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유월에

비단 내게만 일어난 일은 아니었으되 돌이켜보니 꿈같은 석달이었다. 익히 알려진대로 미국내 사망자가 10만을 넘어섰고 확진자 수에 이르면 전세계 확진자 수의 거의 1/3에 이르는 숫자인 180만을 넘어섰다고 한다.

내가 사는 동네만 하여도 거의 일만명에 가까운 확진자와 350명이 넘는 사망자 수를 기록하고 있다. 인구 수 고작 백만명이 안되는 동네에서 일어난 일이다. 지난 석달 동안에.

내 나이 서른 초반에 이민 온 이후 이런 저런 변화들을 여러 번 겪어 왔지만 올들어 일어난 일들에 비하니 모두 잔파도들이었다.

며칠 전 내가 주로 집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방을 옮겼다. 서재에 놓인 책상 바로 위에 돌아가신 어머니 사진을 걸어 놓았더니 자꾸 어머니가 나를 보시고 있는 듯하여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사진을 옮길가 하다가 그래도 내 시선이 하루 중 가장 많이 가는 곳에 어머니가 계셔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간혹이라도 혼자 있을 방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그래 생각해낸 것이 아들녀석이 쓰던 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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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녀석이 장가간 이후 거의 창고방 정도로 사용하던 방을 정리하고 어쩌다 책이라도 읽거나 혼자 있고 싶을 때 시간을 보낸 요량으로 작은 책상 하나 들여 놓았다.

그렇게 만난 새 세상이었다. 창문을 여니 새들의 노래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창문 밖 풍경은 제법 큰 화폭의 그림처럼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어진 것들은 무언가 알 수 없는 미안함과 감사함이었다. 그 감사함과 미안함은 거의 같은 크기로 잇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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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와 뉴욕에 있는 아이들 얼굴을 못본 지도 석달이 지났다. 모두들 건강하고 일자리 잃지 않고 제 밥벌이들 하고 있으니 감사하고 웬지 모를 미안함이 따른다.

올 정월에 돌아가신 장인에게 고맙고 미안한 생각도 든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전에 노인 요양원에서 돌아가셔 참 다행이다는 생각에 이르러 감사하기도 하고, 마지막 일년에 대한 미안함이 그 크기만큼 밀려오기도 한다.

그 꿈같던 석달 동안 어머니를 보낸 일만큼 큰 일이 어디 있으랴. 허나 그 또한 감사함이 앞선다. 어머니가 다 태우고 가셨기 때문이다. 그래 또 미안함이다.

그 석달 동안 평생 처음 해 본 씨 뿌려 꽃 피우고 채마 밭 일구어 본 시간에 대한 감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허나 미안함은 여기에도 따른다. 내 어설프고 섣부른 초행길에 싹조차 틔우지 못하고 흙이 된 씨앗들에 대한 미안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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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펴든 책 종교학자 아론슨이 쓴 ‘위대한 스승 예수와 노자의 대담’ 이다.

< 이 두 스승(노자와 예수)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소박한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고 이웃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덕을 누릴 수 있는, 평화로우며 온전한 삶을 주장했다.>

이제 6월, 다시 세탁소 문을 정상적으로 연다.

Covid-19 이후의 세상이 오래 전 선생들이자 오늘의 인도자들의 꿈에 한 걸음이라도 가까이 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유월, 더운 날에

일터의 환경을 바꾼 덕인지 올 여름엔 더위가 매우 더디 찾아 왔다. 스팀 열기와 함께 해야 하는 세탁소 여름을 수십 년  보낸 탓에 내 마른 몸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다.

올 봄 가게를 이전하며 보일러를 사용하면서도 에어컨이 작동할 수 있도록 꾸몄더니 올 여름 호사를 누리고 있다.

바쁜 하루 일과를 시작하려는데 잠자리 한 마리 세탁소 카운터 위에서 늦잠에 빠져 있었다. 더위는 게으름을 허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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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한바탕 소나기가 더위를 식히다.

차마 사진 운운하기엔 부끄러운 유치원 아동이지만 이즈음 깨달은 두 가지.

나는 렌즈를 통해 보고 싶은 것들만 본다는 것과 그나마 내가 보는 모든 것들은 빛이 결정하고 있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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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전 병원 응급실로 실려간 장인을 기다리는 요양원 앞뜰에서 이어진 깨달음 하나.

삶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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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 앞뜰  고목 밑둥은 새 잎을 낳다.

6/ 2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