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믿는다는 말을 하려거든
이 제목 연재글의 마지막입니다.
둘째로 이민목회와 디아스포라 선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금, 여기에서 재현하는 작업이다.
기독교는 십자가와 부활의 종교이고 기독교 신학의 절정은 십자가와 부활에 있다. 십자가와 부활 이라고 하는 이 연속적 사건에서 십자가는 인간이 져야 할 몫이고 부활은 하나님이 이루실 몫이다. 교회와 목사들과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은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말 없이 묵묵히 지고 가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죽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살리시는 일은 오직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 자신과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정체성이다.
한국 교회와 디아스포라 교회를 포함한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의 신학적 위기 중 하나는 십자가 없는 부활 만을 연속적으로 선포하는 어리석음에 있다. 부활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십자기를 지고 죽은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최종적 은총이다. 그러으로 하나님이 이루실 부활의 역사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책임인 십자가를 지는 일에 대해서 좀 더 치열하게 말하고 적극적으로 행동 해야 한다.
위에서 예화로 제시한 몇 가지 이민목회의 경험담들이 가르쳐주는 교훈의 두번째 핵심은 바로 이 십자가 목회와 십자가 선교이다.
“길을 개척한 이 모든 사람들, 이 모든 노련한 믿음의 대가들이 우리를 응원하고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그들이 열어 놓은 길을 따라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달려가십시오. 절대로 멈추지 마십시오! 영적으로 군살이 붙어도 안되고, 몸에 기생하는 죄가 있어서도 안됩니다. 오직 예수만 바라보십시오. 그분은 우리가 참여한 이 경주를 시작하고 또 완주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어떻게 하셨는지 배우십시오. 그분은 앞에 있는 것, 곧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결승점을 지나는 기쁨에서 눈을 떼지 않으셨기에, 달려가는 길에서 무엇을 만나든, 심지어 십자가와 수치 까지도 참으실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분은 하나님의 오른편 영광의 자리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시들해 지거든, 그분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되새기고, 그분이 참아내신 적대 행위의 긴 목록들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에 새로운 힘이 솟구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3 유지 피터슨의 번역 메시지)
이 텍스트 가운데 이민 목회와 디아스포라 선교에 대한 십자가 신학의 핵심적 개념들 다 음과 같은 단어들로 설명 되고 있다.
– 길, 개척, 경주, 달려감, 결승점, 예수, 십자가, 수치, 참음, 적대행위, 영광, 새로운 힘 – 히브리서는 이런 것들이 바로 십자가 신학에 대한 주요 개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날 내가 호주에서 이민목회자로 살아온 33년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오직 참고 살아온 일생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목회란 인내의 경주요, 인생이란 누가 더 잘 참나, “참기 내기”의 시합 이라고 믿어왔다. 나는 설혹 내가 아무리 잘 참는다 하더라도 예수님 만큼은 참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참았다. 예수의 인내가 내 인내의 사표이다. 나는 한 때 너무나 억울해서 자살을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죽음으로 나의 억울함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죽지 않았고 지금까지 살아있다. 오직 목회란 배신에 대한 신뢰요, 미움에 대한 용서요, 억울함에 대한 사랑이라고 믿고 그냥 묵묵히 참아왔다. 젊은 날, 철 없었던 학생 시절, 부모님의 가숨에 못을 박고, 잘난 척하고 의로운 척 하면서 선생님들과 선배들에게 함부로 막 말을 하며 대들었던 벌들을 지금 그냥 그대로 다 받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 하면서 이민목회자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주변을 돌아보면 나의 인내란 실로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적어도 배 부르고 등 따습게 살아온 사람이 아닌가! 아이들 학교 보내고, 아플 때 병원 가고, 먹고 입고 사는 데 있어서는 큰 고난 없이 지내온 사람이 이제 와서 무슨 고생이니, 억울함이니 하면서 인내 운운 할 자격이 있을까? 우리 주변에는 일차적 삶의 문제 조차도 해결 받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살아가는 목사들과 가정이 적지 않게 많이 있다. 영주권 없이 불안한 신분 상태로 살아가는 목사들이 한 둘이 아니다. 청소하는 목사, 막 노동하는 목사, 택시 운전하는 목사, 타일을 붙이는 목사, 김씨, 이씨, 박씨 라고 불리 우며 험한 일을 하는 목사들도 많이 있다. 그러면서도 주일이 되면 또 다시 몇 명 되지도 않는 교인들을 앞에 놓고 기도하며 찬송하고 설교하는 목사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다는 말이다.
목사 부인들의 삶은 어떤가? 공장에 다니는 사모님, 남의 가게에서 일 하는 사모님, 하숙을 치는 사모님, 시도 없고 때도 없이 밥상 차리고, 아이들 학교 데려다 주고, 데려오면서 택시 운전사 보다도 더 고달프게 살아가는 사모들이 얼마인가? 그러다가 몸은 병들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암 세포가 온 몸에 퍼지고, 집을 나갔다가 변사체가 되어 돌아오고, 그러면서도 허구한날 남편 뒷바라지에 여념 없이, 심방하고, 상담하고, 전도하며, 욕이란 욕은 다 먹어가면서 동서남북으로 뛰어 다니는 목사 부인들 ! 이들이야말로 가정부나 식모나 아줌마 측에도 들지 못하는 빗 좋은 사모들이 아닌가? 출발과 과정은 어찌 되었든 오늘 이민자들에게 주어진 고난의 현장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인내를 바라보며 참으면서 사람들과 함께,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십자가의 길을 걷는 디아스포라 목회자들과 선교사들과 그들의 가정에 진실로 은혜와 축복이 가득 하기를 기도한다.
원래 목사의 길이란 죽음으로서 생명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의 행로 이긴 하지만 이민목회자의 길은 더더욱 죽기로 결심한 사람들 만이 가는 길이다. 이 땅에서는 아예 죽기로 작정을 하고 저 세상에서나 잘 살아보기로 마음 먹은 사람들이 떠난 선교 여행이 이민목회자의 길이다.
여기서도 대접받고 저기서도 대접 받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한 사람들, 이 땅에서 존경 받고 잘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가서도 또 똑같은 대접을 받게 된다면 이는 결코 예수의 길이라 할 수 없다.
고난과 인내를 거치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것이요, 그의 제자로써 목회자와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그의 스승 예수를 따라 골고다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고, 고난 없이는 영광도 없고, 죽음 없이는 생명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기독교이다. 고난과 죽음은 그 자체로써 이미 충분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 예수의 길이다. 설혹 고난 이후에 주어지는 상급이 없다 하더라도 고난은 고난 그 자체 만으로도 이미 값지고 위대한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다. 이것이 바로 고난의 신비요, 우리가 참고 인내 해야 할 진정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