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정신 – 귀환 2

(당신의 천국 – 쉰 아홉 번 째 이야기)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 함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듣고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하니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에스라 4 : 1 – 4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을 들으며 여의도 광장을 헤매던 때가 1983년의 일입니다. 당시 저와 아내는 평안도 정주 땅에서 내려 온 이들 가운데 장모의 기억 속에 있는 이름이나 사진이 혹시 있을까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손피켓과 벽보에 나붙은 이름들을 훑고 다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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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또 다른 30년이 흘렀지만 제 장모님은 아직도 북에 남아 있었던 혈육의 소식은 듣지 못하고 있답니다. 당시 20대 중반쯤이었을 청년가수 설운도씨도 이미 50대 중반을 넘겼을 것입니다. 

한국전쟁이 끝난지 60년이 되는 올해도 그렇게 저물어갑니다. 북진통일에서 평화통일로 평화공존에서 이즈음은 이대로 이렇게 나누어진 채로 죽 살자는 축들도 제법 많다는 이야기들도 들립니다. 

어찌어찌 설혹 통일이 된다고 하여도 해결해야만 하는 어려운 문제들이 이만 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이념, 언어, 경제체제 및 구조, 종교 등등 하나가 되기에는 고착되어진 다름의 크기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아마 땅의 소유권에 대한 문제도 그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또한 통일이 된다고 하여도 미, 중 ,일, 러 등 주변 강대국들과의 관계정립에 대한 문제도 여전히 숙제로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넘어 가야만하는 어려움들이 있더라도 한반도의 통일은 한민족의 소망이어야 하고, 통일 이전 시대를 살아가는 한민족의 시대정신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0여년 전에 팔레스타인 예루살렘성을 중심으로 한 유다 땅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바로 우리들이 염려하는 통일 이후의 문제점들을 고스란이 안고 있었습니다.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시조인 고레스왕은 이전의 제국들인 바벨론과 아시리아와는 아주 다른 점령지 정책을 펴나갔습니다. 바벨론과 아시리아는 점령지의 모든 지역을 제국화시키는(하나의 권력 아래 온 땅이 똑같이 지배되는) 정책을 폈던 반면에 고레스는 점령지의 피지배 민족이나 국가들이 그들의 고유한 문화적 종교적 생활과 전통을 보장해서 이어나갈 수 있도록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제국이 성립된 초기라는 점도 있었겠지만 페르시아제국은 이전의 바벨론이나 아시리아 제국보다 그 땅이 거의 두 배나 되는 거대한 제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레스왕의 명령에 따라 포로지 바벨론을 떠난 세스바살, 스룹바벨, 여호수아 등의 일행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시기는 기원전 529-520년 사이입니다. 이 무렵 말기, 그러니까 기원전 520여년 경에 활동했던 예언자들이 학개와 스가랴입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서를 기록한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돌아 온 것은 기원전 445 -433년 무렵의 일입니다. 처음 바벨론 포로 출신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지 약 60 – 70년이 흐른 뒤의 일인 것이지요.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 – 모두 합쳐보아야 25장 정도되는 짧은 글입니다. 역사 이야기라 읽기도 쉽습니다. 아무 선입관 두지 마시고 그냥 죽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전체 10장으로 이루어진 에스라서에서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 이야기는 7장에서야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 전에 기록된 이야기들은 (1-6장) 지나간  6,70년을 돌아보면서 기록한 것이지요. 

다시 오늘날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볼까요? 이즈음 역사 이야기들 많이 하지요?  일본 식민지 때 이야기, 해방 후의 이야기, 이승만, 박정희 이야기 등등 말입니다. 길어야  70년이고  짧게는 사십년도 지나지 않은 저 쪽 이야기인데요, 오늘날에는 수많은 기록과 사진, 영상 등등의 자료들이 남아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있었던 지난 사실에 대해 전혀 다른 이야기와 주장들이 넘쳐 나지요. 도대체 누가 정말 옳은 말을 하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때도 있지요. 

자! 다시 2500여년 전 팔레스타인으로 가 볼까요. 

기록이라고 해 보았자 별거 없던 시절이고 거의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존하여 옛 일에 대해 알 수 있었던 시절이랍니다.  이런 조건에서 일어난 어떤 사실에 대한 이야기가 후세 사람들이 “이것이야말로 그 시대의 진실”이었다고 믿게 하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기록을 남기는 일이었답니다. 

우리들이 지난 이야기에서 사관(史觀)을 알아 본 적이 있습니다. 역사를 바라보는 눈, 또는 역사를 기록하는 시각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명기 사관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에스라는 신명기 사관과는 다른 눈으로 역사를 보고 기록했답니다. 에스라와 같은 시각을 가진 기록자들을 일컬어 역대기 사가(史家)라고 하고, 그들의 사관을 일컬어 역대기 사관이라고 부릅니다. 

이 역대기 사가들에 의해 기록된 책들이 역대기 상 하와 에스라 느헤미야서입니다.

우선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인들과 그들이 도착한 당시 예루살렘과 유다땅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바벨론 포로였던 계층은 왕국이 멸망하기 전에 유다의 상층부에 속한 사람들과 성전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에스라는 대를 이어 온 사제 집안의 전통을 이어받은 모세의 법에 통달한 사람이었습니다.(에스라 7 :  1-  5) 

바베론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대표성를 드라내는 사람이 바로 에스라입니다.에스라서  2장에 나오는 첫 귀환자들의 명단과 숫자를 보면 42,360명이라는 숫자가 나옵니다.(에스라 6 : 64) 당시의 전통으로 미루어 성인남자들의 수로만 생각하여도 사람의 수는 많지만 당시 유다 전체의 인구에 비해서는 그리 크지 않은 숫자랍니다. 

그들이 돌아오기 전에 예루살렘과 유다 땅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이 더욱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다인들과 옛북왕국 이스라엘인들, 그리고 주변의 작은 왕국이나 나라 출신들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70여년 전 유다 왕국이 망하고 바벨론으로 끌려 갔던 사람들의 땅은 오래 전 토지개혁으로 그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소유가 되었고 그들이 경작을 하던 때였습니다. 

아마 돌아 온 이들 가운데는 그 땅의 옛주인들의 자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선 땅의 소유권 문제가 드러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성서 전체 이야기의 흐름으로 보아서 땅의 소유권 문제보다 더욱 큰 문제는 전통을 잇는 정신의 문제가 이 시대에는 우선했습니다. 

탈애굽이후 가나안 정복, 사사시대, 다윗 솔로몬 시대를 거쳐, 남북 왕국이 멸망하기 까지는 땅의 소유가 구원의 문제로 직결되는 것이었습니다만 이 때에 이르러서는 정신적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 구원의 소중한 가치로 여겨지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 중심이 예루살렘이었고, 솔로몬의 성전이었습니다. 역대기 사가들이 바라 본 유다의 역사입니다.  그들의 생각을 좀 더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전제(前提) – 귀환 1

(당신의 천국 – 쉰 여덟 번 째 이야기)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 에스라 1 : 1 – 2, 공동번역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아시아 전 지역에 이같은 방을 붙이도록 만드셨다. “고레스 왕이 이같이 선포하노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인간 세계의 왕으로 삼으셨는데, 나는 그 하나님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는 하나님인 줄 믿고 있노라. 그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서 내 이름을 예언하신 것을 볼 때 이는 매우 분명하다. 따라서 나는 유대 땅 예루살렘에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지어 드리고 싶노라.” –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 11권 1장에서 

서기 1636년  12월 중순의 일이었습니다. 오늘이 12월2일이니 지금으로부터 얼추 만 377년 전의 일입니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이끄는 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한양을 향해 밀려오자 조선왕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하던 때입니다. 그리고 한 달 보름이 지난 이듬해인 1637년 1월 30일 항복을 주도한 이른바 주화파들의 주장에 따라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지금의 서울 잠실 석촌호수 부근)로 향합니다. 

도19

그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청 태종 앞에서 조선왕 인조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 큰 절 세 번을 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라는 항복의식을 행합니다.  야사(野史)는 이 날 인조의 이마에 피가 홍건히 고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이를 일컬어 삼전도의 치욕이라고 합니다. 

이 항복 이후 조선인으로 청나라에 끌려간 사람들의 수는 대략 17만 명이 웃돈다고 합니다.  사실 이런 역사가 한반도에서 처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망한 뒤 당나라에, 고려 시절에는 몽고족의 원나라에, 아주 후대에 이르러는 일본에 많은 이들이 끌려 간 역사가 있답니다. 

아무튼  삼전도의 치욕 이후 10년이 지나서 끌려 갔던 이들 가운데 약  5만 명이 고향 땅 조선으로 돌아옵니다.  그 가운데 약 2만여명이 일년 안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왜냐고요?  돌아 온 이들  대부분이  여성들이었는데 그들을 향해 조선 땅에 남아 있던 고향사람들이 붙여 준 별명 때문이었답니다. 바로 “환향녀(還鄕女)” 곧  “화냥년”이라는 별명 때문이었지요. 끌려가 몸을 더럽힌 여자라는 손가락질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돌아 온 부인들을 버리는 이혼이 잇달자 조정에서는 이혼이 옳다 그르다 싸움으로 해가 뜨고 저무는 일까지 벌어진답니다. 

아무튼 자살하는 여인들이 잇다르자 왕이 명을 내립니다. 회절강(回節江) 에 가서 목욕을 하는 모든 여인들은 깨끗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명이랍니다. 한양과 경기도 출신은  한강에서, 강원도는 소양강에서, 경상도는 낙동강에서, 충청도는 금강에서, 전라도는 영산강에서, 황해도는 예성강에서, 평안도는 대동강에서 목욕을 하면 절개를 지킨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었답니다. 

혹시 이런 사실들이 진짜일까? 너무 슬픈 이야기다!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정말 슬픈 것은 그런 역사를  잊고 사는 것이 슬픈 일이랍니다. 

이제부터 이야기하려는 유다민족들의 바벨론 포로 후기의 이야기들을 잇기 전에 나와 같은 말을 썻던(물론 오늘날과 같은 말은 아니더라도), 내 조상들의 이야기 또는 나는 모르지만 내 안의 습관이나 전통이 되어 흐르고 있는 선조들의 경험을 한번쯤 생각해 보자는 뜻으로 들추어 본 우리들 조상들이 살아온 삶의 한 조각이었답니다. 

신바벨론이 중동 지방을 경영하던 시대는 짧았습니다. 바벨론 영향아래 있던 메대의 한 부족왕이었던 고레스가 메대의 전 지역과 파사(바사, 페르시아) 지역을 통합시킨 때는 기원전 549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십년 뒤 고레스는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중동의 새로운 강자로 등극합니다. 바로 페르시아 제국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 거대한 제국은 약 200년 뒤인 기원전 333년에 희랍의 알랙산더 대제에게 무릎을 꿇기까지 그 지역의 주인이 됩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곧 가나안 땅은 페르시아, 그리스, 시리아 등을 거쳐 로마의 식민지 역사를 이어갑니다. 기원전 140년에서 기원전 63년까지 약 80년 동안 유대 민족의 왕국이었던 하스몬 왕조 시대를 빼고는 그런 역사로 이어져 내려오다 세례요한의 소리가 들리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조금 지루하지만 우리들이가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길이 제대로 된 여정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역사 이야기랍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했을 때,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나 그 선포를 들은 갈릴리 사람들이나, 후에 선포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던 바울이나 모두가 이런 역사적 경험과 전통을 이어받은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일테면 “떡을 나누다”라는 말과 “빵을 나누다”라는 말과 “밥을 나누다”라는 말을 이해하는 한국인들의 느낌은 다르답니다. 그 느낌의 다름을 잘 알기 위해서는 한국인들이 살아오면서 겪는 이야기들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지요. 

유다인들이 바벨론 포로기를 끝내고 예루살렘 땅으로 돌아오던 무렵부터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들은 역대기 상하 뒤에 나오는 에스라, 느헤미야서입니다. 

에스라, 느헤미야의 이야기를 읽기 전에 먼저 우리들이 들여다 보아야 하는 그 당시의 상황들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이런 성서의 기록들이 쓰여졌고, 거기에 담긴 신앙적 고백들은 어떤 것들이 있고, 그 고백들은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를 찾아가는데 어떤 해답을 주고 있는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입니다. 

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유다인들은 극히 일부의 사람들이었고, 유다왕국이 망할 당시 그 사회의 상층부를 구성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유다 땅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고 이집트나 인근의 다른 나라로 피난 곧 이민 또는 이산되어 간 유다인들이 있었습니다. 

여호야김이 바벨론에 끄려가던 기원전 598년부터 첫 귀환이 있던 기원전 538년까지 일흔 해가 지났습니다. 지금처럼 수명이 길지 않았던 시절의 70년이면 전혀 다른 세대들이 주인공이 된 세상입니다. 

유대 땅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이나 바벨론 포로였던 사람들이나 이집트 등 주변 다른 국가로 이주했던 사람들에게나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된 시간이 흐른 뒤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엄밀한 뜻으로 보면 포로 귀환시대라는 말은 바벨론 포로였던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유다 땅에서 그대로 살았던 사람들 입장 다르고, 바벨론에서 돌아 온 사람들 입장 다르고, 이집트 등 다른 나라 땅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사람들 입장 다르고요. 그런데 그들 모두가 유다인들이었다는 것이지요. 

당연히 처한 입장에 따라 생각들이 달랐겠지요. 

이런 분위기를 전제하고 이제 에스라 이야기로 넘어가 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