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금요일(聖 金曜日) 밤,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선생님의 생각을 꺼내 곱씹다.

‘때’가 이른 것은 ‘때가 왔습니다’할 때가 아니라, ‘이제’의 ‘이’ 소리가 나오는 때입니다. ‘이’라고 할 때도 실상은 과거가 됩니다만,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없는 것이 ‘이제’입니다.

우리는 이 ‘이제’를 타고 가는 목숨입니다.

이제가 이제, 이제, 이제, 자꾸 계속 되어도 났다 죽었다 하는 이 이제가 영원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런 뜻으로 보면 우리의 모든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입니다. 새로 나오자 마지막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지금, 오늘이 귀하고 아름다움에 감사하다.

나의 ‘이제’ 뿐만 아니라 아내와 부모와 자식과 이웃들… 그렇게 귀하고 아름다운  ‘이제’를 누리는 사람들의 지경을 넓혀갈 수만 있다면…

기적처럼 집으로 돌아와 엊그제 생일 케익 앞에 앉으신 어머니와 앞 뜰에 핀 봄이 ‘이제’에 대한 감사를 북돋다.

성 금요일과 부활 아침 사이엔 셀 수 없이 많은 ‘이제’들이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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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어찌 알랴?

추수감사절 연휴를 참말 잘 쉬었습니다. Thanksgiving day 전날에 눈이 좀 오고 바람이 불었는데, 그 탓이었는지는 모르겠으되 집에 전기와 인터넷, 전화가 불통이 되었었습니다. 다행히 당일 늦은 밤 전기는 다시 들어왔지만 인터넷과 전화는 주일(오늘) 오후까지 나흘 동안이나 불통이었답니다.

다석강의전화는 휴대전화가 있으니 별 문제가 아니었지만 인터넷이 끊어지니 저녁시간이 몹시 길었답니다. 컴퓨터나 TV를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손에 든 것이 유영모선생님의 ‘다석강의’입니다. 제 정신 차리며 사노라고 틈나면 꺼내들곤 하는 책인데, 모처럼 사흘밤을 끼고 살았답니다.

유선생님의 말씀들을 읽으며 이즈음 두루 흐트러져 어찌할 바를 모르던 생각 조각들이 하나로 꿰어지면서 머리 속이 환해지는 참 쉼을 누렸답니다.

왜 한국교회와 한인교회는 유영모님이 가르친 ‘뜻의 믿음’과는 전혀 다른 방향인 ‘맛의 믿음’만을 쫓게 되었을까?

왜 한인교회와 한국교회에는 ‘예수의 뜻을 쫓아 살고자 했던 유영모’류의 사람들을 보이지 않고, ‘맛 곧 돈과 권세의 누림만을 쫓는 이명박, 문창극, 이인호, 조용기, 김홍도……’류들이 창궐할까?

왜 한국교회와 한인교회는 “지금 멸시받고, 버림받고, 고통 받고 조롱받는 이들에게  조용하라고 윽박지르는 권력 앞에서 조용히 가만있기만 하는 것일까?

왜? 자기 일에 책임지지 않는 권력자들과 제 배불리우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지도 않는 종북주의자들을 양산해내며 정, 경, 군, 관, 언, 학, 종교 등 제반 권력에 빌붙어 사는 악인들은 “피둥피둥 살이 쪄서, 거만하게 눈을 치켜 뜨고 다니(시편 73:4)”는 세상이 되었을까?

왜? “하나님의 백성마저 그들에게 솔깃하여 그들의 물에 흠뻑 젖어 들어서 한다는 말이, “하느님이 어떻게 알랴, 가장 높은 분이라고 세상 일을 다 아느냐?”고 할까?

왜? “그들은 악인이어도, 몸은 항상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가는”(시편 73 : 11-12)” 세상이 되었을까?

이제 저물어가는 2014년 오늘, 제 앞에 놓인 물음들에 대해 유선생님께서는 명쾌한 답변을 내리십니다.

“그러므로 참 예수쟁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인이 되신 후, 유불선(유교, 불교, 선교)을 통달하여 꿰뚫고 그 곳에도 길이 있다하셨지만 끝내 참 예수쟁이로 살다가신 선생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자유, 독립, 통일, 공평, 평등 같은 거창하고 큰 것을 말씀 하시면서도 그것이 구름 같은 것이 아니라 지금 제가 발딛고 사는 현장에서, 내 가정에서,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작은 것 하나라도 이루며 사는 예수쟁이가 되라는 권고였습니다.

비록 “하나님인들 어떻게 알 수 있으랴!”고 떠드는 이들이 세상 주류를 이루고 있는 세상일지라도 말입니다.

모처럼 푹 쉰듯한 추수감사절 기간이었습니다.

인터넷은 다시 연결되어 이슬람 국가(IS), Ferguson사태, 세월호 유가족 등등 ‘하나님이 어찌 알랴?’는 세상은 다시 제 곁으로 왔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