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비어– 전야(前夜) 5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7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마가복음 4 : 21 – 25, 개역개정본에서 

‘강남’이라는 말이 세계 여러나라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게 다가가게 된 까닭은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라는 노래 덕이고, 그  배경에는 구글과 유튜브라는 현대판 통신수단이 있습니다. 십여년 전만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강남의 일부인 잠실을 제가 어릴 적에 어떻게 갔는지 알려 드릴까요.  제 어머님의 외가가 당시 잠실이었답니다. 제가 살던 신촌에서 잠실을 가려면 우선 신촌에서 버스를 탑니다. 지금의 신촌노타리가 당시 버스의 종점이었습니다. 동대문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그 곳에서 전동차를 갈아 탓습니다. 전동차로 광나루까지 가서 나룻배로 갈아 탓습니다. 나룻배로 한강을 건너고 모래사장을 걸어 올라가면 논밭이 이어졌답니다. 그리곤 어머니의 외갓댁 잠실에 가 닿을 수 있었답니다. 꼬박 하루길이었습니다. 언젠 적 이야기냐고요?  1960년대 초였답니다. 

느낌은 옛날 고려적 이야기지만 고작 50여년 전의 일이지요. 

자!  이즈음의 시간 차이는 빠르게 변하지만  옛날 정말 고려적에는 그런 빠른 변화가 있었을까요? 칠백 여년전 고려 말이나 천이 백여년 전 고려 초나 아마 생활의 변화 속도란 이즈음 십년에 미치지 못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하물며 이천 여년 전에는 어땠을까요. 

이런 저런 역사적인 사건들이 이어지지만 실제 보통 사람들의 삶의 변화란 백년 전이나 백년 후나 크게 변한 것들이 없었던 시절이었을겝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삶이 급변하는 어떤 계기들이 있게 마련이랍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보면 제가 중학교 들어가던 해인 1965년에 개통한 제2한강교를 들수 있겠습니다.  이 다리를 놓는데에 약  2년 6개월이 걸렸다면 이즈음 사람들은 “정말이래?” 할 수도 있겠는데 정말 그만큼 걸렸거니와  당시 신촌사람들에게는 정말 신촌(新村)이  새 마을이 되는 새로운 역사의 계기였답니다. 신촌이 더 이상 버스 종점이 아니라 시내 중심가가  되기 시작한 때랍니다. 

다시 이천년 전 팔레스타인으로 넘어갑니다. 

팔레스타인에 살던 다시 유대인들의 삶이 급격한 변화를 격게되는 시초는 헤롯1세가 왕위에 오른 때로부터 로마의 총독시대가 이루어지던 무렵이었습니다.  이로부터 약 70여년에 이르는 동안 그 땅에서는 무수한 반란과 도적(이 도적을 의적 또는  혁명가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들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자칭 메시야라고 하면서 사회 혁명을 꿈꾸거나 사람들을 규합하여 테러를 일삼거나 하는 무리들이 넘쳐나던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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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알렉산더대왕이 “당신의 소원을 말해보시요. 내가 다 들어 드리겠오.”라는 말에 거적깔고 드러누운 노숙자인 주제에 “좀 비켜 주시겠오, 햇볕 가리지 말고….”라고 대답했다는 전설적 이야기의 주인공인 디오게네스로 유명한  견유철학자(犬儒哲學者)들도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많았답니다. 

견유철학들자들의  삶의 태도를 잘 나타내는 유명한 말이 있답니다. 

“나는 내가 배고프지 않을 만큼, 목마르지 않을 만큼 가졌다. 벗지 않을 만큼 입었다. 밖에 있을 때는 저 부자 칼리아스보다도 더 떨지 않고 안락하다. 안에 있을 때는 따듯한데 왜 옷이 필요한가?”  견유철학자(犬儒哲學者)의 시조인 안티스테네스의 말입니다. 

빈정거리며 사회와 등을 지거나 저항하거나 하는 무리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유대는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젖과 꿀이 흐르는 기후는 아니랍니다. 특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쪽 유대 지방은 그리 농사에 적합한 땅은 아니었답니다. 그에 반해 갈릴리 호수 주변의 땅들은 농사에 적합했다고 합니다. 그 지역의 농산물들이 유대의 젖줄이 되었던 셈이지요. 

그런데 로마시대 농사를 짓는 농민들의 수입은 수확물의 반도 가져가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이마저도 자기 농토를 가진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만큼 각종 세금으로 이들에게 뺏어가는 것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농토의 많은 부분들은 예루살렘 중심의 권력자들의소유였고 농지는 대부분 소작농들이 경작을 하는 현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를 살던 소작농들을 더욱 어렵게 했던 것은 당시 부자들이 즐겨 사용한 매점 매석행위였다고 합니다.  농사가 잘 된 해에 마구 거두어 들여 창고에 쌓아 놓았다가 흉년이 들 때 엄청 높은 값에 파는 일들이었는데  당시 기록에 보면 16배 정도의 이득을 남기기도 하였답니다. 

당시 떠돌던 유언비어에는 이런 것들이 있답니다. 

“어떤 랍비의 일년 수확은 예루살렘 시민이 십년  동안 먹을 정도이었다.”, “마을 천개와 배 천 척을 가진 부자들도 있었다.”, “성전에 바치는 십일조가 송아지 만 삼천마리인 부자가 있었다.” (안병무가 쓴 갈릴래아의 예수에서) 등등이랍니다.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더 가질 것이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마가 4 : 25)라는 성서의 말이 그대로 적용되는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로마에게는 인두세 및 각종 간접세들을 내야하고 유대 종교 자치기관에게는 성전세(이 세금은 빈부의 차이없이 유대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냈답니다.) 와  십일조세(당시만 하여도 정확히 지켜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를 내야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점점 살기가 팍팍해 갔답니다. 

그렇게 하루살이조차 힘들어진 사람들에게 수많은 “하라”와 “말라”라는 율법들은 애초 지키기 힘든 굴레였을 뿐입니다. 

먹고 살기도 힘든 판국에 종교적, 전통적, 관습적 죄인이 되어 사는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