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安息)에

일요일 오후, 아내와 함께 꽃과 대나무 향연을 펼친다는 늦가을 정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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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꽃내음을 타고 떠오른 오래 전 친구 얼굴 하나. 고등학교 시절 원예반 활동을 하던 친구 K다. 키 작은 내가 친구하기엔 버거울 만큼 키도 훌쩍 컷거니와 늘 맑은 얼굴에 말수도 적고, 말도 느릿느릿 몇 살 터울 형같은 친구였다. 그가 속한 원예반 친구들은 국화를 참 멋지게 키우곤 했다. 당시에 이 맘 때 쯤이면 열리곤 하던 전국 국화 경연대회에서 원예반 친구들은 대상을 거머쥐곤 했었다. 원예반 여러 친구들이 함께 이룬 일일터임이 분명하지만 내 기억속엔 국화 하면 그 친구 K가 떠오르곤 한다. 옛 친구 얼굴 하나 떠올려 그 시절을 추억하는 일만으로도 오늘 산책은 그저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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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salvia 꽃잎을 보며 말했다. ‘이 사루비아 우리 많이 먹었지? 참 달았는데…’ 사루비아, 아카시아, 까마중… 개미 똥꼬 까지. 지금처럼 복잡하고 까탈스럽지 않았던 시절 이야기로 오랜만에 이어진 손 잡고 늦가을 길을 느긋하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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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른 아침에 눈이 뜨여 손에 들었던 책 하나. 윤명숙이 쓴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제도>.

책을 쓴 윤명숙은 조선인 위안부 한 사람 한 사람 그 사람 마다 태어난 후 겪어낸 저마다의 이야기에 촛점을 맞추어 당시의 제도와 일제 식민주의의 폭력성을 들추어 나간다.

추억이란 결국 사람인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사람 얼굴 하나 떠올리는 일 아닐까?

역사 역시 뭐 거창한 게 아닐게다. 그 시절 거기 있었던 사람들을 돌아보는 일.

제도, 체제, 주의, 사상 등속이란 모두 헛 것일 수도… 어쩜 종교에 이르기까지.

그저 그 시절 가장 아팟던 사람들 이야기를 꺼내어 곱씹고 오늘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딱 한번 만이라도 눈길 줄 수 있다면 나는 역사 속 하루를 사는 게 아닐까?

늦은 저녁, 노부모 곁 지키느랴 애쓰는 누나에게 들고 간 생선 튀김 하나로 누나 얼굴에 함박 웃음 가득.

내가 누린 하루의 안식이여!

경칩에

일을 마치고 돌아 오는 길,  동네 약국 체인점에 있는 사진 현상소에 들렸다. 재미 삼아 사진을 찍기 시작한 지 일여 년 만에 어제 밤 처음 사진 현상 주문을 해 보았다.

내일부터 나흘 동안 가게 문을 닫고 새 장소로 이전을 한다. 내가 해야 할 이전 준비들은 거의 끝났고, 장비와 기계 등 큰 이사짐들은 일이 맡겨진 이들의 몫이다.

나는 손님들을 맞는 카운터 공간을 꾸밀 생각으로 사진 현상을 맡겼던 터이다. 내가 찍은 사진 몇 장들과 내가 좋아하는 시 몇 편들을 새긴 판넬로 한 쪽 벽을 장식할 요량이다.

현상되어 나무판에 새겨진 사진들을 찾아와 한참을 들여다 보다 툭 튀어나온 혼잣말, ‘오호 제법인데!’

사진들과 함께 벽을 장식할 시편들을 새긴 판넬들을 찾아 든다. 영역한 이해인님의 시편들과 Thoreau의 생각들, 그리고 내가 참 좋아하는 Shel Silverstein의 관점 (Point Of View)이다.

추수감사절 만찬은 슬프고 고맙지 않다/ 성탄절 만찬은 어둡고 슬프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칠면조의 관점으로 만찬 식탁을 바라본다면.

나는 이즈음 한국(한반도) 뉴스 또는 한국(한반도)에 대한 뉴스들을 보며 Shel Silverstein의 관점 (Point Of View)을 떠올리곤 한다.

개인 사이의 관계, 집단과 집단과의 관계 나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 또는 나라와 개인 집단과 개인, 나라와 집단 등등 모든 관계들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Shel Silverstein의 관점은 신(神)의 관점이다.

바로 약자(弱者)의 관점에서 공감하는 능력이 최적화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바로 천국이다.

역사란 사람들이 천천히 정말 천천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그 곳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 아닐까?

내 욕심으로 살다 문득 문득 현상된 사진처럼 툭 정신을 차리게 하는 순간들이 있다.

몹시 추운 경칩(驚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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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어느 안식일

한 주간 쌓인 피로의 무게에 눌려 엊저녁 일찍 자리에 누웠더니, 몸이 ‘피로의 무게’란 단지 맘이란 놈의 생각 이었을 뿐 아직은 견딜 만하다며 새벽녘에 눈을 뜨다.

어제 필라 지인이 했던 부탁이 떠올라 컴퓨터 앞에 앉다. 오는 11월 6일 중간선거 투표와 입후보자들의 약력과 정책공약 등을 알리는 한글 안내 번역 교정을 보다.

가을 점퍼를 꺼내 입다. 아침 바람이 어느새 차다. 휴일 아침 커피 맛은 일하는 날의 그것보다 깊고 달다.

모처럼 교회 한 번 가지 않겠느냐는 아내의 제안에 따라 나서다. 목사님의 말씀 ‘착하게 살자’. 딱 고만큼의 거리와 간격에서 만나는 이들과의 인사도 때론 살가운 법이다.

오후엔 아내와 함께 가을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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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새를 일하고 하루를 쉰 안식일은 역시 신의 한수다.

저녁상을 물리고 이즈음 한국 현대사를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이 보내주신 해방 이후 빨치산에 대한 연구 논문들을 읽다. 민(民)에 대해 천착하는 연구자의 시각이 가슴에 닿다.

참다운 안식일 하루를 만드는데 사람들이 고민하고 투쟁해 온 역사는 거의 육천년.

우리 세대의 70년 고민은  이제 시작이다.

내일은 손님들이 떨구고 간 빨래감들과 뒹굴 터.

또 다른 안식일을 위하여

시월, 첫 일요일에

휴일 오전 내내 서중석이 지은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를 읽다. 1945년8월 15일 부터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는 순간 까지를 기록한 책이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 하기 바로 전 해인 1959년까지 읽다가 책을 덮었다.

몇 가지 생각들이 스치었다. 아무리 백세 시대라고 하여도 나도 꽤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첫째요, 내가 한국 현대사 운운하며 책을 읽고 이야기하던 시절의 현대사란 19세가 말에서 해방 공간까지 곧 내가 살아온 시절의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이젠 내가 살아온 시절들이 현대사의 중심이 되었다는 사실이 둘째요, 마지막으로 놀라운 민(民)의 힘을 다시 깨닫고 확인하는 책 읽기 였다는 생각이다.

이즈음 우리 동네 한국학생들 가운데는 한국 드라마를 보기 위해 한국어를 배우고자 등록하는 영어권 미국인들이 제법 있다. 이들을 성인반으로 분류하여 한국어를 가르치는데 그 반들 중 하나를 내 아내가 맡고 있다.

그 학생들 중 하나가 주정부에서 일을 한다는데 어제 아내에게 선물을 주었단다. Longwood Gardens이라고 미 동북부에선 제법 알아주는 관광명소 가운데 하나인데, 그 곳 입장권 두 장을 주더란다. 물론 작은 부탁을 겸한 것이었으므로 부담없이 받을 수 있는 선물이었다.

하여 오후에는 Longwood Gardens 나들이에 나섰다. 이미 여러차례 가 보았던 곳이라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다만, 오늘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것은  집에서 고작 16분거리, 내 가게보다도 가깝다는 사실이었다. 전에는 4-50분 정도 걸리는 길이었는데 그것이 그렇게 단축된 까닭은  놀랍게 발전된 GPS 덕이었다. GPS는 산속 지름길로 우리를 16분만에 그 곳을 찾게 하였다.

아내와 함께 꽃과 분수(噴水) 사이에서 휴일 오후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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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오르간 공연도 있어 문화생활(?)도 누렸다. 연주 제목들이 불꽃 춤, 성(聖) (누군가?)의 종소리, 무슨 변주곡 등이었는데 음악엔 영 무식 덩어리인 나는 짜장면, 우동, 짬뽕을 다 맞본 기분이라고 아내에게 내 느낌을 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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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을, 그 곳의 주인은 다람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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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부호 DuPont이 그의 아내를 위해 만들었다는 Longwood Gardens을 오늘 우리 부부도 즐길 수 있게 되었지만  본디 주인은 다람쥐와 여우, 사슴 등이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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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뒤적여 본다는 뜻도 본디 주인인 민(民)을 찾는 일 아닐까?

일요일 단상 이제(斷想 二題)

  1. 추억

두어 달 사이 벌써 세번 째 장례식장을 찾는다.  고인들은 노년기에 이르러 이민을 오신 일 세대들로 세 분 모두 90 가까운 일기를 마친 분들이다. 1920년대 후반에 태어나셨던 분들이니 곤고한 시대를 겪어 온 이들이다.

오늘 찾아가는 분은 살아 생전 또래 어르신들 사이에서 ‘장군’으로 불리었던 이다. 부리부리한 눈에 사내다운 풍모 뿐만 아니라 그가 살아온 이력 때문에 붙여진 애칭이다. 한국전 참전 용사였던 그는 영관급 장교로 예편한 이후 경찰에 투신하였다. 1960-70년대 늘 뉴스의 중심이 되곤 하던 서울 주요지역들의 경찰서장을 두루 거치고 은퇴 이후 우리 마을에서 여생을 보내다 떠나셨다.

늘 과묵하고 만면에 웃음을 잃지 않았던 그와 잠시 시간을 함께 하였던 때가 있었다.

어느새 스무 해 전 일이다. 당시 알고 지내던 은퇴 기자 양반이 있었다. 지금이야 쓰레기 소리를 듣는 신문이 되었지만 60, 70년대만 하여도 한국을 대변하는 신문 소리를 듣던 곳에서 기자 노릇을 했던 분이다.

어찌어찌 이야기 끝에 ‘장군’과 ‘은퇴 기자’ 두 양반이 그 당시 경찰서장과 출입기자 사이로 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두 양반이 서로 만나고 싶다고 하여 내가 자리를 주선한 적이 있었다.

가벼운 술자리에서 두 어른은 옛 시절을 추억했다.

나는 두 어른에겐 추억이 된 옛 시절 이야기들이었지만, 그 시절을 아픔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익숙하였기에 두 어른과는 그리 가까이 지내지는 못했다.

장례식 가는 길, ‘장군’을 추억하며 역사를 돌아보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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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해외연대 국가와 도시들)

  1. 기억

역사 또는 지난 일들은 누군가에겐 추억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아픔 서린 한이 되기도 한다. 뿐이랴! 또 다른 누군가에겐 새 세상을 여는 기억이 되기도 한다.

내가 세월호 참사 소식에 귀 기울이기 시작한 때는 참사가 일어나고 한참이 지난 후였다. 물론 당시 실시간으로 전해오던 황망한 소식을 쉽게 잊을 수는 없었지만 딱히 내가 해야 할 일은 전무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몇 달이 흐르고 나서야 이웃마을 필라델피아에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어찌 연이 닿아 모임에 이따금 얼굴 내밀어 내가 살아가는 까닭을 찾기도 한다.

다음은 지난 10월 말에 서울에서 열렸던 한 행사를 소개하는 어느 기사 내용이다.

“진실은 국경을 넘고 저항은 인간을 찾는다.” (수전 손택)

세계 34개 도시의 참가자로 이루어진 4.16해외연대 서울포럼이 닷새간의 일정을 마치고 지난달 30일 폐막됐다.

이번 행사는 세월호 참사 이후 온라인상에서 연대해 온 재외동포들이 상호 협력을 구체화, 공고화 하기 위하여 개최한 최초의 오프라인 모임이다. 이번 포럼에서는 4.16해외연대의 형성과 활동영역 확대 과정에 관한 브리핑(전희경, 애틀랜타 세사모)을 비롯, 재외동포사회 민주진영의 활동사(오복자,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세사모), 활동환경(김이제이, 뉴욕 뉴저지 세사모), 재외동포사회 풀뿌리 운동이 성찰할 의제(이은희, 프랑크푸르트 민주평화투명) 등의 발제가 있었다.

또한 활동주체 운영방식에 대한 사례 발표(박준영, 인도네시아 4.16자카르타촛불행동), 이미지로서의 세월(박정후, 세월호를 기억하는 몬트리올 사람들), 해외 활동 지역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디지털 시스템(이호정, 필라델피아 세사모), 재외 선거 시스템 개선 방안(김수야, 4.16파리연대/이켈리, 세월호를 기억하는 토론토 사람들) 등 다양한 발제 및 발표를 통해 재외 국민과 재외 동포의 정치 참여 조건과 환경을 개선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26일, 안산 분향소와 기억교실 방문으로 ‘416 해외연대 서울포럼 2017’의 첫 문을 연 4.16해외연대는, 포럼 일정 외에도 광장 전시회, 촛불집회 1주년 대회 등 세월호와 관련한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는 등 알찬 일정을 소화했다.

필라델피아에서 두 분이 이 행사에 참여하였다. 지난 주간 우리는 행사에 참여하고 돌아 온 두 사람에게서 행사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가슴에 깊게 새겨진 이야기 한마디다.

“포럼 현장과 광화문, 안산, 진도, 팽목 등지를 돌아보며 마주했던 유가족들의 치열함 앞에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란 너무 초라했어요. 안타까움과 미안함 뿐이었지요. 그런데 그런 제게 유가족 한 분이 이런 말을 했어요. ‘당신들이 기억해 주는 것 만으로도 우리에겐 큰 힘이 된다’고요”

나는 아주 작게는 체험을 통해, 대부분은 알량한 정보와 지식을 통해 멀게는 해방 이후에서 가깝게는 세월호 참사까지 누군가에게 한을 품고 살게 한 숱한 사건들을 기억한다. 단지 기억 뿐, 기억이 누군가의 한을 폴어 준 일은 없다.

세월호는 그 관점에서 확연히 다르다. 기억이 새 역사를 쓰고, 새 세상을 열고 있다. 일시적 한풀이 운동이 아니라 일상으로 녹아져 끊임없이 이어지는 운동이 되었다. 기억은 그 운동의 힘이다.

문무쌍전(文武雙全) 박용만선생

유난히도 푸르른 날이었습니다. 오늘 오후 제 일터에서 바라본 가을하늘이랍니다.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쳐다보다 떠오른 얼굴 하나있어 예전에 썻던 글하나 찾아 여기 올립니다.

10-23-15


 

문무쌍전(文武雙全) 박용만선생

1881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1928년 중국 북경에서 세상을 마친 우성(又醒) 박용만(朴容萬)선생. 90여년 전 이 미국 땅에서 젊은 꿈을 펼쳤던 사나이의 자취는 유, 이민사(流,移民史)에 깊고 뚜렷한 자국을 남겨 놓았다. 이 땅에서 살다 갔거나 살고 있는, 앞서나간 겨레를 생각하고 되씹는 일은 오늘을 아둥바둥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힘을 주거니와 다음세대에게 꿈을 주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선생의 삶을 정리해 본다.

박용만구한말 개화파의 일원으로 옥살이를 했던 선생은 그 곳에서 이승만을 만나 의형제를 맺는다. 옥에서 풀려난 선생은 얼마 후인 1904년 삼촌 박희병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다. 도미후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던 선생은 1909년 네브라스카 커니에 있는 농장을 빌어 ‘한인 소년병 학교’를 세운다. 1912년 네브라스카 헤이스팅스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한 선생은 헤이스팅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참령군인이 된다.

이승만의 외교독립론, 안창호의 교육입국론에 비해 선생은 군사력으로 조국광복을 이루어야 한다는 무장투쟁론을 내세운다. 이 ‘소년병학교’에 100여명의 한인 생도들이 있었을 만큼 선생의 꿈은 야무진 것이었다.  낮에는 농장에서 일을 하거나 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조국광복의 꿈을 키우며 군사훈련에 열중하던 이 소년병학교 출신들은 후에 조국광복과 광복후 조국건설에 중요한 몫들을 담당한다. 김려식, 백일규, 정한경등의 학자들과 구연성, 김용성, 김일신등의 의사들, 기업인으로 유명한 유한양행의 유일한등이 이 학교 출신들이다.

박용만선생은 무력투쟁을 앞세웠지만 문장력이 뛰어난 문필가이기도 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하던 ‘합성신문’의 주필, 하와이 국민회의 기관지 ‘신한국보’의 편집장을 지내며 그가 써낸 글들은 당시 한인사회의 정신적 길잡이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펴낸 저서 ‘군인수지(軍人須知)'(1911), ‘국민개병설'((1911), ‘아메리카 혁명'(1914)들은 시대를 앞서갔던 그의 흔적들이다.

선생은 소년병학교시절이나 후에 하와이에서의 ‘무관학교’시절 손수 편집한 한글교본을 가지고 한글교육에도 힘쓰셨던 교육자이었다. 실로 문(文)과 무(武)를 겸비(文武雙全)하셨던 분이셨다.

1912년 하와이로 건너가신 선생은 그곳의 신문편집을 담당하는 동시에 무관학교를 설립한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이 학교의 학생수가 3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실제 무장(武裝)까지 하였던 이 학교의 위세는 선생의 꿈을 이룰만한 밑둥이었다.

그러나 선생의 불행은 의형(義兄) 이승만이 하와이로 오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프린스톤에서 박사학위를 끝내고 잠시 한국에 갔다가 마땅히 할일을 찾지 못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미국 본토에서 마땅한 자리가 없자 하와이의 박용만선생에게 자신을 초청해 줄 것을 요청한다. 하와이 국민회의는 이승만의 파벌조장 전력을 문제 삼아 그의 하와이행에 매우 부정적 견해를 표출하였으나 박선생의 강력한 요청으로 이를 성사시키게 된다. 그러나 하와이로 온 이승만은 박선생과 협력하는 대신 이미 이 곳에서 탄탄한 자리를 잡고있던 의동생에 대한 경쟁심을 키우며 질투하기 시작한다.(kingsley K.가 쓴 책 ‘하와이의 한인과 교회’ 113쪽)

결국 정치력이 뛰어났던 이승만에게 선생은 밀려난다.  당시 상해에서 세워진 상해임시정부 초대 수반 선거에서도 신채호의 강력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에게 패하고 만다. 이후 현실의 승자 이승만에 의해 선생의 자취는 서서히 묻히고 만다.

타고나게 낙천적 성격이었던 선생은 하와이의 생활을 털고 중국으로 들어가 신채호, 신숙들과 더불어 ‘북경군사통일회’를 만들어 중국내에 흩어져 있던 전 한인 군사력을 통일하려는 노력을 해 본다. 그 당시 선생이 계획했던 <조국 무장해방 작전도>를 보면 그의 크고 절실했던 꿈을 알 수 있다. 그렇게 꿈을 키우던 1927년 10월 16일, 선생은 의문의 피살을 당하여 역사속으로 묻히고 만다.

1945년 해방이후 이승만의 집권으로 그에 대한 기록은 물론 그의 후손들까지 이런저런 핍박을 당하기까지 한 것이 우리 현대사의 한 모습이다. 김대중정권이 들어선 후 우성 박용만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고 그의 발자취를 새롭게 조명하는 기운이 일어난 것은 썩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우기 우리 마을 델라웨어에 그 분의 유일한 혈육인 장조카 박상원선생이 생존해 계셔서 우성선생의 자취를 가깝게 느낄 수 있음은 무척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01. 3 .8.)


 

<후기>

우성의 장조카 박상원선생은 커네티컷으로 이주해 사시다가 몇해전 세상을 뜨셨습니다. 그 이가 커네티컷에서 제게 전화를 주셨던 일은 이명박대통령이 당선되던 즈음이었습니다. 당시 박상원선생이 하셨던 말씀이었답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쥐XX 같은 놈이…. 참 내가 큰 아버지 생각해서도 차마 눈 못 감겠는데….도대체 어찌되어 가는 것인지…”

푸른 가을 하늘을 쳐다보다가 문득 떠오른 선생을 생각해보니 이즈음 박근혜 세상 소식을 모르고 가신게 더 편한 길이 아니였을까하는….

묻는 이들에게 길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하게 마련이다. (Those who do 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 – 미국의철학자이자 시인이었던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가 한 말입니다.

또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씀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나아가 선생은 “우리나라에 부처가 들어오면, 한국의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의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공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공자가 되지 못하고 공자를 위한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예수가 아니고 예수를 위한 한국이 되니 이것이 어쩐 일이냐. 이것도 정신이라면 정신인데 이것은 노예정신이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라는 교훈으로 늘 역사에게 오늘을 묻고 내일을 설계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E. H. Carr(Edward Hallett Carr)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역사적 사실은 역사가가 과거의 어떠한 사실을 역사적 사실로 선택할 때 존재할 수 있다.”라고 명징한 대답을 내민 바 있습니다.

저는 이즈음 뜻이 맞는 몇몇 사람들과 역사공부를 함께 하려고 시간을 좀 내고 있습니다. 조금 뜬금없는 일이기도 합니다만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다.

4-16a세월호참사 일주기를 넘어가는 시점에서 결성된  4.16연대가 ‘이젠 인권을 이야기 할 때’라며 제안한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 인권선언” 때문이었습니다. 처음 뉴스에서 이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바로 “뜬금없이 이게 뭐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사람 살아가는 모든 모습들을 다 담아낼 수 있는 엄청난 크기의 그릇에 “세월호”를 주어담는다는 게 적절한 것인가?라는 스스로의 물음 때문이었습니다.

가뜩이나 시간이 흐르면서 “세월호”라는 말조차 피로감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즈음에 이런 접근이 과연 옳은 것일까?라는 질문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습관처럼 이런 물음을 들고 성서에게 물었습니다. 그리고 성서가 제가 준 응답은 에스겔(에제키엘) 34장에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야훼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너 사람아,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목자들에게 그들을 쳐서 이르는 내 말을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망하리라. 양을 돌보아야 할 몸으로 제 몸만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아! 너희가 젖이나 짜 먹고 양털을 깎아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 먹으면서 양을 돌볼 생각은 않는구나. 약한 것은 잘 먹여 힘을 돋구워 주어야 하고 아픈 것은 고쳐 주어야 하며 상처입은 것은 싸매 주어야 하고 길 잃고 헤매는 것은 찾아 데려 와야 할 터인데, 그러지 아니하고 그들을 다만 못살게 굴었을 뿐이다.

양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 온갖 야수에게 잡아 먹히며 뿔뿔이 흩어졌구나. 내 양떼는 산과 높은 언덕들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내 양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 다니는 목자 하나 없다.

그러니 목자들아,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내가 맹세한다. 나의 양떼는 마구 잡혀 갔고, 나의 양떼는 목자가 없어서 들짐승에게 찢겼다. 그런데도 내가 세운 목자들은 나의 양떼를 찾아 다니지 않았다. 제 배만 불리고 양떼는 먹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목자들아,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주 야훼가 말한다. 목자라는 것들은 나의 눈밖에 났다. 나는 목자라는 것들을 해고시키고 내 양떼를 그 손에서 찾아 내리라. 그들이 다시는 목자로서 내 양떼를 기르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양떼를 그들의 입에서 빼내어 잡아 먹히지 않게 하리라.

주 야훼가 말한다. 보아라. 나의 양떼는 내가 찾아 보고 내가 돌보리라.’> – 에스겔 34 : 1 – 11, 공동번역

바로 “존엄과 안전 지대에서 내 팽개쳐져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위로이자, 그렇게 “사람들을 내 팽개친 권력자들”에 대한 응징의 소리였습니다. 나아가 신의 직접통치를 선언하는 대목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본 응답이었답니다.

그리고 이제  사람 살아온 모습 곧 역사에 묻기로 한 것입니다.

혼자 역사 앞에 서서 묻기보다는 여럿이 함께하는 일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평소 뜻이 엇비슷한 이들과 함께 나선 일입니다.

어디까지가서 어떤 응답을 얻을런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행여 헛수고가 되도라도 뜻을 새길 수는 잇겠다는 생각입니다.

‘인권’이라는 큰 그릇 속에서 지금은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세월호에 얽힌 피맺히고 한맺힌 소리들이지만 언젠가 그 그릇을 꽉 채워 세상을 향한 큰 울림이 되는 날을 그리며 역사에 묻고자하는 것입니다.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함이요, 미래를 열기 위함이요, 세월호를 역사적 사실로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역사는 과거사가 아니라 미래사 – 헤리만의 교훈

미국방문길에 오른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오는 29일 미국 상하원에서 행할 연설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모여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으면서 적대적으로 승전국과 패전국 관계였던 미일 양국이 이제는 상호 돈독한 우방이 되어 만나는 행사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관점은 바로 “과거사 문제” 입니다.

과거 제국주의 일본이 저지른 각종 만행을 인정하고 그 국가 행위에 대한 사죄와 사과를 기대하는 이들이 많겠지만 현재로선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보입니다.

한국과 중국이 제 아무리 목청을 높여도 미일 양국이 눈앞에 놓인 중국을 향한 동맹관계와 경제 동반자로써의 상호 이해관계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중국이야 자기나라의 이해와 아시아 종주국으로써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과거사 문제를 계속 꺼집어 내겠지만, 어정쩡한 것은 언제나 그렇듯 대한민국이 아닐까합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방미 뉴스를 보면서, 미일 양국과 특히 대한민국을 생각하다가 떠오른 인물 한사람을 소개해 볼까합니다.

William_Averell_Harriman에버렐 헤리만(William Averell Harriman, 1891-1986)입니다. 그는 살아생전 미국 외교정책 전문가들 사이에서 “현자(賢者, The  Wise Men)”로 불리었던 사람입니다.

헤리만의 아버지는 조선과 만주의 철도건설을 도맡았던 대재벌이었고, 헤리만 자신은 투르먼(Truman) 대통령 아래에서 상무장관,  48대 뉴욕 주지사, 1952년과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서기도 했었습니다.

그는 또한 은행업을 비롯한 투자, 부동산업 등에서도 성공을 거둔 뛰어난 사업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저를 비롯한 동시대의 한국인들에게 그의 이름이 낯설지 않은 까닭은 그가 베트남전쟁 말기에 미국과 월맹 사이에 있었던 휴전협정에서 미국 수석대표를 지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1969년, 그가  휴전협정 수석 대표직을 사임하는 기자회견장에서 남긴 말은  2015년 오늘 미일 양국의 지도자들은 물론이거니와 대한민국인들이 한번 곱씹어도 좋은 명언입니다.

그의 말입니다.

<월맹(북베트남)이나 월남(남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의 지도자들 가운데는  과거 프랑스 식민에 식민권력에 앞장섰거나 협력한 인물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대부분은 식민정권의 권력이나 행정 그리고 군대에 대항해서 민족해방과 독립투쟁을 평생 동안 해온 사람들이다.

그와는 반대로 월남(남베트남)의 정부, 군대, 종교,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의 지도층 인물들은 해방후 국토가 분단되기 이전에 프랑스 식민권력의 관리였거나 군대의 장교 또는 하사관으로서 자기 동포와 적대적 입장에 서있던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남북베트남의 대중들이 어느 쪽을 더 존경하고 신뢰할 것인가? 어느 쪽 지도자들이 진정으로 베트남의 재중과 민족을 위해 행동할 것인가? 이에대한 답변은 자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베트남 전쟁은 이미 진 전쟁”이라고 선언합니다.

역사란 과거사와 오늘과 미래사가 단절되어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사가 곧 현재사이자 미래사가 된다는 충고입니다.

아베 신조의 방미 행보를 보면서 곱씹어도 좋을 헤리만의 교훈입니다.

참 먼 옛날 이야기 하나

옛날 옛날 고려적 이야기보다도 더 먼 옛날 이야기 하나 드립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700여년 전 이야기랍니다.

유럽역사에서 그리스가 막 주인공이 되려던 때였고, 성서 이야기로 따지면 다윗이 만든 나라가 남북으로 갈렸다가 북쪽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게 멸망을 당하던 무렵의 이야기랍니다. 한반도 역사로 치자면 아직 단군임금이 세운 고조선 시대 쯤의 일이랍니다.

참 먼 옛날 이야기지요.

이 때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였답니다. 진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기 전에 여러나라들이 각축을 벌렸던 시대이거니와 중국의 생각 곧 사상들이 마구 일어나던 시대이기도 하답니다.

그 무렵 초(楚)나라에 화(和)씨라는 사람이 형산(荊山)이라는 산에서 큰 박옥(璞玉: 아직 다듬지 않은 구슬의 원석原石)을 캐냈답니다. 화씨는 귀한 물건이므로 임금께 바쳐야겠다는 생각으로 당시 임금이었던 여(麗)왕에게 이 박옥을 드렸답니다.

여(麗)왕은 이게 진짜 보물인가 아닌가 알아보려고 궁전에 있는 보석장이에게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그 보석장이는 “이건 보석이 아니라 그냥 돌입니다.”라는 진단을 왕에게 올렸답니다. 화가 난 왕은 임금을 놀렸다는 이유로 화씨의 왼쪽 발을 잘라버려답니다.

여왕이 죽고난 뒤 그 뒤를 이어 무(武)왕이 왕위에 올랐답니다. 화씨는 다시 박옥을 무왕에게 받쳤답니다. 무왕 역시 궁전의 보삭장이에게 감정을 시켰고 보석장이는 똑같이 그냥 돌일 뿐이라는 감정을 내렸답니다. 화가 치민 무왕은 이번에는 화씨의 오른발을 잘라버렸답니다.

무왕이 죽고난 뒤 문(文)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말 문왕에 귀에 이상한 소문이 들렸습니다. 형산(荊山)이라는 산에서 두 발이 잘린 사내가 밤낮으로 피를 토하며 울고 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왕은 신하들에게 두 발이 없는 사람이 그 사내 뿐만이 아니거늘 무슨 일인지 자초지종를 알아오라고 시켰답니다.

사내가 울고있는 사연을 들은 신하가 문왕에게 한 말이랍니다. “화씨라는 사내이온데 두 발이 잘려 없어진 것이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보배를 가지고 돌이라 하고, 곧은 사내를 가지고 거짓말장이라고 하는 것이 슬퍼서 피를 토하며 울고 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문왕은 화씨의 박옥을 다듬어 보라고 보석장이에게 명령했더니 그야말로 세상에서 보기드문 보옥(寶玉)이 나왔다고 합니다.

한비자중국 고전인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이야기랍니다.

흔히 우리들이 “옥(玉) 석(石)을 구분 못한다.”고 하는 말의 유래입니다. 보물인지 돌인지를 구분 못한다는 말입니다.

화씨는 두 발을 잘린 이후 그의 옳은 판단을 인정받았지만 화(和)씨 이래 2700여 년 동안 두 발, 두 손, 두 다리, 두 팔 아니 단 하나 밖에 없는 모가지 잘리우면서도 “돌이 아니라 보석”이라는 주장을 펴다 끝내 인정받지 못하고 떠난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문득 역사의 발전이란 바로 그런 이들의 피거름 위에서 피어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 저녁입니다.

옥(玉: 진실)을 주었더니 옥(玉: 진실)을 석(石: 거짓)이라고 우기며 옥을 준 사람(진실을 말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일들이 어찌 그리 오늘날에도 여전한지요.

70주년의 차이

메르켈  독일 총리

<나치 만행을 기억하는 것은 독일인의 영원한 책임이며 아우슈비츠는 인간성 회복을 위해 독일이 해야 할 일을 일깨워준다.> – 아우슈비츠 해방 70주년 기념식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한 말.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70년 전, 우리 민족 모두는 하나된 마음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고, 함께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광복을 기다리던 그 때의 간절함으로 이제 분단 70년을 마감하고 우리의 소원인 통일을 이루기 위한 길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대한민국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문에서

무릇 역사란 돌아보는 자들의 몫입니다. 그 몫이 그들의 미래를 결정하기 마련이고요.

나치는 독일이었다는 고백으로 미래를 맞는 공동체와 반민족 친일분자였던 조상을 독립투쟁가로 둔갑시켜 우상화하며 미래를 여는 공동체의 차이.

역사란 오늘을 사는 이들의 고백이지요.

분단을 극복한 공동체와 분단에 얽매인 공동체의 결정적 차이일 겝니다.

70주년을 해석하는 차이 말입니다.

과거에 (해방에 대한)간절함이 애초 없었던 이들이 말하는 (통일에 대한)미래란 그저 공허할 뿐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