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의 집

부부가 모두 은퇴한 이후 내 가게 출입이 아주 뜸해진 Gaskin씨가 자기 집에서 여는 성탄 파티에 초대한 것은 몇 주 전 일이었다. 그리고 어제 오후 그는 일부러 내 가게를 찾아와 저녁에 있을 파티 참여를 확인했다. 사실 그 몇 주 사이에 같은 시간에 열리는 다른 송년모임이 생겨 망설이고 있던 터였다.

예전에 비해 거의 발길 끊긴 손님이 파티 준비로 여러모로 바쁠 시간에 구태여 찾아와 함께 하자는 말에 미안함과 고마움이 겹쳐 우리 부부의 발길은  Gaskin씨네로 향했다.

해마다 이맘 때 벌어지는 Gaskin씨네 파티는 동네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두 부부의 직장 동료 및 동호회 모임 식구들에 이르기 까지 많은 이들이 함께 하는 제법 큰 성탄 잔치이다. 우리 부부는 Gaskin씨 부부가 애용하는 세탁소 주인이로서 이 잔치에 여러 해 동안 함께 했었는데, 지난 해는 건너 뛰었다.

부부 모두 이미 은퇴한 후 시간이 흘렀건만 많은 전 직장 동료들을 비롯해 동네 사람들 까지 족히 백여명이 넘는 이들이 엊저녁에도 함께 했다.DSC09270 DSC09289

부부는 현관에서 일일이 손님들을 맞았다. 그리고 먹고 마시고 맘껏 떠들고 노래하고 춤추며 흥겨운 저녁 시간을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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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간 주자이자 싱어인 산타의 추임새에 따라 신나게 두드리는 드럼 주자, 이어지는 색스폰 주자의 소리와 기타를 이빨로 튕기는 신공을 보여준 기타리스트까지 잔치자리 흥의 중심은 단연코 밴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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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멤버들 가운데 가장 분주한 이는 이 밴드의 트럼펫 주자인Gaskin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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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흥겨운 잔치자리에서 내가 찾아낸 파티의 주인공은 산타들이었다.

남녀노소와 인종을 불문한 수많은 산타들이 어제 잔치 자리에 주인공이 되어 함께 했다.  산타들을 초대한  Mrs. Gaskin에 따르면 그 산타들 역시 하나하나 일일이 초대했다고 한다. 그녀는 알라스카, 플로리다 등지에서  부부가 여행 중에 만난 산타들을 하나하나 모셔 왔다고 친절한 설명을 곁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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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여기는 가히 산타들의 집’이라고.

그리고 오늘, 이즈음 읽고 있던 책 한 권 마무리하며 덮기 직전에 만난 글에서 Gaskin씨 성탄 잔치의 뜻을 곱씹어 보다.

<성서가 말하는 영원한 생명은 죽지 않고 끝없이 연장되는 삶의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삶을 가리킨다. 그것은 시간의 끝없는 연장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이웃과 교통하며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세우는 삶의 깊이 내지 ‘삶의 질’을 말한다. …. 이 세상의 연약한 피조물에 대한 사랑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 현재적으로 경험된다.>

Gaskin씨 부부와 그들과 늘 함께 사는 산타들이 머무는 집에서 맛 본 사랑을 생각하며.

2019년 성탄의 계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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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에

새 달부터 새 장소에서 영업을 한다는 이전 안내문을 붙이자 “내가 뭘 도와줄까?’ 묻는 이들이 많다. 직장 일을 쉬더라도 이사 일을 돕겠다는 젊은이도 있고, 교회와 동네에 자원봉사자들을 모으겠다는 이도 있다. 더러는 이전 비용을 염려하며 전보다 더 많은 세탁물을 가져오는 것으로 돕겠다는 이들도 있다.

이즈음 이런 저런 어수선한 마음을 달래주는 고마운 얼굴들 떠올리며 주일 편지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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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어느 날인가 네 다섯 살 쯤 되어 보이는 꼬마 아이가 제 아빠 손을 잡고 세탁소에 들어 섰답니다. 아이는 무언가에 아주 토라진 듯 입을 삐죽히 내밀고 있었습니다. 아이 아빠에게 허락을 받고 아이에게 막대사탕 하나를 쥐어 주었답니다. 아이의 얼굴은 이내 세상 다 가진 듯 환하게 바뀌었답니다. 그리곤 그 환한 얼굴로 컨베이어에 걸린 옷들이 돌아가는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답니다.

그런 아이 모습을 바라보며 순간 넋이 나간 저도 잠시 아이가 되었었답니다. 딱 그 꼬마 아이 쯤 나이였을 때 제 아버지의 등에 업혀  잠 들었던 기억이 되살아 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날 오후 내내 제 생각엔 지난 시간들이 마구 스쳐 지나갔답니다. 잠에 빠진 어린 저를 업고 걸으셨던 아버지는 이제 아흔 중반 나이에 이르셨습니다.

유년이 지나 소년을 거쳐 청년이 되어가며 저는 꿈을 꾸었었답니다. 시를 쓰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꿈이었답니다. 아직 그런 꿈을 버리지 못했을 때에 아내를 만났습니다. 그 시절 아내의 꿈은 노래하고 춤을 추며 사는 것이었답니다.

그리곤 어찌어찌하여 우리 부부는 델라웨어 뉴왁에서 세탁소를 하기 시작했답니다. 딱 30년 전인 1990년 7월이었습니다. 제 성씨인 Kim과 아내의 성씨인 Lee의 첫 글자를 묶어 K&L Cleaners라고 간판을 걸었었답니다.

그 날 밤, 막대사탕 하나로 세상 다 가진 듯 행복한 얼굴이었던 아이를 생각하며 저는 꿈을 꾸었답니다. 시 쓰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결코 대단한 일이 아니고, 그저 살아가면서 느끼고 고백하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꿈을 꾸었답니다.

그것이 비록 큰 욕심일지언정 꿈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생각으로.

당신의 세탁소에서.

욕심에

얼굴 가득 찡그린 마음 담은 채
제 애비 손 잡고 내 가게 들어 선 꼬마 아이
막대사탕 하나 쥐어 주니
세상 다 가진 얼굴이다

그 모습에 홀려 꿈을 꾼다

먼 훗날 꼬마 아이
이 도시의 거리와 풍경들
가족과 이웃들
사진첩 넘기 듯 옛일 생각할 때
비록 얼핏 스쳐 지나가는 배경일지라도
사람 좋은 얼굴 세탁쟁이로 남을 수 있다면

때론 욕심이어도
꿈은 아름다울 수 있으므로.


One day last week, a child who looked to be four or five years old held his dad’s hand and walked into the cleaners. He pouted his lips, maybe because he was upset about something. With his dad’s permission, I slipped a lollipop into his hand. His face softened into a grin, as if it meant the world to him. Then, with a beaming smile, he looked at the clothes hanging on the moving conveyers with bewitched eyes.

While I was watching the boy, old memories led me to become a child for a moment. That was because he brought to me an old memory that I had fallen into sleep on my father’s back when I was about his age.

Throughout the afternoon that day, a flood of thoughts and memories of the past coursed through my mind. My father, who walked with me on his back, is in his mid-nineties now.

When I became a young man, after going through my infanthood and adolescent period, I had a dream. It was a dream of becoming a poet. Before I gave up the dream, I met my wife. At that time, she dreamed of living her life in singing and dancing.

Then, one thing led to another, and my wife and I began to run the cleaners in Newark, Delaware. It was in July 1990. I named it “K&L Cleaners” after the first letters of my last name “Kim” and my wife’s last name “Lee.”

That night, thinking about the boy who became happy with a lollipop, I dreamed about the thought that writing poems, singing and dancing are not big deals, but they are simply to feel and to express one’s life.

And the thought that dreams are beautiful, though they may be big greed.

From your cleaners.

My Greed

With a face filled with a frowning mind
A little boy who walked into my store holding dad’s hand,
When I slipped a lollipop into his hand,
Changed his face as if he owned the world.

I’m dreaming enchanted by the changes in his face

Some day in the distant future, when the little boy
Will think back, as if leafing through an old picture album, on the past times
Streets and scenery of this town, and
Families and neighbors,
Even as a part of the passing background,
I’d have been remembered as a friendly-looking cleaner.

Sometimes, though greedy,
Dreams can be beautiful.

 

이웃의 생각

“알 수 없는 김정은, 더 알 수 없는 트럼프” – 가게 손님 한 분이 내게 던진 말이다. 연일 이어지는 한반도 뉴스들을 보다가 가게 손님들에게 평화를 기원한다는 뜻으로 편지를 보냈었다. 손님 하나가 제법 긴 답을 보내왔다. 내 나이 또래인데, 전력공급회사의 중견 간부로 있다가 최근에 은퇴한 이이다. 우리 동네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백인 중산층 신중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생각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의 경험과 생각을 이 곳에 오는 이들과 함께 한다. capture-20171008-085658

너의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만, 내 생각엔 만일 북한 지도자가 진로를 바꾸지 않는다면, 향후 몇 년 내에 한반도에서 (아마 다른 곳에서도) 죽음과 파멸의 시기가 올 가능성이 점차 커지는 것 같다. 만일 그(김정은)가 사람들의 거주지역 내에 핵폭탄을 폭발 시킨다면, 내가 어렸을 때 지녔었던 공포를 수많은 사람들이 가지게 될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의 핵폭탄 대비 훈련을 여전히 기억한다. 기본적으로 그 훈련은 경보가 울리거나 버섯구름이 보이면,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이었다. 물론, 일단 모두가 얼굴을 감싼 채 책상 밑에 들어가 있으면,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혹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을 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핵폭탄이 실제로 폭발하면, 맨하탄 프로젝트에 참여한 정부 과학자들과 그 프로젝트를 관장하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영상물을 직접 본 군사지도자들만이 상황이 얼마나 참혹할지를 인식할 뿐이었다.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 가는 것으로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너의 희망에 한 마디 덧붙인다. — 나는 평양의 미치광이가 자신이 택하고 있는 진로가 자기 나라의 주요 하부구조 상당 부분과 자신의 국민 (자신의 강제노역자들) 다수를 불타버리게 만들 가능성이 아주 높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일본과 남한의 수많은 사람들 또한 고통과 손실을 겪게 되고, 생활양식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 변하게 되거나, 혹은 잃게 될 것이다. 북반구의 사람들과 모든 생명체들이 식량공급 영향, 질병, 불필요한 고통 등의 측면에서 수십년 동안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이 북한의 미래를 책임지는 사람에게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그는 세계에서 위대한 명예와 중요성을 이룩한 사람이기 보다는 자신의 나라를 파멸시킨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내 조상의 대다수는 네델란드에서 왔으며, 나머지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거의 반반이었는데, 우리의 마지막 이민 가족은 1884년에 도착했다. 미국 거주 나의 가족은 열 한 세대에 걸쳐 살았거나 살고 있으며, 오랜 기간에 걸쳐 고국을 방문한 적이 없었고, 또한 그들 국가들이 이후 379년에 걸쳐 상당히 변했기 때문에, 우리가 떠나기 전 고국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세세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내가 알게 된 것은, 당신이나 나나 ‘어디에서 왔는지’는 정말로 중요하지 않으며, 거의 모든 인간들은 같은 것들을 – 음식, 평안, 안정, 선택한 분야에서의 성공, 우리 지역사회에서 승인, 그리고 자녀들이 번창할 수 있는 좋은 기회 – 원한다는 것이다. 한국인들 역시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겠지만, 세계 많은 나라에서는 그러한 모든 행복의 수단을 성취할 가능성이 이 나라에서 보다 훨씬 낮다. 3차 세계대전은 인류의 상당 부분뿐 아니라 지구상의 수많은 생명체들도 파멸시킬 수 있다. 대규모의 전쟁은 피해야 하겠지만, 그 못지 않게 두렵다. 세번째 전쟁에는 모두가 잃게 될 것이다.


 

I hope your wish comes true, but my sense is that it is becoming increasingly likely that there will be a period of death & destruction on the Korean peninsula (and possibly elsewhere) in the next few years if the leader of North Korea doesn’t change course.  If he detonates a nuclear device within range of human habitation, it will bring home the fears that I grew up within as a small child to very many people.  I still remember doing the atomic bomb preparation drills in elementary school, which essentially was crawling under our desks when the alarm sounded or a mushroom cloud was seen.  Of course, once we were all under our desks with our faces covered, nobody had an answer for what would happen next and how we would stay alive.  If a bomb actually went off, only government scientists in the Manhattan Project and military leaders who had overseen that program and viewed the films of Hiroshima and Nagasaki realized just how bad things might become.  Crawling under a desk wouldn’t have saved anybody.

So I would add another line to your hope — I hope that maniac in Pyongyang comes to realize that the path he is taking will most likely incinerate much of the critical infrastructure of his country and many of its people (his forced labor).  Many people in Japan and South Korea will also suffer pain and loss, changing or losing what they know of a way of life.  The people and all other living things in the northern hemisphere will be affected for decades in terms of food supply impacts, sickness, and unnecessary suffering.  IF that is of no importance to the person who is responsible for the future of North Korea, then he will be remembered as the man who destroyed his country rather than someone who achieved great honor and importance in the world.

A majority of my ancestors came from the Netherlands, and the rest are fairly evenly split between Ireland and Scotland, with the last our our immigrant family arriving in 1884.  Eleven generations have lived or are living here in my family of American residents, and we have lost any detailed knowledge of what our homelands were like before we left simply because we have never been back for extended visits and those countries have changed quite a bit in the subsequent 379 years.  But I have learned that it doesn’t really matter where you or I ‘come from’, nearly all of humanity want the same things:  a supply of food, comfort, stability, success at our chosen endeavors, acceptance in our community, and good opportunity for our children to thrive.  Koreans are no different than anyone else, but in many of the countries of the world the chance of achieving all those measures of happiness is much slimmer than in this country.  A third world war could ruin that for not only a large portion of humanity but also many other species on this planet.  That scale of war needs to be avoided, but I fear it may not be.  Everyone will lose in the third 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