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들 세상 – 말씀 8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42 

“너희 가운데 누가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한 마리를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아흔 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둔 채 잃은 양을 찾아 헤매지 않겠느냐? 그러다가 찾게 되면 기뻐서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 와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자,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양을 찾았읍니다’ 하며 좋아할 것이다.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 누가복음 15 : 4 – 7 

 “너희의 생각은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자. 그 사람은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그대로 둔 채 그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 양을 찾게 되면 그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 마태복음 18 : 12 -14 

아주 잘 알려진 예수의 비유 말씀 가운데 하나인 잃어버린 양의 비유입니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 기록된 이 비유의 마지막 서로 다른 구절들 곧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마태)”와 “이와 같이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누가)”는 기록자들인 마태와 누가의 첨언이었을 가능이 높다는 것이 성서 연구자들 사이에 정설입니다. 

나머지 남은 예수의 비유 원형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흔 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둔 채(마태)”,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그대로 둔 채(누가)”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아나서는 주인 또는 목자의 행동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생각을 해 봅시다. 

양 백마리라는 한무리의 집단이 있습니다. 그 집단을 소유하고 있는 주인에게는 백마리들 하나 하나가 모두 소중한 가치를 지닌 재산입니다. 주인이나 목자의 입장에서 보면 말입니다. 백마리로 구성된 양의 무리는 들판 또는 산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안전한 우리(울타리나 가옥)에 있었던 상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lost sheep만일 양들이 안전한 어떤 우리안에 있었던 상황이라면, 그 상황에서 한 마리를 잃어버린 조건이었다면,  당연히 예수의 비유는 합당한 이야기가 됩니다. 상식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충분히 되찾은 후에 일어난 잔치자리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잃어버렸던 양 한마리의 가치 중 십분의 일 정도 한도내(?) 또는 양 한마리 값 통째를 다 써서 맘껏 먹고 마셔도 손해 볼 일을 아니었습니다. 그저 잃어버린 양의 가치만큼 즐긴 것으로 치부하면 될 일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비유는 이런 전제조건이 깔린 상황이 아니였습니다. 

들판이나 산에서 방목 상태에 있는 양떼에게는 그들을 지켜 줄 목자나 하다못해 양들을 지켜 줄 개들이 필요했습니다. 만일목자나 지킴이 동물조차 없이 양떼들을 방목상태로 방치한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재산권을 포기하거나 양들의 생명을 포기하는 일이었습니다. 양떼들을 공격하여 먹이로 삼으려는 들짐승이나 남의 재산을 약탈하거나 훔치는 일을 일삼던 당시 횡행했던 도적들에게는 내 놓은 밥상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이 비유에서 양떼들을 지킬 목자나 어떤 장치도 없이 양 아흔 아홉 마리를 들이나 산에 그대로 방치한 채로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아 나선 주인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쯤해서 우리 스스로에게 한번 묻기로 하지요. 

만일 똑같은 상황이라면 저나 당신은 어떤 행동을 보일까요? 아무런 전제 조건 없이, 일테면 “믿음으로”라는 수식없이 솔직하게 우리들이 보일 수 있는 행동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차라리 이런 비유가 더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 

뉴욕 맨하턴 타임 스퀘어 광장이나 서울 명동 한복판에서 좌판 행상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도록 하지요. 개당 백불 또는 십만원씩 하는 물건 백개를 놓고 팔려고 하는데 그 중 하나를 지나가던 행인 하나가 확 가로채 도망가고 있는 상황을 그려 보실까요. 

그 좌판에 있는 아흔 아홉개 곧 구천 구백불  또는 구백 구십만원을 버려둔 채, 잡을 수 있는지도 모를 그 백불 또는 십만원을 낚아채 도망간 이를 찾아 나설까요? 

한번 이런 상황을 머리 속에 그려 보면서 한번 솔직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을 생각해 보시자는 말입니다. 

아마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나 읽고 있는 당신이나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오늘 재수 더럽다”며 좌판에 있는 구천 구백불의 물건을 지키는 쪽으로 선택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지 않으신가요? 

이건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이지요, 그리고 합리적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글쎄 만일 이러한 제 물음에 당신이 “아니!”라고 하신다면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스스로를 속이고 있거나 예수 반열에 올랐거나…. 

예수가 말한 이 잃어버린 양 한마리의 비유는 바로 그런 우리들의 선택 지점에 대한 물음입니다.

상식에 대한 역설(逆說,paradox)을 넘어 상식에 대한 반역(反逆)이었습니다. 

혹시 역설, 반역. 이런 말들이 거슬리시나요? 그러면 그런 말들을 순하게 써보지요. 바로 바보랍니다.

바보들이 사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라는 말씀이랍니다. 

다가오는 주일이 기독교력으로 종려주일입니다. 사람들이 “바보들의 세상”에 열광하던 시간을 기리는 주일이지요. 그러나 똑똑한 인간들은 바보 한 사람 곧 예수를 죽이고 말지요. 십자가에 매달아 말입니다. 

자! 예수의 비유 몇 가지 더 이야기 하렵니다.

일구이언 – 말씀 1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36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말씀하시자 그는 “선생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 하셨다.  또 한 사람은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따르겠읍니다. 그러나 먼저 집에 가서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 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자격이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 누가복음 9 : 59 – 62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아내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 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 마태복음 19 : 29 

가령,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누가복음 14장 26절의 말씀을 인간 공동생활의 토대였으리라고 가정하기보다는, 오히려 특별한 공동체 삶의 한 정황이라는 양식사의 한 전제를 문제삼고 싶을 것이다. 이러한 윤리적 극단주의 때문에 예수의 말씀은 일상의 행동을 규정하기에는 아주 부적합하다. 그렇게 때문에 오히려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즉, 그러한 말씀을 30년 동안이나 구전으로 전달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누가 그런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을까? 누가 그런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 들일 수 있었을까?   – 게르트 타이쎈(Gerd Theisen)의 “원시 그리스도교의 예수 말씀에 대한 문학사회학적 고찰”에서 

이즈음에도 이런 말을 쓰는지는 모르겠으되 “일구이언이면 이부지자라(一口二言 二父之子)”하는 말이 있습니다. 한입으로 다른 이야기를 하면 아버지가 둘인 사람이다라는 말이지요. 후레자식이라는 말입니다. 

이랬다 저랬다 상황에 따라 자기가 한 말을 뒤집기 일쑤인 사람을 일컬어 하는 말이지요. 특히 여기 미국이나 한국이나 정치판에서 먹고 사는 이들이 주로 듣고사는 말일겝니다. 

애비가 둘이다는 말은 욕이지요. 이즈음은 세상이 하도 급변해서 애비 두 서넛, 애미 두 서넛 되어도 욕은 될 수 없지요. 솔직히 저는 실제 그런 사람들을 욕되게 할 뜻이 전혀 없답니다. 그런 상황은 전혀 본인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고, 어떤 상황에 처한 사람일지라도 제가 믿는 신인 야훼(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똑같이 의미있는 삶인 까닭입니다. 

아무튼 이부지자(二父之子)  곧 애비가 둘이라는 말은  예전에는 큰 욕이었답니다.  후레자식이었지요. 후레자식이란 호래자식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하지요.  호(胡)와 래(來)에서 온 말입니다. 오랑캐 자식이라는 말입니다. 

누가 그렇다고요? 바로 한 입으로 딴 소리하는 사람을 일컬어 그리 불렀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말에 약속에 책임지지 않고 말을 바꾸는 사람은 오랑캐의 자식이란 말이지요.

운보 김기창

예수가 딱 그 짝이라고 제가 말한다면 아마 저를 미친놈으로 몰아치는 사람들이 차고 넘칠 것입니다. 그런데 대단히 죄송하지만 예수가 한 말씀들을 찬찬히 놓고보면 영락없이 딱 그 짝이랍니다. 

일구이언(一口二言)을 밥먹듯이 했다는 말씀입니다. 

지난 기적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는 기적을 통해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에게 “가라”는 명령을 즐겨했습니다. 가족에게로 돌아가라는 명령이었지요. 

그런데 예수는 똑같은 입으로 “가족을 버리라!”고 명령을 한답니다. 그것도 한두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가족을 버려라.”, “가족을 떠나라.”, “가족을 잊어라”, “가족을 돌아보지 마라”는 명령을 한답니다. 

도대체 이런 예수의 일구이언(一口二言)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현령 비현령(耳懸鈴 鼻懸鈴)”이라는 말도 있지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이지요. 귀걸이 코걸이는 옛말이지요. 요즈음엔 피어싱(Piercing)이라고 하지요. 입술,  혓바닥, 배꼽 등등 몸 아무데나 제 맘대로 장신구들을 달곤 하는 일 알입니다. 

일구이언이 이현령 비현령으로 아무 때나 어디서나 예수의 이름으로 만병통치가 되는 오늘날의 교회, 이른바 넘쳐나는 설교들은 때론 그저 성황당이 되곤 하지요. 

이게 누구 때문일까요? 일구이언한 예수 때문이라구요? 그런 답에는 그냥 웃고요. 

그럼 교회나 설교자들 때문이라고요? 어느 정도의 탓을 만드는 요인이 되겠지만 주된 요인은 아니랍니다. 그럼 누구 탓이냐고요? 

바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과 이 글을 쓰고 있는 제 탓이랍니다. 

자! 이제부터 예수의 말씀을 통해 그 까닭을 알아보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