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

어제나 오늘이나 욕심의 끝은 없다. 그 욕심 쫓다 보니 일이 제법 커졌다. 애초 부엌이나 조금 손대어 고쳐 볼 요량이었는데 그만 일이 커져 버리고 말았다. 다 버리지 못한 욕심 탓이다.

그렇게 시간에 쫓기다 맞이한 새해 첫 날, 장기 요양 시설에 계시는 아버지와 제법 긴 시간을 함께 보냈다. “이젠 말하기도 힘들고 귀찮다”고 하시는 아버지는 “아버지, 오늘은 정월 초하루… “라는 내 말에 “정월 …초하루, 정월… 초…하루…”를 몇 번 되뇌이셨다.

올해는 호랑이해, 1926년생 내 아버지가 여덟 번 째 맞이하시는 호랑이해이다. 두어 달 후면 꽉찬 만 아흔 여섯, 우리 나이 아흔 일곱 그야말로 백세 나이가 욕심이 아닌 아버지를 생각하다.

내가 세탁소를 막 시작할 무렵이었다. “얘야! 이 동네 이름이 Newark이구나. 여기가 너의 새 방주(New Ark)가 되길 바란다!” 따져보니 그 말씀을 하셨을 때의 아버지의 나이보다 지금의 내 나이가 훨씬 많아졌다.

그리고 오늘 아침 동네 뉴스. 거의 대개의 뉴스들이 어둡다만 오늘자 News Journal도 크게 엇나가지 않는다.

델라웨어 공중보건국(Delaware Division of Public Health)은  지난 주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 수가 급증했으며 지난 수요일에만 하루 3381명의 확진자가 발생하는 등 Covid 팬데믹 이후 가장 높은 수의 감염자가 생겼다고 하였다. 또한 John Carney 주지사는Delaware주는 1월 3일 월요일부터 비상사태에 들어가고 정부가 운영하는 건물에 일반인 출입을 금한다는 발표하였단다. 모처럼 활기를 띠었던 UD(델라웨어 대학교) 겨울 학기도 전면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 한단다.

날씨는 예년에 비해 따듯하지만, 새해 첫 뉴스는 몹시 춥고 어둡다.

곰곰 이제껏 내가 맞아 온 새해 아침을 돌아본다. 아버지에게 들었던 새해 경험들도 되새겨 본다. 더하여 오래된 옛사람들이 남긴 새해 격언들도 새로 새겨본다.

그렇게 다시 만난 내 아버지에 대한 기억.

언제 어디서나 사람사는 세상에는 New Ark(새 방주)은 반드시 준비되어 있다는 생각을 해보는 새해 첫날 늦저녁,  아주 오래 전 옛사람의 말 한마디 되새겨 새해 욕심을 품어 본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2022년, 새해 나와 이어진 모든 사람들이 함께 누리는 하느님 나라를 꿈꾸어 보며. 이런 꿈의 욕심은 끝이 없어도 좋겠지.

어제 밤, 아내와 함께 한 공원 풍경처럼.

DSC03234 DSC03239 DSC03273 DSC03275 DSC03303 DSC03322 DSC03324DSC03334 DSC03338

욕심에

내가 잘하는 것 딱 한 가지, 잠을 참 잘 자는 습관 아님 버릇이다. 통상 밤잠 여섯 시간, 낮잠 삼십 분 , 정말 꿀잠을 잔다. 낮잠이든 밤잠이든 누우면 그만 깊은 잠에 빠져들고 딱 정해진 시간이면 눈을 뜬다. 세상 무너지는 걱정이 코 앞에 있어도 누우면 그냥 잠에 빠져든다.

그런 내가 간밤에 잠을 설쳤다. 깊게 잠들을 시간인 새벽 세시에 눈을 떠 그대로 아침을 맞았다. 그렇게 깨진 리듬으로 하여 뒤숭숭하게 하루 해를 보냈다. 가만히 따져보니 모두 내 욕심 탓이다.

지난 토요일에 찾아 뵌 아버지는 좁은 아파트 방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당신의 삶에 답답함을 토로하셨다. 이젠 그 답답함조차 다 그대로 받아 들이실 나이에 대해 말하는 내 이야기는 아버지에게 뿐만 아니라 내게도 그냥 공허할 뿐이었다.

이튿날, 아내와 함께 Longwood Garden 정원 길을 걸으며 더 늦기 전에 부모님 모시고 화사한 장식으로 꾸며진 이 정원을 함께 즐겨야 하겠다는  생각을 굳혔었다.

그리고 어제 정원이 비교적 한가한 아침 시간에 부모님을 모시고 정원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아이처럼 마냥 좋아하셨고, 어머니는 세상 꽃구경 다했노라시며 즐거워 하셨다. 한식당이 좋겠다는 어머니 생각에 따라 나눈 점심 밥상에서 두 분은 평소보다 많은 양의 식사를 하셨고, 그냥 좋다는 말씀을 이으셨다.

DSC09215 DSC09217 DSC09219 DSC09221 DSC09224 DSC09229 DSC09232 DSC09236 DSC09237 DSC09239 DSC09241 DSC09244

딱 거기까지였다. 어머니의 기억의 방은 그 즐거움을 담긴엔 이미 꽉 채워져 있었고, 아버지의 삶은 지난 토요일 좁은 아파트 방안으로 돌아가 있었다.

어제 늦은 저녁까지 함께 했던 시간들에 대한 기억은 어머니에겐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어제 밤 내가 잠을 설친 까닭은 그래 모두 내 욕심 탓인게다.

그래도 그저 고마운 것 하나, 어머니가 아직은 아들 며느리 얼굴과 목소리 익히 알고 그저 고맙다는 말씀 이어가는 일.

어제 아내가 어머니를 웃게 했던 한 마디, ‘어머니, 봄에 꽃 필 때 다시 와요!’

늦은 밤,정호승의 시 하나 눈으로 읽다.

<어머니 장독대 위에/ 정한수 한 그룻 떠 놓고 달님에게 빌으시다.>

오늘 밤은 깊게 잠을 잘 수 있을게다.

 

욕심에

새 달부터 새 장소에서 영업을 한다는 이전 안내문을 붙이자 “내가 뭘 도와줄까?’ 묻는 이들이 많다. 직장 일을 쉬더라도 이사 일을 돕겠다는 젊은이도 있고, 교회와 동네에 자원봉사자들을 모으겠다는 이도 있다. 더러는 이전 비용을 염려하며 전보다 더 많은 세탁물을 가져오는 것으로 돕겠다는 이들도 있다.

이즈음 이런 저런 어수선한 마음을 달래주는 고마운 얼굴들 떠올리며 주일 편지를 쓰다.

2-10

지난 주 어느 날인가 네 다섯 살 쯤 되어 보이는 꼬마 아이가 제 아빠 손을 잡고 세탁소에 들어 섰답니다. 아이는 무언가에 아주 토라진 듯 입을 삐죽히 내밀고 있었습니다. 아이 아빠에게 허락을 받고 아이에게 막대사탕 하나를 쥐어 주었답니다. 아이의 얼굴은 이내 세상 다 가진 듯 환하게 바뀌었답니다. 그리곤 그 환한 얼굴로 컨베이어에 걸린 옷들이 돌아가는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답니다.

그런 아이 모습을 바라보며 순간 넋이 나간 저도 잠시 아이가 되었었답니다. 딱 그 꼬마 아이 쯤 나이였을 때 제 아버지의 등에 업혀  잠 들었던 기억이 되살아 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날 오후 내내 제 생각엔 지난 시간들이 마구 스쳐 지나갔답니다. 잠에 빠진 어린 저를 업고 걸으셨던 아버지는 이제 아흔 중반 나이에 이르셨습니다.

유년이 지나 소년을 거쳐 청년이 되어가며 저는 꿈을 꾸었었답니다. 시를 쓰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꿈이었답니다. 아직 그런 꿈을 버리지 못했을 때에 아내를 만났습니다. 그 시절 아내의 꿈은 노래하고 춤을 추며 사는 것이었답니다.

그리곤 어찌어찌하여 우리 부부는 델라웨어 뉴왁에서 세탁소를 하기 시작했답니다. 딱 30년 전인 1990년 7월이었습니다. 제 성씨인 Kim과 아내의 성씨인 Lee의 첫 글자를 묶어 K&L Cleaners라고 간판을 걸었었답니다.

그 날 밤, 막대사탕 하나로 세상 다 가진 듯 행복한 얼굴이었던 아이를 생각하며 저는 꿈을 꾸었답니다. 시 쓰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결코 대단한 일이 아니고, 그저 살아가면서 느끼고 고백하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꿈을 꾸었답니다.

그것이 비록 큰 욕심일지언정 꿈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생각으로.

당신의 세탁소에서.

욕심에

얼굴 가득 찡그린 마음 담은 채
제 애비 손 잡고 내 가게 들어 선 꼬마 아이
막대사탕 하나 쥐어 주니
세상 다 가진 얼굴이다

그 모습에 홀려 꿈을 꾼다

먼 훗날 꼬마 아이
이 도시의 거리와 풍경들
가족과 이웃들
사진첩 넘기 듯 옛일 생각할 때
비록 얼핏 스쳐 지나가는 배경일지라도
사람 좋은 얼굴 세탁쟁이로 남을 수 있다면

때론 욕심이어도
꿈은 아름다울 수 있으므로.


One day last week, a child who looked to be four or five years old held his dad’s hand and walked into the cleaners. He pouted his lips, maybe because he was upset about something. With his dad’s permission, I slipped a lollipop into his hand. His face softened into a grin, as if it meant the world to him. Then, with a beaming smile, he looked at the clothes hanging on the moving conveyers with bewitched eyes.

While I was watching the boy, old memories led me to become a child for a moment. That was because he brought to me an old memory that I had fallen into sleep on my father’s back when I was about his age.

Throughout the afternoon that day, a flood of thoughts and memories of the past coursed through my mind. My father, who walked with me on his back, is in his mid-nineties now.

When I became a young man, after going through my infanthood and adolescent period, I had a dream. It was a dream of becoming a poet. Before I gave up the dream, I met my wife. At that time, she dreamed of living her life in singing and dancing.

Then, one thing led to another, and my wife and I began to run the cleaners in Newark, Delaware. It was in July 1990. I named it “K&L Cleaners” after the first letters of my last name “Kim” and my wife’s last name “Lee.”

That night, thinking about the boy who became happy with a lollipop, I dreamed about the thought that writing poems, singing and dancing are not big deals, but they are simply to feel and to express one’s life.

And the thought that dreams are beautiful, though they may be big greed.

From your cleaners.

My Greed

With a face filled with a frowning mind
A little boy who walked into my store holding dad’s hand,
When I slipped a lollipop into his hand,
Changed his face as if he owned the world.

I’m dreaming enchanted by the changes in his face

Some day in the distant future, when the little boy
Will think back, as if leafing through an old picture album, on the past times
Streets and scenery of this town, and
Families and neighbors,
Even as a part of the passing background,
I’d have been remembered as a friendly-looking cleaner.

Sometimes, though greedy,
Dreams can be beautiful.

 

욕심(慾心) 에

달포 전 일이었다. 잠자리에서 일어 났는데 몹시 어지러웠다. 멀쩡하게 잠 잘자고 일어나서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 ‘괜찮아지겠지’ 하며 조심스레 아래층으로 내려왔는데 영 서있지 조차 못할 지경이었다. 이어지는 심한 구토 증세로 그만 소파에 눕고 말았다. 그렇게 두어 시간 누워 있고 나서야 어지럼증은 가셨다.

아내가 family doctor에게 전화를 해 증상을 이야기했더니 일주일 후에나 오라고 했다. 딱히 emergency로 병원을 찾을 정도는 아닌 듯하여 정해진 시간에 의사를 찾기로 했었다.

느닷없이 처음 맞는 내 몸의 이상 증세에 나는 좀 당황했었다. 솔직히 나는 내 몸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지한 편이다. 계절 따라 이따금 찾아오는 감기 몸살이나 어쩌다 한 번 씩(? 이제껏 평생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지만) 앓아 본 적 있는 복통 정도가 내 몸이 알고 있는 병의 전부였기에 그저 시간이 지나면 몸은 늘 정상으로 돌아온다는 무지한 믿음을 신봉하는 편이었다.

이웃간의 대화 속에서 흔히 듣는 병명이나 약명들에도 나는 거의 무지하다. 약명은 커녕 그 흔한 바이타민 종류에도 무지하다. 그나마 최근에 이르러 아내가 챙겨주는 바이타민을 이따금 먹기는 하지만 그게 무언지도 모르거니와 아내가 잊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이른 아침에 느닷없이 찾아온 어지럼증에 나는 좀 쫄고 있었다. 말이 family doctor이지 의사란 나와는 참 거리가 멀었다. 내가 찾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 찾아온 thyroid 증세와 나이 들어 함께 하는 혈압 문제로 아내가 자주 찾아야만 하는 아내의 의사였을 뿐이다.

몇 해전 봄에 뒷 뜰 잡목들을 정리하다가 poison ivy로 온몸에 번진 두드러기와 가려움 증상으로 의사를 찾았을 때, 의사는 몇 가지 기본적인 몸에 대한 검사를 받아 볼 것을 내게 권유했지만 나는 poison ivy를 치료하는 약을 받아오는 것으로 그 권유를 가볍게 무시했었다. 이제 나이도 있고하니 바이타민 c던가 d, 아니면 e던가를 권유하는 의사의 소리도 한 귀로 흘렸었다.

아무튼 일주일 후에 찾아간 의사는 이런 저런 검진 후에 내 몸에 느닷없이 찾아왔던 어지럼증은 단순 바이러스 감염 현상이라는 판단을 내리며 혈액검사를 비롯한 몇가지 기본적인 검사를 받아 볼 것을 권유했었다.

그 검사 중에는 colonoscopy가 있었다. 집에 돌아와 colonoscopy 곧 대장 내시경 검사가 뭔가하고 찾아보니 하루 전에 온 종일 굶고 뱃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빼내고서야 받는 검사란다.

마침 오래전에 계획했던 여행이 코 앞에 있었던 터라 검사는 좀 뒤로 미루자 하였다.

그리고 어제, 나는 그 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아주 작은 양성 종양이 발견되어 제거했고 대체로 양호하다는 판단이었다.

어제 그 검사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환자복으로 갈아 입고 대기실에 누워 혈압 체온 등 이런 저런 검사와 수액 주사를 놓던 피부색이 까만 간호사와 흰색 보조 간호사 모두 매우 수다스러웠다.

나에 대한 기본 정보들과 나와 가족 병력을 묻고 난 그녀들은 내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그녀들의 묻는 의도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되 나는 내가 사는 동네 이름을 대었다. 그녀들은 소리내어 웃더니 내 본래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단다. 그제서야 나는 ‘한국’이라고 답했다.

이어지는 그녀들의 물음은 ‘동계 올림픽’과 ‘서울’에 대한 것들이었다. 물음을 이어가는 앞뒤 이야기로 보아 그 전날에 있었던 Super Bowls 중계 때 전파를 탄 평창 동계 올림픽 광고 영향이 컷던 듯 하였다.

한국뉴스를 보면 내가 이해 못할 것들이 참 많다만, 평창 올림픽은 평범한 미국 시민들에겐 한국을 가까이 알리는 참 좋은 기회가 될 듯 하다. 아무렴 잘 치루어 졌으면 좋겠다.

수다스런 그녀들이 ‘잠시만 기다리라’는 소리와 함께 사라지고는 의사가 나타가기 까지 한참이나 시간이 지났던 것 같다.

병실 침대에 누워 그렇게 오랜 시간을 누어 있기는 처음인 것 같다는 내 말에 의사는 복되게 살았단다.

그 길었던 시간, 순간으로 찾아온 욕심이 하나 있었다.

언젠간 내게도 다가올 그 시간, 눕지않고 서서 더 큰 욕심으로는 걸으며 그 알 수 없는 시간을 맞을 수 있었으면 하는 욕심이었다.

내 몸에 대한 내 무지함에 비해 나는 아직 괜찮다.

욕심(慾心) 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