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예수를 찾아서

밥이 된 사내 이야기 – 6

<역사속 예수를 찾아서>

지난 이야기에서 성서의 정전(canon)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나를 간략히 말하였다.

문예부흥 이후 인쇄술의 발달과 번역 작업에 힘입어 성서는 급속도로 세상에 퍼졌다.

이후 성서는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자리잡는다. 그러나 팔린 부수에 비해 가장 안 읽히는 책들 중 하나라는 사실도 재미있다.

엄청난 판매량에 비해 성서에 대한 이해나 인식수준은 놀랄만치 낮다. 특별히 한인교회들은 매우 심한 편이다. 평신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설교자들도 신학교에서 당연히 배웠을 성서의 비평학적 이해에 대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이해의 능력조차 없는 이들이 많다.

(이쯤 읽다가 “짜식 니가 뭔데? 니가 뭘 아는데? 아님 너 anti냐? 그러시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대답하고 계속해야겠다. 나는 ‘쟁이 곧 예수쟁이이지 anti가 아니라는 것, 아는 거 별 거 없다는 거, 나는 그저 나라는 거…. 다만 그저 내 생각을 말씀드리고 있다는 것. 그래서 결코 당신의 동조를 얻고 싶다거나, 그렇게 내 생각에 동의해 달라고 구걸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하여 성서란 다른 어떤 것과 비교되지도 않는 비교할 수도 없는 절대적 신앙의 대상이라는 것이 많은 교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내촌(內村)선생의 “성서우상화”에 대한 통박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말이다.

성서가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19세기 들어 일단의 학자들과 문학가들이 역사속 예수에 대한 관심을 갖고 말하기 시작하였다. 실제 이 땅을 살다간 예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는 물음으로 역사적 예수를 찾는 작업들을 시작한 것이다.

조금 지루한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겠다. 학문이란게 사실 좀 따분한 것인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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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트라우스라는 신학자가 <예수의 생애>를 발표한 것이 1835년이었다. 스트라우스는 이 책에서 성서속 예수 이야기에는 신화 곧 전설이 많이 끼어 들었다고 말하고, 이런 역사적이지 않은 사실이 끼어든 것은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이나 제자들이 의도적으로 사기를 쳤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신화적 상상력이 발동한 탓이라고 하였다. 불행하게도 그는 이 책 하나를 쓴 까닭으로 평생 사회로부터 버림받아 격리되어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19세기 후반, 독일에서는 소위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나온다. 이들은 신의 아들 또는 신이었던 예수보다는 권위있는 사람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들이 몰두하였던 사람으로서의 예수 연구에 첫 번째 철퇴를 든 사람은 아프리카의 성인 슈바이처이다.

의사이자 위대한 신학자였던 슈바이처가 “예수의 생애 연구사”를 펴 낸 것은 1906년의 일이다. 슈바이처는 이 책에서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사람이었던 예수는 역사속에 살다 간 예수의 모습이 아니라 그들 곧 자유주의자들이 생각하고 그려서 만든 그들이 좋아하는 예수의 모습일 뿐”(솔직히 슈바이처가 한 본래의 말은 좀 졸립다. 하여 쉽게 풀어 써 본 것이다)이라고 통박하였다.

여기에 “역사속의 예수 연구”에 대해 결정적 쐐기를 박은 사람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들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불트만이란 사람이다. 그의 말을 쉽게 풀어 쓰면 “예수가 어떤 역사적 인물이었는지 그게 무슨 상관이냐? 성서는 오직 예수가 구세주라는 선포에 충실할 뿐이다. 곧 말하는 예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구세주라는 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의 이론은 매우 강력하였다. 적어도 한 세기동안 그의 영향력은 전 유럽을 덮쳤고 한 동안 역사적 예수를 말하는 이들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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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에 무슨 고수가 있겠는가? 고수가 되었다는 순간 벌써 저 아래 후배가 치고 올라와 한 방에 고수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학문아닌가? 딱이 뭐 학문뿐이겠나? 그게 세상 이치이지. 그 대단한 불트만에게 잽을 날리며 “역사적 예수 이야기 없이 어떻게 신의 아들 예수 이야기가 나오랴?”하며 역사속 예수 이야기를 들고 나온 사람들은 다름 아닌 불트만의 제자들인 케제만, 보른캄등이었다. 그 케제만 아래서 대단한 한인 신학자 한 명이 나오니 그가 안병무이다. 안병무 목사 – 이른바 민중신학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연 사람이며 세계 신학계에 한국말 “민중”을 알린 사람이다.

역사속의 예수를 찾아 나선다고 하면서 왜 이리 지루한 이야기를 하는고 하면 이게 내 이야기가 아니고 근 일 백년 이상 썩 대단한 사람들이 찾아 나섰던 길이라는 것을 밝히고자 함이다. 이쯤 하면 또 거룩하신 성도나 정통보수의 깃발을 높이 드시는 높은 분들은 “성서가 있거늘…”하고 말하실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성서는 신앙적 고백의 집산이다.

일테면 “처녀가 애를 낳다”는 사실 하나를 보자. 믿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면 호박씨 까는 소리에 불과할 것이지만 믿는 눈으로 보면 처녀가 아이를 낳은 것은 진실일 수 있다. 나는 사실이라 하지 않고 진실이라고 말하였다. 믿음은 그런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바닷물을 소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과학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고 인증해 보니 그렇게 될 수도 있다”하면 그것은 이미 믿음이 아니다. 믿음이 기적을 만들어 낸다는 말이 다 그런 것이다. 믿음은 그냥 믿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서야 할 것이 있다. 그 믿음이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 하는 물음이다. 역사속 예수를 찾아 나서는 길은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믿음이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하는 판단을 어떻게 내릴 수 있을까? 저마다 제 믿음이 한 수 하는 것인데 도대체 어떤 믿음이 진짜 참 순수 원조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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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럴 때 즐겨 이야기하는 예화가 하나 있다.

이건 중세시대 진짜 있었던 이야기이다. 신심(信心)깊은 수도승 한 분이 계셨다. 평생 수도원에서 절제의 삶을 살며 이 수도승이 연구에 몰두한 일이 있다. 그게 뭐냐고? “바늘 끝 위에 천사가 몇 명이나 앉을 수 있을까?”라는 연구였다. 이 연구로 평생을 산 수도승의 이야기. 지금 우리들의 눈높이로 보면 “이런 미친 놈이 있나?”이겠지만 그는 처절하였을 것이며 진지하였고 그것의 자기의 삶의 목적이라 여기며 살았을 것이다. 웃을 일 하나 아니다. 21세기 이 문명의 땅에서 나는 믿음이라는 허울로 중세의 수도승마냥 정말 미친 짓하는 수 많은 이웃들을 보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신학이란 인간학이란 말이 있다. 다음 글에는 예수의 행태(사실 이런 말은 썩 좋지 않다만, 예수가 살았던 방법 쯤이 좋겠는데, 나도 가끔은 유식한 척하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가 바로 인간학에 초점을 둔 것이라는 말하고자 한다마는 옳은 믿음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 제 “삶의 자리”(이게 또 내 말이 아니고, 신학자들 중 이른바 양식사학자들이 쓴 말이다)에서 제 값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인 것이다.

역사적 예수를 찾아내는 일은 바로 그 옳은 믿음으로 가는 길을 밝히는 일이다.

오늘의 사족: 진실과 사실, 그 차이와 차이의 폭을 아는 일, 그게 바로 믿음이다. 이거 참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믿으면 다 된다고 한다. 나는 그 말에 그저 웃는다.

다만 차이와 폭 사이에 제사밥이 없다면, 그 제사밥에 눈독 들이는 세력이나 개인이 없다면 나도 동의하겠다. 믿으면 다 된다는 말에.

성서 무오론(無誤論)

밥이 된 사내 이야기 – 5

<성서 무오론(無誤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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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일곱 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한 교회는 교부들의 주석들로, 성서해석의 기준으로 삼으며 교회의 권위를 드높여 갔다. 교회의 권위가 단단히 세워질수록 정전화(正典化:canon)된 성서는 일 점 일 획도 잘못이 없는 책으로 규정되어 졌다. 성서 무오론(無誤論)이 확립된 것이다. 더불어 성서는 교회의 지침서 나아가 윤리 생활의 교본으로 새로운 율법책이 되어 갔다.

처음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손으로 써서 두루마리 형태로 남긴 성서는 한 두루마리에 기껏해야 한 두 권의 책의 분량을 담아 낼 수 있었다. 인쇄술에 앞서 발달된 것은 장정술(裝幀術)이었다. 오늘날의 책처럼 면을 첩첩으로 쌓는 장정술인 코덱스(codex) 방식이 개발되자 신약성서뿐 아니라 방대한 구약성서까지 한 권으로 묶어 펴낼 수 있게 되었다. 하나의 묶음집으로써 성서를 펴낼 수 있게 되자 이것을 만들고 보관하는 새로운 직업이 나타났다. “필사자”라고 불리었던 전문적 성직자들이 그들이다. 그들과 함께 발달한 것이 “필사학”이다. 기껏 베껴 쓴다는 뜻의 “필사”가 어찌 학문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그들은 단순한 필경사가 아니었다.

처음 기록된 경전들은 띄어쓰기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오늘날의 장(章) 절(節) 구분은 물론 되어 있지 않았고 구두점조차 없었다. 또한 기록한 이들의 편의에 따른 약자 표시는 거의 암호에 가까웠다. 오늘날 인터넷 세대들이 쓰는 약자들, 일테면 “u” 는 ”you”이고, “brb”는 ”be right back”을 말하지만 한 세기 전 사람들에게는 암호이듯 처음 성서의 약자(略字)들은 그렇게 전해져 왔던 것이다. 띄어쓰기가 없는 문장해독은 더욱 어려운 것이었다. 일테면 “GODISNOWHERE”를 “God is now here(신이 여기 계시다)”라고 읽을 수도 있으며 ”God is no where(신은 어디에도 없다)“라고 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같은 소리의 다른 뜻을 받아 적었을 경우는 정말 난감한 경우이다. 희랍어 ”우리들(hemeis)”을 “너희들(humeis)”로 받아 적은 경우를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he와 hu는 똑같은 발음 [hi]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사자“들은 전문적 지식인이어야만 하였다.

오늘날처럼 성서에 장(章)이 구분된 것은 13세기 초기의 일이고 절(節)이 구분된 일은 16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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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적 지식인으로서 “필사자”였던 성직자들에게 덧붙여진 권위가 있었으니 본문을 변형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그들은 전해 오는 여러 다른 필사본들을 비교하고 비평하며 종합하기도 하였고, 뜻이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는 낱말들을 바꾸기도 하였으며 불경스런 어투를 빼거나 의미를 더하기 위해 새로운 말을 덧붙이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전문적 지식층이 된 필사자들은 치열한 학파적 논리싸움으로 성서를 그들만의 전유물로 삼기에 이르렀다. 먹고 살기 바쁜 무식한 보통 사람들에게 성서는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그러나 누리는 계급이 된 지식층들은 그 권위를 받들어 줄 아래 계급이 필요하였다. 그들은 무지한 보통사람들이 자신들의 고귀한 업적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그림 성서를 만들게 된다. “그림 성서” 중세 교회시대의 희화화된 모습의 단면이다.

인쇄 기술의 발달이 이루어지던 무렵 일어난 종교개혁은 성서학 나아가 성서연구학의 일대 혁명을 초래하기에 이른다.

 

<오늘의 사족> : “필사자” 곧 중간자이며 매개자이다. 이것과 저것을 이어주는 자이다. 그 뿐, 제가 한 노릇의 대가만 받으면 만족해야지.

그가 곧 하늘이 되고자하면 망하는 법. 그 이치 모르고 “내가 곧 법”이라는 필사자들이 오늘도 판을 친다.

또 다른 쪽의 문제 하나.

필사자 곧 매개자를 하늘로 우기는 광신도들. 왈 미친…

성서의 정전화(正典化:canon)

밥이 된 사내 이야기 – 4

<성서의 정전화(正典化:canon)>

사건을 만들고 말하기를 즐겼던 예수는 이야기꾼이었을 뿐 글쟁이가 아니었다.

그는 단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이야기-그가 한 말, 그가 행했던 일들, 그에 대한 무성한 소문들-는 입에서 입으로 바람타고 떠돌며 전해졌다.

제일 처음 예수 이야기를 글로 써서 기록한 사람은 글 깨나 배운 바울이라고 한다.

예수보다 열 대여섯 살 아래였던 바울은 생전의 예수를 만난 적이 없었던 듯하다. 그가 예수를 만난 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전 유대지역에 떠돈지 약 두 해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는 부활한 예수를 만났고, 그 만남으로 하여 그에게 사로잡힌 바 되었다고 쓰기 시작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배운 이들이 쓰는 글들은 읽기 어렵다.

불행하게도 갈릴리 호수가를 헤매던 예수의 모습은 바울의 관심 밖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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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오직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 “예수가 짊어진 십자가사건은 곧 신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전파하는 일에 전 생을 바쳤다.

타고난 이론가이자 조직가였던 바울은 “일하고 말하던(선포하는) 예수”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바울 자신이 말하고 전해야 할(선포된) 예수에 대한 기록”에 전념하였다.

무슨 말인고 하면 김아무개가 살아생전 무슨 일을 하다가 그렇게 죽었다하는 사실을 말하는 것보다는 김아무개가 살아서 이런 일을 하였는데 내 생각에는 그가 이런 뜻에서 그렇게 살았고 또 그렇게 죽었다는 자기의 생각을 말하였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울이 처음(초대) 교회들을 향한 설교의 형태인 편지글로 남겨 전해졌다. 이 때가 대략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후 이 삼 십년이 흐른 뒤(서기 50-60)였다.

초대교회의 기둥들인 야고보(서기 62년경) 베드로(서기 64년경)와 바울(서기67년경)이 죽은 후, 입으로 입으로 전해지던 살아 생전의 예수 이야기들을 기록한 첫 번째 책 마가복음이 서기 67년에서 74년 사이에 쓰여졌다.

이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서기 80년대 추정) 요한복음(서기 90년대 추정)이 뒤따른다. 이 네 권의 복음서와 정전에서 제외된 도마복음서는 역사적 예수를 찾아가는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 이렇게 일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예수에 대한 기록들은 이후 백 여 년간 오늘날 정전(正典)이 된 27권을 비롯하여 <도마복음> <베드로복음> <바나바서신> <베드로계시록> <헤르마스목자서신> <이집트인복음서> <바울행전> <히브리인복음서> <요한행전> <12사도교훈집(디다케)>등이 쏟아져 나왔다.

처음 예수를 따르던 갈릴리 무리들은 예수가 떠나자 교회를 형성하였다.

야고보, 베드로, 바울이 조직한 교회는 시간이 흐를수록 제도화 되어져갔다. 예수와 함께 했던 첫 세대들이 죽고 예수에 대한 이야기책들이 쏟아지자 교회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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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도대체 어떤 책이 예수에 대해 바르고 본래적인 모습을 말하고 있는가?”, “어떤 기준으로 이 책들을 해석하고 이해해야 하는가?”하는 질문 앞에선 고민이었다. 더욱이 2세기에 나타난 최초의 기독교 이단인 영지주의(Gnosticism)와의 싸움에서 교회는 이러한 질문 앞에서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정전화 작업(canonization)”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특별히 교회는 영지주의와 싸우는 과정을 통해 교회법, 신조, 주교조직 등을 공고히하며 제도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전화 작업은 그리 만만하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침내 오늘날과 같은 27권의 책들이 묶여 “신약성서”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된 것은 4세기 중반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타나시우스때의 일이다. 역설이지만 교회는 이 무렵에 이미 어두운 중세로 들어 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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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우상숭배

밥이 된 사내 이야기 – 3

<성서 우상숭배>

오바마를 일컬어 흔히들 검은 케네디라고한다. 케네디, 고작 40년 전 사람이다. 그의 바람기는 클린턴을 능가하였었고, 그의 업적은 미완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에게 “케네디”라고하는 분장을 덧입혀 형상화하였다.

온갖 문서는 말할 것도 없고, 영상자료와 일거수 일투족을 손바닥 손금 확대경으로 들여다 보듯하는 세상에서도 분장은 가능한 법이다. 하물며 조석간 신문은 커녕 흔한 찌라시 한 장 없던 2,000년 일이고 보면…

“루터에 의해서 성서 우상숭배가 시작된 것이다. 모든 우상 숭배가 많은 무서운 해독을 가져 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서숭배도 또 많은 무서운 해독을 흘러 내렸던 것이다”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의 말이다.

류영모                                 내촌                             김교신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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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에게서 유영모가 나오고 김교신이 나오고 함석헌이 나왔다. 내촌선생이 루터의 성서우상화를 철저히 공박하고 있으나 루터에 대한 존경심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일테면 그는 “신문명 또는 신세계, 신세대는 1517년 10월31일에 새로 태어난 것이다. 유대나라 베들레헴에 예수가 탄생하신 날을 제외하고 이날은 세계적인 가장 큰 하루이다. 시인 로웰의 한마디로 말한다면 이날 <용감한 루터, ‘아니오’라고 대답했던 바 그 ‘아니오’에 부딪혀 전 유럽은 동요했다>”라며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일을 예수사건 이래 인류 최대의 사건으로 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 선생이 왜 루터의 성서우상화를 통박하였을까?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 나가자. 나는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제 한국에서 세 명의 상고출신 대통령을 연달아 배출하였다고 자랑스럽게 상고출신임을 밝히는 것이 아니다. 세 분 모두 어찌보면 모두 난감한 처지인데 뭐 거기 빗댈 것 있겠나? 어쨋건 고등학교 시절 “상업미술”과목이 있었다. 워낙 그림 그리기에는 젬병이었던 나는 이 시간을 몹시도 싫어하였다. 어쩌면 그림 그리기가 싫었다기보다는 선생님이 싫었다는 것이 더욱 적합할 지 모르겠다. 일주일에 두 시간이었다고 기억한다.

첫 번째 시간에는 그림의 주제를 주고 그림을 그리게 한다. 주어진 시간에 다 못 그려도 좋았다. 돌아오는 시간까지 완성만 하면 되었기에 시간적인 제약은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 시간 선생님은 아이들의 작품을 평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평가방법이 내겐 참 기가 찰 노릇이었다. 아이들은 열 명 단위로 교단 앞으로 나가 정렬하고는 자기가 그린 그림을 가슴높이로 받쳐든다. 선생은(이쯤해서 님자 빼자) 교실 뒤 끝 책상에 걸터앉는다. 그리고 “일 번” 호명을 하면 일 번 학생은 자기가 그린 그림을 머리 위로 치켜든다. 선생은 잠시 그 그림을 보다가 “우수, 가작, 낙선, 선외”중 하나를 택일하여 평가를 내린다. 아아! 나는 늘 선외였다.

어찌 그 선생에 대한 좋은 기억이 있겠는가? 그 뿐이었다면 나는 내 그림솜씨를 탓하며 지금쯤에는 기억에도 없었을 것이다. 늘 선외를 받는데 부화가 치밀어 선생을 시험해 본 것이다. 하루는 우수평가를 받은 옆 반 친구의 그림을 빌려 가지고 머리위로 치켜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선생에게 매맞을 각오를 한 터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선외”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그 뒤로 선생을 미술선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내 어릴 적의 추억이다만 내촌선생의 성서우상화도 따지고 보면 이 정도의 이야기와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어려운 말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 이야기를 바꾸자.

“성서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고 따라서 그것으로 족하다는 이른바 축자영감설의 신앙적 주장은 아주 편협하다”는 말이다. 그 같은 시각으로 성서를 읽는 한, 내촌선생께서 지적한 성서우상화의 길로 들어서는 일이요, 내 기억속 미술선생처럼 같은 작품을 쥐어 든 손에 따라 우수와 선외로 평가하는 우를 범할 수 있는 까닭이다.

자! 어떻게 성경이 형성되었고 갈릴리 바다를 살아 숨쉬며 활보하다 그 일로 죽은 예수가 진열장 속에 데드 마스크처럼 장식화 되었을까? 그 이야기를 찾아 떠나자.

밥이 된 사내 이야기 – 1

<들어가는 글>

예수 – 제가 글을 깨우치기 전에 만난 이름입니다. 성장하면서 십대 후반까지 제 주된 놀이터는 교회 앞마당이었습니다. 이십대 초반에 전혀 새로운 모습의 예수를 만났습니다. 이십대 중반에 평생 그를 쫓기로 하고 신학교에 들어갔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제 나이가 너무 젊고 이르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를 쫓기엔 이젠 나이가 너무 들었습니다.

제 나이가 너무 젊었을 때부터 늙은 이 순간까지 여전히 예수는 제 삶의 주된 화두였습니다.

올해 정초에 문득 든 생각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언젠간 머리글을 제대로 얹힐 날이 있기를 바라면서… 제가 이 글을 연재하는 뜻입니다.

크게 이야기를 셋으로 나누려 합니다.

머리로 만난 예수 이야기(밥이 된 사내 이야기), 가슴으로 만난 예수 이야기(신이 된 사내 이야기), 사람으로 만난 예수 이야기(부활한 사내 이야기)

그 첫번 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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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된 사내 이야기 – 1

세 개의 다른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으로 내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하자.

첫 번째 이야기.

<본디오 빌라도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께 문안드립니다.

최근에 제가 직접 알아낸 어떤 일이 발생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시기심 때문에 자기 자신들과 후손들에게 잔인한 심판을 가했습니다. 그 조상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하늘로부터 거룩한 존재를 내려 보낼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는 왕이라 불려 마땅하며, 하나님은 그를 처녀의 몸을 통해 이 땅에 보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가 유대지방에 나타난 것은 제가 그곳에 총독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가 눈먼 사람에게 시력을 되찾아 주고,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해주고, 중풍병자를 치료해 주고, 악한 영을 쫓아내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을 일으켜 세우며 바람에게 명령을 내리고, 물결이 이는 바다위를 맨땅을 걷듯 걸어 다니며, 그외의 많은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기심에 사로잡힌 대제사장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를 체포하여 나에게 데려왔습니다. 그들은 거짓말에 또 거짓말을 덧붙여가면서 그가 마술사(사기꾼)이며, 자신들의 율법을 위반했다고 고소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고소가 사실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저는 병사들을 시켜 그에게 채찍질을 가한 뒤에, 그를 유대인들 마음대로 처분하도록 내어주었습니다. 그들은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고는 그 무덤에 파수꾼을 세워 두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흘째 되던 날, 그러니까 제 휘하의 군사들이 무덤을 지키고 있을 때 다시살아 났습니다.

그런데 사악함에 이성이 마비된 유대인들은 저의 군사들에게 돈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말하시오” 병사들은 돈을 받긴 했지만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병사들은 그가 살아났고, 자신들의 눈으로 그것을 보았으며, 자신들이 유대인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까지 증언했습니다. 제가 이것을 보고하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 이 사실을 왜곡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혹여라도 폐하께서 유대인들의 거짓말을 신뢰하시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 이른바 빌라도문헌(Pilatusliteratur)으로 외경(外經)인 베드로행전과 바울행전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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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이야기.

<한편 바로 이 때 예수라는 지혜로운 사람-너무나 신기한 일들을 많이 행했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인간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면-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쁜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선생이었다. 그는 수많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그의 곁으로 끌어들였다. 그가 바로 그리스도였다.

빌라도가 유대의 유력 인사들의 청에 의해 그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으나 그를 처음부터 사랑하던 자들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그에 관해 예언한 대로 3일만에 다시 살아나서 그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이뿐 아니라 그에 관해서 수많은 놀라운 일들을 예언했었다. 그의 이름을 본떠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제18권 3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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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이스라엘 북동쪽의 한 무덤에서 발견된 약 2000년 된 유골은 예수님과 비슷한 시대에 같은 십자가 처형을 받았던 ‘여호하난’이라는 청년의 것으로 밝혀졌다는데 복숭아뼈 부근에 박혀 있던 쇠못을 가족들이 빼어내질 못해 그냥 그대로 안장한 듯. 박아 놓은 십자가에서 발이 빠지지 않도록 끝을 구부려논 못이 복숭아뼈에 그대로 박혀있는 참혹한 모습.>

 

 

세 번째 이야기

<1968년 6월에 지금까지 발견된 것중 유일하게 십자가에 달려죽은 유골이 북동 예루살렘 지역 나불로스도로 바로 서쪽의 기브앗 하 미브타르에 있는 기원후 1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한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모두 서른 다섯 명의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이중 남자가 11명, 여자가 12명, 어린아이의 것이 12명이었다. 아이들은 생후 6개월에서 여덟 살까지로 추정되는데 대부분 굶주려 죽었고, 어른들은 불에 타 죽었거나 철퇴 같은 것에 맞아 죽었거나 화살에 맞아 죽은 흔적이 드러났다. 그런데 하나의 유골은 나이 스물 넷에서 스물 여덟 사이로 추정되며 키는 약 165cm정도인데 십자가형으로 죽은 것이 확인되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여호하난이다. 그러나 지금은 I/4A라고 불린다.

즉 무덤번호 I, 납골함 제 4번, 유골 A를 합친 고고학적 이름이다.

이스라엘의 고고학자들과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의 하사다 의과대학 교수들이 감정하고 다시 감정한 결과 십자가 처형방법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의 팔은 못으로 박힌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가로 막대에 묶여 졌는데, 아마도 팔꿈치까지 가로 대 위로해서 뒤로 넘겨 팔을 묶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두 다리는 수직으로 세워진 기둥의 양쪽 측면에 놓여졌는데, 별개의 못으로 각 발 뒤꿈치의 뼈를 기둥 측면에 박아 고정시켰다. 처형된 사람이 발을 비틀어 못에서 빼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올리브 나무로 된 작은 판이 못의 머리 부분과 발뒤꿈치 뼈 사이에 끼워졌다. >

빌라도의 편지와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그리고 십자가형으로 처형된 사람의 유골 발굴 이야기를 하였다.

빌라도의 편지는 대략 서기 100년 전후에 나온 문서들에 기록된 것이고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는 서기 93년이나 94년에 기록된 것들이다. 성서에 나오는 이른바 바울문서들이 대략 서기 50년에서 60년 사이에 기록되었으므로 약 반세기 뒤에 기록된 것들이다. 그나마 빌라도의 편지와 요세프스의 유대고대사에 나오는 예수에 대한 기록은 사실 이즈음 대다수의 학자들이 신뢰하지 않는다.

무슨 말인가하면 그 두가지의 기사는 후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첨가 삽입하거나 수정하였다는 말이다. 이쯤 이야기하면 경건한 정통 보수 예수쟁이 양반 한마디 할 것이다. “거룩한 성서의 기록을 나두고 왠 쓸데없는 이야길… 쯧쯧쯧…” 너무 나무라지 마시라. 나는 이제부터 성서를 말하고자 함이니. 또 한가지 예로 든 것은 십자가에 처형된 유골이야기이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한꺼번에 많게는 이천 명 정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째서 거의 이천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야 단 한 구의 유골을 발견하게 되었을까?

역사속에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살다가 죽은 예수, 교인들의 신앙고백은 뒤로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명백한 사실은 그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는 사실이다. 왜 그렇게 죽었을까?

엄숙한 죽음, 그것도 예수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마당에 우스개 소리 하는 것을 용서하시라. 그냥 머리속에 스쳐감으로 쓰는 것이니, 또한 삶과 죽음에 웃음이 좀 있어야 넉넉하지 않겠는가?

오래 전 일이다. 터놓고 지내는 이 하나가 어느 날 진지하게 내게 물었다. “김형, 예수가 왜 죽었는지 아시오?” 이럴 때 해답은 간단 명료하지. “그야, 나와 당신을 위해서지” 이 양반 껄걸 웃으며 “아니야. 목사님들 밥 먹여 살려 주시려구 죽으셨데” 너무 썰렁했나. 나는 많이도 웃었구만.

자 우스개 소리 접고, 내가 풀어 가는 예수의 죽음 아니 그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하자. 이야기인데 제목은 하나 있어야 할 것 같아 붙인다. 이 이야기는 성서를 교과서로 하고 약간의 신학서적들을 참고서로 하여 내 작은 상상력도 조금 붙이고 하여 해 보는 소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