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 예언자 16

(당신의 천국 – 마흔 다섯 번 째 이야기)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신세를 걱정해 주는 자가 어디 있었느냐그렇다그는 인간사회에서 끊기었다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 이사야 53 : 7 – 8, 이상 공동번역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였다. “예언자가 여기서 말한 것은 누구를 두고  말입니까자기를 두고  말입니까아니면 다른 사람을 두고  말입니까빌립은 입을 열어서 성경 말씀에서부터 시작하여예수에 관한 기쁜소식을 전하였다. – 사도행전 8 : 34 – 35

이사야가 살았던 당시 남왕국 유다의 형편(아사야 1장에서 39장까지의 이야기) 이사야가 죽은  일어난 바벨론 포로 시절(이사야 40장에서 55이야기그리고 포로에서 풀려나 예루살렘 재건을 하던 무렵(이사야 56장에서 66) 이야기가 합쳐진 책이 성서의 이사야서입니다.

그래 첫째 이야기를 이사야둘째 것을 2이사야,  세째 이야기를  3 이사야라고 부른답니다.

기간으로 보면  이백  정도의 역사적 사건들과 고백들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백  동안은  유다인들에게는 간난(艱難) 질곡(桎梏) 세월이었습니다.  이사야가 활동하던 히스기야왕 시절에 성서는 그가 다윗 못지 않게 복을 받은 왕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그의 말년이 가까워 오면서  유다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합니다.

예루살렘이 멸망 직전의 위기에 놓입니다이미 말씀드렸듯이 당시 팔레스타인의 국제적 정세는 북의 아시라아와 남의 이집트동쪽의 신흥 세력 바벨론과의 힘의 역학에 따라 땅의 주인이 바뀌던 때였습니다유다왕국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여러 약소 왕국이나 도시국가들은 살기 위해 줄을 서거나 힘을 합쳐 연합을 하되   강국이라고 생각되는 세력에 붙곤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히스기야도 독립노선을 표방하면서도 일견 이집트에 붙기도 하고바벨론과 붙기도 하고 왕국의 안녕을 도모하기 위해 갖은 외교적 수단들을 동원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아시리아를 표방하던 때에 아시리아의 강력한군주가 나타납니자산헤립이라는 왕입니다예루살렘 성이 완전히 포위되어 산헤립의 손에 넘어가기 직전인 상황들이 두번이나 연속됩니다이사야의 예언들이 쏟아지던 때입니다.

기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야훼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산헤립의 군사  팔만 오천 명을 야밤에   숨에 없어버립니다.(이사야 37 : 36)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산헤립이  이길  있었던 싸움을 앞두고 까닭없이 철군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사야 당대에는 멸망의 위기를 넘기지만 끝내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  이후의 이야기는 예레미야 이야기를 하면서 잇기로 합니다.)

현실적으로보면 좋은 일이란  전혀 일어나지 않을  같은 상황이었습니다그러한 때에 이사야는 메시아 왕국메시아가 통치하는 세상을 봅니다그리고  세상을 노래합니다.

이쯤이사야 시절부터 아주 오래  이야기를 되돌아 보기로 하지요 700 전의 일입니다.

히브리족들이 탈애굽을 하여 광야 사십년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시작하던 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는 것이지요야훼 하나님과 히브리족들이 광야에서 계약을 하고 들어  땅은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고평등한 사회를 이루는 곳이었다는이야기를 우리가 함께 했던 생각을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히브리족들이 꿈꾸었던 하나님의 나라였지요그러나 시간의 흐름과 함께 젖과 꿀이 흐르는 땅도 평등이 이루어지는 세상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사야가  메시아 왕국 하나님의 나라는 평화가 넘치는 세상입니다.

  평화가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이사야는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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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가 새끼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수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으리니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친구가 되어  새끼들이 함께 뒹굴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리라.  젖먹이가 살모사의 굴에서 장난하고 젖뗀 어린아기가 독사의 굴에 겁없이 손을 넣으리라.  나의 거룩한  어디를 가나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다시는 없으리라바다에 물이 넘실거리듯 땅에는 야훼를 아는 지식이 차고 넘치리라. – 이사야 11 : 6 – 9”

사람과 사람사이의 싸움  전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온갖 만물들이 더불어 함께 누리는 평화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바로 뱀의 유혹이 일어나기 선악과에 대한 유혹이 일어나기  태초 에덴으로의 회귀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사야에서    하나님 나라의 원형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바로 하나님의 공의가 넘치는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남왕국 유다가 망해가는 시점그리고  망한 후의 시점남의 나라에 포로 생활을 하는 시점그리고 풀려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피와 땀을 흘리던 시점 이백 년의 세월 동안 유다인들이 꿈꾸었던 메시아 왕국하나님의 나라입니다바로 누구나 공평한 평화로운 세상 말입니다.

그리고 언젠간 반드시 그런 하나님의 나라메시아 왕국을 이루어  메시아가 온다는 예언을   사람바로 이사야입니다.

이사야가 그린 메시아의 모습이 바로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고난받는 종으로 오시는 메시아는 온갖 고초와 멸시를 당하고 채찍질과 찔림을 당하여 죽습니다그의 죽음은 후손들이 오래 오래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기 위한 제물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700  이사야의 예언이 어떻게 실현되고,어떤 이해와 해석들이 이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예수의 생애와 바울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어질 것입니다. 

이사야를 통해 우리들의 머리 속에 깊이 새기고 넘어가야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모습바로 평화가 넘치는 세상입니다.  전쟁과 다툼이 없는 세상입니다.

히브리족들이 가나안에서 꿈꾸었던 젖과 꿀이 흐르는 평등한 세상은 정복과 전쟁을 전제로  세상이었습니다.

이사야가 꿈꾸던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온갖 무기들이 생산의 도구로 바뀌어 평화가 넘치는 세상입니다.

21세기 오늘날에도 여전히 빈번한 모든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일어나는 다툼싸움전쟁들이 얼마나 후진적 신앙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사야로부터    후에 오신 메시아 이야기를 향해 이야기를 진전시키면서 이제 우리들이 만날 인물들은 예루살렘과 유다가 멸망하는 시기에 활동했던 예언자들입니다.

발상의 전환 – 예언자 15

(당신의 천국 – 마흔 네 번 째 이야기)

‘너는 나의 종이다. 내가 너를 뽑아 놓고 버리겠느냐? ‘ 두려워 말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말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 내가 도와 준다. 너에게 서슬이 푸르게 달려들던 자들은 부끄러워 쥐구멍을 찾게되고, 멸망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  – 중략 –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와 준다. –이사야 41 : 9 -13, 공동번역 

신약은 구약을 전제로 하고 복음을 율법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구약에 구현되어 있는 이 율법은 결코 구체적인 구약성서일 필요는 없다. 복음을 위한 선이해(先理解)가 구약에서 자라났지만, 신적 율법이 역사적으로 달리 구현되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선이해가 자라날 수 있다.  – 루돒프 불트만의 ‘신앙과 이해’에서 

종종 쓰거나 듣게 되는 말 가운데 “생각이 바뀌면 달라진다’는 말이 있지요. 똑같은 하루인데도 바라보는 생각을 바꾸어 보면 아주 다른 일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일컬어 ‘발상의 전환’이라고 합니다. 

인류사에 있어서 내노라하는 인물들이 있지요. 그 가운데 ‘발상의 전환’의 상징인 된 사람은 코페르니쿠스(기원후 1473  – 1543)랍니다. 획기적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은 사람이지요. 바로 지구를 중심으로 천체가 돈다는 천동설(天動說)에서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地動說)로 세상을 바꾼 사람입니다. 

그의 이런 주장을 더욱 확고하게 주장한 사람은 갈릴레오(Galileo Galilei, 기원후 1564 – 1642)입니다. “그래도 지구가 돈다”라는 말로 유명한 사람이지만 정작 이 말은 그가 한 말이 아니라는 게 정설이랍니다. 

갈릴레오는 독실한 크리스챤이었습니다. 천주교인이었지요.  그의 주장, 곧 “지구가 돈다”는 주장으로 교황청의 재판을 받았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요. 그 재판정에서 그는 그의 주장을 꺾습니다. “지구가 도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재판정을 나오다 한 말이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이라는 것인데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당시의 교황청만 갈릴레오의 지동설 주장을 정죄 했을까요? 개신교의 시조로 알려진 루터 역시 갈릴레오를 정죄하였답니다. 그가 갈릴레오를 정죄한 까닭은 교황청의 생각과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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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갈릴레오는 마땅히 정죄 받아야 된다고 말한 근거는 성서 여호수아 10장 13절에 있는 “ 그러자 원수들에게 복수하기를 마칠 때까지 해가 머물렀고 달이 멈추어 섰다.  – 중략 – 해는 중천에 멈추어 하루를 꼬박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성서무오설(聖書無誤說)  – 성서는 일점 일획도 틀린 것이 없다 –이 그 정죄의 잣대였던 것입니다. 

나아가 지동설 곧 지구가 움직인다는 사실은 교황청 및 교회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일이었고, 중세 유럽을 무너뜨리고 르네쌍스 시대를  여는 인류사의 일대 전환의 계기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 세상을 주도해 오던 교황청을 비롯한 유럽의 실세 권력의 입장에서 보면 근간을 흔드는 “이단”이었던 셈입니다. 

이쯤 우리들이 살고있는 2013년 오늘의 시점에서 본다면 지동설은 과학적 진리이지요. 그렇다고 중세의 교회가 걱정했던 신에 대한 믿음과 신앙이 사라지기는 커녕 야훼(여호와) 하나님의 세상은 더욱 넓어졌지요.  – 제가 오늘 처음으로 야훼(여호와)라는 표기를 했습니다. 요것도 기억해 두시기를- 

사람들의 생각이 커갈수록 더 큰 야훼 하나님 곧 본래적인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생각을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 이쯤해서 제가 하고싶은 질문을 드립니다. 이사야서는 누가 썻을까요? 

혹시 제1이사야서, 제2 이사야서, 제3 이사야서라는 말을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들어보셨다면 그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요? 

갈릴레오 이후로 성서의 무오설에 대해 마구 도전하는 일들이 일어난 것은 18세기,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 전에서 300년 전의 일이랍니다. 

이사야서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랍니다. 18세기 전까지만 해도 이사야서는 이사야가 썻다는 것이 정설이었고, 그것에 대한 의문조차 없었거나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답니다. 18세기 말엽에 이사야서는 최소 두 명의 다른 사람이 쓴 책이라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세 개의 다른 저자 그룹들이 있다는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이사야서 66장 가운데 1장에서 39장까지를 제1 이사야, 40장에서 55장을 제2 이사야,  56장에서 66장까지를 제 3 이사야로 부르는 까닭입니다. 

그 이후로 이사야서 뿐만 아니라 성서의 모든 자료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18세기 이전까지 흔들리지 않았던 성서 무오설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또 확인해 볼 수 있답니다. 

성서무오설이 무너지고 다양한 성서 연구 방법론들이 나오고, 19세기 이후부터는 고고학의 자료들이 마구 발굴되면서 이제껏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해 오던 믿음들이 무너지거나 오히려 확고히 하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답니다. 

수년천 사람들이 믿어왔던 천동설이 무너지면서 야훼 하나님의 역사와 그가 일하시는 지경이 넓혀졌듯이, 성서 무오설이 무너지고 여러 연구 방법들로 인해 성서가 해부될수록 야훼 하나님으 역사와 그 지경이 또한 넓혀져 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합리적 의심을 시작으로하여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해 연구하고, 허와 실을 가려내는 일은 너무나 당연하고 마땅히 그리 해야 할 일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입장이나, 성서를 믿음의 눈으로 읽고자 하는 이들도 이런 흐름 또는 사조, 연구에 대해 귀를 활짝 열어두어야 할 필요가 있답니다. 

그렇게 열린 시각으로 야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보면 더 큰 야훼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이사야서는 이사야가 썻다. 그걸 의심하면 믿는 게 아니다.”라는 18세기 이전의 옛날 사람의 눈으로 성서를 읽는 것은 아직도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것을 믿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는 말씀이고요, 저 위에서 제가 인용한 불트만의 말처럼 그 어떤 사람들의 경험들을 예로 들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 구원에 대한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와 메시아왕국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적어도 이런 이해는 먼저 필요하겠다는 생각으로 쓴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발상의 전환이란 신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 곧 나나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지요. 그걸 깨우치기 위해 신이 내리는 기적들 역시 신이신 야훼 입장에서 보면 필요없는 일이지만 나나 당신의 입장 곧 사람에 입장에서는 때론 절실한 것이지요. 

성서를 합리적인 사고와 믿는 마음이라는 크게 열린 눈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랍니다. 

이제 이사야의 메시아 복음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산당(山堂)이 산당(産黨)? –예언자 14

(당신의 천국 – 마흔 세 번 째 이야기) 

오늘은 주일(일요일)입니다. 

이 날에 대한 의미와 뜻은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일요일로 표시되는 날짜 색이 평일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주 특별한 자신들의 전통적 달력이나 일력을 사용하는 민족 이외에는 21세기에 거의 대부분 국가들이 일요일이라고 표시된 달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너무 넓게 생각하지 않아도, 오늘날 대부분 국가들에서 일요일은 쉬는 날입니다. 천지창조니 유대교니 기독교니 그런 것을 따지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렇게 쉬는 날이 되었습니다. 

다만 이런 오늘날 지키는 일요일 관습을 따져 올라가 보면 유대인들의 관습을 만나게 되고 더 올라가면 창조신앙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어떤 전통과 관습과 종교를 유지하고 이어 나가더라도 “일요일 하루는 쉬는 날”이라는 현실을 맞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일요일조차 일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지구상에는 더 많을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일요일은 쉬는날”이라는 생각과 실현은 분명 넓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사라고 제가 믿는 이유 가운데 하나랍니다. 

이사야 이야기를 하다가 무슨 뚱딴지인가 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당신은 분명 저와 함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이사야 이야기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메시아 이야기를 바로 이어가려다, 오늘은 주일 곧 일요일이라는데 생각이 미쳤고, 그래서 한번 짚고 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읽고 생각해 보는 이사야 시대 이야기 뿐만 아니라 사무엘 시대 또는 그 이전부터 계속 들을 수 있었던 말 가운데 산당(山堂)이라는 말이 있답니다. 도대체 이 산당이란 무엇일까요? 

문자 그대로의 설명은 산에 있는 제사단, 높은 곳에 있는 제사단입니다. 이건 예루살렘 성전이 마련되기 이전에 이스라엘 열 두지파가 각자 편하게 야훼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들었던 제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원래는 이방신과는 관계없는 야훼 하나님을 위한 제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운 후 유일신이신 야훼 하나님은 오직 이 예루살렘 성전에만 계시다는 선언과 함께 모든 제사를 일원화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왕국이 남북으로 갈리면서 성전도 이전 모습인 산당으로 갈라집니다. 그리고 그 산당에는 이교적 요소들이 합쳐지는 것입니다. 

자! 산당(山堂)이란 본래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단이었는데 중앙집권에 힘을 빼는 요인이 되었고 이방신들과 쉽게 결합하는 장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완전히 없앤 것이 바로 이사야 예언자가 일했던 히스기야왕 때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이야기하려는 촛점은 이런 이야기가 아니랍니다. 

제가 오래 알고있는 어느 장로님께서 하셨던 이야기가 자꾸 머리 속에 생각난다는 말을 드리려는 것입니다. 이 장로님은 정말 사람도 좋은 분이시고, 이제는 은퇴하셨지만 교회를 세우고 섬기고 하는데 정말 누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좋은 신앙을 지닌 분이시랍니다. 대학은 자그마치 서울대학교 출신이시고, 여기 미국에서 의사라는 전문직종으로도 오랜 경험과 능력을 인정받으신 분이시랍니다. 

참 본받을 것이 많은 분이시랍니다. 

그런데 그 분이 어느 날엔가 모임에서 이런 말씀을 했답니다. “성서에 산당을 없애라고 했어요. 그거 안 없애서 심판 받았지요. 그거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어요. 공산당을 없애지 않아 우리 민족이 힘들다.” 

그 순간 저는 정말 놀랬었답니다. 정말 황망한 순간이었답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들의 신앙이라는 것이 이 장로님과 같은 시점에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깊히 해 보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우리들의 현실 속에서 각자 믿는 삶에 프리즘으로 보는 세상은 때론 정말 황망한 것을 믿는 것으로 결말이 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엉뚱한 하나님 나라에 이르러서야 후회하는…. 

이사야서를 바로 읽어야 하는 까닭이 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사를 읽는 일이고, 당신과 제가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자! 오늘은 일요일, 바로 주일입니다. 성경 한 장 같이 읽어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우선 읽고보고 다음 이야기로 이어가도록 하지요. 

이사야서 53장입니다. 

23HolySepulchre12

 

 

 

 

 

 

 

1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3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4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6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7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8    그가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그 세대 사람들 가운데서 어느 누가, 그가 사람 사는 땅에서 격리된 것을 보고서, 그것이 바로 형벌을 받아야 할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느냐? 

9    그는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았고, 거짓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악한 사람과 함께 묻힐 무덤을 주었고,  죽어서 부자와 함께 들어가게 하였다. 

10    주께서 그를 상하게 하고자 하셨다. 주께서 그를 병들게 하셨다. 그가 그의 영혼을 속죄제물로 여기면, 그는 자손을 볼 것이며, 오래오래 살 것이다. 주께서 세우신 뜻을 그가 이루어 드릴 것이다. 

11    “고난을 당하고 난 뒤에, 그는 생명의 빛을 보고 만족할 것이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의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할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자기가 짊어질 것이다 

12    그러므로 나는 그가 존귀한 자들과 함께 자기 몫을 차지하게 하며, 강한 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겠다. 그는 죽는 데까지 자기의 영혼을 서슴없이 내맡기고, 남들이 죄인처럼 여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졌고, 죄 지은 사람들을 살리려고 중재에 나선 것이다.  – 이사야서 53장, 표준새번역 

 

기본 정신 – 예언자 13

(당신의 천국 – 마흔 두번 째 이야기) 

그(아하스 왕)는 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면전에서 쫓아 낸 민족들의 역겨운 풍속을 본받아 벤힌놈 골짜기에서 친자식들을 불살라 제물을 바쳤으며 산당과 산마루에서, 또 우거진 나무 아래서에서 분향하고 제사를 지냈다.  – 역대기하 28 : 3-4 

그(히스기야 왕)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드리기 시작하였고 하느님의 법과 계명을 지켜 자기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였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는 마음을 다 쏟았다. 그래서 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었다. – 역대기하 31 : 21 

무엇하러 이 많은 제물들을 나에게 바치느냐? 나 이제 수양의 번제물에는 물렸고, 살진 짐승의 기름기에는 지쳤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수염소의 피는 보기도 싫다.  – 중략 – 두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내가 보지 아니하리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 중략 – 내 앞에서 악한 행실을 버려라. 깨끗이 악에서 손을 떼어라. 착한 길을 익히고 바른 삶을 찾아라. 억눌린 자를 풀어 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 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 이사야 1 : 11 – 17 

20세기에 활동했던 가장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한사람인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은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신약성서 신학(Theology of the New Testament)”을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제 일장 ‘예수의 설교(The Message of Jesus)’에서 제 일과인 ‘종말론적 설교(The Eschatological  Message)’를 시작하는 첫 문장입니다. “예수 설교의 주요 개념은 바로 하나님의 통치이다. (The dominant concept of Jesus’ message is the Reign of God.)” 

하나님의 통치 곧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입니다. 

비단 불트만의 예가 아니더라도 신약성서 복음서에만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이라는 말이 백번도 넘게 나오는 것만 보아도 예수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아, 오늘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영생을 얻어 천국에 들어간다.>는 단호하고 확실한 신앙 고백을 나누기 위해서 저는 지금 “당신의 천국”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나라 이야기” 순례길을 걷고 있습니다. 

단 한 분이라도 제 이야기 순례길에 동행하며 같은 신앙 고백을 나눌 수만 있게 된다고 하여도 이 순례길은 제게 아주 의미있고, 제 삶의 가치를 스스로 부여할 수 있는 큰 일이라고 믿는답니다. 

바로 그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책이 이사야서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사야가 주로 활동했던 당시의 왕들 곧 아하스왕(주전 736년 – 주전 716년)과 히스기야왕(주전715년 – 주전 686년) 때의 역사적 사실들과 예언자 이사야의 당시 역할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이미 잠시 언급했듯이 아하스왕 시절은 북쪽에서 강력한 군대를 밀고 남하하는 아시리아 세력에 의해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시기였습니다. 

그 무렵 아하스왕의 행위에 대해 성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하스왕이 아시리아 왕들에게 도움을 청한 것도 그 때였다.(역대기하 28 : 16)”, “아하스는 야훼의 성전과 왕궁과 대신들의 집들을 털어 아시리아 왕들에게 바쳤으니 헛된 일이었다.(열왕기하 28 : 21) 

강국 아시리아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조공을 바치고 사대(事大)의 길을 택했던 아하스왕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외세(外勢)에 대해 굴복하는 일은 정권 또는 왕조의 역사를 이어가는 방편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겠으나, 오직 하나 뿐인 신(神)  야훼만을 모셔야하는 유다의 전통을 망가뜨리는 선택이기도 하였습니다. 

아하스왕 당시의 야훼 신앙을 망가뜨리는 종교적 타락에 대한 성서의 기록입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구들을 거두어 부수고 야훼의 성전 문들을 봉쇄해 버렸다. 그리고 예루살렘 모퉁이마다에 제단을 만들어 섬겼다. 또 유다의 성읍마다 산당을 세우고 남의 나라 신들에게 분향하게 하여 선조의 하나님 야휘를 진노케 하였다.(역대기하 28 : 24-25)” 

심지어 아하스왕은 이방 종교 풍습에 따라 친자식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습니다.(역대기하 28 :3) 

이사야가 야훼 하나님을 환상으로 보고 부름에 응답한 뒤 제일 먼저 했던 일이 바로 이 아하스왕 앞에 선 일입니다.(이사야서 7장) 

이사야는 야훼의 명령을 받고 두 번에 걸쳐 아하스왕 앞에 서서 야훼 하나님의 경고를 전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 시리아 등의 침략이나 외세에 대해 두려워 말고 오직 야훼 하나님만 믿으라는 경고였습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이사야의 경고를 무시하고 아시리아에게 의지합니다. 결국 이사야는 아시리아에 의해 남왕국 유다도 침공을 받아 유린되리라는 예언을 하게 됩니다. 

이 때 아하스왕 앞에서 전하는 두번 째 경고에서 이사야의 유명한 예언이 행해집니다. 바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 7 : 14)라는 예언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어질 메시아왕국편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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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승계한 사람은 그의 아들 히스기야였습니다. 히스기야왕은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의로운 왕으로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하스왕의 외교노선이었던 사대노선을 버리고 독립노선을 천명합니다. 그가 반 아시리아 정책을 선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의 주변 강국 사이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힘으로 남하하는 아시리아를 일시 저지하는데는 당시의 남쪽 강대국인 이집트의 힘이 컷기 때문입니다. 

이런 국제적 힘의 역학관계를 잘 이용했던 히스기야왕은  외교정치는 독립노선을 구가하면서 대내적으로는 과감한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다시 강화합니다. 

그는 성전을 재건, 정화 시킵니다. 이교도적인 이방신들을 모두 제거, 배척하고 유일신 야훼신앙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전통적인 제사의례를 복원하고 유월절 등의 전통적 절기를 복원함으로써 유다와 이스라엘 선조들과 함께 했던 야훼 신앙을 되찾은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예배의식을 복원한 일입니다. 지방에 산재했던 산당들을 부수어 없애고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야훼 하나님을 경배하는 제사를 지내도록 복원한 일입니다. 바로 중앙집권체제의 왕권을 복원시킨 일입니다. 

여기까지는 히스기야왕이 야훼 하나님께 복받는 위업이었습니다. 성서는 이러한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태조 다윗 못지 않게 야훼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였다.(역대기하 29 : 2) 

그러나 히스기야왕도 거기까지였습니다. 

예루살렘 중심의 제사의식과 의례, 전통 등은 야훼 하나님과 선조들이 맺었던 계약에 맞게 개혁하고 복원하고 실행하는데 성공했지만, 그 예배의 정신, 제사의 본래적 목적 곧 야훼 하나님과의 계약의 기본 정신을 되찾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들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억눌리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더불어 함께 가야하는 정신을 잃고, 그들의 인권을 짓밟고 드리는 제사는 가짜라는 예언들(이사야서 1 장, 10장 1-4절 등)입니다. 

이사야가 심판의 예언을 그치지 않는 까닭입니다. “공평을 기대하셨는데 유혈이 웬 말이며 정의를 기대하셨는데 아우성이 웬 말인가? (이사야 5 : 7)” 

그리고 그런 원인을 제공한 이들은 “나쁜 것을 좋다, 좋은 것을 나쁘다. 어둠을 빛이라, 빛을 어둠이라. 쓴 것을 달다, 단 것을 쓰다 하는 자들”, “지혜있는 이들이라 자처하는 자들, 유식한 자로 자처하는 자들, 독한 술에 빠진 자들, 뇌물에 눈이 어두어 죄인을 옳다 하고, 옳은 사람을 죄있다 하는 자들(이사야 5 : 20 -23)”이라고 선언합니다. 

히스기야왕의 성전 정화와 개혁에도 불구하고 유다왕국이 맞게 될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예언자의 예언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의 끝은 파국이 아닙니다.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 올 것입니다.(이사야서 9 : 2) 

이제 우리들이 만나 볼 이사야의 메시아 왕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