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 역사와 성서에게 묻다

신구약 성서에는 각기 전체 이야기에 큰 기둥이 되는 사건들이 하나씩있습니다.구약에서는 출애굽사건이요, 신약에서는 십자가 사건입니다. 출애굽사건은 해방에 대한 이야기이고, 십자가사건는 구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신앙고백이라고 말합니다. 성서는 바로 신앙고백서이고 그 고백서의 핵심은 바로 해방과 구원 이야기다라는 전제를 바탕으로하면서 제 발제를 시작하겠습니다.

출애굽 또는 탈애굽이라는 해방사건이 노예들이었던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있었던 역사적, 신앙적 경험이었던 것처럼, 우리 한민족에게는 70년 전에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난 해방의 역사적 경험이 있습니다. 피지배민족이라는 사슬에서 벗어난지 올해로 70년이 되었지만, 그 역사적 경험을 민족 공동체가 깊게 되새기는 시도는 아직도 여전히 부족하거나 오히려 되새기는 일이 금기시되는 지경에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1945년 해방이후 한반도에서는 무수한 사건 사고들이 이어져왔습니다. 이런 사건 사고들은 비단 한반도 남북에 국한되어 일어나는 것은 아니고 역사이래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공동체 겪어 온 경험들입니다.

다만 각 민족 또는 국가 공동체들이 자신들이 당한 사건이나 사고들을 어떻게 정리하고 넘어가느냐는 것은 각기 다릅니다.

오늘 저는 우리들의 경험들 곧 1945년 이래 한반도 남쪽에서 일어났던 사건 사고들을 아주 간략하게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여러 사건 사고들 가운데 자연재해 등의 천재 이런 것들은 제외하고 국가권력을 비롯한 공권력이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일어났던 굵직한 사건들을 몇가지 꺼내어 짚어보고자 합니다. 사건이나 사고는 연도순으로 짚어봅니다.

우선 제주 4.3사건을 들수 있겠습니다. 미군정 치하였던1948년 4월 3일부터 시작해서 대한민국정부 치하인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이렇게 약 6년 동안 이어져온 제주 4.3사건 또는 제주항쟁에서 약 3만에서 8만명으로 추정되는 제주도민이 학살당한 사건입니다. 당시 제주도민 7-8명당 1명 꼴로 죽임을 당한 사건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는이 사건 개시일로부터  약 55년이 지난 2003년 10월에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 처음으로 사과를 하고, 2005년에는 국가 차원에서 최초로 4.3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를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총리후보였던 문창극이 4.3폭동이라고 규정하는 등 현 집권세력 및 동조세력들은 이 사건을 좌익 빨갱이들을 토벌한 사건으로 만들려고 여전히 애쓰고 있습니다.

다음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일어났던 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들수 있겠습니다. 국민보도연맹(정식 명칭은 국민보호선도연맹)은 남한 내 공산주의 세력 약화를 위해 과거 좌익에 몸담았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가입시켜 만든 단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1949년에 이 단체를 만들면서 관료들이 실적을 높이기 위해 마구잡이 또는 강제로 양민들을 이 단체에 가입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국가는 이 단체에 속한 사람들은 과거 전력 때문에 북에 동조할 염려가 있다면서 산골작이로 이들을 끌고가 무차별 학살을 자행합니다. 이 사건으로 학살당한 사람 수는 적게는 6만에서 많게는 60만에 이른다는 설들이 있는데, 대략 20만 추정설이 강한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이 역시 노무현대통령이 2008년 1월 24일 울산 국민 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한 과거 국가권력의 불법 행위에 대해 포괄적으로 사과하였지만, “보도연맹”이라는 말 자체가 여전히 금기시되는 사회라는 것이 오늘의 솔직한 모습일 것입니다.

다음은 역시 전쟁 중에 일어났던 국민방위군 사건을 들 수 있겠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한때 압록강까지 진출했던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를 합니다. 이른바 1.4후퇴입니다. 이때 국가는 다시 적의 지배지역이 될 곳에 사는 장정들을 적들에게 뺏기지 않을 목적으로 만 17살 이상 40살 이하의 장정을 제2국민병에 편입한 뒤 제2국민병 중 학생이 아닌 자는 지원에 의해 국민방위군에 편입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국민방위군 설치법안’을 만듭니다.

그리고 전국에서 해당 연령층에 있는 사내들을 징집합니다. 문제는 이들을 수용할 시설도 식량도 의복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동원된 장정들은 2인당 한명꼴로 가마니 한장을 지급받은 채 무조건 각자 알아서 부산에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한겨울 추위, 전쟁통에서,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한 이들 국민방위군 총수 50만명 가운데 약 20%의 10만명이 굶어죽거나 얼어죽은 사건입니다.

훗날 이 사건이 세상에 들어나면서 국회조사단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민방위군을 위한 국가 예산 대부분인 당시돈 50-60억이 국민방위군 재정을 실질적으로 총괄한 부사령관 윤익헌 등 당시 국가 권력자들의 손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죽어 간 사람들 가운데 정부가 인정한 사망자수는 꼴랑 331명입니다.

그리고1970년 4월 8일에 일어났던 와우아파트 붕괴사건과 이듬해인 1971년 8월 10일 전라도 광주가 아닌 경기도 광주에서 일어났던 광주대단지 대봉기사건입니다.

이 사건들은 개발독재 시절 국가권력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들입니다.

1960대 서울은 경제성장으로 인해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로 인해 짧은 시간에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던 시절이었습니다. 늘어나는 인구에 비해 그들이 살 집들 곧 주택은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그러다보니 서울에는 하꼬방이라고 불렀던 무허가 판자집들이 넘쳐났습니다. 청계천 일대를 비롯하여 정동을 중심으로 한 신문로 일대 등 서울 곳곳에 하꼬방들이 즐비했습니다.

그즈음 당시 대통령 박정희는 “판자집 좀 정리해 보라”는 명령을 내리고, 블도저시장이라는 닉네임이 갖고 있던 그의 충복 김현옥 서울시장 은 이른바 시민아파트라는 새로운 주거공간과 신도시 건설에 앞장서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시민 또는 국민이라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춘 건설사업이 아니라 권력자의 입맛에 맞는 사업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마구잡이 사업이었습니다.

당시 세워진 시민 아파트들 대부분이 서울에 있는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 이유를 설명하는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의 말은 이 사건들을 압축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높은데 있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니냐?”라는 말입니다.

6개월만에 세워진 5층 아파트가 완공된지 5개월만에 주저 앉았는데 나중에 조사해보니 철근 70개를 써야하는 기둥에 철근 5개를 썻다는 것이 밝혀졌답니다. 아무튼 이 사고로 33명이 죽고 40여명이 크게 다쳤답니다. 제 고향이 신촌이라 이 사건에 대해 할말이 많지만 일던 여기서 접고요.

광주대단지 봉기사건으로 넘어갑니다.

무허가 판자촌 해결에 봉착한 당시 박정희 정부는 일부 무허가 주택은 개량해서 허가 주택으로 양성화하고 나머지는 새로운 주택단지를 세워 무허가 주민들을 이주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고 경기도 광주에 대단지 주거 공간을 만든다고 공표를 합니다.

주로 청계천과 서울역 부근에 거주하던 빈민층 10만여명에게 “다시는 서울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각서에 서명하면 광주에서 살 집을 마련해 준다”는 약속을 하고 이들을 경기도 광주로 이주시킵니다.

문제는 10만명이 이사를 한 광주에는 도로, 교통, 시장 등이 거의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좀 더 간단히 설명을 드리자면 떵 몇 평을 주고 여기서 살되 각자 알아서 살아라는  지경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휘발유를 부어 불을 붙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주를 권유하면서 평당 당시 돈 200원에 주기로 한 땅을 8000원에서 16000원씩을 내라고 국가 공권력이 강제한 것입니다. 국가의 사기질에 불이 붙었습니다. 자그마치 약속보다 40배에서 80배를 요구한 것입니다.

대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약 6만여명이 시위를 하면서 경찰 차량을 포함한 약 22대의 차량에 불을 지르는 등 대규모 항거가 일어납니다. 이들이 “서울로…”라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당시 서울시장 양택식이 사과하고  이들의 요구를 다 들어 주기로 하고 사흘만에  이 봉기는 막을 내립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주동자 22명은 “폭동을 일으킨 주범들”로 낙인 찍히고 맙니다.

이 사건은 이후에 일어난 부마항쟁, 광주항쟁 등 민중항쟁의 한 표본이 되기도 하는데 현재 많은 진보인사들 가운데도 이 사건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1980년 5월 18일 광주항쟁이 일어납니다. 아니 일어난 게 아니라 일으킵니다, 누가 국가권력이. 이 부븐은 제가 건너 뜁니다.

자, 다음은 성수대교 붕괴 사건과 삼풍백화점 사건입니다. 이게 어떻게 국가 권력과 상관이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1994년 10월 21일 서울시간 아침 7시 48분경에 일어났던 성수대교 붕괴사건은 전세계사에서 보기드문  안전불감증에 걸린  국가권력을 대변하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듬해인 1995년 6월 29일에 일어난 단군 이래 최대의 참사라고 일컬어지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역시 이에 맞닿아 있습니다.

이 두 사건 이후 실시된 정부의 안전 평가 실시 결과를 보겠습니다. 정부의 발표입니다.

  1. 전체 고층 건물의 1/7(약 15%)은 개축이 필요한 사태이다.
  2. 전체 건물의 80%는 크게 수리할 부분이 있다
  3. 한국내 전체 건물의 2%만이 안전한 상태이다.

1995년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있었던  진단입니다.

그리고 이제 세월호입니다.

세월호 사건은 해방후 겪었던 모든 사건들을 축약해서 드러낸 사건입니다.

2014년 4월 16일 대한민국 진도 서해앞바다 에 배가 가라 앉았고 이내 탑승했던 모든 사람들이 바로 구출되었다는 뉴스에서부터, 건국이래 최대의 구조 작업이 펼쳐지고 있다는 뉴스가 이어졌지만 단 하나의 생명체가 구출되었다는 보도는 없었습니다.

이제껏 되돌아보았던 사건들의 공통점입니다. 국가권력과 공권력이 주도했거나 책임과 의무를 방기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사건들입니다. 그리고 결코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왜 그랬지?”라고 묻는 사람들은 불순분자, 좌빨, 종북 등등으로 불온의 낙인을 찍어 버립니다. 그리고 국민, 시민들에게 그 사건을 빨리 잊어버리라고 종용합니다.

2015년 오늘까지 자그마치 70년을 이어져온 것입니다. 역사를 되새겨 곱씹을 줄 모르는 공동체의 아픔입니다.

이제 다시 성서로 돌아갑니다.

저는 해방과 구원이라고 말씀드렸고, 그것은 신앙적 고백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해방과 구원의주인공은 누구입니까? 신이라고요? 아닙니다. 바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 지금 노예인 상태, 억눌린 상태, 억압받은 상태 바로 우리말로 이야기하자면 한을 품은 상태에 놓인 사람이 바로 주인공입니다.

바로 성서가 말하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 가난한 사람들에 정의는 시대에 따라 많이 달라집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 강단에서 이 가난한 자들에 대한 황당한 정의들이 난무하는 뉴스들을 보곤합니다. 실제로 가난한 자들이란 바로 부자들이라는 논리입니다. 부자들이 누리는 부와 권력 때문에 사람들에게 까닭없이 지탄받고 소외되고 미움을 받기 때문에 그들이야말로 진짜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황당하다고요?

저는 어제 한국의 경향신문에서 “국민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역사의 피해자가 되게 하고 있다.”라고 시작되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이 말은 새누리당 한 중진의원이 한 말이랍니다. 바로 부자가 가난한 사람이다라고 우기는 한 전형입니다.

해방은 노예, 피압박, 억압, 굴종 등의 상태에서 풀려나오는 것입니다. 구원은 죄의 상태 곧 죄인에서 자유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는 이렇게 해방과 구원을 바라는 사람들을 일컬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예수가 말한 가난한 사람들이란 바로 그들이 처한 물질적, 도덕적, 정신적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정치적 상황에서 가진자, 권력자와 그에 기생하는 사람들로부터 경멸받고, 손가락질 받고, 불온시 당하면서도 그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드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교육자이자, 철학자이며 사회운동가였던 파울로 프레이리는 이렇게 억눌리고, 불온시 당하며 그것이 당연한 일로 받아드리며 사는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내세 곧 죽음 이후의 세상에다 촛점을 맞우는 종교를 강력히 비판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 해방되고 구원받는 바로 한풀이하는 세상을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1960, 70년대 브라질과 남미 민중들이 스스로 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다수가 문맹자였던 농민과 빈민들에게 문해교육 곧 글을 깨우치는 교육에 전념했습니다.

혹자는 2015년 문맹률 0%에 가까운 한민족에게 파울로 프레이리가 무슨 뚱딴지냐고 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입니다. 대한민국 국민들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들의 문맹율은 0%에 수렴하고있지만 문해력, 곧 어떤 글을 이해하는 능력은 현재 OECD 국가들 중에 꼴지라는 것입니다.

자신, 또는 자기가 속한 집단이나 지역에게 유리하고, 편리한 것들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보고 듣기에 불편한 것들은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아주 간단하고 간편하게 불온으로 찍어 버리면 그만입니다. 분단 상황은 이들에게 아주 유용하고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권력자들은 이런 상황을 아주 적절히 이용합니다. 남북대화록을 마구 까댈 수 있었던 까닭이나, 앞뒤 논리가 맞지않고 심지어 허위사실까지 적시했던 헌법재판소의 정당해산 판결문을 다 까서 공개하는게 거림낌이 없는 만용들은 바로 읽지 않고, 듣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고, 아니 이해하지 않으려하는 민, 곧 국민, 시민, 민중의 속성을 잘 이용하는 권력자들의 횡포입니다.

이제 제 발제를 마치려합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희망을 보아야합니다. 해방 이후 숱한 사건과 사고들을 겪어오면서, 피해자 가족들이 이렇게 끈질기게 자발적으로 가난의 상태에서 해방되고 구원 받고자 했던 전례가 없습니다. 바로 세월호 유가족 및 실종자 가족들이 지난 일년 동안 줄기차게 목청높게 외쳐온 진실규명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희망을 보아야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투쟁과 외침에 귀기울이고, 이해하려는 해외동포들의 연계작업 바로 우리들에게서 희망을 보아야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