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이 소외감을 느끼면…

포박자세상은 참 빠르게 많은 것들이 변했고, 변하고 있고, 변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득 생각을 멈추고, 변(變)하지 않고 정지(停止)하고 있는 것들을 따져 보기로 한다면 그 역시 엄청나게 많거니와 어쩜 그렇게 예나 지금이나 똑같을까 하는 물음을 지울 수 없답니다.

뚱딴지같은 소리라고 여길 줄 모르지만 정말 변하지 않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사람이 아닐까합니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여전히 유효한 세상살이를 보며 해 보는 말입니다.

그 사람들이 함께 모여사는 세상 역시 전혀 변함이 없는 것을 보노라면 깜작깜작 놀랄 때가 있답니다.

어느 사회건 신과 사람 사이에서 브로커 노릇을 하며 사기를 일삼는 종교 브로커들이 늘 있어왔다는 종교적 무변화 곧 정지상태는 이어져 왔고요.

인류사에 있어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갈등이 없었던 때는 어느 사회든 단 한차례도 없었다는 무변화가 있을 것이고요.

이런 저런 이유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꾸 사람들의 생각에서 점점 뒷전으로 밀려가는 듯한 세월호 집단 생수장 사건 초기에 있었던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역시 곰곰히 따져보면 인류 역사 이래 변하지 않고 사람들이 계속 던져 온 질문이랍니다.

어쩌면 이런 변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에 대한 변하지 않고 계속되는 질문으로 하여 사람들의 역사는 발전해 나왔고, 발전해 가고 있고,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기원전 기원후를 따질 것도 없이 오늘날에 똑같이 품고있는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옛날 사람들의 생각을 곱씹어봅니다.

“도시국가의 상태는 개인의 몸과 아주 닮아있다. 일테면, 우리들의 손가락 하나가 상처를 입으면 몸 전체가 고통을 느끼듯이, 제대로된 국가는 이러한 유기체와 아주 흡사하다. 국민 가운데 어느 누구든 고통을 당하면 국민 전체는 그것이 마치 자기의 것인양 느낄 것이고, 국민 개개인의 즐거움이나 고통은 국민 전체의 그것이 될 것이다.” – 플라톤의 국가론

국가는 마치 하나의 선박이나 살아있는 유기체와도 같다. 그 일부의 와해는 전체의 보전에 치명적인 붕괴 요인이다. – 플라톤의 법률

인간의 몸은 국가를 상징하는 바와 같다. – 중략 – 정신(精神)은 제왕(帝王)과 상응하고, 피는 신하와 기(氣)는 백성과 상응한다. 이러한 까닭에 자신의 몸을 자제할 수 있는 이는 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백성을 사랑하므로써 국가에 화평을 가져올 수 있고, 자신의 기를 함양함으로써 자신의 몸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백성이 소외감을 느끼면 국가는 와해, 붕괴될 것이고, 기가 다하면 사람의 신체는 생명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 포박자(抱朴子)

도대체 뭐가 다를까?

지금으로부터 155년 전인 1860년 5월에 한양 땅에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강화도령으로 잘 알려진 조선조 철종임금 11년차에 일어난 일입니다.

포도대장을 지낸 신명순의 집에 낯선 중년의 여인이 스며듭니다. 여인의 이름은 주례, 당시 나이 쉰 네살이었습니다. 여인은 그 때 열 세살이었던 아들을 데리고 신명순의 집을 침입합니다. 가슴에는 단도(短刀)를 품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침 신명순은 큰 사랑방에서 아우와 함께 담소중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신명순의 나이는 예순 둘. 주례라는 여인이 단도를 꺼내들고 신명순을 향해 달려들었으나 신명순 형제의 힘에 맥없이 저지당했습니다. 열 세살 어린 아이도 그냥 얼어버렸고요.

아우성 소리에 신명순의 하인들이 달려들어 여인과 아이를 포박하고 포도청으로 끌고 갔답니다.

그리고 포도청에서 공초한 내용은 이렇답니다.

“지난해 오월에 제(주례) 맏아들이 병들어 죽고 작은 아들 회종이 지난해 팔월에 무슨 일인지 우포도청에 잡혀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열흘도 못되어 죽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 아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랐습니다. 저는 그저 몇 달 동안 마음이 저리고 뼈가 삭아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귀하거나 천한거나 다 같은 것입니다.

이 달은 제 맏아들이 죽은 달이요, 둘째 아들의 생일이 낀 달입니다. 도대체 제 작은 아들이 왜 죽었는지를 알고 싶은 생각에 정신이 나가 포도대장 집을 들이닥치게 되었습니다.”

여인 주례는 이 일로 하여 목을 잘리는 형벌로 세상을 마감했습니다. 열 세살 막내는 귀양길에 올랐고요.

그리고 155년이 흘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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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세월동안 아낙 주례같은 삶을 살다가 간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요?

세월호 집단 생수장 사건이 일어난 지도 6개월이 지나 이백일을 맞는답니다.

이즈음은 ‘종북’이라는 신종 효수(梟首)놀음이 유행의 도를 넘은지라.

155년전과 오늘의 다름은 무엇일까요?

조선민국 7 – 백년

백년이라는 세월이 참 별거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든 적이 있었습니다. 저희 온 집안 식구가 모였던 자리였습니다. 오는 구월이면 유치원(kindergarten)에 들어가는 조카손주아이의 재롱을 즐기고 계신 왕할머니와 왕할아버지(조카손주 아이들이 제 부모님을 부르는 호칭들입니다.)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입니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를 왕할아버지와 왕할머니로 부른답니다.

아이들의 왕할아버지와 왕할머니는 이제 구순을 바라보시고, 백세시대로 접어드는 때에 조카손주들이 백년을 산다고 가정했을 때 거의 이백년의 세월이 한 순간에 만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던 것입니다. 그리 생각해보니 백년이라는 세월이 참 별거 아니구나하는 데까지 이르던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사람살이가 이즈음 우리들이 사는 모습으로 얼추 골격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 끽해야 삼백년이 채 안된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사람살이의 변화 또는 인류역사의 변화란  어찌보면 짧은 한순간일 수도 있겠다는 가히 망상에 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살이의 변화를 역사발전이라고 말하던, 신의 섭리라고 말하던 돌이켜보면 인류는 똑같지는 않지만 어떤 비슷한 과정을 거치며 살아 온 듯합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 그 삶의 맥을 이어왔더라도 말입니다.

일테면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문화라는 문화의 발전과정이나 비단 마르크스의 역사발전 5단계설이 아니더라도 사회의 발전 과정을 보노라면 지구상 어떤 민족이나 종족들의 살아온 과정들은 거의 엇비슷한 보폭으로 여기까지 온 것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살이의 변화를 역사발전 또는 신의 섭리라고 말했을 때 이미 그 말 안에는 그 변화가 나아지는 쪽으로 이른바 진보한다는 뜻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런 생각을 사람들이갖게 된 것이 고작 삼백 년이 채 안되었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잡설이 이렇게 길게 되었답니다.

한 삼백년 이전까지만 하여도 사람들은 사람살이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옛날로, 아주 먼 옛날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답니다. 기독교 영향 아래에서 생각의 틀이 짜여져 내려온 서구에서는 에덴동산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람살이가 나아가는 것으로 여겼고, 중국적 생각의 틀을 가쳐 살았던 동양에서는 요순(堯舜)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사람살이 궁극의 목표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생각의 틀이 깨어진 것이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18세기와 19세기를 넘어오던 그 때에 일입니다.

자본주의를 일으켜 승승장구할 것 같았던 영국이 식민지 아메리카를 잃고, 공산주의를 잉태하게 된 때가 그 무렵이고,  신생 미국이 독립한 것 때가 바로 그 때였으며, 서구 유럽을 바닥부터 뒤엎고 새로운 질서의 근간을 세운 프랑스 대혁명이 그즈음에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심심치않게 입에 오르내리곤 하는 좌파니 우파니, 진보니 보수니하는 말들이 생긴 때이기도 합니다.

서구사회의 급격한 변화는 이내 동양으로 건너와 일본이 명치유신으로 나아가는 원인이 되었고, 중국 청나라의 급격한 몰락의 시발이 되기도 한 것입니다.

그 무렵 한반도는 조선의 마지막 유교적 제왕이라는 모습과 실패한 개혁적 이미지를 동시에 갖추었던 이산(李祘) 정조(正祖) 임금의 시대를 지나 몰락의 길에 들어서던 시기였습니다.

1800년을 기점으로 전후 약 50년 사이의 백년은 인류사는 물론이거니와 동서양  많은 주요국가들이 이전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경험을 하게되는 신시대로 접어 들던 때였습니다.

renan“예수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인간”이라고 했던 르낭이 교수직을 박탈당한 때가 프랑스 2월혁명 후인 1862년의 일이었으니, 오랜 중세적 종교 사고가 바뀌던 때도 바로 그 무렵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시기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는냐에 따라 오늘 우리들의 시대를 판가름하는 생각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른바 문창극류의 역사적 사고가 단지 한 개인 것만이 아니라 오늘날 수많은 한인들에게 깊히 각인되어 드러나지만 않을 뿐인 생각으로 굳어진 까닭은 바로 이 시대를 옳게 곱씹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으로 한반도에서는 정조 이후로, 세계사로는 프랑스혁명전후로 부터 대충 한번 훑어 보고자 합니다.

조선민국 6 – 출발

“사람이 소송사건에 있어서 불실한 증언을 하려고 출정하여 그가 한 말을 확증하지 못하면, 그 소송이 생명에 관한 소송일 경우 그를 죽인다.” OLYMPUS DIGITAL CAMERA

지금은 세계 최고(最古)의 자리를 빼앗겼지만 제가 어렸을 때만 하여도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법전으로 알려졌던 함무라비 법전 제3조의 내용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800여년 전에 바벨론의 왕 함무라비가 반포했다는 바로 그 법전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십계명에는 “하지 말라”는 계명이 다섯가지가 있습니다.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인, 남에 것에 대한 욕심 등입니다.

또한 팔조지교(八條之敎), 팔조법금(八條法禁) 등으로 알려진 한반도 최고(最古)의 법전인 고조선의 여덟가지 법률에는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남에게 상해를 입힌 자는 곡물로써 배상한다,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비로 삼는다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살인, 도둑질, 간음 및 강간, 각종 상해에서부터 거짓 증언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범죄행위들은 인류 역사와 함께 사람사는 세상이면 어디에건 끊임없이 일어났거나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때, 어느 사회건 이런 범죄행위들은 공동체를 위해 다스려져야하고 그에 대응하는 벌칙이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외없는 법칙이 없다는 말처럼 이 경우에도 예외는 늘 있어왔습니다. 누가 범죄를 저지르는냐에 제재 대상이 되기도 하고 오히려 영웅적 행위로 간주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저지른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이라도 말입니다.

인류사의 발전이란 바로 이런 예외의 적용율이 낮추어지는 쪽으로 발전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언제 어디서건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잣대가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역사의 발전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즈음 제재받는 않는 국제적 무법자 행세를 하는 이스라엘의 행태나 집단 생수장(生水葬) 사건인 세월호 사건 이후의 대한민국을 보노라면 이러한 역사 발전의 거대한 반동이 일어나고 있는 듯 착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길게 놓고 따져보면 그 또한 발전의 한 과정일 뿐이라고 확신을 합니다. 문창극류의 신의 은총이 아니라 인류의 오랜 역사와 정신사가 그렇게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집단 생수장 사건 및 이후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은 바로 대한민국, 한반도 나아가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모든 한국어를 사용하는 인종의 오늘날 솔직한 자기 모습입니다.

함무라비법전과 십계명과 고조선 팔조법금 아래 사는 모습입니다.

특히 사건 이후 정홍원총리 책임 사임에서 도로 정홍원에 이르는 사이에 등장했던 여러 인물들, 일테면 안대희, 문창극, 김명수, 정성근 등등의 이름들과 뉴스들을 보면서 이 시대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소위 이 시대 한인사회 엘리트들의 모습들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비단 그들만의 모습이겠습니까? 참으로 저렴한 가치관이 사회 엘리트 행세를 하는데 필수 요소가 된 현실을 벌거벗겨 드러내 놓은 격입니다.

삼백년 전 박지원이 쓴 양반전에는 비슷한 가치관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삼백년 전에 양반행세를 하던 이들이 오늘날의 신양반계급으로 변하는 과정을 돌아보는 일은 바로 역사를 바른 방향으로 흐르게 하기 위한 첫걸음입니다.

세계사의 흐름에서 삼백년 전인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오는 싯점은 바로 모든 민족과 국가들이 거의 동일한 선상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던 싯점이었기 때문입니다. 문창극류의 저렴한 사관(史觀)으로는 볼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랍니다.

부끄러움을 넘어서

일본의 교과서 왜곡파동으로 시끄럽다.

일본 문제가 불거질 때면 등장하는 반일 구호와 현수막, 탑골공원의 궐기대회 사진과 함께 온통 반일 민족주의자들 뿐이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나 싶게 모두가 잠잠하다. 그러고 또 다시 애국적 저널리즘과 프랭카드, 반 세기 동안의 반복다.

이 점 일본도 마찬가지다. 적당히 눈치보며 과거를 정당화하다가 세 불리하면 슬그머니 꼬리를 뺀다. 그러다 가시 보수 우익을 앞세워 과거 찬양의 목청을 높인다. 때린 자의 부끄러움과 맞은 자의 부끄러움을 진정 헤아리지 못한 탓이다.

긴 역사의 눈으로 볼 때 먼저 그 부끄러움을 청산하고 이겨내는 민족이 앞설 것이다.  가해의 역사를 기록한 민족이 그 부끄러움을 청산하지 못하면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다. 피해의 역사를 가진 민족이 그 부끄러움을 깨닫지 못하면 그 또한 맥이 끊긴다. 그것이 역사의 교훈이요, 종교적 역사관이다.

한민족의 역사를 훑다보면 일본 식민지 35년(일제 36년 – 이것 부터 고쳐야 한다. 만 35년에서 열 나흘이 빠지는 기간이다)보다 더 험난했던 세월이 있었다.

남도석성

고려 후기 13세기에 있었던 몽고족의 침략기간이 바로 그 때였다.

1206년 징키스칸이 몽골국가를 일으킨 후 그와 그의 군대가 지난 가는 곳마다 피바다를 이루었다. 징키스칸의 아들이 전장에서 죽자 그 지역 주민을 단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죽였다는 기록이 있고보면 그 잔인함이 오죽했으랴!

징키스칸의 아들 오코타이가 태종왕이 된 직후인 1231년, 장수 살레타이를 앞세워 한반도를 유린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1273년 4월 김통정 이하 70여명의 삼별초군이 제주도에서 최후의 항쟁으로 전멸하기까지 여섯 차례에 걸친 몽골군의 침략은 한반도 전체를 유린한 일대 사건이었다. 그리고 14세기 초 몽골족이 세운 원(元)나라가 망하기까지 100여년 간 한반도는 처참하였다.

(한반도의 역사보다 이스라엘 역사에 박식한 기독교인들은 바벨론 시대의 유대를 상상하면 될 것이다.) 고려인들 특히 가진 것 없었던 백성들과 천민들은 목숨이 다하도록 몽골족과 맞서 싸웠다. 당시 무신정권의 권력층들이 강화도로 피신하여 제 뱃속 차리기에 여념이 없어 그 곳에서도 권력다툼으로 나날을 보냈 때 그 정권 아래서 핍박받던 백성들은 목숨을 마다치않고  침략자들에게 대항하여 싸웠다.

삼별초 – 권력의 호위병들이었던 그들이 민족의 초병이 되어 마지막 한사람까지 침략자에게 대항하다가 죽은 역사는 세계사에 보기 드문 기록이다.

그 시절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들이었다. 잔인한 적들과의 긴 싸움으로 많은 반도의 고려 여인들이 몽골인들에게 성을 유린 당하였다. 이것은 전쟁의 아픔 중 가장 큰 것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의 가정마다 파괴될 상처였다.

도대체 제 몫을 못했던 당시 임금들 가운데 그나마 원종(元宗)임금이 왕 노릇 한 번 하였다.

“호수만복(湖水滿服) – 커다란 연못을 파고 “이 물에 몸을 씻으면 모든 더러움이 깨끗해 진다.”라고 선언한 임금의 명령으로 많은 여성들과 가정이 살아 남았다는 역사적 사실은 얼마나 거룩하기까지 한가?

그것은 종교다. 그것은 역사다.

요단강 강물에 흠뻑 담갔다 나온 몸이 깨끗해졌다는 믿음, 세례수 한 방울 머리에 떨어짐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믿음이 종교이듯, 더러워진 몸 연못에 들어갔다 나옴으로 깨끗해졌다는 사회적 약속, 또는 믿음 그것이 새 힘을 낳는다. 그것이 부끄러움을 털어 버리는 일이다. 제 부끄러움을 알고 털어버리는 의식, 그것이야말로 부끄러움을 넘어서는 일이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먼저 하는 자가 이긴다. 민족뿐 아니다. 장삼이사(張三李四) – 평범하게 이 땅을 살아 갈 우리도 마찬가지다.

*** 오늘의 사족

2001년 3월 22일의 글이다.

얼핏 세상은 완전히 거꾸로 흐르는 느낌이다. 2013년 이즈음엔. 숨기고 감추고 뻔뻔하게 덧칠하는 세력들이 더욱 판치는 세상인 듯 하다. 모든 세(勢)들이 그리로 모이는 듯 하다.

그러나 아니다!

무릇 역사는 긴 호흡으로 보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