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일기

장모 기일을 기리며,  당신 자손 모두가 함께 얼굴 마주할 시간을 갖게 된 것은 이즈음 비대면 세태 덕(?)이라 할 수 있을 터이니 삶의 역설이다. 그렇게 서울 사는 두 처남네 식구들과 필라 아들 내외와 모처럼 집에 온 딸애와 우리 내외 모두 함께하는 시간을 누렸다. 장모 떠나신 지 사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마침 아내의 생일 직전이기도 하여 두루 감사였다. 비록 그것이 온라인 모임일지언정.

조촐한 가정 예배를 드리며 단지 나이가 가장 많다는 까닭으로 하여 몇 마디 말을 가족들과 함께 나누었다.

장모 사주기91

자!  이렇게라도 얼굴들 볼 수 있으니 우리 모두 감사한 오늘이야! 세월이 빠르다는 소리는 너무 많이 들어서 진부하지만 어찌 보면 늘 새로워.

2020년이라는 시간은 어쩌면 인류사에 있어 아주 독특하게 남을 한해가 될 것 같아. 나는 물론이거니와 오늘 함께 한 모두가 처음 겪어보는 시간들이었지. 이제껏 전 세계인들이 함께 두려워 했던 것이 전쟁이었다면 올 한해는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그걸 뛰어넘는 새로운 경험을 해본 것일게야.

자! 이쯤 우리들의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구.

내가 지금 보여주는 몇 장의 사진들은 우리들의 어머니이자 할머니인 최용옥 할머니가 남겨놓은 일기장이야.

찬찬히 보라구. 매일 매일 일기의 글은 매우 짧아. 그런데 매일 매일의 일기에 똑 같이 반복되는 문장이 하나 있어. 자! 찾아 보자구.

맞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바로 그 말이야.

내가 가지고 있는 할머니의 일기장은 처음 할머니가 암이라는 판정을 받은 후부터 돌아가시기 몇 달 전 펜을 들어 글을 쓸 수 있을 때까지의 하루 하루 아주 짧은 생각들이 담겨 있어.

할머니의 마지막 몇 년 동안 기록에는 몇 가지 일관된 이야기들이 있어.

첫째는 이미 말했듯 감사야. 하나님에 대한 감사인데 나는 그걸 시간에 대한,  삶에 대한 감사로 읽고 있어. 할머니에 대한 감사를 어떻게 읽고 해석하든 모두 너희들 몫이겠지.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 읽고 쓰고 말하고 숨쉬는 순간이 그저 감사라는 할머니의 생각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지.

둘째는 할머니의 일기에는 그 누구에 대한 원망이나 누구의 흉도 없어. 얼핏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결코 이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오늘 함께 한 우리 모두에게 최용옥 할머니가 남겨주신 큰 교훈이라는 생각이지. 살며 누구에게 대한 원망도 품지 말고 흉보지 않고 사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할머니 흉내라도 내고 살면 좋겠어.

세째는, 두번 째에서 내가 누구에 대한 원망이나 흉 없다고 했지만 딱 한 사람 예외가 있었어. 때때로 흉도 보고 원망도 한 딱 한 사람. 바로 남편인 이영제 할아버지였어. 이건 아주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태도였다고 나는 생각해. 살며 흉보고 원망하는 사람 하나 없다면 뭔 살 맛이 있겠어. 부부란 그런 것 아닐까? 원망과 흉을 품을지라도  함께 살 수 있는 유일한 관계가 바로 부부라는 생각 말이지. 물론 이즈음 세상은 많이 바뀌었지만 난 부부사이에 대해 최용옥 할머니가 느끼고 남긴 말에 많이 동감하는 편이야.

어때 이쯤, 최용옥 할머니가 우리에게 남겨 준 유산이 뭔지 생각해 보자구.

감사와 사랑 가족. 나는 그렇게 정리해 보구 싶어. 매우 성서적이지.

최용옥 할머니는 그렇게 살았고 우리더러 그렇게 살라하는게 아닐까?

자! 우리 모두 최용옥 할머니에게 감사하자구.

–            장모 4주기에


 

Well! It is a grateful day today, as we can see each other like this. Though the expression, “Time flies!” is a cliché as we’ve heard so many times, it always seems new in some way.

Perhaps, the year 2020 will be remembered as a very unique year in human history. All of you, as well as I, have never experienced a year like this. If what human beings fear most thus far has been a war, all the people in the world may have been experiencing something even more fearful this year.

Now, let’s talk about your grandmother.

These pictures which I’m showing you now are those of the diary which Mrs. Choi Yong-ok, our mother and your grandmother, left.

Look at them slowly and carefully. What she wrote each day was short. But, one sentence appeared repeatedly every day. Well, let’s find it.

Right! “Lord, thank you.” That’s exactly it.

Grandmother’s diary, which I keep, held very short thoughts of hers each day from the time when she had been diagnosed with cancer to the day when she could not have held a pen any more, just a few months before she passed away.

What Grandmother wrote during her last some years showed some consistent and prominent features.

The first was gratitude, as I said before. Though it was gratitude to God, I’d like to read it as gratitude for time and for life. Of course, it is up to you how her gratitude may be read and interpreted. However, I hope that you won’t forget Grandmother’s thought that every moment, whether reading, writing, speaking or breathing, is to be grateful for, no matter how you read and understand.

The second was that Grandmother had never written resentment at anyone or found fault with anybody. It could be passed easily as nothing unusual without notice. But it is not really so easy to do so. I think that it is a very precious lesson which Grandmother, Choi Yong-ok, left to all of us gathered together today. I know that living without holding resentment at and finding fault with anybody is not easy. But I hope that I will be able to imitate her, if not living like her.

Though I said earlier that Grandmother had never revealed any resentment or someone’s faults in her diary, there was only one exception. Who she resented from time to time was her husband and your grandfather, Lee Young-je. In my opinion, it was quite natural and commonsensical. How can a human being live, if he/she has no one to resent at or to find fault with? Isn’t the relationship of husband and wife like that? Yes, the world has changed a lot. But I empathize a lot with what Grandmother, Choi, Yong-ok had felt and left about the relationship of husband and wife.

Now, how about thinking about the legacy which Grandmother Choi, Yong-ok has left us?

Gratitude, love and family. I like to summarize it like that. It appears very biblical.

Grandmother, Choi, Yong-ok lived her life like that and she wanted us to live our lives like that, too. Don’t you think so?

Well! Let’s thank Grandmother Choi, Yong-ok together.

– The Fourth Anniversary to remember the late Mother-in-law

일기에

‘아파요?’ 늦잠에서 깨어 일어난 내게 아내가 물었다. 이젠 몸이 맘을 쫓아가긴 틀린 모양이다. 장기요양원으로 옮기시기로 결정하고 장인의 아파트를 정리하면서 아내는 사람을 부르라고 했었다. 노인네 짐이 뭐가 그리 많을까 싶기도 했고, 들기 버거운 가구나 물건들은 모두 청소하는 이들의 몫으로 남기고, 이제 장인에게 꼭 필요한 물건들만 챙겨 옮기는 일인데 번거롭게 사람을 부를 일은 아니라 우겼었다.

몇 시간 과외 노동에 늦잠을 요구하는 몸을 스스로 다독여 위로하며, 아침 일기를 쓰듯 손님들에게 편지를 띄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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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어 달 전에 넘어지신 후 수술을 받고 재활원으로 옮겼다가 다시 병원과 재활시설로 오가셨던 장인이 이젠 장기 요양원으로 옮기게 되었답니다.

어제 오후 장인이 사시던 아파트 방을 정리하면서 눈에 뜨인 노트 한 권이 있답니다. 장모의 일기장이었습니다. 2012년에 발견된 담낭암과 싸우셨던 장모는 2016년 12월에 돌아가셨는데 그 기간 동안에 쓰셨던 일기장이었습니다.

매일매일 아주 짧게 두 세 문장 정도로 그날의 일상들을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그날 그날 자신의 몸과 마음의 상태, 만난 사람들, 먹은 음식, 가족 이야기 등등 아주 자잘한 일상의 이야기들을 기록해 놓으셨는데, 그 일기의 형식이 매우 독특했답니다.

모든 일기는 대화체로 쓰여져 있었고, 매우 친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듯이 쓰여져 있었답니다. 그리고 모든 일기의 시작은 똑같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참 감사한 하루였답니다.’ 그렇게 시작한 일기는 그날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와 음식에 대한 감사로 이어졌습니다. 일기는 돌아가시기 한 달여 전 글씨가 삐뚤빼둘한 모습으로 바뀔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일기 속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밉다’라고 지칭한 유일한 사람이 있었답니다. 바로 장인이었습니다. 그 ‘밉다’라는 표현은 몹시 싫다는 뜻은 아니었고, 철없는 아이를 바라보는 애처로운 심사를 표현한 말이었습니다.

이즈음 장인은 그야말로 철없는 아이와 다름없답니다. 게다가 이따금 오락가락하셔서 엉뚱한 말씀을 일삼곤 하신답니다.

장모의 일기장을 훑어 보다가 제 머리 속에 든 생각 하나랍니다. 장모가 살아 계셔 오늘 일기를 쓴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오늘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참 감사한 하루였습니다.’라고 쓸 것이라고 말입니다.

지난간 시간들을 돌이켜 보며 감사한 마음이 들 때 삶은 언제나 살 만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답니다.

새로운 한 주간 감사함이 매일매일 넘쳐나는 하루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My father-in-law, who fell down about two months ago, underwent a surgical procedure, and then moved back and forth between a rehabilitation center and a hospital, is to move to a long-term care facility.

While I was cleaning up the apartment in which he had been living, I found a notebook. It was my mother-in-law’s diary. It was the record of her life and thoughts during the period from the time when cancer had been found on her gallbladder in 2012 to the time when she had fallen to it in December 2016.

She very briefly wrote about her day in a few sentences every day. While she recorded small stories about everyday life, such as the condition of her body and mind, people who she met, food, and family, her diary had a very unique style.

It was written in the conversational style, as if she had been having a nice chat with a very close friend. And all the beginnings were the same every day: “God, it was a really grateful day today, too.” Then, she continued with gratitude for the people who she had met and food that she had eaten on that day. The diary was written until her handwriting became wobbly, about a month before she passed away.

There was only one person who she said she “hated” in the diary. It was her husband, my father-in-law. Of course, she did not mean that she really hated him, but she expressed it as a wistful and distressful feeling for an immature child.

In these days, my father-in-law has been like an immature child. Furthermore, as his mind often wanders, he strikes false notes frequently.

While I was scanning through my mother-in-law’s diary, one thought came across my mind. It was that if she were alive to write her diary today, she would definitely write, “God, it was a really grateful day today, too.”

I think that life is always worth living, if we feel grateful when we look back on for the past time.

I wish that you’ll have days of overflowing gratitude every day this week and beyond.

From your cleaners.

아름다운 그림자

단언컨대 내 장모는 여전히 꽃이다. 오늘도 그녀를 그렇게 기억하는 이들이 있음으로.

델라웨어 한인 침례교회 이홍 목사님의 기억이 그러하였고, 그 기억에 고개 끄덕이는 공동체들로 하여 오늘 장모는 여전히 꽃이 되었다.

장모 돌아가신 지 두 해, 이홍목사님과 교회는 잊지 않고 이 주기 추도예배를 드렸다. 우리 부부는 목사님과 그 교회 식구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예배에 함께 했다.

사실 돌아가신 장모나 점점 기력이 쇠하여 지는 장인에게나 딸인 아내나 사위인 나보다 그 교회 식구들이 더욱 가까운 가족이어서 우린 그저 부끄럽고 미안해야 마땅하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가장 큰 까닭은 잊혀진다는 것 아닐까?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다웠던 여인, 미운 사람을 안고 살지 않았던 여인으로 기억하는, 그리고 그런 여인과 함께 했던 세월에 감사하는 이들이 있는 한, 내 장모는 여전히 꽃다운 삶이다.

살아 생전 장모가 유일하게 미워했던 사람이 장인이었다는 나와 동갑내기 이홍목사님의 지극히 인간적인 우스개에 이목사를 향한 내 존경은 더해졌다.

예배 후 찾은 장모 계신 곳. 내 어머니와 아버지, 장인, 아내와 나의 자리가 모두 예약되어 있는 곳을 두루 둘러보다.

단 한 사람만에게라도 꽃같은 삶으로 기억될 수 있는 삶이었으면…

오늘 하루의 삶에 감사를 느끼게 해 준 이홍목사님과 침례교회 식구들을 생각하며.

특별히 장모의 그림자를 아름답게 수놓아 주신 이목사님께 감사를.

12/ 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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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옷(Wings of Clothes)

( 이 시를 지난 35년여 내 삶의 일부였던 사랑하는 장모에게 드립니다)
 
날개

이민 삼십년에 이골이 난 내 다림질
그 솜씨로 장모 수의를 다린다.

먼저 버선을 다린다

땅과 하늘 사이 때론
어제와 오늘 사이를 헤매이던 마지막 시간에
장모는 엄마를 부르곤 했다
“엄마가 엄마를 찾으니까 내가 아파”
아내는 엄마를 부르는 장모를 말하며 눈가를 훔쳤다
분단은 남북만 가른 것이 아니었다
북쪽 가족들과 갈라져 남쪽에 홀로남은 장모 나이 고작 열 두살
애초 홀로는 아니었다
고향으로 가겠다며 국군에 입대한 스무살 오빠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을 뿐
그날 이후 장모는 엄마를 찾지 않았단다
마지막 시간속을 헤매던 장모는 버선발로 다가오는 엄마를 보았을 터

치마를 다린다.

치마는 장모의 자존이었다
열두살 이후 홀로된 외로움을 감싸는 갑옷이었다
열 여덟에 하나되어 육십갑자 세월을 함께 한 장인은 외아들
거기에 호랑이 같은 홀시어머니와 시누이 셋
엄마를 찾지 않았던 장모는 어느새 엄마가 되어갔다
딸 하나 아들 둘
누구랄 것 없이 모두 한수에 더해 끼 넘치는 가족이었지만
문제 없었다
장모의 치마는 모든 것을 감쌀만큼 폭이 넉넉했으므로
허나, 못내 치마 속에 감쌀 수 없는 외로움은 가슴에 숨겼을 터

이제 저고리를 다린다

언젠간 꼭 만나고 말리라
옷고름 매주고 옷깃 여며주던 엄마
장모의 꿈은 끝내 이루지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장모는 꿈을 바꾸었다
내가 엄마가 되리라고
일흔 여덟해의 마지막 한 달
장모는 그저 엄마였다
장인과 두 아들과 며느리들 딸과 사위에게
엄마를 가슴에 아프게 품지 말라고
행여
살아있는 너희들은
외로움과 그리움
그 암덩어리 안고 살지 말라고
장모는 저고리 섶에 우리들의 몫을 그렇게 저미고 갔을 터

마지막 두루마기를 다린다

평안북도 정주 아낙 최용옥
아무렴 한반도 믿음의 성지 정주 땅인데
장모는 평생 믿음의 두루마기를 걸치고 살았다

믿음 아니면 그 외로움 어찌 삭혔으랴
기도 아니면 그 긴 기다림 어찌 이어 왔으랴
찬송 아니면 그 먼 길 어찌 걸어 왔으랴

이제 내가 꿈을 꾼다
꿈이 기도가 된다
무릇 모든 기도는 이미 이루어진 것들 뿐

내가 다린 옷들은 장모의 날개가 된다
날아 날아 날아 훨훨
기다리던 엄마의 손을 잡았다

아! 이제
모녀는 하늘문을 들어섰다

이민 삼십년 도 닦듯 익힌 내 다림질
용 한번 썼다

Casket of D's dad. My lapel flower.

(I dedicate this poem to my beloved Mother-in-law who was a part of my life for 35 years.)
 
Wings of Clothes

My press, a tired routine of daily life as an immigrant for thirty years,
With the skill, I’m pressing Mother-in-law’s shroud.

First, I press beoseon1.

Between earth and heaven, sometimes
At the last moment, wandering between yesterday and today,
Mother-in-law called for mom.
“As Mom’s looking for her mom, it breaks my heart,”
Wife says, as she wipes tears from her face.
Division did not cut just the country into the South and the North.
Only twelve years old was Mother-in-law, when she became alone in the South, separated from her family in the North.
She was not alone from the start.
It’s because her twenty-year-old brother never returned after joining the army with the hope to go to their hometown.
Mother-in-law had not looked for her mom since then.
I believe that while wandering at the last moment, she must have seen her mom running to her with stockings on her feet.

I press a skirt.

Skirts were Mother-in-law’s pride.
They were the armor to cover her loneliness since she became alone at twelve.
The only son in the family was Father-in-law, with whom she was with for the sexagenary cycle from the age of eighteen.
Her tigerish mother-in-law and three sisters-in-law added to her life.
Mother-in-law, who had not looked for her mom, became a mom herself:
One daughter and two sons.
Though all of them were full of talents and fun,
There was no problem,
Because Mother-in-law’s skirts were wide enough to envelop everything and everyone.
However, her loneliness, which could not be enfolded under them, was hidden in her heart.

Now, I press a jeogori2.

Mother-in-law felt that she would never fail to see her mom again someday,
Who had tied her jeogori string and adjusted her clothes.
Mother-in-law’s lifelong dream was never realized.
At the last moment, she changed her dream,
For herself to become a mother.
In the last month of her seventy-eighth year,
Mother-in-law was simply a mother.
For Father-in-law, two sons and daughters-in-law, a daughter and a son-in-law,
Not to hold her in their hearts painfully,
By any chance,
For all of you, who are alive,
Not to live with that cancer of
Tormenting loneliness and yearning,
Mother-in-law must have left us with taking our shares in the gusset of her jeogori.

Last, I press a durumagi3.

Yong-ok Choi, a village woman of Jeongju, North Pyeongan Province,
Jeongju, certainly a shrine of faith in the Korean peninsula,
Mother-in-law had lived in the durumagi3 of faith all her life.

How could she have appeased such loneliness without faith?
How could she have kept enduring such an agonizingly long wait without prayers?
How could she have walked such a long way without hymns?
Now I’m dreaming.
Dreams become prayers.
In general, all prayers are for what has already been realized.

Clothes I have pressed become Mother-in-law’s wings.
Fly, fly, and fly freely.
She holds the hands of her mother who has been waiting for her.

Ah! Now,
Mother and Daughter enter through the gate of heaven.

My pressing skill which I have practiced as if cultivating myself spiritually during the thirty years of my immigrant life

1. beoseon: Korean traditional socks 

    2. jeogori: The upper garment of Korean traditional clothes for women

   3. durumagi: a traditional Korean outer coat

장모(丈母)에게도 기회를…

제 고모부, 처고모부, 장모 – 이 세분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답니다. 고향이 북쪽이고 한국전쟁 탓으로 남으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중 고모부님과 처고모부님은 모두 세상을 뜨셨답니다. 두 분 모두 북에서 가정을 꾸리시다가 남으로 내려와 새가정을 꾸려 사시다 가셨답니다. 한분은 그 언젠가 북의 가족들을 만날 세월을 낚노라고 낚시에 말씀을 묻고 사시다, 다른 한분은 도수에 상관없이 소주잔 한잔이면 나오는 웃음에 세월을 얹혀 날리시다 가셔, 이젠 뵐 수 없답니다.

그래도 두분에게는 함께 남으로 내려온 혈육이 있었거나, 이북 오도민(五道民) 향우회에서 만난 고향분들이 함께 했던 삶이었지요.

아직 팔순이 안된 제 장모는 그야말로 남으로 내려온 홀로랍니다. 이북 오도민 향우회에 홀로 얼굴 내밀기도 뻘줌한 나이랍니다.

십대 어린 나이에 오빠하고 단 둘이 내려왔던 남쪽살이였답니다. 전쟁통에 고향에 간다며 국군에 입대했던 오빠는 그 뒤로 소식을 들은 적 없이 이북에 있던 가족들과는 영영 이별한 채 살아오셨답니다.

사람살이 길은 늘 열려있다고, 장인 어른 만나 가정을 꾸며 열 아홉에 제 처를, 이어 두 아들을 낳고 키우며 오늘도 기도로 사신답니다. 행여 북에 살아있는 어릴 적 헤어진 가족들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꿈도 버리지 못하고 있답니다.

그래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해 놓고 있답니다.

오는 10월로 예정된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는 남북 각기 100명씩 선정해 만남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현재 남쪽 신청자들의 반수 이상의 나이가 90대라고 하니 아직 팔순도 안된 창창하게 어린(?) 제 장모에게 순번이 돌아오는 일은 없을 듯합니다.

이산가족

한 삼년전 이맘 때, 장모에게 병이 찾아왔답니다. 담낭암이라는 이름의 손님이었지요. 그래 담낭을 떼어내고 전이된 간 일부를 떼어내는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도 받으시고 난 후. 그 언젠가의 세월을 기다리시며 잘 버티고 계셨답니다.

다시 시작한다는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 소식이 들리던 이지음 장모에게서 떠났다고 생각했던 손님이 아직도 몸속에서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다는 판정을 받았답니다.

그래 이 저녁, 모처럼 제 가족을 위해 기도해 본답니다.

“장모(丈母)에게도 기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