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보일배(三步一拜)

오체투지(五體投地)나 삼보일배(三步一拜)라는 말들은 제게 좀 낯선 말들이랍니다. 제가 그런 행위들을 해본적도 없거니와 귀에 익은 말들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 비롯된 이 말들은 제 일상과는 거리가 좀 있답니다.

금강경이나 반야심경 같은 경전들의 번역본들이나 벽암록 같은 선문답집 등을 곁에 두고 읽는 까닭은 그저 제 지적 유희일 뿐이지 불교의 심오한 바닥을 느끼고자하는 지경은 아니랍니다.

그러니 오체투지(五體投地)나 삼보일배(三步一拜)같은 수행방법들은 저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랍니다.

사실 108배니 천배니 삼천배니 하는 말들은 소설속 또는 야사 등에서 들어보았지만 오체투지니 삼보일배니 하는 말들을 들은 것은 근자에 이르러서입니다.

세월호 희생자인 고 이승현군의 아버지 이호진씨와 누나 아름양이 팽목항에서 광화문을 향해 삼보일배 걸음을 내디딘지 백일을 맞는답니다.

삼보일배

세걸음 걷고 큰 절 한번하면서 520km의 거리를 온몸으로 걷고 있는 것이지요. 지난 2월 23일에 시작한 이 고행의 걸음은 오는 이달 중순경 광화문에서 끝을 맺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무릇 모든 종교 수행 방법에는 고행이라는 수단이 있습니다. 세 걸음 걷고 한번 큰절을 하는 삼보일배만 하더라도 자신이 지은 모든 나쁜 업을 뉘우치고, 깨달음을 얻어 모든 생명을 돕겠다는 서원하는  불교의 수행법입니다.

삼보일배는 문자 그대로 세걸음 걷고 절 한번 하고라는 뜻 위에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의 삼보(三寶)에 귀의한다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곧 부처님께 귀의하고, 진리에 귀의하고, 수행자에게 귀의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호진씨 부녀의 삼보일배 고행이 비단 그런 종교적 수행만은 아닐 것입니다. 두 부녀의 고행길은 자신들이나 가족들의 구원이나 깨달음을 위한 수행만은 아닐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아마 지난해 4.16일 이전의 이호진씨 부녀에게 이런 고행길이란 차마 꿈속에서라도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들 부녀가 이런 고행과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 일이 일어났을까, 그 의미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예수쟁이인 저는 이런 고통의 의미를 성서에게 묻게 된답니다.

성서 욥기는 바로 이호진씨 부녀와 같은 처지에서 육체와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해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학작품입니다.

욥기의 주인공인 욥은 죄없는 자들이 당해야만 하는 고통과 그 고통을 정당화하는 체제(신학, 신앙)에 대한 그리고 그런 종류의 신(고통을 정당화하는 이들이 말하는 신)에 대한 반항이자 도전입니다.

그러나 욥기 저자는 끝내 욥이 당하고 감내해야했던 고통에 대한 이성적이고 합리적 또는 설득력있는 설명이나 해석을 내리지 않습니다. 욥기는 죄없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란 가장 비인간적 상황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바탕에서 그것을 이겨내야만 하는 몫은 바로 사람에게 달려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 신이 함께 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호진씨 부녀가 사개월여에 걸친 520km 삼보일보의 고행을 광화문에서 마친 후에도 아마 두 부녀의 고통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지난 일여년 동안 세월호 유가족들과 그들과 함께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바램들이 이루어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삼보일배의 고행은 새로운 시작에 대한 희망이 될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감사 – 지혜 2

(당신의 천국 – 일흔 네번 째 이야기)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나는 넋을 잃었다. 그대 눈짓 한번에 그대 목걸이 하나에, 나는 넋을 잃고 말았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그대 사랑 아름다워라. 그대 사랑 포도주보다 달아라. 그대가 풍기는 향내보다 더 향기로운 향수가 어디 있으랴! 나의 신부여! 그대 입술에선 꿀이 흐르고 혓바닥 밑에는 꿀과 젖이 괴었구나. 옷에서 풍기는 향내는 정녕 레바논의 향기로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울타리 두른 동산이요, 봉해 둔 샘이로다. – 아가 4 : 9 – 12, 공동번역 

이런 말들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실 겝니다. “고사리도 꺾을 때 꺾어야 한다.”라거나 “썩은 새끼줄도 잡아 당겨야 끊어진다.”같은 말들 말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물려 준 지혜 곧 속담입니다. 이런 속담이나 격언들이 우리 민족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것은 아니지요. 

일테면 “잔잔한 바다에서는 좋은 뱃사공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영국 속담도 있는 것이고, “네가 태어났을 때, 너는 울었고 세상은 기뻐했단다. 네가 죽을 때에는 세상이 울고 네가 기뻐할 수 있는 삶을 살거라.”라는 인디언 속담도 있는 것이지요. 

그런가하면 펄벅이 남긴 말 “힘은 희망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있고 용기는 속에 있는 의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라는 것처럼 유명한 사람들이 남겨놓은 명언들고 많지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의 말들은 대대를 걸쳐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서구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전 세계로 파송되어 가며 제일 먼저 현지민들에게 전했던 성경책은 잠언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답니다. 세상 어느 민족에게나 인생 살아가는 지혜의 책은 낯설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기독교에 대한 이질감을 희석시키는 역할을 한 책이었다는 말입니다. 

잠언이란 책 이름은 중국어 성서이름 箴言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지요. 영어성경의 이름 Proverbs는 물론이거니와 그 어원인 라틴어 역시 격언, 속담, 금언 등의 뜻으로 쓰인 것이지요. 그러나 중국어 번역 잠언이 더 뜻이 깊다는 생각을 해 본답니다. 잠(箴)은 바늘 또는 침(鍼)이라는 뜻이거든요. 바늘이나 침으로 꼭 찌르듯 정신을 일깨워주는 말씀의 책이라는 이름이 좋다는 것이지요. 또 어떤 이들은 “잠을 부르는 책”이라고 부른다고도 하더군요. 

wisdom

구약성서에 있는 이른바 지혜서들은 잠언, 욥기, 전도서, 아가 등입니다. 이 지혜서들과 율법서와 역사서들과의 근본적인 차이는 야훼 하나님과의 계약을 내세우느냐 아니냐에 있습니다. 율법과 역사서의 기본은 계약정신에 입각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행위들과 계약백성들의 행동에 대한 이야기인데 비하여 지혜서는 이런 계약사상 또는 계약정신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지혜라는 말이나, 속담과 격언 또는 금언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살면서 느끼고 깨달은 것들을 사람들이 남긴 것임으로 야훼 하나님이 끼일 자리가 없는 말이기도 합니다. 동서고금 어느 민족에게나 전해오는 속담들과 격언들이 야훼 하나님 없이도 이어져 온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서의 지혜서들은 자칫 이렇게 사람 중심으로 빠질 수도 있는 지혜 이야기들을 비록 들어나게 강조하지는 않지만 야훼 하나님의 계약정신과 계약법과 연결시켜 놓았답니다. 지혜의 근원이 사람이 아닌 야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들이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잠언으로 알려져 있는 잠언은 솔로몬을 비롯한 가나안 정착 초기의 사사시대로 부터 입으로 전해져 오던 이야기들과 포로기, 포로기 이후 시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들을 모아 포로기 이후인 기원전 450년에서 350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 가르침을 들어 학식이 더해지고 슬기로운 사람은 남을 이끌 힘을 얻어 잠언의 깊은 뜻을 풀이해 주고 현자의 말이 품은 뜻을 깨우쳐 준다. 야훼를 두려워하여 섬기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어리석은 자는 교육을 받아 지혜로와지는 것을 멸시한다.”(잠언 1 : 5 – 7)는 말처럼 모든 지혜의 근본은 야훼 하나님을 아는 일에 있다는 잠언의 교훈들은 자칫 지혜 만능주의에 빠질 우려도 있답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 식의 해석이 가능한 부분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특히 부유함과 가난함에 대한 금언들은 그런 수렁으로 안내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답니다. 잠언의 말들을 만들고 전해준 계층들이 초기의 사사(또는 씨족 부족의 족장)들로 부터 왕, 나중에는 궁중이나 성전의 서기관 등 부를 누리는 쪽의 입장에서 바라본 지혜의 결과물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또한 짧고 간명하게 표현된 지혜의 말들 속에 자칫 당시의 부조리 또는 부정직한 현실들을 쉽게 감출 수도 있는 함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잠언의 부족한 부분들을 매워주는 책들은 바로 욥기와 전도서입니다. 

욥기는 지혜서인 잠언이 야훼를 믿고 착하고 부지런하면 복받고 잘 살고, 믿지 않고 악하고 게으르면 벌 받고 못산다는 일률적인 잣대의 도덕과 지혜 만능주의에 대한 도전입니다. 

사는 모습이나 삶의 자세로 볼 때 도대체가 고난을 받아야 할 아무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받는 고통과 고난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잠언을 엮고 믿었던 사람들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현실에 대한 고발입니다. 고통이나 고난 또는 성공에 대한 사람들의 습관적인 믿음이나 단정적 결론에 대한 도전입니다. 

욥기는 왜 비교적 죄없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하는가?라는 물음에 해답을 주지 않습니다. 다만 욥기는 “사람은 사람일 뿐이고, 사람은 아무 것도 바라는 것 없이 그러나 스스로 기꺼이 야훼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따라야 한다.”는 신앙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말로 시작되는 전도서는 자칫 회의주의자의 책으로 오해할 수도 있답니다. 우리 말로 “헛되다”로 번역된 말의 원뜻은 무의미하다, 무익하다, 공허하다라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자연이 시간이 지나감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지루한 반복을 이어가듯이 사람들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이고, 지혜, 쾌락, 수고, 부귀, 여자(남자) 등등 사람들이 욕심을 부리고 추구하는 것 모두 부질없으며, 불의, 억압, 위험, 죄악 그리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이렇게 분명한 한계 속에서 사는 하루하루의 삶가운데서 먹고 마시는 일부터 모든 일상에 감사하며 살라고 권고합니다. 또한 인과응보의 법칙에 매달리지 말고, 삶의 불확실한 상대적 가치들을 즐겁게 추구하며 살 것을 권유합니다. 

마지막으로 아가서에 대한 해석이나 주석들 역시 많습니다. 또한 해석하기 어려운 책이라는 말들도 합니다. 신랑은 하나님, 신부는 이스라엘로 이해하는 유대의 전통도 있고,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신부는 교회라는 바울을 비롯한 기독교인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신부는 신부, 신랑은 신랑으로 읽고 이해함으로 우리들 각자의 가정생활에서 사랑하는 부부관계를 일상화 시킬 것을 강조한 책으로 이해한다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지혜서 이야기 이렇게 맺습니다. 

이제 우리들의 이야기,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구약 이야기들의 마지막입니다. 종말론, 종말문학, 묵시문학, 묵시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