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낯선 시간 앞에서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하루를 보내다. 손님들에게 이미 고지한대로 가게 문은 닫았다. 다음 주부터 주 사흘 동안 짧게 라도 영업을 지속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그래도 여전히 시간은 남아 돈다. 그렇게 빨리 달리던 시간들이었는데 한적한 거리 풍경만큼 더디다.
오후 속보는 주(州)내에서 첫 바이러스 감염 사망자 소식을 전한다. 오늘로 첫 확진자 소식 이후 보름이 지났다. 현재 확진자 수는 143명이란다. 주내 인구라야 아직 백만명에 이르지 못하므로 인구 대비 결코 낮은 수치가 아니다.
신문은 coronavirus pandemic 상황에서 어찌할 바 모르는 이웃들을 위해 서로 위로하는 모습들을 담은 사진들과 글로 오늘을 이겨내는 사람들 소식도 전한다.
그리고 재미있는 기사 하나.
재택근무가 늘어가면서 집안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하게 된 부부 사이의 갈등 현상과 그 해결 방안들을 제시하는 기사였다.
삼십 년 넘는 세월 동안 거의 24시간을 아내와 함께 하며 살아 온 내 눈을 반짝이게 한 기사였지만,하루에도 열 두 번(아주 최소한으로 잡더라도) 싸우며 무사하게 살아 온 우리 부부에겐 별무 소득이었다.
그러다 손에 든 송기득 선생님 책 ‘인간(그리스도교 인간관에 대한 인간학적 해석)’을 읽다가 내 온 몸과 맘으로 웃는 웃음을 짓다.
“그런데 그때그때의 상황에서 모든 <남>에게 <너>가 되려고 애쓴 예수의 삶은 결국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의 <나>의 참된 실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끝내 자신의 <참 나>를 살아냈던 것 뿐이다. ………..
우리는 이따금 우리 둘레에서 자신의 온 삶을 한 이성異性을 위하여 살고 있는 사람을 본다. ….이러한 삶의 자리를 우리는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너를 삶으로서 <나>를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너를 사는 나, 그것이 곧 나이며 그 밖에 나는 따로 없는 것이다. 나 없는 <너와 나>라고 할까……….
우리는 이러한 자리를 비난하거나 낮게 평가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한없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그러나 한 가지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그것은 <너>에게 <나를 드림> 이라는 미명으로 하여 자신의 순수한 새 가능성을 억누른다든지, 그와 못지 않은 <나>의 성실을 저버린다든지, 심지어 그것으로 하여 반反너스러운 것의 발현을 위장한다든지, 자기 속임수를 감추려든다든지. 또한 그것이 저만의 희생이라고 하여 자만하거나, 과장한다던지 한다면, 그것은 드디어 <나>도 못살고 <너>도 못살고 마는 자기파멸을 가져 올 것이 뻔하다. 더구나 그러한 <나>로 하여 자신을 쳐다보고 구원을 바라는 그 밖의 사람들을 못 본 채 해서는 더욱 안될 것이다.
그러나 <너>에의 고귀한 삶도 깊이 따지고 보면 결국 <나>를 사는 삶 그것을 넘지 못하리라.”
그래, 무릇 너를 위한 나를 살기 위해 누구 또는 무엇과 싸우더라도 웃으며 살 일이다. 하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