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에

살며 내겐 전혀 걸맞지 않는 유혹의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여러 번 그 유혹의 소리들이 진짜 내 것인 줄로 알고 착각했던 때들이 있었다. 돌이켜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게 다 오늘의 나를 만든 모습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나는 언제나 소중하고 감사의 시원(始原)이라는 생각으로.

내 세탁소 카운터 한 쪽 벽면엔 몇 개의 사진들과 시를 새겨 놓은 나무 판넬들이 걸려 있다. 사진들은 내가 찍은 풍경들이거나 가족 사진들이다. 딱 한 개는 야구의 전설적 영웅인 Babe Ruth가 빨래를 담은 hamper에서 낮잠을 즐기는 사진이다. 생각할수록 아린 옛 벗이 세탁소 잘 되라고 주고 간 것이다. 그리고 시 몇 편들은 내가 좋아하는 이해인 수녀의 시를 영역해 걸어 놓은 것들이다.

종종 손님들은 시와 사진들에 대해 묻곤 한다. 카메라의 기종을 묻기도 하고, 렌즈에 대해 묻기도 하며, 시인에 대해 묻기도 한다. 그때 마다 내가 하는 대답이다. “그저 취미이고 좋아하는 것들인데 전문적 지식이 전혀 없답니다. 그저 제 격에 맞는 싼 카메라이고, 시도 그저 제가 좋아할 뿐이지요.” 때론 그걸 팔라고 하는 이들도 있어 아주 난감할 때도 있다.

내가 또 하나 즐기는 취미 하나는 매 주 일요일 아침에 세탁소 손님들에게 띄우는 편지 쓰기다. 거의 15년 가까이 이어져 온 일이다. 이 편지에 대한 이야기는 참 많다. 언젠가 이 편지들을 정리할 여유가 있었으면 하는 바램 보다 아직은 편지 쓰기가 조금 더 이어지기를 바라는 욕심이 더 크다.

아무튼 그 편지 마무리에는 시를 한 편 씩 달려 보내곤 한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편들이다. 때때로 편지를 쓰는 시간 보다 시를 고르는 시간에 몇 배나 많은 시간들을 쓰곤 한다. 주로 영미 시인들의 시편들이지만 때론 한국 시인들의 시를 번역해 보내주기도 한다. 아주 이따금 씩은 내가 쓴 것을 달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사족을 반드시 붙인다. ‘ 시(詩)가 아닌 제 낙서’라고.

그리고 어제 어느 손님에게서 받은 제안이다. 자신을 계간지 Dreamstreets의 편집장이자 시인이라고 소개한 그는 지난 몇 달 동안 내 가게를 드나들고 내 주말 편지를 받아 읽으며 생각 끝에 내게 제안한다고 하였다. 델라웨어 인근의 시인 등 예술가들이 함께 하는 동호인지 같은 것인데 오는 12월호인 겨울호에 내 글을 싣고 싶다는 제안과 함께 시인들이 함께 하는 모임에 참여해 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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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저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난 그저 세탁소 일을 할 뿐이랍니다.’

사실 이런 제안이 처음은 아니었다.

세탁소를 시작한 이래 종종 내가 걸려 넘어져 크게 낭패를 본 사건들은 대개 ‘아이고 세탁소 할 사람이 아닌데…’라는 유혹에 혹한 결과였다.

오늘 저녁 그가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 왔다. 그가 쓴 시 몇 편들과 함께.

유혹에.

시험문제 – 갈릴리 6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22 

그 때에 악마는 예수를 그 거룩한 도성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서, 너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다’ 하였다.” – 마태복음 4장 5 – 6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율법학자들과 장로들과 함께 조롱하면서 말하였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가 보다! 그가 이스라엘 왕이시니,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라지!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을 터인데!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으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시라지. 그가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말이다.” – 마태복음 27 : 42 

이민생활이 오래되면서 점점 잊혀지고 제 생활과는 거리가 먼 일이 되어가는 것들 가운데 하나가 한국 전통명절입니다. 설날이나 한가위같은 명절들 말입니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한인들끼리 마주치는 경우조차 흔치않은 시골에서 사는 저같은 경우에는 한국 명절은 그저 평범한 하루가 되기 십상이랍니다. 

그렇게 2014년 설날이 다가온답니다. 갑오년(甲午年)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갑오 동학혁명이 일어난 지 12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쯤 아주 엉뚱한 상상을 하나 해보기로 하지요. 120년 전에 전라도 고부나 충청도 보은에 살앗던 사람들이, 아니 그 당시 한반도 어디서 살았건 그 때 살았던 사람들이 2014년 오늘의 세상을 다시 살아서 본다면 그들의 반응은 어떤 것일까요? 

좀 더 올라가 보기로 할까요. 이천 년 전에 팔레스타인에서 예수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다시 살아서 오늘날의 모습을 본다면 그들의 반응은 어떤 것일까요? 

온통 기적과 이적들이 넘쳐나는 세상으로 보지 않을까요. 아마 처음에는 너무 놀라서 기절해 다시 죽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그 때 살던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사람이긴 다 마찬가지이므로 시간이 지나면서 이즈음 풍습에 맞추어 살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살다가 이번에는 그 때나 지금이나 전혀 변하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에 또 다시 놀라 자빠질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해본답니다. 

그날 그날 먹고사는 걱정에서부터, 더 좋은 것 더 많이 먹으려는 욕심, 크기와 상관없이 권력을 갖기 위해 안달들을 하며 사는 모습들, 그런 욕심과 욕망을 채우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쩜 이렇게 안변했을까?”하고 놀라 자빠질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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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광야에서 마귀에게 받은 시험 세가지는 바로 천지창조 이래 사람사는 모습들이 엄청나게 바뀌어 왔지만 결코 변하지 않은,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사람들의 모습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는 마.귀의 이 세가지 시험이야말로 결코 변하지 않을 사람들의 모습에 대해 응답하라는 물음이었습니다. 

또한 창조 이래, 또는 인간이라는 종(種)이 생긴 이래 이런 물음과 시험에 대해 “내가 정답을 가지고 있다.”거나 “바로 내가 그 모든 시험을 잘 풀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주장하던 사람들은 차고 넘쳤거니와 오늘날도 도처에 널려 있답니다. 

첫번 째 시험인 ‘돌로 떡을 만들라’는 것은 배고픔의 문제로 부터 시작해서 더 많이 더 잘 먹고 살고자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대한 물음이었습니다. 두번 째 시험인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보아라’라는 것은 절대자인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권력을 부여 받았느냐는 질문으로 권력에 대한 욕구와 두려움 앞에 선 사람들의 모습을 향한 물음이었습니다. 세번 째 시험인 ‘내게 절하면 내가 너에게 주겠다’는 것은 잘 먹고 잘 사는 일과 나아가 자기가 속한 작은 집단에서부터 크게는 국가나 세계의 권력을 쥐는 주체가 되기위한 방법을 알려줄테니 나를 따르라는 물음이었습니다. 

예수시대뿐만 아니라 그 이전 또는 그 이후 오늘날까지 예수가 받았던 이 세가지 시험문제에 “예! 내가 합니다.”라고 선언하고 사람들 앞에 선 이른바 영웅호걸, 황제, 대왕, 왕, 메시야에서부터 오늘날 숱한 정치가들, 종교인들, 경제인들 차고 넘쳐난다는 이야기랍니다. 

지난 글에서 제가 인용했던 요세푸스의 기록에 나오는 숱한 가짜 예언자들, 거짓 메시야들이 예수시대에 넘쳐 났지만 결국 그들을 쫓던 사람들(백성, 민중, 무리) 모두를 죽음의 길로 인도했을 뿐이었지요. 

그 숱한 가짜들의 공통점들은 “내가 (신처럼) 모든 것을 보여주고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선전을 한다는 것이고 그 가짜들에게 언제 어느 곳에서나 쉽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의 속성이 있다는 것인데 이 두가지는 세상 끝나는 날까지 결단코 변하지 않을 사람사는 세상 모습이라는 믿음이 바로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첫걸음입니다.(이것은 델라웨어 촌구석에 사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의 소리이므로 믿거나 말거나, 뜻을 같이 하거나 말거나…그저 제 주장이랍니다.) 

이제 하나하나 짚어보기로 하지요. 

“돌로 떡을 만들어 보라.”는 물음은 두가지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실제 당시 그 시점에서 배가 고팟을(금식중이었으므로) 예수 자신을 향한 것, 두번 째는 당시 사람들의 정말 절실한 배고픔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요구하는 물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광야에서 40일 금식을 했다는 사실은 믿음의 영역을 넘어서라도 실제적인 배고픔의 고통이 있었으리라는 생각은 정말 평범하게 동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성서의 첫 자료들이 만들어졌을 당시)의 상황을 누가는 이렇게 전하고 있답니다.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사도행전 11 : 27 – 30” 

이런 흉년으로 인한 배고픔 뿐만 아니라 당시 팔레스타인에 살던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일상적인 굶주림과 싸워야 했다는 것은 나중에 우리들이 이야기할 주기도문에도 잘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돌을 떡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은 백성, 군중, 무리, 민중들을 규합하고 움직일 수 있는 힘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기적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당시 숱한 가짜들이 내건 기적 행위들이었고, 오늘날에도 이런 기적들을 이야기합니다. 

두번 째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 보아라라는 시험문제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을 때 거의 똑같이 받았던 시험문제이었습니다. 한계가 있는 사람에게 모든 족쇄를 채워 놓고 결과가 빤한 일에 도전해 볼 것을 요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도전이 성공하면 신이 존재를 믿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 역시 두가지로 생각해 봅니다. 권력은 모든 것을 이루어주는 만능 요술주머니라는 생각입니다. 역사이래 권력을 누리려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입니다. 백날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의 교훈을 이야기해 보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 놈들아! 나는 진시황이다.”라는 이들이 넘쳐나는 현상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두번 째는 만일 그 권력을 신이 주신 것이라면 권력으로 뭔 짓을 하던 신이 알아서 돌보아 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실제 역사 이래 이렇게 착각하다가 목이 잘려 나간 권력자들의 이름들을 대자면 한이 없답니다. 

마지막 세번 째 시험문제는 정말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한 물음입니다. 배고픔에 대한 해결, 권력을 가질 수 있는 해답은 바로 이것이다는 마귀의 선언이고 그 선언을 쫓으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간단한 해결책이랍니다. 힘있는 자에게 고게 숙이고 언제나 자기 생각없이 딸랑 딸란 쫓아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역사이래 차고 넘쳐나는 예들이 있는 사람살이 모습입니다. 또한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에게 “아니오!”라고 선언한 것이 바로 예수의 응답입니다. 

이제 그의 응답의 뜻을 알아보려 합니다. 그를 구세주로 믿는 다음 단계의 고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