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足)함

피할 수 없이 맞을 매라면 몰아서 맞는 편이 낫다든가? 한 주 사이에 여러 대 맞았다. 누군가 아내의 차를 박는 접촉사고로 일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일주일 이상 차수리를 받아야 한단다. 보험회사, 딜러 수리센터, 렌트카 등등 안해도 좋은 일들로 시간을 뺏겼다.

세탁업이 내 천부의 업이거니 치부하고 산 이래 오늘까지 손님들과 다투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손님과 몸싸움을 벌리고 경찰을 부르는 일을 겪었다. 몸싸움이라고 했지만 나이 들고 왜소한 내가 까만 얼굴의 이십 대 젊은 아이와 무슨 싸움을 했겠나, 그저 당한 일이었다. 생각할수록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마스크를 벗어도 좋은 시절이 다가와 가게 매상이 좀 나아지려니 하는 부풀었던 꿈은 중장비가 내 가게 바로 앞에서 요란한 굉음과 먼지를 만들어내는 통에 사라졌다. 내 세탁소가 있는 샤핑센터 한 쪽엔 이즈음 아파트 건립공사가 한창이다. ‘너희들 이젠 대박나겠네!’하며 손님들이 건네는 덕담이 무색하게도 공사의 일환으로 내 가게 앞 도로와 주차장 공사가 시작되었다. 글쎄? 얼마나 걸릴런지… 건물주의 계획은 믿을 것이 못되니, 아마 올 여름이 끝날 때까지는 내 가게 팬데믹은 이어질 듯 하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에 잘 버티어 오시던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저녁진지를 들고 아파트에 들어서자 조용하였다. 거실문을 열자 아버지는 침대 곁에 쓰러져 계셨고 “어,어,어…”하시며 말을 잇지 못하셨다. 응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옮기셨다.

결정타를 맞은 것은 이튿날이었다. 두 해전에 아내가 어깨 수술을 받았는데 시술한 병원으로부터 날아 온 거금의 청구서였다.

그렇게 맞은 메모리얼 연휴였다.

매를 맞기 전 연휴계획은 내 집 driveway seal coating을 하고, 아들 며느리와 저녁식사를 함께하며 샤핑을 즐길 생각이었다.

차수리에 연관된 일들은 모두 예약을 마쳤으니 시간이 흐르는 대로 따르면 되는 일이고, 가게 앞 공사야 내 뜻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그 역시 시간의 흐름에 맡길 일이고, 병원에서 날라온 청구서에 대해서는 그 수술을 받은 이후 우리 내외가 받은 보험회사 및 병원의 모든 서류들을 정리하여 다툴 준비를 끝내었으니 그 또한 시간이 흐르면 정리될 터. 다만 하지 않아도 좋을 헛수고와 시간을 빼앗기는 게 크게 아쉬울 뿐.

그리고 아흔 다섯 내 아버지.

병원은 여전히 팬데믹으로 통제되고 있는 상황이라,  환자 면회는 아침 11시에서 7시 사이 일일 딱 한사람만 허용이 되는 상황이어서 토요일엔 누나, 일요일엔 누이동생, 그리고 오늘은 내 차례였다.

왼쪽 뇌로 통하는 혈관이 거의 막혀 갑자기 닥친 stroke으로 언어마비증세와 몸 오른쪽 마비 증상을 보이셨던 아버지의 증세는 언제 그랬느냐 싶게 놀랄만한 호전이 일어났다. ‘어어어’만 하시던 첫날 밤이 지나자 누나는 단어를 말하시는 아버지 모습을 전해왔고, 이튿날 누이동생은 완벽한 문장을 구사하시는 아버지 목소리를 듣게 하였다. 그리고 오늘 아버지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들을 다 하실 뿐만 아니라 의사와 간호사에게는 영어를 내겐 한국말로 갈라 말씀하실 정도로 지극히 정상적 모습을 보이셨다.

끼니 때 마다 잘 잡수셨고, 잠도 잘 주무셨다. 그런 아버지 덕에 그 곁에서 책 한권 읽었다.

게자 버미스(Geza Vermes)가 쓴 <유대인 예수의 종교(The Religion of Jesus the Jew)>다. 내 삶에서 예수를 놓지 못하게 하는 그의 생각들은 그저 곱씹어 살 뿐.

그로 인해 다시 곱씹어보는 성서 구절 하나.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 마태 6장 34절

아버지 덕에 나는 하루 도(道)를 닦고, 아내와 아들과 며느리는 족(足)한 하루를 보내다.

뒷뜰엔 내 수고 없이 핀 꽃이 나를 토닥이고…하여 나는 오늘도 예수쟁이…. 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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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쟁이

누가 하라고 시켰다면 손도 대지 않을 일이었다. 그저 내가 좋아 벌린 일이다. 그저 작게 시작한 일이었다. 헌 것 뜯어내고 새 옷을 입혀 보자는 생각이었다. 막상 손을 대고 보니 생각치 않던 일에 더해 욕심이 자꾸 보태진다.

애초 세웠던 계획은 어느새 기억조차 없다. 그냥 맘 내키는 대로 시간이 허락하면 하는 일이 되었다.

그렇게 땅을 파고 땅을 다지며 높이를 맞춘다. 자갈을 덮으며 또 생각이 달라진다. 어느새 그냥 즐기는 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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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뉴스들을 보며 드는 생각 하나.

믿음 또는 교회, 사찰, 종교기관, 조직 또는 체제, 아니 이념 사상 그 무엇이라 부르든 모두 저마다 제 머리 속 크기만한 신들을 안고 살며 벌이는 일들 아닐까?

저마다 제 욕심과 이기 – 그것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 그것 빼고 나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세탁소에서 손님들을 맞으며 날아갈 듯 기쁨에 겨워 내 삶에 크나큰 자긍을 맛 볼 때가 있다.

일테면  ‘You have contributed to the health, welfare, and happiness of each person with whom you have come in contact here in Newark. The beautiful photographs you share with us, the poems, both those translated from Korean and those already written in English give comfort, knowledge, and enrichment to all who receive them.’ 인사치레도 기분 좋은 것이지만, 가장 큰 것은 ‘너 예수 믿지!’하는 말이다.

어쩌다 그 말을 들을 때면 하기 쑥스럽고 부끄러운 말이지만 ‘내가 잘 살고 있구나’하는 맛을 느끼곤 한다. 나는 정말 예수쟁이가 되고 싶었고 지금도 그렇다. 한땐 거창하게 허황된 꿈도 많이 꾸고 살았다만, 신이 내게 허락하신 재주 안에서  하루를 그렇게 꾸려 나갈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산다.

그렇게 난 예수쟁이이고 싶다.

뭐 특별히 큰 생각 없다.

예수가 선포했듯이 신과 나 사이에 그 누구도 중간에 개입할 수 없고 중간자로 사기칠 수 없다는 믿음이다. 그것이 믿음, 교회, 종교, 이념, 사상 그 무엇으로 불리우던 간에.

신앞에 홀로 선 단독자가 될 것을 가르쳐 준 내 신앙의 스승 가운데 한 사람인 본회퍼를 능멸한 수준 이하의 잡사기꾼 전광훈이라는 놈 뿐만이 아니다. 교회와 사찰의 크기가 문제도 아니다.

신 앞에서 자기를 잃어 버리고 신과 나 사이에서 착취하는 중간자에게 정신 빠뜨리는 일이 바로 죄이고 악이다.

중간자에게 얼 빠뜨리면 사람이 망가진다. 망가지는 게 나만이 아니라 너와 함께 우리가 망가진다.

예수가 저주하며 혼낸 이들은 중간자, 가진 자, 권세 있는 자들 만이 아니다.

신 앞에서 자기를 잃어 버리고 중간자, 가진 자, 권세 있는 자들에게 얼빠져 노는 게으른 자, 무지한 자, 오만한 자들에게도 만만치 않게 저주를 퍼부었다.

이게 내 믿음이다.

날 좋은 일요일, 땅을 뒤집으며 고집으로 부려보는 욕심 하나. 정말 예수쟁이가 되고 싶다. 그냥 소소한 내 일상 속에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딱 일주일 전 이 시간쯤이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사람답게 살며, 이웃을 사람으로 여기며 사는 세상”을 꿈꾸며 살아온 필라에 사시는 김경지선생께서 전화를 주셨답니다.

35주년 5.18을 맞아 조촐한 간담회를 개최하려고 준비 중인데, 광주항쟁을 기념하면서 4.16 세월호 참사와 기독교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참석하겠노라고 응답드리고나서 이런 저런 뉴스들과 자료들을 뒤적이고 있었답니다. 그러다 제 눈에 들어 온 말들입니다.

“하나님이 (세월호를) 공연히 이렇게 침몰시킨 게 아닙니다. 나라가 침몰하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은 그래선 안 되니, 이 어린 학생들, 이 꽃다운 애들을 침몰시키면서 국민들에게 기회를 준 것입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될 일이지, 왜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다 이런 사단이 빚어졌는지 모르겠다.”

이른바 기독교인들이 했던 말들 입니다. 그것도 자칭타칭 기독교계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목사들이 한 말들입니다.

해당 기사들을 훑어 보다가 든 생각이랍니다. 과연 이런 생각들이 그들만의 것일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월호라는 이름은 분명 잊혀져가는 사건, 또는 잊혀져야만 하는 사건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대다수일 것입니다.

처음 사건이 일어났을 때만 하더라도 안타까움, 동정하는 마음, 웬지 그냥 아리고 슬픈 마음으로 눈물을 찍어내고, “어떻게 이런 일이….”하던 이들도 이젠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그게 언제적 일이냐고?”, “제네들은 뭘 더 바라는거야?”, “그건 지나간 일이고 우리들이 이젠 살아야지!”, “아니 누가 그때 제주도를 가라 그랬냐고?”, “저게 아무래도  종북 빨갱이들이 뒤에 있을게야…” 등등등

누가 하는 소리냐고요? 바로 믿는 분들이 하시는 말씀들이랍니다.

11050688_392090650982606_5665019593049397144_n아마 이 순간에도 유가족  이호진씨 부녀는 광화문을 향한 삼보일배 고된 여정을 계속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제 거의 다달았다는 생각으로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을 터입니다. 그러나 그들 부녀가 광화문광장에 도달한다하여도 세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고, 변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세월호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 그리고 그들의 외침에 귀 기울이고 있는 이들이 함께 소리쳐 외치는 함성은 “진실규명”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소원인 “진실규명”은 시간이 갈수록 잡기 어려운 길목으로 들어서는 듯합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진실규명”은 비록 아무 것도 밝혀진 것이 없는 지금 보고 듣고자하는 이들에게는 이미 진실에 다가서고 있다고 믿습니다.

다만 진실보다 거짓에 익숙한 삶을 살아 온 공동체가 진실을 말하는 이들을 조롱하고, 멸시하고, 능멸하는 사회가 너무 오래 지속되어 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또 그렇게 그들의 외침은 스러져 갈 것이라는 생각들이 지배적인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 끝에서 희망을 보았답니다.

바로 바울이 이야기했던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 15)는 명령에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넓고 깊게 연대해 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 아직도 예수쟁이로 남아 있답니다.

하나님이 어찌 알랴?

추수감사절 연휴를 참말 잘 쉬었습니다. Thanksgiving day 전날에 눈이 좀 오고 바람이 불었는데, 그 탓이었는지는 모르겠으되 집에 전기와 인터넷, 전화가 불통이 되었었습니다. 다행히 당일 늦은 밤 전기는 다시 들어왔지만 인터넷과 전화는 주일(오늘) 오후까지 나흘 동안이나 불통이었답니다.

다석강의전화는 휴대전화가 있으니 별 문제가 아니었지만 인터넷이 끊어지니 저녁시간이 몹시 길었답니다. 컴퓨터나 TV를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손에 든 것이 유영모선생님의 ‘다석강의’입니다. 제 정신 차리며 사노라고 틈나면 꺼내들곤 하는 책인데, 모처럼 사흘밤을 끼고 살았답니다.

유선생님의 말씀들을 읽으며 이즈음 두루 흐트러져 어찌할 바를 모르던 생각 조각들이 하나로 꿰어지면서 머리 속이 환해지는 참 쉼을 누렸답니다.

왜 한국교회와 한인교회는 유영모님이 가르친 ‘뜻의 믿음’과는 전혀 다른 방향인 ‘맛의 믿음’만을 쫓게 되었을까?

왜 한인교회와 한국교회에는 ‘예수의 뜻을 쫓아 살고자 했던 유영모’류의 사람들을 보이지 않고, ‘맛 곧 돈과 권세의 누림만을 쫓는 이명박, 문창극, 이인호, 조용기, 김홍도……’류들이 창궐할까?

왜 한국교회와 한인교회는 “지금 멸시받고, 버림받고, 고통 받고 조롱받는 이들에게  조용하라고 윽박지르는 권력 앞에서 조용히 가만있기만 하는 것일까?

왜? 자기 일에 책임지지 않는 권력자들과 제 배불리우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지도 않는 종북주의자들을 양산해내며 정, 경, 군, 관, 언, 학, 종교 등 제반 권력에 빌붙어 사는 악인들은 “피둥피둥 살이 쪄서, 거만하게 눈을 치켜 뜨고 다니(시편 73:4)”는 세상이 되었을까?

왜? “하나님의 백성마저 그들에게 솔깃하여 그들의 물에 흠뻑 젖어 들어서 한다는 말이, “하느님이 어떻게 알랴, 가장 높은 분이라고 세상 일을 다 아느냐?”고 할까?

왜? “그들은 악인이어도, 몸은 항상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가는”(시편 73 : 11-12)” 세상이 되었을까?

이제 저물어가는 2014년 오늘, 제 앞에 놓인 물음들에 대해 유선생님께서는 명쾌한 답변을 내리십니다.

“그러므로 참 예수쟁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인이 되신 후, 유불선(유교, 불교, 선교)을 통달하여 꿰뚫고 그 곳에도 길이 있다하셨지만 끝내 참 예수쟁이로 살다가신 선생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자유, 독립, 통일, 공평, 평등 같은 거창하고 큰 것을 말씀 하시면서도 그것이 구름 같은 것이 아니라 지금 제가 발딛고 사는 현장에서, 내 가정에서,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작은 것 하나라도 이루며 사는 예수쟁이가 되라는 권고였습니다.

비록 “하나님인들 어떻게 알 수 있으랴!”고 떠드는 이들이 세상 주류를 이루고 있는 세상일지라도 말입니다.

모처럼 푹 쉰듯한 추수감사절 기간이었습니다.

인터넷은 다시 연결되어 이슬람 국가(IS), Ferguson사태, 세월호 유가족 등등 ‘하나님이 어찌 알랴?’는 세상은 다시 제 곁으로 왔지만 말입니다.

세월호 – 난 더욱 예수쟁이어야

세월호 집단 생수장 사건이 일어난지도 어느새 반년이 지났습니다.  세월호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의 일심 재판도 끝났습니다. 끝내 시신조차 거두지 못한 아홉 영혼(추정하는 숫자일지도 모를 일이지만)들의 가족들에게 깊은 한을 남기며, 시신 수색작업도 끝냈다고 합니다.

노란리본실로 어이없는 세월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거대한 여객선이 육지가 빤히 바라보이는 연안에서 기울어져 바닷속으로 잠겼고,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사고 이후 단 한사람도 구조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희생자들의 대부분이 아직 인생을 꽃피우기도 전인 아이들이었습니다.

육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왜 사고가 일어났는지, 왜 그 많은 아이들이 속수무책으로 바다속에서 죽어가야 했는지는 아무 것도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오늘 이런 저런 뉴스들을 훑다가 정말 기가 찬 나머지 헛웃음 터트릴 수 밖에 없는 기사를 보았답니다. 달탐사를 위한 엄청난 예산을 쪽지예산으로 들이밀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도대체 “사람”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라는 물음이 이어졌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만든 공동체에서 – 그것을 국가라 부르든, 사회라 부르든, 교회라 부르든, 당파라고 부르든 간에 – 가장 중요한 핵심은 사람이건만 어디에도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말씀입니다.

그저 오로지 “돈”입니다. “권력”은 돈을 그러 모으기 위한 일차적 수단이고요. 그렇다면 돈과 권력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어야 할 터인데 그조차 없습니다. 물론 거기 모습으로만 사람이 있으되 이미 사람이 아닌 악귀들만 있을 뿐입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부끄러움”을 상실한 악귀들만이 공동체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모습이랍니다.

세월호 집단 생수장 사건 이래로 정말 조용한 공동체가 한 곳 있습니다. 바로 개신교회입니다. 그렇게 느끼는 까닭은 제가 평생 개신교도인 까닭입니다. 이 나이에 개종(改宗)을 하거나 무종교자가 되는 일은 없겠기에 제겐 그저 아픔입니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세월호 생수장 사건으로 인해 불거진 인사파동에서 드러났던 문창극이나 김성주 류의 사람들이 읊어댔던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 뿐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야말로 “사람을 철저히 배제한” 것입니다. 오직 “돈과 연계된 악귀들 만을 위한” 세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정말 큰 문제는 문창극이나 김성주 류가 말하는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믿는 사람들이 한국교회와 한인교회에 여전히 차고 넘치는 주류라는 것입니다.

뭐 멀리 가서 찾을 이유가 없답니다. 그저 주변에 널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개신교도임을 부인하지도 않을 것이고, 예수와 교회를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믿기 때문입니다.

긴 역사를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임을 믿는 까닭이 첫째요, 누구나 짧은 인생을 통해 모든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신을 향해 응답하는 몸부림이야말로 참 신앙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집단 생수장 사건은 죽은 이들의 문제가 아닙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현재 진행형으로 신앞에서 묻고 응답해야 하는 사건입니다.

제가 살며 사랑하는 목사님 가운데 한 분이신 홍길복목사님께서 그의 글 <디아스포라 코리안의 역사와 삶>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기독교신학에서 고난은 제3의 성례전이라 일컬어진다. 고난은 예수그리스도의 정체성이고 그의 구속사역의 방법이다. 십자가의 신학은 고난의 신학이다. 고난이 없이는 구원도, 부활도 없다. 고난은 인간존재의 가장 명확한 존재방식이다. 고난은 디아스포라의 존재방식이다. 고난은 모든 디아스포라의 삶과 이야기의 키 워드(key word) 이다.

고난을 넘어서는 길은 그냥 고난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다.  좌절을 극복하는 것은 절망의 밑바닥까지 떨어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고난은 미화되서도 않되고 찬양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고난의 한 가운데는 고난의 주인이신 우주와 역사의 창조주가 계시다.

기쁨은 고난의 반대편에 있는것이 아니라 고난의 역사가 진행되는 한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다.

승리 역시 실패가 끝난 뒤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실패가 진행되는 한 가운데 다른 얼굴로 현존하여 있다.

“고난이 지난 후에는 승리가 온다”라고 믿고 기대하는 것은, 자칫 고난 자체가 주는 위대성과 값어치를 모독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고난은 훗날 기쁨으로 바뀌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써 이미 엄청나게 위대한 축복이요, 승리이다.

수학에는 답을 얻는 과정이 있듯이, 인생에도 정답으로 가는 과정이 있다.  그것은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마찬가지이다.

고난이 정답이다.>

세월호 집단 생수장 사건을 먼나라 이야기로 치부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제가 개신교도이어야 하고, 예수쟁이이어야만 하는 까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