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에

세탁소의 스팀 열기와 연일 백도를 넘나드는 더위에 진이 빠질 대로 빠져 축 처졌던 어느 날 저녁, 아내가 ‘이거 한 번 들어 보셔!’하며 읽어 준 대목이다.

<케이시는 평생 집, 세탁소, 교회만 오가는 부모님의 삶이 한심했다. 이민 온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영어는 늘지 않고 손님들에게 바보 취급을 받았다. 사십대에 머리가 하얗게 된 엄마 리아는 일주일 내내 “더러운 셔츠를 분류하고, 떨어진 단추를 달고, 10대 고객에게 미스, 미스터 존칭을 붙여 불러가면서 값비싼 디자이너 청바지 단을 줄였다. >

아내가 이즈음 읽은 소설 <파친코 Pachinko>의 저자 이민진이 쓴 자전적 소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을 소개하는 글 가운데 한 대목이란다.

나는 그날도 미스, 미스터 뿐만 아니라 써, 맴을 입에 달고 지냈었다. 비록 이십 대 아이들일지언정. 뿐이랴! 캔이나 윌은 거의 쓰지 않는다. 큐드와 우드를 입에 달고 산다.

그날 밤, 내 아이들에게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어…. 한 잔 찐하게 했다.

호칭에

아버지가 사뭇 진지하고 심각한 어조로 내 이름을 부르셨다. 우선 나를 부르는 호칭이 평소와 달랐다. 통상 즐겨 쓰시는 ‘아범’, ‘애비’도 아니고, 기분 좋으실 때 부르는 ‘어이 김영근!’도 아니었다. 오늘 아버지는 ‘영근아!’라고 말씀을 시작하셨다. 그렇게 이어진 아버지 이야기를 다 듣기도 전에 나는 웃고 말았다. 세상 둘도 없는 말씀을 하실 듯이 나를 부르신 아버지가 하신 말씀은 미안하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게 또 미안해서 웃고 말았던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보다 여운이 가시지 않은 것은 ‘영근아!’라는 호칭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를 부를 때 ‘영근아!’라고 하는 이들이란 지금은 아버지 어머니 딱 두 분 뿐이다. 물론 가게 손님들이나 여기서 살며 알게 된 이들이 ‘Young’이라고 나를 부르지만  ‘영근아!’와는 사뭇 다르다.

나를 ‘영근아!’라고 부르는 친구들과는 시간과 공간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어쩌면 내가 그들을 찾아가지 않는 한, 더는 나를 ‘영근아!’라고 부를 이를 만날 수는 없지 않을까?

그러고보니 아무리 백세 시대라 하여도 내가 보낸 시간들도 결코 만만한 것은 아니다.

그런 마음을 다 지우지 못한 채 난민과 이민에 대한 책장을 넘기다  눈에 밟힌 글귀 하나.

<사람은 나면서부터 어디든 옮겨 다닐 수 있고 자기가 살고 싶은 곳에서 살 수 있다. 누구든 살던 곳에서 자유롭게 ‘떠날’ 권리, 살던 곳에서 강제로 ‘쫓겨나지 않을’ 권리, 새 삶터에서 ‘정착할’ 권리, 그리고 살던 곳으로 안전하게 ‘돌아 올’ 권리가 있다. 또 이주와 정착 과정에서 국제사회가 여러 협약으로 인정하는 기본적 ‘인권을 보장받을’ 권리도 있다. 오늘날 이런 권리가 어떤 이유에서든 원칙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나라는 폐쇄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사회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글쓴 이의 주장에 시간을 하나 덧붙인다면 우리는 영원히 폐쇄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사회를 살다 가는 것은 아닐까?

‘영근아! 이 짜샤!…’ 그 흘러간 저쪽 세월에 잠시 빠져버린 밤에.

기차여행 -17

금문(金門, Golden Gate)

금문교(金門橋, Golden Gate Bridge)로 향했다. 아무렴, 샌프란시스코인데 금문교 배경으로 얼굴 사진 하나 정도는 찍고 가야 마땅한 일이었다.

가는 길에서 만난 단독주택들은 작고 마당은 없지만 아주 예뻣다. 특히 집 색깔들이 동부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어서 자꾸 눈길이 갔다.

dsc02471a

우리 일행중에 주로 수다(?) 담당이었던 아내가 느닷없이 샌디에고에 있는 어느 목사에게 전화를 한다. 샌프란시스코와 샌디에고는 같은 캘리포니아라도 약 500마일(800km) 떨어진 곳이건만 아내는 San Diego와  San Francisco에서 San만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하나아빠처럼 1.5세 이민인 그이는 속한 교단에서 차세대 목회자로 손꼽혔던 사람이다. 내 나이 또래인데 벌써 준은퇴상태이며, 손주가 다섯이란다. 내외 모두 건강 문제로 꿈의 크기를 줄였나보다. 이즈음엔 책을 쓰고 있단다.

벌써 두 해가 지났다. 그가 모처럼 내가 사는 동네에 왔었다. 강변을 걸으며 그는 김광석이 부른 ‘서른 즈음에’를 웅얼거렸었다. 난 그런 그이를 아내못지 않게 좋아했다.

안개속을 달리다보니 이미 금문교를 건넜다.

golden_gate_bridge_dec_15_2015_by_d_ramey_logan

capture-20160915-173159

우리가 본 금문교는 이런 멋진 모습들이 아니었다.

dsc02476a

그저 이렇게 안개 속이었다.

dsc02474a

dsc02472a

사진을 찍으며 금문교에게 너무나 미안하게도 나는 제2한강교와 절두산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때 세계최고, 최초라는 여러 수식어가 붙었던 금문교에게 정말 미안하리만치 내겐 큰 감흥이 없었다. 셋 중 하나였으리라. 내가 이미 늙었거나, 넘쳐나는 세계 최초와 최고들로 인하여 둔해졌거나, 아니면 안개 때문이었거나.

dsc02486a

한여름 대낮이었건만 안개는 거치지 않았고 추웠다.

dsc02511a

다리 아래로 내려가서야 감탄이 일기 시작했다.

dsc02518a

금문교 옆 Sausalito 마을을 들리지 않았다면 그나마 금문교에 대한 정취는 별로 남아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dsc02537a

dsc02516a

dsc02514a

Sausalito는 우리를 매료시켰다.

dsc02523a

dsc02526a

먹을거리는 우리들의 눈과 입맛과 배를 완전하게 정복하였다.

dsc02531a

스페인 여행중이던 하나는 제 아빠가 Sausalito에 있다는 문자를 보내자, ‘거기있다면 자전거를 빌려 타보라’고 했단다.  아이들은 아직 우리들의 나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dsc02534a

우리는 자전거 대신 해변에서 앉아 놀았다.

dsc02535a

Sausalito에서 금문(金門,Golden Gate)을 지나 누리고 있는 내 이민의 여유를 보았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아직도 성실하고 깨끗하기를…

며칠 전 모처럼 만난 지인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최근 한국에서 새로 임명된 장관 한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로 올랐다. 새로 임명된 그 장관과 지인은 동향이었으며, 장관이 한때 미국에서 지낼 때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지인이 내게 했던 말이다.

“나는 그 친구를 아주 성실하고 깨끗한 사람이라고 기억하고 있어요. 공직자으로써 자기 일에 매우 충실한 사람이기도 했고요. 내가 뭐 한국 떠나온지 40여년인데 그쪽 뉴스 어디 그렇게 잘 보나요? 낯익은 이름이 뉴스에 나오길래 좀 눈여겨 보았지요. 처음엔 참 잘됬다 싶었어요. 그만한 사람이면 장관 한번 할만하지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허 근데…. 그거 아니더구먼요. 내가 사람을 잘못 봤었나하는 생각도 들고요, 아니면 사람이 많이 바뀐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였고요. 아무튼 그 친구에 대한 뉴스들을 주욱 보면서 한국사회 이른바 엘리트계층이 참 많이 상했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언제부터인가 나는 내가 사는 동네 한인들을 만나 한국에 대한 이야기, 특히 한국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는 거의 없다. 화제가 그쪽으로 달려가면 나는 슬그머니 자리를 뜬다. 경험상 시간과 에너지 낭비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영남이나 호남 출신들이 주를 이루는 모임에서 한국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거의 그날 하루 기분을 잡치는 일이 되고 만다. 출신지역 뿐만 아니라, 언제쯤 이민을 왔는지,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따라 들어보나마나 그들이 하려는 말은 이미 들은 것이나 다름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여 가깝게 지낼수록 한국 정치 이야기는 금물이다.

개인적으로 만나면 다 좋고 착하며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들이다.

여기 살다보면 한국에서 연수나 연구차 또는 파견근무 등등으로 일이년 정도 단기 거주를 하거나 수년 동안 장기거주를 하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이들과 연을 맺을 기회가 있기 마련이다. 그들 가운데 회사원들도 있지만 주로 공무원들이나 교수들이 많다.

내 기억 속에도 손으로 꼽을 수 없을만큼 많은 얼굴들이 있다. 생각해 떠올릴수록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고, 착하고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종종 한국 뉴스에 오르내리던 인물들도 있었다. 대개의 경우 며칠전 지인이 이야기했던 신임장관과 같은 인물의 모습으로 뉴스에 오르내리던 것이었다. 그 때마다 나 역시 지인처럼 혀를 차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지인이나 내가 만났던 사람들의 현재 모습을 대변한다고는 결코 생각치 않는다. 그들보다 많은 이들이, 아니 그들 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착하고 성실하며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공직이나 교직에서 땀흘리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생업(生業)

길 건너에서 같은 업(業)을 하고 있는 6.25선생께서 손을 턴단다. 그가 힘들어 한다는 이야기는 이따금 들었지만, 막상 이렇게 가게 문을 닫아야 할 만큼 곤궁한 처지인지는 몰랐다.

그를 처음 본 지도 어느새 스무해 전 일이 되었다. 어느 한인들 모임에서였다. 한 사내가 남도 특유의 사투리로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그의 주변에는 내 또래 사내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사내는 6.25 전쟁 때 자신과 가족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었는지 열변을 토하고 있었는데, 바로 어제 일어났던 일을 설명하듯 하던 것이었다. 이런 첫 만남 때문에 한동안 나는 그를 적어도 1945년생 전후의 나이로 여기고 깍듯히 대하곤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시간이 지난 후, 그의 나이를 알게 되었을 때부터 나는 그를 6.25선생이라고 불렀다. 그가 나보다 18개월 먼저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을 안 이후에 나는 그의 얼굴만 보면 6.25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피난지 부산에서 태어난 나는 부산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거니와, 아무리 용을 쓰고 어릴 적 기억을 되뇌어 본다한들 고작 1950년대 후반에 일어났던 일들 혹은 그 시절 풍경에 대한 것이 고작일 뿐이건만,  6.25 때 일들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그는 가히 내가 쫓아갈 수 없는 비범함이 있었을 터이다.

아무튼 말이 좀 많은 편이기는 하나 그는  썩 괜찮은 사내이다. 인물이 착하기도 하거니와 동네 한인들 대소사에 손이 필요할 때면 앞뒤 가리지않고 흔쾌히 나서서 평판도 나쁘지는 않다. 그저 한 마을에 살고있는 한인 가운데 한사람 사이 정도이던 그와 내가 얼굴을 자주 부딪히게 된 것은 한 십 수여년 전 쯤부터이다. 그가 내 가게 길건너에 있는 세탁소를 인수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나는 그 이전 십 수년 해오던 세탁업에 지쳐 딴데 한눈을 팔고 있었거니와, 당시만 하여도 아직 세탁소 형편이 썩 나쁘지만은 않은 때여서 그에 대해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아니하였다.

내가 세탁업을 시작했던 때만 하여도 ‘세탁소 간판만 붙이면 밥은 넉넉히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이 떠돌 때이고, 적어도 2,000년도 전후만 하여도  그 말은 타당하지 않았는가 싶다. 처음 내가 세탁소를 시작할 때 가까운 주변 몇 마일 안에 세탁소 숫자라야 한 손으로 꼽을 정도이었지만, 2,000년도 초반에는 이미 두손 열손가락으로는 모자라고 두발 열발가락을 다 동원해야 할만치 늘어나 있었다. 6.25선생께서 세탁업에 발을 들여놓던 때는 바로 그 무렵이었다.

6.25선생이 인수한 가게주인으로 그가 네번 째이다. 그 이전에 주인이었던 세사람 모두 내가 한자리에서 겪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지난 십여년 동안 세탁업은 세상이 변한 만큼보다 더 큰 변화를 겪었다.

최근 몇 년 사이, 두 손 두 발 모든 가락수를 꼽아야 할만큼 많던 내 주변 세탁소들 숫자가 손만 동원해도 충분히 세고도 손가락이 남을 만큼 변했다.

변하는 세상풍경이 끝내 6.25선생을 비껴가지 않은 모양이다.

늘어가는 내 나이 숫자보다 줄어드는 세탁소 숫자가 자꾸 밟히는 까닭은 나 역시 변하는 풍경 한가운데 서있기 때문일게다.

쉬는 날, 내 업(業)을 생각하며.

내가 말하는 까닭

일주일에 한번씩 온라인 화상으로 만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세월호 가족들이 앓고 있는 아픔이 이어지는 한, 우리라도 그들을 잊지말고 그 아픔의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나눌 수 있으면 나누어 보자고 만나는 친구들입니다.

모일 때마다 작은 주제를 정해놓고 서로의 생각들을 나누곤 합니다. 지난 주에는  “미국에 사는 우리들은 왜 세월호 참사를 비롯한 한국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왜 이민와 살면서 떠나온 모국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지?”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나이도 다르고 미국에 온 햇수도 다르고 이제껏 살아온 경험들도 서로 다르거니와 직장생활을 하는 친구도 있고, 자영업을 하는 친구들도 있고, 가정주부로 자녀교육에 열심인 친구도 있으니 저마다 다른 생각들이 있었답니다.

그날 모임은 일테면 그렇게 서로 다른 우리들이 왜 모여 함께 이야기하고 우리들이 나눈 이야기들을 전파할 수 밖에 없는지를 이야기하는 자리였습니다.

늘 그렇듯 모임이 끝나면 저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 또 새롭게 눈뜨는 것들로해서 이 나이에 과한 즐거움을 얻는답니다.

photo_2015-09-27_17-42-22

그리고 지난 주말과 주초에 제가 경험한 일 때문에 이 글을 써보는 것입니다.

이른바 SNS라는 신종 대화 도구들이 있습니다. 트위터니 페이스북이니 카톡, 텔레그램 등등이 그것들이지요. 저는 제 또래 남못지않게  이런 신종 도구들을 먼저 사용해보는 왈 얼리어답터에 속하는 편입니다. 모든지 처음 나왔다하면 찝적거려보기는 하는 편이랍니다. 그런데 즐기는 쪽으로 접어들면 완전히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쪽이랍니다.

일테면 저는 제 소유의 셀폰(핸드폰, 스마트폰 무어라고 부르던간에)이 없습니다. 그저 PC와tablet을 가지고 놀 뿐입니다. 전혀 불편함을 모르고 삽니다. 폰을 손이나 핸드백에서 떼어내지 못하고 사는 아내를 보면 이따금  “왜 저럴까?”하는 생각을 하곤합니다. 그러나 아내는 저더러 “촌스럼의 극치로 산다”고 말한답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이용하는 방법도 마찬가지랍니다. 트위터에서 누군가를 팔로잉한다든가 페북에서 친구맺기를 신청한다든가, 댓글을 단다든가 하는 일에는 거의 쑥맥에 가까운 촌스러움이 있답니다. 그저 수줍게 제 이야기를 올리고 그것으로 족한 편이지요. 당연히 팔로윙이니 팔로워니, 친구숫자니 하는 것에는 관심조차 없는 편이랍니다.

그러니 말이 사회관계망서비스 이용을 할 뿐이지 골방에서 제 이야기를 혼자 떠드는 수준에 불과한 진짜 촌스러움의 극치랍니다.

그런 제게 지난 주말과 주초에 댓글로 충고들을 남긴 이들이 있답니다. 한 친구는 지금이라도 만나면 “야~ 쨔샤!”하며 반길 중고등학교 동창이고, 또 다른 이는 전혀 모르는 어찌 하다보니 페북에서 만난 분입니다.

제 어릴 적 친구는 현재 한국에 살고, 페북에서 만난 분은 미국에 사시는 이입니다.

먼저 헤어져 만나지 거의 40년이 넘는 제 어릴적 친구의 충고는 “떠났으면 지금 사는 곳의 삶에 충실하길 바란다. 여긴 사는 우리들이 꾸려나갈 것이므로…”하는 것이였는데, 그 충고를 남긴 시간과 그 친구가 누리고 있었던 형편으로 미루어 오랜 옛 벗인 저를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와 그리 멀리 않은 곳에서 사는 페북에서 알게된 이의 충고는 “차라리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는게 좋겠다”는 것이었는데 사뭇 성난 투의 말이었답니다.

두 사람 다 제가 페북에 올린 한국관련 이야기들에 대한 반응들이었지요.

그래 저를 다시 돌아보는 것이랍니다.

먼저 최근에 제가 받은 이메일 몇 개를 소개해 드리는 것으로 제 이야기를 이어가려 합니다.

<You’re welcome.  I’m glad you are here, and doing what you do, too. Very interesting article — research which reinforced my observations / perceptions in a few of the listed occupations. >

<Mr. Kim,

Thanks for your note. It reminded me of the African-American slaves, when the children and spouses were sold and they knew, chances were, they would not see each other again.  My Dad told me of stories where slaves who were able to escape to the north, who spent the rest of their days trying to find out where their kin lived and to reconnect.  Some stories ended right and others ended very sad.  To this day I cannot trace my family back to the slavery days.  However, my wife Mae can trace her descendants back to Nova Scotia, Canada and the slave ship that brought the family to Halifax from Jamestown, VA.

I always enjoy your notes: they make us think!>

<Mr. Kim,

I really like your note. I hope you are right about the move to the “HANGRY” Generation .  I see the “me first” in our national politics. Maybe that will change as the younger generation influences.>

<Dear Young Kim,

Thank you for another delightful letter from My Cleaners.  I agree the world is full of very diverse people with lots of differing attitudes and beliefs.  Your reminder to be open to others comes at a perfect time.  Well, any day would be the perfect time, wouldn’t it?

What transpires at your counter, everyday, is a wonderful example of openness and willingness to come into relationship.  One of my teachers would say that we move through a progression in knowing people.  We start as Strangers, move to Acquaintances, then to Rapport and finally into Relationship.

Strangers — we know nothing about each other

Acquaintances — we know some facts (name, address, phone number) about each other.

Rapport — we share similar feelings, are harmonious, we can get along

Relationship — we share and understand what to expect from each other, we share mutual expectations.

In my business (dental practice) we used to say, “Never treat a stranger.”

Of course, always started out as Strangers.  We easily became Acquaintances with a written intake form which shared the needed data.

Coming into Rapport was more time consuming, requiring some questions and answers, sharing of information, thoughts, feelings, opinions, experiences.

Relationship required a more complete discussion of what we each expected from each other.

Although not everyone wants to be in Relationship with every other person, or even with their healthcare providers, (or cleaners).  We all can easily move toward Rapport, starting with just a SMILE.  A welcoming, open attitude begins there and moves ahead with words and gestures.

Your “Letter From Your Cleaner” constantly reminds us what we can expect from you.  This is an open door for relationship building.  What you can expect from me, is to be paid for your service.  I also may provide a pleasant attitude, timely retrieval of my clothes, a sincere referral of a friend to your business.  Thus, we move into Relationship as we each fulfill our mutual expectations.  This is the basis of a trusting, respectful Relationship.

My wardrobe is improved by your cleaning service, and my life is improved by your letter and my spirit is lifted by our relationship.

Yours for a better world,>

제가 이 이민의 땅에서 이곳 사람들에게 받은 이런 종류의 메일은 책으로 엮는다면 족히 몇권 분량은 된답니다. 믿거나 말거나 말입니다.

제가 이 미국에서 이민자로 사는 삶의 모습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비춰진 일면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저는 “괜찮은 한국계 미국인”으로 알려지고 싶은 욕망도 있거니와 저로 인해 한국과 한국인들의 좋은 점들이 드러나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민의 삶을 이제껏 가꾸어 나왔다고 생각한답니다.

그런데 제게 늘 자랑스러워야 할  대한민국이 손가락질 받고 우스개 노릇으로 전락하는 모습은 정말 아니랍니다. 그래 한국과 한반도에 대해 제가 관심을 끊지 못하거니와 적극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그런 제가 종북이니 반국가적(반정부라는  말은 그래도 들을만 하답니다.)이니 하는 말을 듣게되면 솔직히 분노가 치민답니다.

사르트르는 <유대인>이라는 책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반유대주의란 유대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유대인”을 “혐오집단”으로 지목해 그들에 대한 증오없이 도저히 살 수 없는 반유대주의자들의 문제>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이어갑니다 <만약 유럽의 부르조아들은 그런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유대인이라는 민족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만들어 냈을지도 모른다.>

사르트르가 이런 말을 남겼던 때로부터 70년이 흘렀습니다.

중동에서는 유대인들이 옛날 유럽인 행세를 하고 있듯이, 같은 한인들끼리 한반도 안에서 그리고 이곳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혐오집단”과 “증오의 대상”을 찾는 못된 관습은 사라져야 마땅한 일입니다.

제가 이 땅에서 더욱더 미국인으로 살기 위해서라도 한국과 한반도에 대한 관심과 이야기를 끊을 수 없는 까닭이랍니다.

잔치와 분단

어제밤엔 Gaskins씨네 크리스마스 파티에 다녀왔답니다. 지난 시월초에 초대를 하였고, 그 사이 Gaskins씨의 몇 차례 확인이 있었답니다. “꼭 와야한다”며 말입니다.

그리고 어제 아침에 파티에서 입을 그들 부부의 빨간 셔츠를 찾으러 제 가게에 들렸던 그가 한 말이랍니다. “올해가 여덟번 째 파티이고 해마다 약 백여명을 초대하면 연말이라 바빠서들 대개 60-70명 정도가 오는데 이번에는 못온다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한 90명은 올것 같아. 오늘 새벽부터 마누라와 함께 이리뛰고 저리뛰고 정신이 없단다. 아무튼 이따 보자구.”

1220141906지난 해에 가보았던 자리라 낯선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각종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오밀조밀 집안 구석구석을 치장하고 있었는데, 어느 것 하나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답니다. 식전 다과상과 술상에서부터 저녁 테이블 그리고 후식까지 모든 상차림은 Gaskins 부부의 큰손을 여지없이 증명해 주는 정말 넉넉한 것이었습니다.

1220141958잔치 개회사(?)를 하는 고등학교 교장선생이신 Mrs. Gaskins이 오늘 파티 참석자들에 대한 소개를 통해 잔치자리에 모인 이들과 Gaskins씨 부부와의 관계를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은퇴후 Gaskins의 중요한 일과 가운데 하나인 악기 연주를 통해 알게 된 밴드동호회원들과 Mrs. Gaskins이 근무하는 학교의 사친회원들(PTA members) 그리고 동네 분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물론 Gaskins씨 부부의 단골 세탁소 주인인 저희 부부도 있었고요.

1220142010b쉬지 않고 늙은 젊음을 과시하는 밴드동호회원들의 연주에 맞추어 먹고 마시고 춤추고 즐긴 멋진 파티였답니다.

옥에 티랄까요?

자기 마누라가 밴드동호회에서 건반을 치고 있다는 사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갑자기 제게 던진 질문과 제 답이었답니다. “너 일본사람?”, “아니 한국인”, “남? 북?”, “남” 그렇게 교차문답이 끝난 후 그가 제게 던진 물음이랍니다.

“북한이 했다는  ‘디 인터뷰(The Interview)’의 소니픽처스 해킹 사건 어떻게 생각해? 진짜 개네들이 했을까? 우린 지금 IS만으로도 충분히 골 아픈데 말이지.”

속으로 “하필 이런 친구를…”하는 생각을 하며 제가 던진 답이랍니다. “개네들이 무슨 그런 능력이 있겠어? 옛날 후세인의 이라크 같은 거 아닐까?”

찜찜해하는 제 표정에 재치있는 제 마나님이 나섰답니다. “정치나 이념, 뭐 이런 이야기들은 언제나 파티 분위기를 깬다고들 하지요. 부인께서 건반 치신지가 오래 되셨나요?”

무릇 분단(分斷)이나 통일(統一)은 거대 담론(談論)만이 아니랍니다. 이런 일상의 소소한 불편일 수도 있답니다.

이 이민(移民)의 땅에서도 말이지요.

이민 복권(Green Card Lottery)

매주 제 세탁소 손님들을 비롯하여 (제게 의뢰한)한인 세탁인들의 가게 손님들에게 매주 일요일 아침 짧막한 이메일 편지를 보내는 일을 시작한 지도 벌써 일곱해가 지났습니다.

us-dv-lottery-2014-300x218단 한차례도 쉰 적이 없으니 제법 오래 이어져 온 일입니다. 편지를 띄우고나면 이런 저런 답신들을 많이 받게됩니다.

오늘은 이번 주에 제가 받은 답신 가운데 하나를 여기에 소개드리려고 합니다.

지난 일요일 제가 띄운 편지 내용은 <미국 복권 이민 비자(American Green Card Lottery)>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바로 아래와 같은 내용이었답니다.

복권 사보신 적 있으신지요? 복권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요? 어떤 종류의 복권을 사보셨는지요? 그 런데 혹시 복권 이민 비자(American Green Card Lottery)라는 말을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말 그대로 미국에서 살 수 있는 비자를 복권 추첨을 통해 발급해주는 것이랍니다.

로또 이민 비자의 정식명칭은 ‘다양성 이민 비자 (Diversity Immigrant Visa)’랍니다. 미국 사회의 다양성을 확보한다는 취지로 전 세계 사람들 가운데 미국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 가운데 추첨을 통해 매년 최대 55,000명에게 미국 이민 비자를 발급해 주는 제도랍니다.

지난 6일 월스트리트 저널 온라인판에 실린 이 로또 이민 비자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저는 깜작 놀랐답니다.

올해 이 프로그램을 통해 비자를 얻기 위해 응모한 사람들의 숫자가 1,100만 명이 넘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추첨을 통해 55,000명이 미국 이민 비자를 얻게된다는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놀란 사실은 미국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나라들, 일테면 멕시코, 브라질, 캐나다, 영국, 중국, 인도, 한국, 필리핀, 베트남 등등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은 로또 응모 자격조차 주지 않는답니다. 이미 그 나라 출신의 이민자들이 미국내에 많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니 만일 세계 모든 국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권에 응모할 자격을 준다고하면 아마 응모자가 몇 천만명이 될 지도 모를 일인 것이지요.

제가 무슨 이민제도나 이민비자발급 제도 같은 것을 말씀드리고자 함이 아닙니다. 저도 이민 일세이지만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다만 미국에서 살기를 원하거나 미국민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말입니다.

만일 당신이 복권을 사보신 경험이 있다면, 그 사람들의 심정을 조금은 쉽게 이해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보면 이민 일세는 저는 이미 복권에 당첨된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건강한 미국시민이 되는 일, 우리 동네에서 꼭 필요한 세탁소 주인이 되는 일은 이미 제가 당첨된 복을 지키는 일일 것입니다.

감사의 계절입니다. 이 땅에서 뿌리 내리고 사는데 가장 크게 도와 주시는 우리 세탁소 손님들에게 드리는 감사가 매우 큰 계절입니다.

그리고 Driggs씨에게서 받은 편지 번역과 원문입니다.

영에게,

당신이 이곳에 와서 기쁘다. 당신 아내와 당신은 분명히 열심히 일하고, 지역사회에 참여하며, 하는 일을 통해 가치를 더하고 있다.

대형 함선이 등장하여, 이곳에서 새 삶을 일구려는 다양한 사람들을 데려오기 (시작한 때로부터) 대략 6만년 전에, 머나먼 그리고 아마도 험난한 여정을 통해 걸어서 원래 이곳에 도착한 아메리칸 인디안들만이 부족 시민인 나라가 바로 이 미국이다. 하지만, 아마도 “불과” 10만년 전에는 이 땅에 인간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현재 불법적인 방법으로 우리 나라의 남부 국경을 넘어 도착하는, 그들 중 상당 수는 범죄 전력이 있거나 범죄를 저지를 의도가 있는 이민자들에게는 “당신이 이곳에 와서 기쁘다”는 말을 나는 할 수가 없다.

다행히도, 그들은 최근 까지 남서부 지역에 머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미국인들의 99%는 이민자였다; 단지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보다 더 오래 살았을 뿐 이다. 많은 미국인들이 이런 사실을 잊고 사는 것 같다. ─ 아니면 초등학교에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애당초 그것을 배우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선조들이 전쟁에서 싸웠으므로, 그들은 이곳에서 살 권리를 획득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얻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부계와 모계 쪽 모든 내 선조들은 프랑스와 인디언간의 전쟁 (French & Indian War),’ ‘미국 독립전쟁,’ ‘1812년 전쟁’에 참전했지만, 나는 그것을 이 나라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나라로 만드는데 내 조상들이 기여한 것으로 보며, 또한 그것이 내게 특별한 특전을 수혜할 자격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조상들의 본에 맞게 살아가야 한다는 의무를 뜻하는 것으로 여긴다.

보다 최근에 낙원에 온 이민자들은 찾은 것을 모두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으로 지키기 위해, 그들 보다 후에 오는 사람들에게 문을 닫고 싶어하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자신 보다 나중에 오는 사람들이 일을 열심히 하려 하지 않고, 지역사회의 일원이 되려 하지 않고, 우리가 원하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 기술과 재능을 들여오려 하거나, 이 땅을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드는데 조력하지 않으려 하는 경우에 한해, 그 생각이 공정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경제학을 수년 동안 공부한 바에 따르면, 우리가 기술과 재능을 소지한 이민자들을 지역사회에 들이면, 모두가 보다 나은 상태가 되며, 그것은 보통 모두의 삶이 개선되는 결과를 낳게된다.

 현재 처한 불쾌한 또는 희망이 없는 상황이 어떻던지 간에, 단순히 해를 끼치기 위해, 사람들이 이곳에 오고 싶어하는 경우는 아주 예외적이겠지만, 만일 그것이 실제 상황이라면, 처한 특별한 상황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그들에게 문호를 개방할 이유가 결코 되지 않을 것이다.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도 남서부 국경지역 주(州)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란다.

만일 기꺼이 지역사회의 건설적 일원이 되려한다면, 그렇다면 어디지역에 살고 있든지, 모두에게 (이민비자) 복권추첨에 신청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뉴스 레터를 계속 보내도록하라. 시사하는 바가 많은 내용들이다!

Charlie

그리고 편지 원문입니다.

Young,

I am glad you came here.  You and your wife certainly work hard, participate in the community, and add value by what you do.

As this is a country in which only the Native American tribal citizens originally arrived by a long and possibly torturous journey on foot before large ships started showing up, bringing a variety of people wanting to make a new life here some 60,000 years later.  But we do know that perhaps “as little” as 100,000 years ago, there were no people here at all.

I cannot say “I’m glad you came here” about some of the immigrants currently arriving by unauthorized means across the southern borders of our states, as a few too many of them have criminal backgrounds or a criminal intent for being here.

Fortunately, they have tended to stay in the Southwest until recently.

But the truth is that 99+% of Americans were immigrants; some have just been here longer than others.  A few too many Americans tend to forget that — or didn’t pay attention in grade school and learn it in the first place.

Some of us think that because their ancestors fought in a war, they earned a right to be here that others didn’t earn.

My ancestors on both my father’s and my mother’s side of the family did fight in the in the French & Indian War, the American Revolution and the War of 1812, but I look at that as their contribution to helping make this country a place people can live in relative freedom — not a grant of special privileges for me, but an obligation to live up to their example.

I have learned though that more recent immigrants coming into paradise have a habit of wanting to slam the gate on those coming in behind them, to protect what they’ve found all for themselves.

To me, that only seems fair if those coming in next are not willing to work hard, be a part of the community, bring some skills or talents we don’t need or want, or are unwilling to help make this a better place.

Several years of studying Economics taught me that we are all better off when we let immigrants with skills and talent into the community, as normally doing that results in everyone’s lives improving.

It is unusual for people to want to come here from whatever unpleasant or hopeless situation they are in simply because they want to do harm here, but when that is the situation, whatever that unusual reason might be is never going to be seen as a good reason to keep the door open for them.

I wish we would fix the problem in the southwestern border states for that reason alone.

Everyone else from wherever they come from — if they are willing to be constructive part of the community, then they should have a chance in the lottery!

Keep up the newsletters.  Good thought provoking stuff!

Charlie

우리는 이 땅에 최근에 이주한 이민자들입니다. 한국(남한)사회도 이즈음에 들어 다문화사회로 막 진입해 들어가고 있습니다.

Driggs씨는 이 땅을 살아가는 한 건강한 중년 사내이며, 그 역시 이민자의 후손입니다. 그의 생각에 귀기울여 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올려봅니다.

봄엔 꽃이 아니어도 좋아라

봄엔 꽃이 아니어도 좋아라

봄엔

꽃이 아니어도 좋아라

이른 아침

버섯공장 거름냄새

앞뜰

파랗게 물오른 버드나무 아래

차마

견뎌내지 못하고 떨어진 잔가지들

뒤뜰

흐드러진 개나리 사이

겨우내

숨 져 마른 관목

아래

볼품없이 누워있는

내 머리만한

돌멩이 하나

 

봄엔

꽃이 아니어도 좋아라

2010-spring-wallpaper_1920x1080_76651

<덧붙이는 글>

예수의 죽음이 끝이 아니었듯 부활도 끝이 아닙니다. 문제는 부활이후(以後)입니다. 탐스런 목련, 뒷뜰에  흐드러진 서울 개나리, 하얀 배꽃, 날렵한 더그우드 꽃잎들… 봄 꽃으로 꽉찬 세상만이 봄이 아닙니다.

제 딸년이 코끝에 사래질 치는 버섯공장 거름냄새도 주워 내다 버려야 할 떨어진 버드나무 잔가지들도 앙상히 말라 톱질 기다리는 죽은 나무도 일 년 내내 그 자리에 있어도 눈길 한 번 주어 본 적 없는 못생긴 돌덩어리도 봄입니다. 

 

예루살렘 입성할 때 한 자리 꿈꾸었던 제자들…

부활이후에도 여전히 한자리 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첫 증인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여인이었다는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으며 베드로는 바울에게 밀려 났고, 야고보, 요한 역시 한 자리 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바울은 뭐 크게 출세했나요. 발품 팔아 돌아 다니며 멍석 짜는 일에서 벗어 나지 못한 삶이었지요. 봄은 그렇게 오는 것이지요. 부활 이후 말입니다.

“위로자로서

화의 축원자로서

삶의 조언자로서…필요한 것을 나누어 주는 자로서”

솔직함(frankness)과 진정성(authenticity)으로…

벌써 사년 전 일입니다만 당시 USA TODAY는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삶이 날로 힘들어 지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For immigrants, living the dream is getting tougher)

많은 이민자들이 스물비지네스를 통해 생계를 꾸려가고 있지만 최근 불어닥친 경기침체의 영향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전하며, 이들의 삶이 이민초기의 무일푼의 상태로 되돌아 가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스몰비지네스국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내 약 150만명의 이민자들이 스몰비지네스를 소유하고 있으며 비이민자에 비해 이민자들의 스몰비지네스 창업율이30%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About 1.5 million immigrants own U.S. businesses, according to a study for the Small Business Administration by Rob Fairlie, an economics professor at the University of California-Santa Cruz. He found that immigrants are 30% more likely to start a business than non-immigrants.).

미국내 스몰비지네스의 12.5%가 이민자들 소유이며 멕시칸 이민자의 스몰비지네스 소유가 2.22%로 가장 많고 다음이 한인으로 전체의 0.78%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도표 참조)

immigrant_VA

신문은 남미, 유럽, 아시아 등지에서 이민을 와서 옷가게, 식당, 세탁소, 그로서리등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사는 이렇게 끝납니다.

“내 피와 땀과 눈물을 이 땅에 쏟았습니다. (오늘의 고통은) 실로 슬픔입니다.” (I put my blood, sweat and tears in this place. It’s a sad story.)

한인 이민자들인 우리들의 삶은 어떨까 생각을 해 봅니다. 많은 우리 한인 이민자들이 스몰비지네스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모습도 신문이 전하는 이야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듯합니다. 우리들의 착각과 편견을 벗어 내 버리면 말입니다.

다른 통계를 하나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시안계 대다수가 평균적인 중산층 수입 이하의 소득수준을 보이고, 1가구당 수입이 다른 인종(백인, 흑인, 히스패닉)에 비해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5가구중 1가구가 빈곤선 이하) 게다가 아시안계 가정의 54%가 영어 미숙자로 언어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80-20 initiative)

저는 착각과 편견을 이야기했습니다. 많은 한국 이민자들은 아시안계에 속하기를 거부합니다. 특히나 남미나 흑인계 이민들과 비교되는 것들도 꺼립니다. “한국인”을 이야기 하고 높은 학력과 아시아의 유태인으로 견주기를 즐겨합니다. 이 땅의 타 민족 이민자들 보다 비교 우위에 있다는 자부가 매우 강합니다. 그러나 이젠 솔직해 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위에 통계나 USA TODAY의 기사와 우리 한인 이민자들의 실상은 크게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자부”는 지녀야 할 덕목이지만 그 보다 먼저 “솔직”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우리를 돌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위의 USA TODAY 기사는 1970년대 중반에 그리스에서 이민을 와서 세탁소(Four Seasons Cleaners)를 경영하고 있는Panayiota Koskiniotis 씨의 이야기를 싣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길게 보면 이 땅은 살 만한 곳이다.”라고.

저 역시 그의 말에 동의를 합니다.

비록 경기침체의 끝은 보이지 않고, 갈수록 스몰 비지네스로 생계를 꾸려가지 힘들만큼 현실의 여건은 어렵더라도 “길게 보면 이 땅은 살 만한 곳입니다.”

언어의 장벽, 문화의 이질감, 터무니 없이 적은 자본능력 등등 현실을 헤쳐 나갈 도구들도 충분치 않지만 여전히 “길게 보면 이 땅은 살 만한 곳입니다.”

“솔직”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우리를 돌아 볼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솔직함(frankness)”과 “진정성(authenticity)”이 “이 땅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도구입니다.

비록 어려운 경제환경과 우리들이 지닌 핸디캡들(언어의 장벽, 문화의 이질감, 터무니 없이 적은 자본능력)에도 불구하고 세탁소를 비롯한 스몰 비지네스로 성공 이민의 꿈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솔직함(frankness)”과 “진정성(authenticity)”으로 내 비지네스를 키우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