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권– 갈릴리 7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23 

너희는 지난 사십 년간 광야에서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어떻게 너희를 인도해 주셨던가 더듬어 생각해 보아라. 하느님께서 너희를 고생시킨 것은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킬 것인지 아닌지 시련을 주어 시험해 보려고 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고생시키시고 굶기시다가 너희가 일찌기 몰랐고 너희 선조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여 주셨다. 이는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야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다. – 신명기 8 : 2 – 3 

모세가 야훼께 부르짖었다. “이 백성을 어떻게 하면 좋겠읍니까? 당장 저를 돌로 쳐 죽일 것만 같습니다.”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이 백성보다 앞서 오너라. 나일강을 치던 너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오너라.   내가 호렙의 바위 옆에서 네 앞에 나타나리라. 네가 그 바위를 치면, 물이 터져 나와 이 백성이 마시게 되리라.” 모세는 이스라엘 장로들이 지켜 보는 앞에서 그대로 하였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대들었다고 해서 이 고장 이름을 므리바라고도 하고 “야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안 계신가?” 하며 야훼를 시험했다고 해서 마싸아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 출애굽기 17 : 4 – 7 

그리 되더라도 너희는 에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신 너희 하느님 야훼를 잊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 하느님 야훼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맹세할 일이 있으면 그의 이름으로만 맹세하여라. 주위에 있는 백성들이 섬기는 신들 가운데서 어떤 신이든지 그 신을 따라 가면 안 된다. – 신명기 6 : 12 – 14 

야훼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나는 내 백성이 에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와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이제 내려 가서 그들을 에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그 땅에서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 가나안족과 헷족과 아모리족과 브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땅으로 데려 가고자 한다.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의 아우성 소리가 들려 온다. 또한 에집트인들이 그들을 못살게 구는 모습도 보인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너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에집트에서 건져 내어라.” – 출애굽기 3 : 7 – 10 

예수의 종교적 핵심은 토라가 전혀 배제된 것도 아니고 내적 영성을 촉진시킬 수 있음에도 토라 자체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에식상의 그리고 도덕적인 순결을 추구함도 아니다. 성전이나 회당에서의 예배와 기도생활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자기 성화도 아니다. 또한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축구하는 것도 아닌 듯하다. 오히려 그의 형제들을 향한 헌신을 통해 자비로우신 하늘의 아버지를 닮아 가는 것이다. – 게자 버미스(Geza Vermes)의 유대인 예수의 종교(The Religion of Jesus the Jew)에서 

이제 광야에서 있었던 마귀의 시험에 대한 예수의 응답과 뜻을 새겨보고자 합니다. 

우선 제가 위에서 인용한 성서(구약) 구절들과 게자 버미스가 한 말들을 찬찬히 음미하며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인용된 성서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한번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먼저 한 가지 예를 들어 보도록 합니다. 혹시 복권을 사보신 경험이 있으신지요? 아니면 복권 한번 사봐야지 하는 생각을 해 보신 적 있으신지요? 미국에서 팔리는 Powerball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답니다. “파워볼에 당첨될 확율이란 벼락맞아 죽을 확율보다 낮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벼락맞아 죽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듯이 거액의 복권 당첨자에 대한 뉴스를 종종 볼 수 있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복권을 사거나 사려는 마음을 지니고 있고, 실제 그 누군가는 당첨이 되곤 한다는 것이지요. 

powerball billboard

파워볼을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주 작은 돈을 투자해서 한순간에 수 억, 수십 억배를 얻는 요행을 바라는 마음 때문이지요. 이런 마음을 셀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요. 그리고 그 누군가에게는 요행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지난 글에서 마귀가 예수에게 던진 질문들에 대해 “그래 내가 하지”라고 응답하는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건 넘쳐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또 그렇게 마귀에게 응답하는 이들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꾀는 경우도 숱하게 많은 법입니다. 때론 복권이 당첨되듯 실제 돌을 떡으로 만들거나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 내리거나, 온 세상을 쥐고 흔드는 사람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마치 요행수가 맞아 복권이 당첨된 사람들의 끝이 좋지 않을 확율이 높듯이 어쩌다 수많은 가짜들 중에 진짜인듯한 ‘능력자들’ 역시 역사적 경험으로 본다면 일시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이제 예수의 응답을 보도록 하지요. 예수의 응답을 요약하자면 첫째 시대를 넘나들어도 언제나 동일한 사람들의 요구와 한계에 대한 응답이요, 둘째 신 곧 하나님과 사람의 영역을 명확히 구분짓는 응답이요, 마지막으로 철저히 성서적(구약, 유대전통적)인 응답이었다는 것입니다. 

첫째 질문에 대한 응답은 “성서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응답은 신명기 8장에 나와있는 성서 구절을 인용한 응답입니다. 그런데 신명기의 내용을 잘 보시면 이미 야훼 하나님은 먼저 돌로 떡을 만드신 기적을 보이신 후에 그 기적을 보여주신 뜻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광야에서 배고픔에 굶주려 아우성치던 히브리 백성들에게 광야 들판을 만나로 뒤덮히게 하셨던 기적의 의미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가르쳐준 주기도문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와 맥이 닿아 있는 것입니다. 

바로 “빵으로만…”이라는 말과 “하나님의 말씀…”의 위치는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써 생존해야하는 기본 양식은 준비되어 있는 세상이 예수가 생각한 야훼 하나님 세상이었습니다. 그 기본에서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 꿈꾸고 이루고자 하는 세상보다 먼저인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점이 예수가 내린 첫번 째 응답의 핵심입니다. 

광야 40년 동안 히브리족의 먹을거리였던 만나의 의미는 “누구나 동등하게 똑같이 하루의 양식을 나누어 먹는 사회”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만들어 준 기적이요, 인간들이 어느 사회이건 준수해야 마땅한 신명기 정신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에게 있어 마귀의 시험은 이 기본을 넘어서는 물질에 대한 욕심을 이루어 보라는 요구였던 것이고, 예수의 응답은 “기본에 대한 해결이 먼저이고 그것이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 이 공용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복권이 통용되는 사회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 누구나가 하루 일용할 양식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세상이 먼저인데, 여기까지는 신의 영역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정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들의 응답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인간의 선택이라는 말씀입니다. 

인간들을 위해 마땅히 우선하는 신의 영역을 먼저 정의하는 예수를 제가 구세주로 믿는 까닭입니다. 

두번째 질문과 응답으로 넘어갑니다. 

준비 – 갈릴리 5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21 

비록 기독교의 기원이 갈릴리에 있었다고 할지라도 운동의 중심은 곧 예루살렘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보다 후대에 속한 신약 성서 책들은 실제적으로 갈릴리에서의 기독교의 존재와 그 운명을 무시하고 있다. 이러한 무시는 초기 기독교 안에서도 계속되었으며 실로 최근까지도 계속되었다. – 엘리옷 빈즈(Elliott- Binns)의 갈릴리 기독교(Galilean Christianity)에서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은 후(세례요한과 결별한 후) 갈릴리 사람들을 향해 나가시기 전에 예수는 광야로 나갔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행보를 마태, 마가, 누가는 한목소리로 전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비교적 짧게 이 사실을 기록합니다. 

그 뒤에 곧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께서는 사십 일 동안 그 곳에 계시면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 동안 예수께서는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 마가복음 1 : 12 – 13 

반면 마태와 누가는 광야에서 예수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비교적 소상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마귀의 세가지 유혹 곧 시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광야의 예수

세 복음서가 똑같이 전하는 사실은 예수가 40일 동안 광야에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성서에는 40일에 대한 이야기들이 몇군데 등장합니다. 인생을 40년 단위로 살았던(왕자 40년, 유목생활 40년, 히브리 지도자 40년) 모세가 히브리백성들과 애굽을 탈출한 후 광야에서 지낸 세월이 40년입니다. 또한 모세는 40일 동안 금식으로 지내기도 하였습니다.(출애굽기 34 : 28) 

엘리야 역시 광야에서 40일을 보냈던 적이 있습니다.(열왕기상 19 : 1 – 8) 그리고 교회사시대에 이르러 지키게 되는 사순절기의 40일이 있고,  오늘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예수의 광야 생활 40일이 있습니다. 

이상의 모든 40일에 얽힌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전(前)과 후(後)의 상황이 완전히 변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40년 단위 인생은 그 때마다 매번 그의 삶의 방향과 목적, 의미 등이 완전히 바뀌는 전환점이었습니다. 특히 모세의 40일 금식 사건의 전과 후 사이에는 야훼 하나님과 히브리 백성 간에 계약이 이루어집니다. 바로 십계명을 부여받는 시기였습니다. 히브리백성의 40년 전후 상황은 노예상태로 부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누리는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상태로의 전환이었습니다. 

엘리야의 40일은 도망자 신세에서 야훼 하나님의 명을 받고 용맹스럽게 앞으로 전진하는 예언자의 모습으로 바뀌는 시간이었습니다. 

사순절은 고난과 수난, 처절한 패배인 듯한 상황에서 부활의 기적이 이루어지는 시간입니다. 

예수의 광야 40일 준비기간은 옛 세상이 새 세상으로 바뀌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40이라는 상징적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과 후가 완전히 뒤바뀌는, 노예에서 누구나 신 앞에서 홀로 서서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독립된 인격으로, 절망적인 도망자 신세에서 삶의 충만한 의미와 의욕으로 넘쳐나는 활기찬 삶으로,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아픔과 한계에서 신음하고 고통받는 삶에서 죽음까지도 이기고 부활하는 기적을 맛보는 그 뒤바뀜 현장의 의미를 되새김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가 광야에서 굶주린 가운데 마귀에게 받은 세가지 시험에 대해 이야기 하기 전 요세푸스가 전하는 1세기 곧 예수 전후 시대의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났던 사건들 몇 가지 소개해 드립니다. 

“파두스(Fadus)가 유대총독으로 있을 때(기원 후 45-46년 경) 튜다스(Theudas)라는 한 마법사가 수많은 군중들을 미혹하고 있었다. 튜타스는 자신이 선지자라고 무리들을 속이면서 명령 한 마디로 요단강을 갈라 걸어서 강을 건너게 해줕테니까 모두 요단강으로 모이라고 떠들고 다녔다. 이에 많은 무리들이 그의 말에 현혹되어 요단강으로 모여 들었다.  –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20권 5장 1” 

“한편 유대인이 처한 상황은 계속해서 악화 일로를 걷고 있었다. 유대 전체가 강도와 사기가 들끓는 범죄의 소굴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벨릭스 총독은 매일 수많은 강도들과 사기꾼들을 체포하여 처형하기에 이르렀다. –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20권 8장 3” 

“이 강도들로 인해 예루살렘은 온갖 악과 불의로 가득차게  되었다. 게다가 사기꾼들과 협잡꾼들은 자기들이 직접 이적과 표적을 행할 터이니 광야로 나가자고 백성들을 현혹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섭리로 이적이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20권 8장 6” 

요세푸스가 예루살렘과 유대 전역에 강도떼들과 사기꾼들이 들끓고, 각종 기적과 이적들을 행한다는 가짜 예언자난 거짓 메시야들이 넘쳐 났다고 기록하고 있는 시대는 바로 신약성서들 곧 바울서신들을 필두로 하여 복음서들이 막 쓰여지던 때였습니다. 

요세푸스가 강도나 도둑이라고 적시한 사람들은 거의 열심당(젤롯당)을 중심으로 한 유대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요세푸스는 로마로 귀화한 유대인입니다.) 특별히 주시해야 할 것은 가짜 예언자들, 거짓 메시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각종 기적과 이적들을 미끼로 하여 메시야를 기다리며 유대의 독립을 갈망하던 백성들을 광야로 모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늘 참혹한 죽음 뿐이었습니다. 

로마군들은 위에 튜다스의 말에 속아 요단강가로 모여든 유대백성들을 반역을 도모한다고 하여 몰살을 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튜다스를 전후해서 등장했던 여러 가짜 예언자들과 거짓 메시야를 중심으로 모였던 유대인들은 결국 죽음을 면치 못했다고 요세푸스는 전하고 있습니다. 

많은 가짜 예언자들과 거짓 메시야들은 당시 백성들의 절실한 요구와 바램을 자신들이 들어주고 해결해 줄 수 있다며 기적과 이적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번번히 속았고, 그들의 삶은 점점 나락으로 치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가 광야에서 마귀에게 받은 세 가지 시험들은 바로 당시 유대인들에게 절실했던 문제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이 시험에 대한 예수의 응답은 바로 새로운 세계가 도래하고 있다는 예언이었으며, 그 예언의 성취자가 자신이라고 하는 자기확신의 과정이었습니다. 

이제 그 시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