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 5

오늘도 낯선 시간 앞에서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하루를 보내다. 손님들에게 이미 고지한대로 가게 문은 닫았다. 다음 주부터 주 사흘 동안 짧게 라도 영업을 지속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그래도 여전히 시간은 남아 돈다. 그렇게 빨리 달리던 시간들이었는데 한적한 거리 풍경만큼 더디다.

오후 속보는 주(州)내에서 첫 바이러스 감염 사망자 소식을 전한다. 오늘로 첫 확진자 소식 이후 보름이 지났다. 현재  확진자 수는 143명이란다. 주내 인구라야 아직 백만명에 이르지 못하므로 인구 대비 결코 낮은 수치가 아니다.

신문은 coronavirus pandemic 상황에서 어찌할 바 모르는 이웃들을 위해 서로 위로하는 모습들을 담은 사진들과 글로 오늘을 이겨내는 사람들 소식도 전한다.cec82e34-d943-4d01-a697-73a61516d18f-Jen_5 d8471453-ec20-493d-86dd-9a99da7e063d-Jen._3

그리고 재미있는 기사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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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택근무가 늘어가면서 집안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하게 된 부부 사이의 갈등 현상과 그 해결 방안들을 제시하는 기사였다.

삼십 년 넘는 세월 동안 거의 24시간을 아내와 함께 하며 살아 온 내 눈을 반짝이게 한 기사였지만,하루에도 열 두 번(아주 최소한으로 잡더라도) 싸우며 무사하게 살아 온 우리 부부에겐 별무 소득이었다.

그러다 손에 든 송기득 선생님 책 ‘인간(그리스도교 인간관에 대한 인간학적 해석)’을 읽다가 내 온 몸과 맘으로 웃는 웃음을 짓다.

“그런데 그때그때의 상황에서 모든 <남>에게 <너>가 되려고 애쓴 예수의 삶은 결국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의 <나>의 참된 실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끝내 자신의 <참 나>를 살아냈던 것 뿐이다.  ………..

우리는 이따금 우리 둘레에서 자신의 온 삶을 한 이성異性을 위하여 살고 있는 사람을 본다. ….이러한 삶의 자리를 우리는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너를 삶으로서 <나>를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너를 사는 나, 그것이 곧 나이며 그 밖에 나는 따로 없는 것이다. 나 없는 <너와 나>라고 할까……….

우리는 이러한 자리를 비난하거나 낮게 평가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한없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그러나 한 가지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그것은 <너>에게  <나를 드림>  이라는 미명으로 하여 자신의 순수한 새 가능성을 억누른다든지, 그와 못지 않은 <나>의 성실을 저버린다든지, 심지어 그것으로 하여 반反너스러운 것의 발현을 위장한다든지, 자기 속임수를 감추려든다든지. 또한 그것이 저만의 희생이라고 하여 자만하거나, 과장한다던지 한다면, 그것은 드디어 <나>도 못살고 <너>도 못살고 마는 자기파멸을 가져 올 것이 뻔하다. 더구나 그러한 <나>로 하여 자신을 쳐다보고 구원을 바라는 그 밖의 사람들을 못 본 채 해서는 더욱 안될 것이다.

그러나 <너>에의 고귀한 삶도 깊이 따지고 보면 결국 <나>를 사는 삶 그것을 넘지 못하리라.”

그래, 무릇 너를 위한 나를 살기 위해 누구 또는 무엇과 싸우더라도 웃으며 살 일이다. 하루를.

만남

주말 오후, 친구 부부와 우리 내외가 함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펜실베니아  Swarthmore 마을의 소극장에서 락오페라 Jesus Christ Superstar를 보았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이젠 틈나면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며 살아보자는 배포가 맞는 친구의 생각이었다.

Swarthmore는 인구 6천을 조금 웃도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이곳에 있는 소극장 Players Club of Swarthmore는 107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다. 비교적 한적한 주택가 마을에 위치한 소극장은 마치 초등학교 강당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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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 입구 제법 너른 로비에는 107년의 역사를 말해주는 게시물들이 벽을 채우고 있었는데, 음료수와 간식들을 파는 매대는 아이들 소꿉놀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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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 입구에서 표를 받고 안내하는 이들을 보니 나는 아직 시퍼런 청춘이었는데, 내 나이는 300여석의 공연장을 거의 매운 관객들의 평균 연령 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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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전에 각종 안내를 하는 사내도 내 또래였는데, 그가 소극장 클럽 멤버들을 위한 안내를 한다면서 멤버들은 손을 들어 보라고 하니 객석의 약 1/3정도가 손을 들던 것이었다. 소극장을 위해 연회비를 내거나 기부하는 멤버들의 연령 역시 대부분 내 나이 또래 중늙은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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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시작되고, 오페라에 무지한 내 눈과 귀의 수준으로 보면 배우들의 연기와 음악성은 놀랄만큼 대단했다.

내 무지함 탓이 우선이지만 이따금 내가 공연에 매몰되지 못했던 까닭은 바로 내 앞자리에 앉아있는 아이 때문이었다. 옆자리 제 엄마와 함께 공연을 보고 있던 아이는 덩치가 제법 큰 십대 나이 즈음의 정신 신체 장애아였다.

무거운 음악이 흐르거나 노래가 고음으로 불려지거나 조명이 갑자기 어두어지거나 하면 아이는 몸을 뒤틀며 제 앞자리나 옆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찌르거나 머리를 만지거나 하곤 했는데, 그럴 때 마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꼭 끼어 안고는 했었다. 그런 모자의 모습이 무대를 향한 내 시선을 뺏곤 하였다.

사실 내가 그보다 더 놀라운 시선을 보낸 관객들은 따로 있었다. 중간 휴식 시간이었는데 스물 언저리 처자를 양쪽에서 붙들고 걷는 중년 부부, 아마 가족일 듯한 일행이 그들이었다. 처자는 앞을 못보는 소경이었다.

아이들 소꿉장난 같던 로비의 매대는 중간 휴식이 되자 제법 붐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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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Christ Superstar의 극 내용은 익히 아는 것이었고, 내 젊은 시절 70년대의 파격적인 예수나 유다의 해석이 오늘날에야 전혀 놀랄 일도 아니었지만, 나는 어제 그 자리에서 새롭게 예수를 만났었다.

연극이 끝나고, 배우들을 향한 이어지는 박수 소리도 끝나고 객석의 관중들이 일어난 후의 일이었다. 내 앞자리에 앉아있던 지체아에게 시달림(?)을 받았던 주변의 사람들은 너나할 것도 없이 아이와 엄마에게 인사를 건네던 것이었다. “연극 잘 보았니?”, “재밌었니?”하며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 엄마에겐 따듯한 눈길을 보내며 한두 마디 씩 인사를 건넸는데 그게 결코 건성이 아니었다.

어쩜 예수를 재해석하고 만나 얼싸 안는 일이란 무대 위에서가  아니라 객석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나는 모처럼 문화인 흉내를 내보았다.

성탄과 별

해방과 구원은 성서 이야기의 두 핵심이다. 히브리족속의 탈애굽과 예수의 십자가는 두 핵심 이야기를 대변하는 사건들이다. 나머지 무수한 이야기들을 단지 두 핵심 이야기를 위한 치장으로 내칠 수는 없겠다만, 무게가 처짐에는 틀림없다.

예수 탄생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십자가와 부활에 닿지않는 예수 탄생 이야기는 큰 뜻이 없다.

<그 분은 그 옛날 호숫가에서 그분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찾아가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름이 없는, 알지 못하는 분으로 찾아 오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고 똑같이 말씀을 하시며, 우리 시대에 그분이 성취하셔야 할 과제를 우리에게 정해 주신다. 그리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현명한 사람이건 단순한 사람이건 간에, 그분의 제자로 살기 위해 거치게 될 수고와 갈등, 고난 속에 그분 자신을 계시하시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 속에서 그분이 누구인지를 배우게 된다.> –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역사적 예수의 탐구에서)의 말이다.

<예수가, 아마도 처음이자 유일하게, 성전의 화려함에 맞서서 그 합법적 브로커 기능을 브로커 없는 하나님의 나라(unbrokered kingdom of God)의 이름으로 상징적으로 파괴하였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 시대의 신학자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 역사적 예수에서)이 만난 예수의 모습이다.

십자가와 부활이 전적으로 믿는 이들 개인 신앙고백에 닿아 있듯이, 예수 탄생의 뜻 역시 온 세상 각 사람들과 신이 그 어떤 브로커 없이도 만나는 지점 곧 오늘 여기에서 세워진다.

2018년 성탄 전날 아침에 빌어보는 기도이다. “곤고한 모든 이들의 가슴에 한 점 별빛으로 찾아오소서. 별빛에 크기와 상관없이 오신 당신으로 인해 오늘, 여기에서 누리는 삶의 뜻을 찾게 하소서.”

그 마음으로 가게 손님들에게 편지를 띄운다.

12-24

이제 2017년도 딱 한 주간을 남겨 놓았습니다. 지나간 한 해 동안 있었던 여러 일들을 생각해봅니다. 사람 사는 일이 늘 그렇듯 꼭 즐겁고 기쁜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느 해처럼 때론 아프고 슬프고, 화나고 짜증나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해를 돌아볼수록 커지는 것은 감사입니다. 특별히 제 세탁소를 통해 만난 당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 감사의 마음으로 크리스마스 전 날 아침에  제가 좋아하는 시 한편을 당신과 나누고 싶어 띄웁니다.

겨울 길을 간다

–       이해인

봄 여름 데리고
호화롭던 숲
가을과 함께 서서히 옷을 벗으면
텅 빈 해질녘에
겨울이 오는 소리

문득 창을 열면
흰 눈 덮인 오솔길
어둠은 더욱 깊고 아는 이 하나 없다
별 없는 겨울 숲을
아는 이 하나 없다

먼 길에 목마른
가난의 행복 고운 별 하나
가슴에 묻고
겨울 숲길을 간다.

화사한 봄도 아니고, 호사스런 여름도 아니고, 풍성한 가을도 아닌 텅 빈 겨울에 흰 눈 덮힌 오솔길을 걷는 시인은 올해 73살의 카톨릭 수녀입니다. 그녀는 아는 이 하나없이 별 빛조차 없는 어두운 겨울 숲길을 걷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눈으로 바라보면 겨울 길을 걷고 있는 시인은 불쌍하고 안타깝게 보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저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 놀라운 반전을 선포합니다.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녀가 행복한 까닭은 <가난의 행복 고운 별 하나/ 가슴에 묻고/ 겨울 숲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녀가 가슴에 품은 별이란 종교적 고백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저 같은 보통사람들 누구에게라도 그 별 하나 묻을 가슴이 있는 한 ‘행복을 가져다 주는 고운 별’ 같은 사람 하나쯤을 있지 않을까요?

이제 한 주간 남은 2017년의 당신의 시간들이 고운 별들로 반짝이는 길이 되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The year 2017 has just one week left now. I’m thinking back over various things that happened this year. As is of the case with life, not all of them were happy and pleasant. Just like other years, some of them were painful, sad, upsetting or irritating. However, as I’m looking back over the year, what becomes bigger is gratitude. Especially, I am grateful to you who I got to know through my cleaners.

With the gratitude in mind, I would like to share with you one of my favorite poems on this morning one day before Christmas.

Walking on a winter path

– Hae-in Lee

Along with spring and summer
Woods which was dazzled,
When they take off clothes slowly with autumn,
Desolate at sunset
The sounds of winter coming are whistling around.

When I open the window casually,
On the snow-covered footpath,
Darkness becomes deeper and no one who I know is there.
In the winter woods without stars
There is no one that I know.

Thirsty from a long journey
Happiness of poverty, a beautiful star
Burying in my heart,
I’m walking on a winter footpath in the woods.

Not in cheery spring, not in dazzling summer nor in abundant fall, but in desolate winter, the poet who is walking on the snow-covered footpath is a Catholic nun at the age of 73. She is walking on the dark winter footpath in the woods without stars.

If we look at her with the eyes of ordinary people, the poet may look pitiful and sad. But, she declares the reversal which is shocking to ordinary people like me. She says that she is a happy person.

The reason why she is happy is because she is walking <on a winter footpath in the woods/Burying in my heart/Happiness of poverty, a beautiful star>. The star which she buries in her heart may mean religious confession.

But, thinking it over deeply, to all the ordinary people like me, if we have a heart to bury that star in, I think that we must have at least one person who is like a beautiful star which brings happiness to us. Don’t you think so?

I wish that the last week of 2017 will be like a path sparkling with beautiful stars to you.

From your cleaners.

거짓에

뜰에 낙엽이 수북하다. 세상의 변화가 어지러울 지경이라고들 하지만, 계절의 변화처럼 때론 순차적이다. 사람 사는 모습도 매양 한가지다.

모처럼 게으른 아침에 복잡한 세상 뉴스들을 훑어 보다가 꺼내든 생각들은 노자와 예수이다.

인위人爲란 것이 곧 거짓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거짓이란 글자는 여러분도 잘 알고 있듯이 ‘위僞’입니다. ‘僞위는 인人+위爲입니다.’ 거짓의 근본적인 의미는 ‘인위’입니다. 인간의 개입입니다. 크게 보면 인간의 개입 그 자체가 거짓입니다. – <신영복의 ‘강의’에서>

관습의 수호자는 항상 인간의 행동을 일반화하려고 애쓴다. 이 때 사회를 하나로 묶는 데 사용하는 끈은 거짓됨이다. – 중략 – 그들은 내적인 덕을 배양하는 대신에 사회를 보다 더 인위적으로 규제하려고 애쓴다. – <마틴 아론슨(Martin Aronson)의 ’예수와 노자의 대담’에서>

예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그들의 위선을 조심해야 한다” 하고 말씀하셨다.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말한 것은 모두 밝은 데서 들릴 것이며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것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  < 성서 누가복음 12장에서>

겨울로 들어서는 일요일 아침에.

삶이란?

연일 95도를 웃돌고 습기가 높은 날씨에 지친 몸이 만사가 귀찮다고 풀어질 즈음 기온이 뚝 떨어졌다. 오늘 내일은 최고 기온이 70도 어간에 머무른단다. 그렇다하여도 지친 몸이 쉽게 탄력을 되찾지 못한다. 나이 탓이려니.

몸 생각만 하다가 맘 생각이 들어 노자(老子)를 펼쳐 든다.

<사람들은 모두 여유가 있는데 나만은 늘 가난하다. 내 마음은 바보의 마음, 그저 멍청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모두 똑똑하고 활발한데, 나만은 흐리멍덩하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상세하고 분명한데, 나만은 우물쭈물 결단을 못 내린다. 바다처럼 흔들리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정처 없다. 사람들은 다 유능한데, 나만은 우둔하고 촌스럽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20장의 한 부분이다. ‘그랬구나, 노자 어르신도 그 맘 아셨구나’ 그 맘으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어찌 노자 뿐이랴!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 조차 없다.>
예수는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한 모습을 고백하기도 했거늘.

노자와 함께 생각이 뒹구는데 튕기는 아내의 소프라노 소리.

“와요!”
저녁밥 준비되었다는 소리에 엉덩이 드는 순간, 이어졌던 아내의 웃음소리.
“미안, 미안! 밥솥을 안 눌렀었네….”

하여, 삶이란 무릇 살만한 것이려니.

삶이란!

2016년 성탄에

새 식구를 맞고, 또 다른 가족이 하늘나라로 떠나는 길을  배웅하노라 지난 두어 달 동안 몸과 마음이 조금 분주했었다. 눈과 귀는 열려있어 미국이나 한국의 숱한 뉴스들은 저절로 내게 들어와 생각의 분주함을 더했다.

지나간 내 삶이 그랬듯, 습관처럼 생각의 분주함을 떨치려 성서를 손에 들곤 하였다. 2016년을 보내는 이 시간속에서 성서는 내게 이렇게 응답했다. 우리는 신의 은혜와 은총을 소유하고 마냥 누리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신의 은총을 그냥 겸허히 받아 드리는 존재라는 것이다. 어떤 처지와 환경에 놓여 있든간에, 신 앞에서 사람(존재)이 존귀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 맘으로 가게 손님들에게 성탄편지를 띄웠다.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 귀한 모습으로 2017년 새 희망을 맞자고…


2016년 마지막 일요일이자 성탄절입니다.

올 한해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저도 지나간 올 한 해의 삶을 되돌아봅니다. 당신 덕분에 세탁소도 잘 운영되었으며, 제 개인적인 삶이나 가정 일들도 그럭저럭 잘 꾸려 온 것 같답니다. 그러나 곰곰히 다시 따져보면 아쉽고, 부족하거나 모자란 것들이 너무나 많답니다.

그런 생각으로 선택해 읽은 책의 제목은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한국의 불교 스님인 혜민이 쓴 책인데, 이 사람의 이력이 재미있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친 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종교학을 공부한 후 하버드 대학교에서 종교학 석사, 프린스턴에서 종교학 박사를 마친 뒤, 매사추세츠 주의 Hampshire College에서 7년간 종교학 교수로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가 스님이 되었답니다. 현재는 가족을 먼저 보낸 분들, 암 진단을 받으신 분들, 장애인 아이를 기르고 있는 부모들, 힘든 취업 준비생들, 유산의 아픔이 있으신 분들 등등을 위한 무료 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합니다.

혜민 스님은 그의 책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에 이런 말들을 기록하고 있답니다.

<완벽하진 않아도 85퍼센트 정도 괜찮다 싶으면 넘기고 다음 일을 하세요. 완벽하게 한다고 한없이 붙잡고 있는 거, 좋은 거 아닙니다. 왜냐하면 완벽이라는 것은 내 생각 안에서만 완벽한 거니까요.>

<오랫동안 원하던 것을 성취하고 나면 두고두고 행복할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막상 성취하고 나면 잠시의 행복감 뒤에 허탈의 파도가 밀려오고, 성공 후 새로운 상황이 만들어낸 생각지도 못한 후폭풍이 몰려와요. 그러니 지금의 과정을 즐겨요. 삶에 완성이란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의 책을 읽는 이들에게 이런 당부를 합니다.

<지금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 행복해지시길, 건강해지시길, 편안해지시길. 어디를 가시든 항상 보호 받으시길. 자신의 존귀함을 잊지 않으시길.>

성탄절 아침에 불교 스님의 말로 인사 드리는 것이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있지만, 비록 결코 완벽할 수는 없는 존재일지라도 우리 스스로의 존귀함을 일깨워 주는 점에서는 다 통한다는 마음으로 인사 드립니다.

Merry Christmas & Happy Holidays!

당신의 세탁소에서


 

It’s the last Sunday of 2016 and Christmas Day.

How has this year been to you? I’m also trying to look back on my life this year. Thanks to you, I think that I have been able to manage to run the cleaners as well as my personal life and my family well enough. However, brooding over things in this year more thoroughly, I feel that many things are lacking and that this year leaves me much to be desired.

With that thought, I chose and read a book whose title was “Love for Imperfect Things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

It was written by a Korean Buddhist monk, Hyemin, who has a very interesting career. After graduating from a high school in Korea, he studied the science of religion at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in Berkeley, received a master’s degree in the science of religion from Harvard, and a Ph.D. from Princeton. After that, he taught at Hampshire College in Massachusetts as a professor in the science of religion for seven years. Then, he returned to Korea and became a Buddhist monk. At present, he is running a free special healing program for unfortunate people, such as bereaved families, people with cancer, parents with handicapped children, jobseekers in difficult situations, women with the ordeal of miscarriage, and so on. He is also a best-selling author.

He said the followings in his book, “Love for Imperfect Things”:

<If you think that it is 85% fine, if not perfect, move to the next work and do it. To hold on to something forever to make it perfect is not good. That’s because to be perfect really means to be perfect only within your own perspective.>

<Though you may think that you would be happy for a long time if you accomplish what you have wanted for so long, that is nowhere near the truth. Once you have accomplished it, you would face a wave of letdown after a brief feeling of happiness. You would confront the unexpected backlash which a new situation after the success will cause. So enjoy the process at the present time. It seems to me that there is no completion in life.>

And, he made wishes for the readers of his book:

<I wish for all of those who are reading this book to be happy, healthy, and comfortable, and to be protected wherever you may go, and not to forget the nobility of yourself.>

It may look inappropriate to greet you with a Buddhist monk’s words on Christmas morning. But, I’m doing so with the thought that Christianity and Buddhism have something in common: they enlighten us that though we can never be perfect, we are still precious.

Merry Christmas & Happy Holidays!

From your cleaners.

 

가을, 주일아침 그리고 생명

<안식일이 되어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 가셨는데 마침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기만 하면 고발하려고 지켜 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는 “일어나서 이 앞으로 나오너라” 하시고  사람들을 향하여는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말문이 막혔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노기 띤 얼굴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펴자 그 손은 이전처럼 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나가서 즉시 헤로데 당원들과 만나 예수를 없애 버릴 방도를 모의하였다.> – 성서 마가복음 3장 1 – 6절, 공동번역

지난 20일 노스 캐롤라이나 샬롯(Charlotte)에서 일어났던 경찰관에 의한 용의자 피살사건 현장 녹화영상이 공개되었다. 경찰관들이 착용하고 있었던 몸부착 카메라(officer’s body camera)에 찍힌 영상이다. 영상으로 흑인 용의자가 총을 손에 들고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다만 경찰관들이 쏜 총소리임에 분명한 네발의 총성과 마치 토끼몰이하듯  포위하는 경찰관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경찰측은 용의자의 차량에서 용의자의 지문과 DNA를 확인할 수 있는 권총과 마리화나를 증거로 용의자가 공공 안전을 위협하는 인물이었음을 주장하고 있지만,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가 경찰관에 의해 피살 되었다고 주장하는 시위대들을 무마시키기에는 어림없어 보인다.

한국에서는 지난해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후 317일 동안 사경을 헤매던 백남기선생이 끝내 숨졌다는 소식이다.

%eb%b0%b1%eb%82%a8%ea%b8%b0%ec%84%a0%ec%83%9d백선생을 치료해온 서울대병원은 돌아가신 백선생의 사인은 신장 기능이 갑자기 떨어지는 증세인 급성신부전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경찰측은 오래전부터 백선생이 쓰러져 누우신 일과 물대포 살수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불명확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으며, 지난 9월 12일 국회에서 열린 이른바 ‘백남기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했던 사고 당시 경찰청장이었던 강신명은 “(시위 진압 과정에서) 사람이 다쳤거나 사망했다고 무조건 사과하는 것은 적절치 않고 원인과 법률적 책임을 명확히 하고서 해야 한다”고 답변한 바 있다.

명백한 것은 두 사건 모두 법질서를 내세운 측이 힘(총과 물대포)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간 사건이다. 마흔 세살의 흑인 Keith Lamont Scott은 법질서를 집행하는 권력인 경찰이 판단하기에 공공 안전을 위협하는 인물로 여겨져 목숨을 잃은 경우이고, 일흔살 농민 백남기선생은 “대통령의 공약인 쌀값 21만원을 보장하라”는 요구가 공공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주장하는 권력의 최첨병인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숨진 것이다.

오래전에 이유를 막론하고 사람을 상하게 하고 죽이는 법질서를 파괴했던 이가 있었다. 바로 예수이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법질서를 앞세운 이들에게 던졌던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는 예수의 물음은 ‘법의 존재’ 이유를 묻는 것이었다.

무릇 법이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법을 위해 있지 않다는 것이며, 법이 사람들의 삶을 보호할 때 그 존재 의미가 있는 일일 뿐 그것에 반하여 사람들을 상하게하고 죽게하는 법은 언제든지 폐기할 수 있다는 선언이었다.

외형적이고 형식주의를 우선시할 수 밖에 없는 사회통념과는 별개로, 적어도 예수쟁이라면 성서를 삶의 지표로 삼는 신앙인이라면 “법은 사람을 위해 있어야 한다”는 이 명제를 놓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최근 대한민국 국회에서 있었던 대정부질문 답변에 나선 황교안총리가 교언영색의 화술로 법질서를 앞세워 세월호 유가족 및 실종자 가족들의 가슴을 후비고 파며 또 다른 죽음을 안기는 장면이 떠오른다.

황총리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포장되어 소개되는 오늘의 종교는 예수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

뚝 떨어진 수은주 따라 성큼 다가선 가을날 주일 아침, 떨어진 낙엽에서 다시 솟아날 생명을 보았던 예수와 숱한 예수쟁이들을 그리고 생각하며…

휴일 그리고 좌파

노동절 휴일도 저물었다.

어제 농사짓는 벗이 땡볕에서 땀 흘려 키운 열무 몇 단을 보내왔다. 그의 노동을 생각하며 열무김치를 담갔다. 실히 병 하나를 채우고도 남았다. 농사짓는 친구 덕에 이젠 김치도 곧잘 담게 되었다.

얼마전에 만두 먹으러 중국인촌에 갔다가 사서, 다듬어 얼려놓은 오리고기를 꺼내어 주물럭구이를 만들었다. 기름기가 노인들에게 그리 좋지 않을 것 같아 고기만 저며 했더니 양이 참 적었다.

이즈음 다리가 불편해 거동이 힘드신 아버지는 “이게 다 6,25 때 박힌 수류탄 파편 탓”이라며 혀를 차신다. 내일 MRI 찍기 위해 병원 나들이를 하신다.

암기운이 다 가신  듯  가신 듯 하면서도, 잊힐만 하면 문제가 있다는 의사 소견에 움찔하시는 장모도 내일 병원 나들이를 하신다.

양쪽 노인들 몫으로 조금씩 떼어 놓고보니 우리 부부 양념에 비벼 한끼 식사로 딱 적합하였다.

이런 저런 뉴스들을 훑어 보다가 저녁나절 묵자(墨子)를 읽는다. 묵자를 읽는다기 보다는 문익환과 신영복을 읽는다가 맞겠다. 그 분들이 읽은 묵자를 내가 읽고 있기 때문이다.

묵자나 예수나 그들이 살았던 그 시대의 눈으로 비추어 보면, 아니 어쩌면 오늘에 이르기까지 줄곧 극단에 서 있는 좌파 일수도 있을 것이다.

“강자는 약자를 억누르고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능멸하고, 귀한 사람은 천한 사람에게 오만하며 간사한 자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며, 천하의 화와 찬탈과 원한이 생겨나는 근본적인 원인은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愛人若愛其身)”는 묵자의 가르침은 예수에 닿아 있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愛人若愛其身)”는 선언은 이미 혁명일 것이다. 입으로 말고 몸으로 서로가 실천하는 세상은 혁명 이후에나 가능할 것 아닐까? 극좌에 있는.

휴일 뉴스들은 나를 좌파로 몬다. 일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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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과 함께하라!

매서운 추위가 몰아친 주일 아침, 제 이메일함에 세월호 유가족 간담회에 대한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인근에 사는 한인들 가운데, 지난해 대한민국 진도 앞바다에서 있었던 세월호 참사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모여 “잊지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까?”라는 물음을 줄기차게 던지며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이들이 오는 3월초에 세월호 유가족들 두 분을 초청하여 모시고 간담회를 개최한다는 내용과 그 간담회를 위한 준비사항들을 알리는 소식이었습니다.

그저 마음으로만 성원을 보낼 뿐 이런 저런 핑계로 적극적으로 함께하지 못하는 부끄러움으로 이 글을 씁니다.

육년 전인 2009년 1월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뉴스를 전하는 화면에서는 엄청난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즈음 날이 새면 터지는 IS(이슬람 국가)의 만행에 버금가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시간 2009년 1월 20일 아침 7시20분, 대한민국 서울 용산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크레인에 실린 컨테이너 박스안에 있는 경찰 특공대들이 망루 양쪽을 잡아당겼습니다. 그러자 망루 틈이 벌어지고, 불기둥이 망루 아래로부터 솟구쳤습니다. 불은 삽시간에 망루 전체로 퍼지며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그 모습을 바라보던 누군가가 외쳤다는 소리입니다.

“저기 사람이 있어요. 저기 사람이….”

애타는 맘으로 외쳤을 “저기 사람이 있어요. 저기 사람이….”라는 절규를 육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기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리고 열달 전인 2014년 4월 16일 대한민국 진도 앞바다, 바닷물 속으로 잠겨가는 여객선 세월호에 울려 퍼지던 소리 “가만히 있으라” – 그렇게 가만히 있었던 사람들은 단 한사람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2015년 2월, 오늘 우리들 귀에는 이런 소리들이 들립니다. 바로 “그만 하라!”입니다. “제발 지겹다. 이젠 좀 그만 하라.”는 소리 말입니다.

마음만 먹었다면, 뜻만 있었다면 충분히 살릴 수도 있었던 생때같은 가족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저기 사람이 있어요, 저기 사람이….”를 외치는 이들에게 “가만 있으라!”라고 외치는 자들 “이젠 지겨우니 그만 하라”고 외치는 자들의 목청만 높아가는 세월입니다.

성서 마가복음의 기자인 마가는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갈릴리에서 끝나는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 마가복음 1장 14-15절, 개역개정본>

갈릴리에서 일하던 요한이 잡혀 죽음에 이르게 되자 예수는 갈릴리로 나가 그의 일을 시작했다고 마가는 전합니다.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 마가복음 16장 7절, 개역개정본>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살아난 예수는 누구보다도 먼저 갈릴리로 간다는 마가의 전언으로 사실상 마가의 예수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갈릴리” – 예수가 나아갔던 곳이고 일했던 곳이고 다시 살아나 달려간 곳입니다.

예수가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기전 사람들은 베드로가 예수 패거리였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이렇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 마가복음 14장 70절)”

“갈릴리 사람이니 너 또한 한 패거리지?”라는 물음,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같지 않으신지요?

지친 예수“저기 사람이 있어요! 사람이…”라는 외침을 불온하고 불순하다고 낙인찍으며 “가만 있어라!”, “이젠 그만 하라!”외치는 자들을 향해 나아갔던 이, 바로 예수라는 믿음이 제 믿음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저기 사람이 있어요! 사람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는 곳, 2015년 오늘 “가만 있어라!”, “이젠 그만 하라!”고 강압하는 자들을 향해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치는 이들이 있는 곳, 갈릴리에 예수가 함께 한다고 믿습니다.

매운 바람소리 온종일 그치지 않는 날, “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 사람들의 모임”에서 전해 온 소식 가운데 만난 예수랍니다.

‘우리가 텍스트(성서)에 말을 걸기까지는 텍스트(성서)는 결코 우리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텍스트(성서)는 우리 자신의 언어로 대답한다. 그것이 사회학적인 언어이든 신학적인 언어이든지간에 그렇다. 간단히 말해서, 새로운 대답은 새로운 자료로부터 나오기보다는 새로운 물음으로부터 나온다.” – John Goodrich Gager(전 프린스톤대학 종교학 교수)가 쓴 <우리들은 적들과 손잡을 것인가? 사회학과 신약성서 (Shall we marry our enemies? Sociology and the New Tastament)>에서

어떤 감사 – 홍길복목사님께

<지혜의 왕이라고 불리는 솔로몬 임금이 한번은 신하들을 모두 불러 모은 후 이런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제 너희들은 이 세상에 나가서 기쁠 때 보면 슬퍼지고 슬플 때 보면 기뻐지는 것을 하나 구해 오거라.”

솔로몬의 신하들은 온 천하를 다니면서 기쁠 때 보면 슬퍼지고 슬플 때 보면 기뻐지는 것을 찾아 헤매다가 드디어 한 가지를 구해서 왕에게로 가져왔다. 그것은 왕의 손가락에 꼭 맞는 반지였다. 솔로몬왕은 그 반지를 자기 손가락에 끼웠다. 그리고 자세히 그 반지를 들여다 보았다.

그런데 거기, 그 반지 곁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이 또한 지나가리라’ 성공도 실패도, 사랑도 미움도, 기쁨도 슬픔도, 그리고 마침내는 삶과 죽음까지도 다 지나가서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손길에 맡기고 나면 모든 것이 다 그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감사뿐이다.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진심으로 드리는 말이다. 이제는 실패까지도 감사할 나이가 되었다.> – 홍길복목사가 쓴 “호주 디아스포라 목회와 신학>에서

사람이 한평생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고 똑같은 걸음걸이로 한결같은 길을 걸어왔다면 그것을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언듯 그리 생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실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비웃음만 살 뿐이다.

내 나이 젊어 한 때 많은 선배와 선생들을 만났다. 그들 가운데 “예수”에 빠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스스로 “예수처럼 사노라”고 확언하기도 했고, “예수처럼 살자”고 외치기도 하였다. 나도 이제 환갑, 진갑을 지나니 그이들은 칠순 팔순을 바라보게 되었다.

오래 전에 “예수에 빠져 예수를 외쳤던” 그이들이 오늘도 여전히 “예수에 빠져 예수를 외치며” 살고 있는 모습을 본다. 신문과 방송을 통해서거나 아는 이들의 전언을 통해서 또는 직간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여전한 그이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 모습들은 마치 전혀 변함없이 한마음으로 평생을 살아온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속내는 다르다. 그들이 오래 전에 말했던 “예수”와 지금 그들이 말하는 “예수”의 모습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내가 젊어서 그들에게 들었던 예수는 “오늘 우리와 함께 살아 움직이는 존재”였지만, 이제 나이들어 그들이 말하는 예수는 “체제(體制)안에 안주하며 그들만을 위해 만들어진 허수아비”일 뿐이다. 세월이 흘러 그들이 “예수”를 여전히 외치는 것은 변함 없으되 외치는 “예수”의 모습은 전혀 달라졌다는 말이다.

홍길복-2그러나 35년만에 만난 선생님 홍길복목사는 전혀 변함이 없으셨다. 그는 여전히 “떠남과 움직임은 아브라함 이후 성경의 전통이다. 크리스천의 삶은 영원한 순례자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움직이시는 하나님(The Moving God, The Mobile God)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다.”고 외치고 있었다.

홍목사님은 많이 변해 있었다. 35년 세월의 흔적을 얼굴에 남기지 않는 인간이 누가 있겠는가? 그 역시 늙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예수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에게 “실패자”라는 낙인을 찍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실패자임을 자인하는 까닭으로 두가지를 든다. ‘신학적 실패’와 ‘인간적 실패’가 바로 그것들이다.

두가지 모두, 그가 청년 시절에 외쳤던 ‘움직이는 예수의 모습’과 달리 ‘안주하는 예수’에 빠졌었던 일을 말한다.

그가 말하는 ‘신학적 실패’란 잘못된 목회 목표 설정 두가지이다.

첫째는 자신의 삶의 자리인 “호주 이민의 삶”에 두발을 딛지 않고 “한국적 상황 – 일테면 한국의 민주화, 인권 문제, 조국 통일과 평화문제 등”을 그대로 안고 고민하는 일에 빠져서 실제 빵과 기쁨을 함께 나누워야 했던 이민자들과 함께하지 않았던 이민 초기에 대한 반성이다.

둘째는 자신도 한때 “안주하는 예수”에 빠졌던 일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이다. 그 역시 “교회 성장이라는 권력욕과 물질욕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가는 탐욕”에 빠졌었던 일을 고백하며, “목적이 수단이 되고 수단이 목적으로 변해 버린 지난 날 나의 목회에 대한 슬프고 아픈 참회”라며 가슴을 치고 있었다.

그가 두번 째로 꼽는 ‘인간적 실패’란 사랑의 실패를 고백함이다. 그는 성서와 예수를 ‘사랑’으로 요약한다. 그에게 사랑의 실패란 곧 성서이해의 실패이며 예수신앙의 실패였다. 그의 고백이다.

<지난날 나의 목회는 ‘고객관리’라고 하는 차원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사랑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의무와 책임으로 한 일은 결코 목회라고 불릴 수는 없다. 이 지구상에 단 한사람의 억울하고, 가난하고, 아파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그것까지도 목사의 책임이다. 목사는 사랑에 대하여 무한책임을 진 사람의 다른 이름이다.

공동묘지에 무덤의 숫자가 늘어난다고 해서 그것도 성장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머릿수를 많이 채우는 것이 성장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는 머릿수가 그득한데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는 시대가 되었다.

계속해서 교회를 다니자니 찜찜하고 안 다니자니 딱히 다른 할 일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탄한다.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데 사람의 마음은 사랑으로만 얻는다.>

이렇게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규정한 홍목사는 그 실패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에게 이제 남은 것은 오직 “감사”일 뿐이라고 외친다.

<그때 그렇게 실패하도록 허락해 주신 하나님, 그때 그렇게 아플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 그때 그렇게 넘어지도록 방치해 두신 그 하나님의 측량할 길 없는 사랑을 깨닫기 때문에> 이제 그가 오직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감사 뿐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한평생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고 똑같은 걸음걸이로 한결같은 길을 걸어왔다면 그것을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언듯 그리 생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실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비웃음만 살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그리보여도 “움직이는 신”의 세상에서는 “사람이 한평생 예수에 대한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고 똑같은 걸음걸이로 한결같은 길을 걸어왔다면 그것은 바로 축복”이다.

한결같으신 선생님을 다시 뵐 수 있었던 일은 내게 축복이요, 감사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