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사람도 그런데 하물며 물고기는 어떻겠는가?

그러나 미학적으로보면 장자가 이겼다. 장자는 자신이 느끼는 자유로움과 즐거움을  꼬리를 흔들며 헤엄치는 물고기에게 투사시켜 물고기가 즐거울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했다.

시인 신기질(辛棄疾; 1140년- 1207년, 중국 남송의 시인)은 “내가 청산을 보며 매우 아름답다고 여기니 청산도 나를 보면 똑같이 느끼겠지”라고 했다. 장자는 큰 덕을 가슴에 품고 세상 만물에게  봄처럼 따뜻한 정을 느꼈다. 그에게는 천지간이 모두 따뜻한 우주였다.

봄눈(春雪)에 춘정(春情)을 느끼던 날에.

莊子與惠子遊於濠梁之上(장자여혜자유어호량지상) 莊子曰(장자왈) 儵魚出遊從容(숙어출유종용) 是魚之樂也(시어지락야) 惠子曰(혜자왈) 子非魚(자비어) 安知魚之樂(안지어지락) 莊子曰(장자왈) 子非我(자비아) 安知我不知魚之樂(안지아부지어지락) 惠子曰(혜자왈) 我非子(아비자) 固不知子矣(고부지자의) 子固非魚也(자고비어야) 子之不知魚之樂(자지부지어지락) 全矣(전의) 莊子曰(장자왈) 請循其本(청순기본) 子曰(자왈) 汝安知魚樂(여안지어락) 云者(운자) 旣已知吾知之而問我(기이지오지지이문아) 我知之濠上也(아지지호상야)

원추(鵷鶵)와 올빼미

장자(莊子) 외편(外編)인 추수편(秋水篇) 열 네번 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혜자(혜시惠施)가 양나라 재상으로 있을 때, 장자가 그를 만나고자 했다. 그 때에 어떤 자가 혜자에게 말했다.

“장자가 지금 오는 것은, 당신을 대신해서 재상이 되고자 함입니다”

이 말에 혜자는 두려워서, 장자를 찾으려고 나라 안을 사흘 밤낮으로 수색했다. 그러자 장자가 이를 알고 스스로 나타나서, 혜자에게 말했다.

“남쪽에 사는 원추(鵷鶵)라는 새가 있는데, 자네는 알고 있는가? 그 원추라는 새는, 남해를 출발하여 북해로 날아 가지만, 오동나무가 아니면 머무르지 않고, 귀한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단맛이 나는 샘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네.   그런데 썩은 쥐를 얻은 올빼미가 원추가 지나가자 제가 물고 있는 썩은 쥐를 빼앗으려는 줄 알고, 올려다 보면서 꽥 하고 호통을 쳤다네. 지금 자네는 양나라의 재상자리 때문에 나에게 꽥 하고 소리를 치겠다는 건가!”

혜시와 장자, 두 사람의 됨됨이와 크기 나아가 두 사람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의 차이를 잘 드러내고 있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아마 장자는 그 자리를 뜨면서 호탕한 웃음 한자락 날렸을 것입니다.

또한 장자(莊子) 내편(內編)인 제물론편(齊物論篇) 아홉번 째 이야기에서 장자는 “方生方死(방생방사) 方死方生(방사방생)”이라는 말로 모든 삶과 사물에는 서로 상대성을 지닌다고 설파합니다.

“方生方死(방생방사) 方死方生(방사방생)” – 곧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면 삶이 있다는 말입니다.

삶의 참 뜻을 먼저 깨우친 옛 선생이 후대에게 남겨 놓은 말씀들입니다.

여러 해 전에 마지막 길을 떠나시기 전에 이런 말을 남기고 간 이가 있습니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삶의 참 뜻을 고뇌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겐 아주 낯선 말 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 이가 비록 원추는 아닐지라도 썩은 쥐로 배를 채우는 삶은 결코 살지 않았음을 증명해주는마지막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엊저녁에 정말 깜도 안되는 놈, 그야말로 제 배때기 하나 채울 욕심만으로 썩은 쥐새끼 입에 물고 정치 사기꾼질에 여념없는 천하의 못된 박쥐같은 잡놈이 원추를 보고 짖었다는 뉴스를 보다가 떠올린 장자 이야기 한편입니다.

젊게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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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ortality”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아마 영어권 사람들에게도 낯선 말일겝니다. 몇 년 전만해도 이런 말을 쓰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게 널리 퍼진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009년에 타임즈의Catherine Mayer기자가 만들어 낸 말인데죽을 때까지 나이를 잊고 살아가는 현상을일컫는 뜻이랍니다.

 

세상이 이미 나이를 잊고 사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의학과 과학기술에 힘입어 장수시대가 열렸고, 나이의 경계없이 하려고만 하면 나이를 이겨내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자 trendwatching의 커버스토리에도 다룬 “Virgin Consumers”  곧 새 것을 바라고 소비하는 소비문화에도 나이는 이미 경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이아그라’로 대변되는 노인 성해방의 역사도 이런 흐름을 만든 요인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이렇게 나이를 잊고 살게 된 세대들이 출현하므로 인해 전통적인 결혼, 가족, 사랑, 종교, 소비 등등의 개념들이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Catherine Mayer는 <어모털리티는 우리의 삶을 저 깊숙한 곳까지 바꿔놓고 있다. 일, 여가, 가족, 사랑, 젊은 나이와 늙은 나이,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들에 접근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라고 주장합니다.

 

amortality현상에 동조하는 옥스포드 대학교 ‘인류 미래 연구소 (Future of Humanity Institute)’ 은 “중요한 것은 태어난지 몇년이 흘렀느냐가 아니라, 생의 어디에 위치해 있으며,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무엇을 할 수 있으며, 하고자 하느냐 하는 것이다.( The important thing is not how many years have passed since you were born, but where you are in your life, how you think about yourself and what you are able and willing to do.)라고 말합니다.

 

죽음까지 두려워하지 않는 나이를 뛰어넘는 세상이 되었고 그것은 바로 당신의 생각에 달려 있다는 주장까지 합니다.

 

자! 이제 나이 6,70에 노인티 낼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amortality라는 신조어도 만들어 설명하며 세상이 엄청 바뀐듯한 글들과 주장을 들으며 든 제 머리속 생각이랍니다.

 

쯔쯔쯔, 서양인들의 사고의한계라니… 이미 이천 수백년 전에 장자(莊子) 선생이 이리 말씀하신 것을 알기나 하고들 하는 말들인지….

뭐 그런 생각이 들더란 말씀입지요.

zhuangzi 

장자(莊子) 내편(內篇)  제물론(齊物論)에 이런 말이 있답니다.

“망년망의진어무경(忘年忘義振於無竟)”  나이와 옳고 (그름)을 잊고 무한한 경지로 뻗어 나간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바로 무위의 경지로 나아가면 그리된다는말입니다. 무위의 경지란 바로 제 맘에서 시작되는 것이고요.

 

나이란 바로 제 마음 속에 있다는 생각으로 살면 뭐 한번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나이를 넘어 젊게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