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담배는 왜 피세요?”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에게 물었었다. 그 때 하셨던 할아버지의 짧은 대답, “이눔아! 심심허니까 태우지. 그래 심심초란다.”
할아버지 돌아가신 후 머리 제법 굵어졌을 무렵부터 나도 담배를 입어 물었다가 끊은 지도 이젠 시간이 꽤 흘렀다.
하루 삼시 세끼 이외엔 군것질 이라곤 거의 입에 대지 않던 내가 이즈음 들어 주전부리들을 끼고 산다. 각종 견과류와 과자류들이 그것이다. 그러다 만난 한국산 과자 맛에 흠뻑 빠져 산다.
따져보니 어느새 내가 “이눔아! 심심하니까 태우지.”하셨던 내 할아버지 나이에 닿았다. 심심초 아닌 심심과자를 즐기는 셈이다.
그 심심한 마음으로 요 며칠새 틈틈이 즐기는 책, 댄 주래프스키(Dan Jurafsky)가 쓴 ‘음식의 언어’다.
책장을 넘기자 바로 만나게 되는 케찹의 유래가 중국이라는 썰(說)부터 사람 살아온 과정과 음식을 엮어 풀어내는 지은이에 해박한 이야기에 절로 빠져 든다. 한마디로 참 재밌다.
그가 음식의 언어를 통해 발견한 사람살이 발전 과정을 설명하며 단정지어 선언하는 말 한마디에 깊게 빠져 본다. <혁신은 언제나 작은 틈새에서 발생한다.>는.
내 할아버지의 심심초와 나의 심심과자 그 세월 사이에서 내가 보았던 숱한 작은 틈새들을 더듬어 보며.
저녁나절, 글라디오스가 빨간 꽃망울을 내밀고 있다. 이젠 여름이다. 심심초를 태우든 심심과자를 즐기든, 작은 틈새를 찾아 즐기는 한 삶은 언제나 여름이다. 아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