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계약 – 예언자 21

(당신의 천국  쉰 번 째 이야기) 

야훼께서 예레미야에게 내리신 말씀이다. “너는 야훼의 성전 대문에 가 서서, ‘야훼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 오는 유다 사람은 모두 야훼의 말씀을 들어라’ 하고 이렇게 큰 소리로 일러 주어라.   ‘나 만군의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서 말한다. 너희는 생활태도를 고쳐라. 그래야 나는 너희를 여기에서 살게 하리라.  이것은 야훼의 성전이다, 야훼의 성전이다, 야훼의 성전이다-한다마는 그런 빈말을 믿어 안심하지 말고 너희의 생활태도를 깨끗이 고쳐라. 너희 사이에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여라. 유랑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말라. 이 곳에서 죄없는 사람을 죽여 피를 흘리지 말라. 다른 신을 따라가 재앙을 불러 들이지 말라. – 예레미야  7 : 1 – 6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킴이 유다 왕이 되어 다스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야훼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런 말씀을 내리셨다.  “나 야훼가 말한다. 너는 내 집 마당에 가 서서, 유다 모든 성읍에서 내 집에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내가 너에게 전하라고 준 말을 하나도 빼놓지 말고 다 일러 주어라. 행여나 이 백성이 내 말을 듣고 그 못된 생활태도를 고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렇게만 한다면, 재앙을 퍼부어 그 악한 소행을 벌하려던 계획을 나는 거두리라.  너는 야훼의 말이라고 하며 이렇게 일러 주어라. ‘내 말을 따라 살아라. 내가 세워 준 법대로 살아라.  내가 거듭거듭 보내는 나의 종 예언자들의 말을 들어라.  그러지 않으면 내가 이 집을 실로처럼 만들리니, 이 성읍은 세상 모든 민족에게 욕을 먹게 되리라.'” – 예레미야 26 : 1 – 6 

앞으로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가문과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온다. 나 야훼가 분명히 일러 둔다.  이 새 계약은 그 백성의 조상들의 손을 잡아 에집트에서 데려 내 오던 때에 맺은 것과는 같지 않다. 나는 그들을 내 것으로 삼았지만, 그들은 나와 맺은 계약을 깨뜨리고 말았다. 귀담아 들어라.  그 날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란 그들의 가슴에 새겨 줄 내 법을 말한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 주어,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그들의 잘못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리니, 다시는 이웃이나 동기끼리 서로 깨우쳐 주며 야훼의 심정을 알아 드리자고 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내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 예레미야 31 : 31 – 34, 이상 공동번역 

요시야왕의 성전정화와 개혁 작업이 미완으로 끝난 후, 밀려 오는 이집트, 바벨론 등의 이방 문화와 관습, 이방 종교 앞에서 유다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시작되는 싯점의 상황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를 깨어진 계약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이야기합니다. 탈애굽후 광야에서 맺었던 야훼 하나님과 자기 백성들 사이에 이루어졌던 계약이 깨졌기 때문에 유다의 멸망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는 예언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바라본 당시 유다 왕국 예루살렘 성전에서 올리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경배나 제사, 예배 등의 모든 절차나 의식은 철저히 위장된 가짜요 거짓된 것 뿐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제사장들을 비롯하여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마다 “바로 이 곳이 야훼 하나님의 성전이다”라며 마치 그들이 야훼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것처럼 호들갑들을 떨고 있었지만 그건 다 위선일 뿐이라고 선포합니다. 

더하여 당시 많은 가짜 예언자들과 가짜 사제들이 야훼 하나님의 성전이 우리 가운데 있는 한, 또 자신들이 성전을 드나드는 한, 모든 위험과 외부의 재난으로부터 안전할 것이고, 평화로운 번영이 계속될 것이라는 말들에 대해 그것이야말로 미신이요, 마술적 부적 같은 것이고, 끝내 야훼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들이는 죄악이라고 적시합니다. 

특히 그런 거짓 예언을 하며 야훼 하나님의 성전을 미신의 부적으로 만드는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불의한 소득을 탐내며, 백성들의 눈을 가리는 일들에게 닥칠 심판은 피할 수 없다고 강한 경고를 합니다. 

이른바 “예레미야의 성전설교”라고 알려진 예레미야 7장과 8장 1-3절 까지를 꼼꼼히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예레미야의 이 경고는 26장에서 또 한 번 반복됩니다. 

무릇 역사상 무너져 사라진 모든 민족들이나 국가들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각자  개인적 삶의 고통에 이르기까지 그 원인을 따져보면 외부적 요인들보다 내적 요인들이 많았음을  발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않습니다. 

예레미야 당시의 유다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야훼 하나님의 성전은 여전히 예루살렘 도성에 있었고, 그 백성들은 그 성전을 드나들며 “야훼 하나님”을 외쳤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 외침이 모두 빈 말 뿐이었던 것입니다. 

보통 우리들이 생각하기를 이방신들을 모시고, 이방 풍습을 따른다고 할 때 눈에 확 뜨이는 어떤 불경한 일들을 상상하기 쉽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경고는 정신이 사라진 껍데기만 남은 제사를 향하여 내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껍데기만 남은 제사, 그것이 바로 이방신이요, 미신이요 마침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계약정신으로 돌아가라” 는 회개의 명령이 바로 예레미야의 외침이었던 것이고, 그 계약정신이란 바로 정직한 생활태도로 사는 일이고, 함께 사는 이들 가운데 억울한 사람들이 없게 하는 일이며, 떠도는 사람들, 과부, 고아 등 똑같이 누리지 못하는 이들을 돌아보는 일인 동시에 죄없는 사람을 곤경으로 몰거나 죽이지 않는 정신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외침은 그저 공허한 울림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의 백성들은 “나(야훼)의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으로 찾아 와 나(야훼)의 앞에 나서서 살려 주셔서 고맙다고 하고는 또 갖가지 역겨운 짓을 그대로 하고 있(7 : 11)”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예레미야는 더는 돌아서 건너 올 다리 조차 없어졌다는 사실을 공표하기에 이릅니다. “너는 이런 백성을 너그럽게 보아 달라고 빌지 말라. 용서해 달라고 울며 불며 기도하지도 말고, 떼를 쓰지도 말라. 나는 너의 소리를 들어 주지 않으리라.(7 : 16)” 

이제 예레미야의 예언들은 예루살렘과 유다 그리고 야훼 하나님의 성전이 무너지고 파괴되고 멸망할 것이라는 최후의 것들로 이어지고, 백성들과 제사장, 권력자들은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는 연금되거나 도망치거나 하는 지경에서도 예언을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의 예언들은 모두 현실이 되어 그와 그의 백성들 앞에 펼쳐집니다. 

유다의 왕들(여호야긴, 시드기야)과 고관대작 및 제사장들 그리고 백성들은 두차례에 걸쳐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예루살렘과 성전은 무너지고 맙니다. 유다 땅에 남아있던 백성들은 바벨론이 세운 총독 게달리야 치하에 살다가 바벨론 총독에 대한 반란 사건 일어난 후 이집트로 피난을 갑니다. 예레미야는 그 대열에 합류하여 이집트 생활을 하면서도 죽기까지 그의 백성들이 야훼 하나님께로 돌아 올 것을 쉬지 않고 선포합니다. 그의 마지막 예언들이 있었던 곳이 바로 이집트입니다. 

이집트로 피난갔던 유대인들도 결국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갑니다. 예레미야의 죽음에 대해 성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 전설들이 남아 있으 뿐입니다. 그 중 하나가 심판의 예언을 그치지 않는 그를 동족들이 죽였다는 설입니다. 

예레미야의 위대성은 인간이 지닌 모든 한계 속에서, 그 어떤 기적의 징표도 없이, 온갖 수난과 멸시와 협박 끝내 살해 위협을 받아가면서 까지 야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속에서 만났던 회의와 의심과 반항과 도망의 끊임없는 유혹들을 이겨내고 이루어진 순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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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위대성의 진면목은 바로 깨어진 옛 계약대신 새 계약이 이루어 질 것을 선포하는 장면에서 드러납니다. 

예레미야 32장과 33장을 주목해야만 하는 까닭입니다. 

우리들이 찾아가고 있는 하나님 나라 길목에 세워진 또 다른 중요한 이정표입니다. 

“‘내가 이스라엘 집안들과 유다 집안들과 더불어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이다.  ‘이 새 계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아 에집트 땅에서 인도해 내던 날 그들과 맺은 그런 계약이 아니다. 그들이 내 계약을 지키지 않았으니 나도 그들을 돌보지 않았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이다.” – 히브리서 8 : 8 -9 

신약의 히브리서 기자가 인용한 예레미야의 새 계약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그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예레미야의 새 계약은 이제 신약시대에 이르러 다시 다루게 될 것입니다. 

이제 남북 왕국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유다 민족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만나 볼 예언자들은 바로 이런 때에 야훼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애원 – 예언자 20

(당신의 천국 – 마흔 아홉 번 째 이야기)

“아! 야훼 나의 주님, 보십시오. 저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 – 예레미야 1 : 6 

“야훼님, 제가 아무리 시비를 걸어도 그 때마다 옳은 것은 하느님이셨기에 법 문제를 하나 여쭙겠읍니다. 어찌하여 나쁜 자들이 만사에 성공합니까? 사기밖에 칠 줄 모르는 자들이 잘되기만 합니까?”– 예레미야 12 : 1 – 2, 공동번역 

‘아무도 전적으로 고립해서는 못산다’고 한 쟌 돈(John Donne)의 명언이 옳다면 오직 우리에게 대한 불가피한 진리가 무엇인가를 알 때에만 우리는 참된 실존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매 순간마다 소속 의식을 가지라는 요구가 아니다. 의식해야 될 것은 우리가 현재대로 곧 우리는 전체적인 인간 상황에 참여하는 자로서, 따라서 더불어 살 뿐만 아니라 다른 자들로부터, 그리고 다른 사람에 의해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 노먼 피텐저(Norman Pittenger)의 “사후(死後, After Death) – 하나님 안에서의 삶(Life in God)에서 

겨울이 성큼 다가온 주일 아침입니다. 

주일 아침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면서 이어가는 예레미야 이야기의 방향을 조금 바꾸어 봅니다. 그의 예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다가 그가 겪었던 삶에 고뇌, 고통, 괴로움들과 그런 아픔들을 어떻게 그가 받아 들이고 살아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방향을 바꾸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미 우리들이 만나 온 다른 예언자들 – 일테면 이사야, 아모스, 미가, 하바꾹 등 –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다른 예언자들은 하나님에게 받은 명령이나 신탁 등을 예언하고 선포하는 일에 거의 주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비록 야훼 하나님의 명령일지라도 묻고 따지고, 때로는 대들기도 합니다. 그는 야훼의 명령을 따르다가 받는 고난이나 고통에 대해 깊이 후회하고 회의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야훼 하나님께 매인 자로서 자신이 짊어진 짐을 지고 두벅두벅 그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입으로 선포하다가 그 입을 막을 때 그는 글로써 예언의 사명을 이어갔습니다. 쓴 글들이 불살라지자 그는 또 다시 씁니다. 그렇게 죽는 순간까지 그 짐을 내려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때때로 구약의 예수로 비유되는 삶을 살다 간 것입니다. 

그런 예레미야는 진정 외로웠던, 외로움을 심히 고뇌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인생길을 걷는 첫걸음부터 그리 흔쾌히 디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태 속에 있을 때부터 야훼 하나님이 주신 숙명을 받아 태어난 사람입니다. 

“내가 너를 점지해 주기 전에 나는 너를 뽑아 세웠다. 네가 세상에 떨어지기 전에 나는 너를 만방에 내 말을 전할 나의 예언자로 삼았다.” – 예레미야 1 : 5 

그러자 그가 보인 반응입니다. “아! 야훼 나의 주님, 보십시오. 저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 – 그가 가고 싶지 않은 길이었기에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런 예레미야였지만 야훼 하나님의 강권과 보여주시는 환상들(살구나무와 끓는 가마 환상)로 인해 예언자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러나 그 길목에서 그가 만난 현실들은 그저 아픔 뿐이었고, 결국 눈물을 흘리는 일 뿐이었습니다. 

“이 백성은 영영 살아날 길이 막혔읍니다. 가슴은 미어지고 마음은 터질 것 같습니다. ‘야훼께서 시온에 안 계시는가? 왕노릇 그만 하시려고 물러나셨는가?’ 이렇듯이 내 딸, 내 백성이 신음하는 소리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려 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아직도 우상을 섬기며 내 속을 썩여 주느냐? 어찌하여 남의 나라 허수아비를 들여다가 섬기며 내 속을 썩여 주느냐?”  “여름도 지나고 추수도 끝났건만 우리는 이제 살아 나갈 길이 없읍니다. 

“내 딸 내 백성이 치명상을 입었는데 전들 어찌 아프지 않겠읍니까? 앞이 캄캄하고 마음은 떨립니다.  길르앗에 약이 떨어질 리 없고 의사가 없을 리 없는데, 어찌하여 내 딸, 이 백성의 상처를 치료하지 못합니까? 내 머리가 우물이라면, 내 눈이 눈물의 샘이라면, 밤낮으로 울 수 있으련만, 내 딸 내 백성의 죽음을 곡할 수 있으련만.”  – 예레미야 8 : 18 -23 

뿐만 아니라 그는 몸에 병을 얻기도 하고, 그런 그를 비웃거나 심지어 죽이려는 세력을 만나기도 합니다. 

“야훼여, 저를 어루만져 주시어 마음의 상처를 고쳐 주십시오. 저를 붙들어 주시어 성한 몸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저는 주님 한 분만을 기립니다. 이 백성이 저를 비꼬아 말합니다. ‘야훼가 엄포를 놓더니, 어찌 되었느냐? 그렇게 야단치더니 어디 해보시지!’” – 예레미야 17 : 14 – 15 

“그 말을 듣고 이 백성은 수군거립니다. ‘예레미야를 없애야겠는데 무슨 좋은 계책이 없을까? 이 사람이 없어도 법을 가르쳐 줄 사제가 있고 정책을 세울 현자가 있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려 줄 예언자가 있다. 그러니 이자를 그가 한 말로 때려 잡자. 이자의 말마디마다 조심하여 듣자’ 고 합니다.” – 예레미야 18 : 18 

그러나 현실은 야훼 하나님만을 믿고 당당히 나가려는 예레미야의 힘을 번번히 빼 놓을 뿐이었습니다. 

“야훼님, 제가 아무리 시비를 걸어도 그 때마다 옳은 것은 하느님이셨기에 법 문제를 하나 여쭙겠읍니다. 어찌하여 나쁜 자들이 만사에 성공합니까? 사기밖에 칠 줄 모르는 자들이 잘되기만 합니까?  하느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나무처럼 심어 뿌리를 박고 자라서 열매를 맺게 하시는군요. 그런 자들은 말로는 하느님과 가까운 체하면서, 속으로는 멀리 떠나가는 것들인데 말입니다. 

 야훼여, 주께서는 제 속을 환히 들여다 보십니다. 제 마음이 주께 있다는 것을 시험하여 보아서 아시지 않습니까? 저것들을 양처럼 끌어다 죽여 버리십시오. 갈라 내었다가 그 날 당장 죽여 버리십시오.  언제까지 가뭄 든 이 땅을 내버려 두시렵니까? 들풀이 다 마르게 내버려 두시렵니까? 이 땅에 사는 사람의 잘못으로 짐승이나 새가 죽어 없어져서야 되겠읍니까? 어떤 일을 하여도 주께서 보지 못하신다고 저들은 떠들어 대고 있읍니다.”” 예레미야 12 : 1 -4 

착하고 의롭고 바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어렵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데, 못되고 불의하고 거짓되고 사기를 일삼는 자들은 떵떵거리고 살아가는 이 세상 속 현실은 도대체 뭐냐? 나쁜 놈들부터 먼저 죽여야만 되지 않느냐? 당신이 그렇게 안하니까 저들이 당신을 우습게 보는 것 아니냐? 온 세상을 당신 손안에 넣고 계시는 야훼 하나님께서 한번 답을 내 놓아 보아라! 예레미야가 야훼 하나님께 던진 물음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야웨 하나님의 응답은 실로 엉뚱한 것이었습니다. 

“네가 사람과 달리기를 하다가 지쳐 버린다면, 어떻게 말과 달리기를 하겠느냐? 편안한 곳에서나 마음 놓고 살 수 있다면 요르단강 가 깊은 숲 속에서는 어떻게 살겠느냐?  너의 집 식구, 너의 동기들이 너를 헐뜯으며 배신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그들이 정답게 말을 걸어 오더라도 믿지 말라.” – 예레미야 12 : 5-6 

“예레미야야, 네가 알면 뭘 그리 안다고 따지냐? 그저 나만 믿고 네 갈 길을 가라!”는 야훼의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인 예레미야가 마주치고 있는 “옳은 사람들이 겪는 불행, 나쁜 놈들이 누리는 행복”이라는현실 속 모든 부조리와 불의에 대한 해결책은 전적으로 야훼 하나님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닌 삶의 수수께끼 전체 문제의 흐름과 해답은 야훼 하나님 손 안에 있다는 선언입니다. 

사람인 너는 그 믿음 안에서,  나 야훼 하나님이 내린 명령에 온 몸을 바쳐 따르고 행동할 것을 촉구하는 것으로 응답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야훼 하나님의 응답이 사람인 예레미야의 의문과 질문을 속 시원하게 풀어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연이어 야훼께 울부짖습니다. “제발 눈으로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조름이었습니다. 

“야훼여, 제 말을 잘 들어 주십시오. 원수들이 고발하는 저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 중략 – 저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을 야훼께서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죄를 벗겨 주시지 마시고 잘못을 용서해 주시지도 마십시오. 분김에 해치우시어 거꾸러지는 모습을 눈으로 보셔야 하지 않겠읍니까?” – 예레미야  18 : 19 – 23 

제발이지 나쁜 놈들, 원수되는 자들을 죽여 없애달라는 애원입니다. 이 원수들은 모두 그의 동족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참을 수 없는 인간적인 분을 풀기 위해서라도 동족조차 나쁜 놈들은 다 죽여 달라고 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예레미야가 넘거나 뚫지 못할만큼  여전히 높고 단단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을 쏟아 내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인생 전체가 무의미함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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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여, 저는 어수룩하게도 주님의 꾐에 넘어갔읍니다. 주님의 억지에 말려 들고 말았읍니다. 그래서 날마다 웃음거리가 되고 모든 사람에게 놀림감이 되었읍니다. 저는 입을 열어 고함을 쳤읍니다. 서로 때려 잡는 세상이 되었다고 외치며 주의 말씀을 전하였읍니다. 그 덕에 날마다 욕을 먹고 조롱받는 몸이 되었읍니다.” – 예레미야 20 : 7 -8 

“저주받을 날, 내가 세상에 떨어지던 날,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 복과는 거리가 먼 날. 사내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전하여 아버지를 즐겁게 한 그자도 천벌을 받아라.” – 예레미야 20 : 14 – 15 

예레미아의 이 말들은 인생길 막장에 이르렀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근원적인 곳에서부터 거부하는 외침이었습니다. 더는 믿지 못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레미야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부터 야훼 하나님이 점지했다고 야훼께서 스스로 선포했었습니다. (예레미야 1 : 5) 이 장면에서 예레미야는 그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물론이요, 자신이 태어난 것을 축하했던 모든 이들까지도 저주하는 것입니다. 우리식으로 표현 하자면 “나를 낳고 미역국을 끓인 모든 자들조차…”가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짊어진 짐과 현실의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낼 어떤 신적 체험, 신기한 기적, 신비스런 어떤 징조들을 끊임없이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체험한 것들은 그저 인간적인 체험들 뿐이었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에서 저나 이 글을 읽고 계시는 그 누군가인 당신이 두 발 딛고 사는 세상에서 겪는 인간적인 체험들 말입니다.  저나 당신이 기도하고 바라는 일들에 대한 기적같은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고, 여전히 고통이나 아픔은 남아 있거나 오히려 깊고 아림이 더 하는 현실들 말이지요. 

예레미야의 예언들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끊임없이 이어졌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구약에 등장하는 많은 카리스마적 인간들의 모습이 아니라 정말 인간적인, 연약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체험을 안고 그의 사명을 다한 사람입니다. 

이제 그의 예언들을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 냄새 – 예언자 19

(당신의 천국 – 마흔 여덟번 째 이야기)

그래서 야훼께서 바빌론 왕을 끌어 들이시니, 바빌론 왕은 성소에서 장정들을 칼로 쳐죽였다. 그는 장정, 처녀, 늙은이, 약자 할 것 없이 모조리 쳐죽였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그의 손에 붙이셨던 것이다. 그는 하느님의 성전 그릇들을 크건 작건간에 모두 쓸어 가고 야훼의 성전 창고와 왕궁 창고를 털어 갔으며 대신들도 바빌론으로 모두 붙잡아 갔다. 하느님의 성전을 불살랐고 예루살렘성을 허물었으며 궁궐들을 불살라 버리고 거기에 있던 값진 것을 모조리 부수어 버렸다.     느부갓네살은 칼에 맞아 죽지 않고 살아 남은 자들을 바빌론으로 붙잡아다가 페르샤 시대가 되기까지 대대로 종으로 부렸다.   이리하여 이 땅은 긴 세월 동안 황폐되어, 밀렸던 안식을 다 찾아 누리며 칠십 년을 채우리라고 야훼께서 예레미야를 시켜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 역대기하 36 : 17 – 21 

야훼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내리기 시작한 것은 아몬의 아들  요시야가 유다 왕이 된 지 십 삼 년 되던 때의 일이었다.   야훼의 말씀은 그 후로도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킴이 유다 왕으로 있는 동안, 또 요시야의 다른 아들 시드키야가 유다 왕이 된 지 십 일 년 되던 해의 오월, 그의 통치가 끝나고 예루살렘 시민이 포로로 끌려 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 예레미야 1 : 2 – 3, 이상 공동번역 

우리에게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기록에 따르면 이같이 우리 히브리국가는 두 번씩 유브라데강을 넘어 포로로 잡혀가는 비운을 겪으면서 비참한 종말을 맞이했던 것이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10권 9장에서 

구약 성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 한 때 제가 가장 매료되었던 사람이 예레미아입니다. 제 나이 푸르던 때의 일입니다. 예레미아서와 애가를 읽고 또 읽고 했던 때가 있었답니다. 

예레미야를 읽다가 보면 정말 사람 냄새가 그득하답니다. 정말 사람다운 사람의 냄새가 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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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예레미야는 좀 내성적인 사람입니다. 겁도 많은 것 같습니다. 게다가 눈물도 많았습니다. 그는 눈물샘이 말라 울수 없을 때까지 울었던 사람입니다. 

내 머리가 우물이라면, 내 눈이 눈물의 샘이라면, 밤낮으로 울 수 있으련만, 내 딸 내 백성의 죽음을 곡할 수 있으련만… 예레미아 8 : 23” 

그는 자기를 못살게 구는 자들을 없애달라는 기도를 자신있게 드린 사람입니다.

“저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을 야훼께서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죄를 벗겨 주시지 마시고 잘못을 용서해 주시지도 마십시오. 분김에 해치우시어 거꾸러지는 모습을 눈으로 보셔야 하지 않겠읍니까? 예레미야 18 : 23″ 

그는 야훼 하나님께도 마구 대들었던 사람입니다. 

“아아,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읍니까?  예레미아  15 : 10”, “야훼여, 저는 어수룩하게도 주님의 꾐에 넘어갔읍니다. 주님의 억지에 말려 들고 말았읍니다. 그래서 날마다 웃음거리가 되고 모든 사람에게 놀림감이 되었읍니다. 예레미야 20 :7” 

그러나 그는 철저히 야훼 하나님께 매인 사람이었습니다. 갖은 고난과 감금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이 옳다는 것을 믿고 오직 외길만을 걸은 사람이었습니다. 갖은 수모 끝에 자신의 백성들에게 맞아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이 옳다고 믿는 사실을 주저없이 선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요시야왕 때부터 유다왕국이 멸망하는 모든 과정을 겪으며 자기 백성들을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잇기 전에 그가 살았던 시대를 한번 죽 훑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아시리아의 급격한 몰락이 시작될 즈음 남쪽 이집트가 먼저 움직입니다. 요시야왕이 이집트 왕 느고에게 맞서다 죽은 것은 그의 나이 서른 아홉살 때의 일입니다. 정말 한참 나이에 불꽃처럼 살다 간 것입니다. 

그가 죽은 후 유다는 급격히 무너집니다. 

요시야를 죽인 이집트 세력 아래 놓인 유다의 왕위를 이은 것은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입니다. 그는 고작 삼개월 왕위에 앉아 있다가 이집트 세력에 의해 내쫓깁니다. 이집트는 그의 형 엘리아킴을 왕위에 앉히고 이름을 여호야킴으로 부르지만 그는 십 일년 만에 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를 이어 단지 석달 열흘만에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갑니다. 

그리고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등극합니다.  그는 전왕인 여호야긴의 삼촌, 곧 요시야왕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를 왕위에 앉힌 것은 바벨론이었습니다.  그는 나약한 군주였고 국제정세에 매우 어두웠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미 대세가 바벨론에게 넘어간 시점에서 이집트의 원조를 꿈꾸며 바벨론에게 대항하였다가 예루살렘의 철저한 파괴을 불러 드립니다. 시드기야의 마지막 모습을 성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처형하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뺀 다음에, 쇠사슬로 묶어서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열왕기하 25 : 7” 

요시야가 죽은 후 멸망하기까지 유다는 친 이집트파와 친 바벨론파 사이에 왕국의 생존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야훼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그의 백성들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비록 당시 자신의 동족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그를 죽음으로 몰아 넣기 까지, 그가 믿고 의지한 야훼의 말씀을 선포했던 예레미야 이야기를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