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나라

장인 때 한 번, 어머니 때 두 번, 아버지 덕에 또 한 번. 네 군데 서로 다른 노인 재활원을 경험한다. 아버지는 운도 참 좋으시다. 네 군데 중 시설이나 분위기나 환자의 느낌과 반응 모두 가장 좋다. 엿새 만에 병원에서 재활원으로 옮기신 아버지의 회복 속도는 놀랄만치 빠르다.

삶에 대한 강한 의욕, 철저한 자신의 몸 관리,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그 속도를 더하는 듯하다.

허나 식사를 하시는 모습을 바라보는 내 속은 그저 애틋하다.

늦은 밤, 이즈음 새로운 느낌으로 다시 책장을 넘기고 있는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의 ‘역사적 예수 The Historical Jesus’ 속 글귀 하나를 넘기지 못하고 오랜 동안 곱씹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미래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통찰력이 아니라 현존하는 그 나라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 오늘을 간절한 마음으로 사는 이들의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 있는 나라라는 크로산(Crossan)의 사족(蛇足)은 오늘 밤 내게 절대적으로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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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해 줘

한국 TV 연속 드라마를 첫 해부터 마지막회까지 빠짐없이 본 것은 참 오랜만 일이다. 드라마 ‘송곳’을 본 게 가장 최근의 일인데 그 역시 전편을 다 보지는 못했다. 이즈음 서울 처남이 이런 저런 영상 자료들을 보내 주어서 아내가 제법 즐긴다. 나 역시 이따금 기웃거리곤 하지만 크게 흥미를 일으켜 브라운관 앞에 앉게 하지는 않는다.

그러다 내가 빠져들어 전편을 다 본 드라마 바로 ‘구해 줘’이다.

오늘 모처럼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돌아온 오후, 드라마 ‘구해 줘’의 마지막 편을 보았다.

비단 사교(邪敎)만이 아니다. 모든 종교가 다 그렇다. 또한 종교 뿐 만이 아니다. 세상사를 지배하고 있는 모든 권력 또한 마찬가지다.

신이든 권력이든 브로커가 문제이다. 하나님, 하느님, 하늘님, 새 하늘님 그 무어라 부르든 신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 정의, 복지, 자유, 자주 등등 그 무어라 부르든 권력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신과 사람 사이, 권력과 사람 사이를 잇는 브로커가 바로 문제이다.

드라마 ‘구해 줘’를 본 후 모처럼 꺼내든 책,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의 ‘역사적 예수(The Historical Jesus)’이다.

<예수가, 아마도 처음이자 유일하게, 성전의 화려함에 맞서서 그 합법적 브로커 기능을 브로커 없는 하나님 나라(unbrokered kingdom of God)의 이름으로 상징적으로 파괴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과정 – 갈릴리 1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17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읍니까?” 하고 묻게 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 –마태복음 11 :  2 – 6 

이제 예수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예수와 세례요한의 관계와 그 두 사람간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은 무엇인지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아주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답니다. 오늘날 한국어를 사용하는 한인들이 알고 있는 예수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이나 믿음 또는 기독교를 개독교라며 비하하면서까지 싫어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수의 모습들이 형성된 과정을 짧게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성서를 읽으며 하나님 나라를 바로 만나고 누리려면, 예수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필수이기도 하거니와 성서에 나오는 예수 이야기나 예수가 하신 말씀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믿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창조 이래, 또는 인간이라는 종(種)이 지구상에 나타난 이래 사람들의 생각이 획을 긋듯 크게 바뀐 때는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 자본주의가 형성된  17세기가  아닐까합니다. 

예수에 대해 이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순서대로 있는 사실 그대로 쓰여진 책이고, 예수는 신의 아들이며 곧 신이라는 믿음이 지배해왔습니다. 

태양이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돈다는 게 사실로 밝혀지면서 천체를 손바닥 들여다 보듯이 들여다 볼 수 있게 되는데, 보니까 거기 하늘나라는 커녕 천사 날개같은 것은 다 허구요, 소설이었다는 생각들을 하게 된 것입니다.  “참고 기다리라”는 마지막 때도 결코 오지도 않았고 올 것 같지도 않은 생각들이 들기 시작합니다. 

교황, 국왕, 귀족 등의 최상위 계급들이 무너지면서 그 자리를 급속하게 돈을 가진 이들이 제 몫으로 차지하는 세상으로 바뀝니다. 인권, 평등, 자유는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천부의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세상이 이렇게 빠르게 변하고 생각이 바뀌면서 “신은 죽었다”라는 소리까지 등장하게 됩니다. 

그 무렵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와 실제 예수와는 다르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헤르만 사무엘 라이마루스(Herman Samuel Reimarus, 1694년-1768년)라는 사람이 시초라고 합니다. 

그 뒤를 이어 교회나 예수에 대한 관심이 있는 분들(믿음과 교인과는 관계없이)이 한번 쯤은 들어 보셨을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학자로서는 슈트라우스 (David Friedrich Strauss)가 시초이고 문학으로는 ‘신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 “예수전”을 쓴 죠셉 르낭(Joseph Renan)입니다. 

슈트라우스라는 신학자가 <예수의 생애>를 발표한 것이 1835년이었습니다. 스트라우스는 이 책에서 성서속 예수 이야기에는 신화 곧 전설이 많이 끼어 들었다고 말하면서, 이런 역사적이지 않은 사실이 끼어든 것은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이나 제자들이 의도적으로 사기를 쳤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신화적 상상력이 발동한 탓이라고 하였답니다 . 

역사적 예수

슈트라우스는 당시 주류들에  의해 크게 비판받기는 했지만, 이후 역사적 예수 연구에 불을 붙이는 역할은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 독일을 중심으로 자유주의 신학의 물결이 거세집니다. 이들은 신의 아들 또는 신이었던 예수보다는 도적적으로 권위있는 사람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학문적으로 이들을 향해 첫 번째 철퇴를 든 사람은 아프리카의 성인 슈바이처입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이런 유럽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한 것은 미국의 복음주의 또는 근본주의 종교 운동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이 무렵 미국 교회의 (거의 전적인 그리고 일방적인) 영향을 아래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 그리고 아래 계속되는 사람들의 생각의 변화 곧 기독교 신학, 신앙, 운동의 변화와는 상관없이 19세기, 20세기 초 미국의 복음주의 신앙으로 회귀 또는 정체 되어 있는 한국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드립니다.  이러한 성향은 비단 기독교 뿐만이 아니라 한민족이 불교와 유교를 받아 드렸을 때와 그것을 이어가는 행태와도  매우 유사한 점도 함께 나누어야 할 중요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무튼 의사이자 위대한 신학자였던 슈바이처가 “예수의 생애 연구사”를 펴 낸 것은 1906년의 일입니다. 슈바이처는 이 책에서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사람이었던 예수는 역사속에 살다 간 예수의 모습이 아니라 그들 곧 자유주의자들이 생각하고 그려서 만든 그들이 좋아하는 예수의 모습일 뿐”이라고 통박하였습니다. 

여기에 “역사속  예수 연구”에 대해 결정적 쐐기를 박은 사람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들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불트만입니다. 그의 말을 쉽게 풀어 쓰면 “예수가 어떤 역사적 인물이었는지 그게 무슨 상관이냐? 성서는 오직 예수가 구세주라는 선포에 충실할 뿐이다. 곧 말하는 예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구세주라는 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론은 매우 강력하였습니다. 적어도 한 세기동안 그의 영향력은 전 유럽을 덮었고 한 동안 역사적 예수를 말하는 이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그 불트만에게 “아니요!”라고 나선 사람들은 바로 불트만의 제자들인 케제만, 보른캄등이었습니다. “역사적 예수 이야기 없이 어떻게 신의 아들 예수 이야기가 나오랴?”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그 케제만 아래서 대단한 한인 신학자 한 사람 안병무가 나옵니다. 안병무 목사 – 이른바 민중신학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연 사람이며 세계 신학계에 한국말 “민중”을 알린 사람입니다.(무릇 모든 학문은 그것을 뛰어넘는 성과들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 시대 앞서 나갔던 인물들에 대한 평가에 있어 제 속차림이나 편협함이 앞서는 민족에게는 미래에도 큰 인물이 나오기 힘든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비단 학문에서뿐만이 아니라, 정치, 문화, 종교, 사상, 나아가 돈을 따지는 경제에 이르기 까지 말입니다.) 

다시 예수 연구 이야기로 돌아가서 최근래에 이르러 1985년에 로버트 펑크(Robert W. Funk)와  존 도미닠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이 중심이 되어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가 발족이 됩니다. 이들은 짧은 시간내에 엄청난 양의 연구들을 발표합니다. 이들의 연구 가운데 “진짜 예수가 한 말들은 무엇일까?”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쯤 제 개인적 경험 몇 줄 얹습니다. 

나이 이십까지는 성서무오설(聖書無誤說 :성서는 일점 일회도 잘못이 없다)에 기반한 그야말로 미국식 근본주의 교단에서 성장을 했답니다. 교회 주보조차 성물(聖物)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 무렵 막 성장 가도에 불을 짚히던 서대문 순복음 집회에 참석했던 기억도 있군요. 그보다는 제가 다니던 교회 새벽기도를 통해 체험했던(글쎄요, 깜박 졸다가 꿈에서 본 것인지, 기도 중에 제 정신이 다른 세계에서 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수와의 만남이 더욱 선명하답니다. 

그러다 스물 언저리부터 학문적으로 성서를 읽게 되었답니다. 물론 그 무렵 제 개인적인 일탈(이즈음 이 말이 유행인지라)로 하여 성서를 수차례(정확히 몇 번인지는 기억 못하지만) 통독을 하는 경험을 했답니다. 그것 밖에 할 수 없었던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답니다. 오랜 동안 성서를 꿰고 있다는 자만으로 살았어도 창피하지 않을만큼 읽었답니다. 

그리고 예수세미나의 열풍이 신학계에 일 때 저는 여기 미국에서 그들에게 빠졌었답니다. 그 그룹들이 내놓는 책들은 거의 읽어 보았다고 하여도 크게 엇나가지 않을 정도로 빠졌었답니다. 

학문적으로 예수세미나 열풍과 신앙적으로는 복음주의(근본주의) 열풍은 극과 극에 있지만 서로가 모두 시들해질 무렵 저는 이제 삶의 내리막을 걷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즈음의 제 생각으로 이 글을 이어가고 있답니다. “모두가 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이고, 예수의 복음은 복음이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구요? 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그 믿음으로 예수의 말씀들과 행위들을 되짚어보는 제 노력이며, 궁극으로는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당신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순례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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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쯤. 

눈이 엄청 내려 사방이 고요한 밤에

(이야기가 너무 딱딱해 진 듯하여 아까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사진 한장?”하는 아내를 위해 마지못해 찍은 사진 하나 붙입니다.).

 

밥이 된 사내 이야기 – 1

<들어가는 글>

예수 – 제가 글을 깨우치기 전에 만난 이름입니다. 성장하면서 십대 후반까지 제 주된 놀이터는 교회 앞마당이었습니다. 이십대 초반에 전혀 새로운 모습의 예수를 만났습니다. 이십대 중반에 평생 그를 쫓기로 하고 신학교에 들어갔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제 나이가 너무 젊고 이르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를 쫓기엔 이젠 나이가 너무 들었습니다.

제 나이가 너무 젊었을 때부터 늙은 이 순간까지 여전히 예수는 제 삶의 주된 화두였습니다.

올해 정초에 문득 든 생각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언젠간 머리글을 제대로 얹힐 날이 있기를 바라면서… 제가 이 글을 연재하는 뜻입니다.

크게 이야기를 셋으로 나누려 합니다.

머리로 만난 예수 이야기(밥이 된 사내 이야기), 가슴으로 만난 예수 이야기(신이 된 사내 이야기), 사람으로 만난 예수 이야기(부활한 사내 이야기)

그 첫번 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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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된 사내 이야기 – 1

세 개의 다른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으로 내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하자.

첫 번째 이야기.

<본디오 빌라도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께 문안드립니다.

최근에 제가 직접 알아낸 어떤 일이 발생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시기심 때문에 자기 자신들과 후손들에게 잔인한 심판을 가했습니다. 그 조상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하늘로부터 거룩한 존재를 내려 보낼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는 왕이라 불려 마땅하며, 하나님은 그를 처녀의 몸을 통해 이 땅에 보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가 유대지방에 나타난 것은 제가 그곳에 총독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가 눈먼 사람에게 시력을 되찾아 주고,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해주고, 중풍병자를 치료해 주고, 악한 영을 쫓아내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을 일으켜 세우며 바람에게 명령을 내리고, 물결이 이는 바다위를 맨땅을 걷듯 걸어 다니며, 그외의 많은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기심에 사로잡힌 대제사장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를 체포하여 나에게 데려왔습니다. 그들은 거짓말에 또 거짓말을 덧붙여가면서 그가 마술사(사기꾼)이며, 자신들의 율법을 위반했다고 고소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고소가 사실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저는 병사들을 시켜 그에게 채찍질을 가한 뒤에, 그를 유대인들 마음대로 처분하도록 내어주었습니다. 그들은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고는 그 무덤에 파수꾼을 세워 두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흘째 되던 날, 그러니까 제 휘하의 군사들이 무덤을 지키고 있을 때 다시살아 났습니다.

그런데 사악함에 이성이 마비된 유대인들은 저의 군사들에게 돈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말하시오” 병사들은 돈을 받긴 했지만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병사들은 그가 살아났고, 자신들의 눈으로 그것을 보았으며, 자신들이 유대인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까지 증언했습니다. 제가 이것을 보고하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 이 사실을 왜곡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혹여라도 폐하께서 유대인들의 거짓말을 신뢰하시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 이른바 빌라도문헌(Pilatusliteratur)으로 외경(外經)인 베드로행전과 바울행전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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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이야기.

<한편 바로 이 때 예수라는 지혜로운 사람-너무나 신기한 일들을 많이 행했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인간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면-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쁜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선생이었다. 그는 수많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그의 곁으로 끌어들였다. 그가 바로 그리스도였다.

빌라도가 유대의 유력 인사들의 청에 의해 그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으나 그를 처음부터 사랑하던 자들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그에 관해 예언한 대로 3일만에 다시 살아나서 그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이뿐 아니라 그에 관해서 수많은 놀라운 일들을 예언했었다. 그의 이름을 본떠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제18권 3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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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이스라엘 북동쪽의 한 무덤에서 발견된 약 2000년 된 유골은 예수님과 비슷한 시대에 같은 십자가 처형을 받았던 ‘여호하난’이라는 청년의 것으로 밝혀졌다는데 복숭아뼈 부근에 박혀 있던 쇠못을 가족들이 빼어내질 못해 그냥 그대로 안장한 듯. 박아 놓은 십자가에서 발이 빠지지 않도록 끝을 구부려논 못이 복숭아뼈에 그대로 박혀있는 참혹한 모습.>

 

 

세 번째 이야기

<1968년 6월에 지금까지 발견된 것중 유일하게 십자가에 달려죽은 유골이 북동 예루살렘 지역 나불로스도로 바로 서쪽의 기브앗 하 미브타르에 있는 기원후 1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한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모두 서른 다섯 명의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이중 남자가 11명, 여자가 12명, 어린아이의 것이 12명이었다. 아이들은 생후 6개월에서 여덟 살까지로 추정되는데 대부분 굶주려 죽었고, 어른들은 불에 타 죽었거나 철퇴 같은 것에 맞아 죽었거나 화살에 맞아 죽은 흔적이 드러났다. 그런데 하나의 유골은 나이 스물 넷에서 스물 여덟 사이로 추정되며 키는 약 165cm정도인데 십자가형으로 죽은 것이 확인되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여호하난이다. 그러나 지금은 I/4A라고 불린다.

즉 무덤번호 I, 납골함 제 4번, 유골 A를 합친 고고학적 이름이다.

이스라엘의 고고학자들과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의 하사다 의과대학 교수들이 감정하고 다시 감정한 결과 십자가 처형방법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의 팔은 못으로 박힌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가로 막대에 묶여 졌는데, 아마도 팔꿈치까지 가로 대 위로해서 뒤로 넘겨 팔을 묶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두 다리는 수직으로 세워진 기둥의 양쪽 측면에 놓여졌는데, 별개의 못으로 각 발 뒤꿈치의 뼈를 기둥 측면에 박아 고정시켰다. 처형된 사람이 발을 비틀어 못에서 빼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올리브 나무로 된 작은 판이 못의 머리 부분과 발뒤꿈치 뼈 사이에 끼워졌다. >

빌라도의 편지와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그리고 십자가형으로 처형된 사람의 유골 발굴 이야기를 하였다.

빌라도의 편지는 대략 서기 100년 전후에 나온 문서들에 기록된 것이고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는 서기 93년이나 94년에 기록된 것들이다. 성서에 나오는 이른바 바울문서들이 대략 서기 50년에서 60년 사이에 기록되었으므로 약 반세기 뒤에 기록된 것들이다. 그나마 빌라도의 편지와 요세프스의 유대고대사에 나오는 예수에 대한 기록은 사실 이즈음 대다수의 학자들이 신뢰하지 않는다.

무슨 말인가하면 그 두가지의 기사는 후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첨가 삽입하거나 수정하였다는 말이다. 이쯤 이야기하면 경건한 정통 보수 예수쟁이 양반 한마디 할 것이다. “거룩한 성서의 기록을 나두고 왠 쓸데없는 이야길… 쯧쯧쯧…” 너무 나무라지 마시라. 나는 이제부터 성서를 말하고자 함이니. 또 한가지 예로 든 것은 십자가에 처형된 유골이야기이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한꺼번에 많게는 이천 명 정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째서 거의 이천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야 단 한 구의 유골을 발견하게 되었을까?

역사속에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살다가 죽은 예수, 교인들의 신앙고백은 뒤로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명백한 사실은 그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는 사실이다. 왜 그렇게 죽었을까?

엄숙한 죽음, 그것도 예수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마당에 우스개 소리 하는 것을 용서하시라. 그냥 머리속에 스쳐감으로 쓰는 것이니, 또한 삶과 죽음에 웃음이 좀 있어야 넉넉하지 않겠는가?

오래 전 일이다. 터놓고 지내는 이 하나가 어느 날 진지하게 내게 물었다. “김형, 예수가 왜 죽었는지 아시오?” 이럴 때 해답은 간단 명료하지. “그야, 나와 당신을 위해서지” 이 양반 껄걸 웃으며 “아니야. 목사님들 밥 먹여 살려 주시려구 죽으셨데” 너무 썰렁했나. 나는 많이도 웃었구만.

자 우스개 소리 접고, 내가 풀어 가는 예수의 죽음 아니 그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하자. 이야기인데 제목은 하나 있어야 할 것 같아 붙인다. 이 이야기는 성서를 교과서로 하고 약간의 신학서적들을 참고서로 하여 내 작은 상상력도 조금 붙이고 하여 해 보는 소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