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 – 포로기 3

(당신의 천국 – 쉰 세번 째 이야기) 

그러니 너는 이렇게 일러라.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그들을 멀리 다른 민족들에게 쫓아 보내어 이 나라 저 나라에 흩어져 살게 하였지만, 나는 그들이 가 있는 여러 나라에서 얼마 동안 그들에게 성소가 되어 주리라.’ – 에스겔  11 : 16 

너희는 아비가 남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겨레 가운데서 못할 짓을 하다가 자기의 죄를 쓰고 죽었는데,  그 아들이 아비의 죄를 쓰고 벌을 받지 않으니 어찌 된 일이냐고들 한다. 그 아들은 내가 정해 준 규정을 지키고 그대로 바로 살았는데 왜 죽겠느냐?  죽을 사람은 죄를 지은 장본인이다. – 에스겔 18 : 18 – 20, 이상 공동번역 

Turkey day라고도 부르는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 아침입니다. National Geographic  Daily News에 따르면 오늘 하루 미국인들의 밥상에 오르는 칠면조의 숫자는 대략 사천 육백 만 마리가 된답니다. 

저의 가족들 저녁상도 칠면조 위주로 차려집니다. 아무리 요리를 잘해도 제겐 그렇게 당기지는 않는 음식 가운데 하나랍니다. 이곳을 살아가는 관습이기도 하거니와 모처럼 한 상에 둘러 앉는 식구들 특히 저희 아이들이 좋아하기에 해마다 큼직한 Turkey 한마리를 구어온지도 벌써 스물 다섯해가 넘었습니다. 

에스겔 이야기를 잇기 전에 오늘 아침에 떠오른 시 한 수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제가 즐기는 시 가운데 하나랍니다. 쉘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의 관점(觀點Point  Of  View)이라는 시입니다. 

추수감사절 만찬은 슬프고 고맙지 않다 /성탄절 만찬은 어둡고 슬프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칠면조의 관점으로 만찬 식탁을 바라본다면.

주일만찬은 즐겁지 않다 /부활절축제도 재수 없을 뿐 /닭과 오리의 관점으로 / 그걸 바라 본다면. 

한때 나는 참치 샐러드를 얼마나 좋아했었던지 /돼지고기 가재요리, 양갈비도 /잠시  생각을 멈추고 식탁의 관점에서 /식탁을 바라보기전까지는. 

Thanksgiving dinner’s sad and thankless / Christmas dinner’s dark and blue /When you stop and try to see it /From the turkey’s point of view. 

Sunday dinner isn’t sunny /Easter feasts are just bad luck /When you see it from the viewpoint /Of a chicken or a duck. 

Oh how I once loved tuna salad /Pork and lobsters, lamb chops too /’Til I stopped and looked at dinner /From the dinner’s point of view. 

turkey_hunt

추수감사절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한 해 동안 각자 자기의 삶의 자리에서 생활하던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한해 동안 누린 기쁨과 감사를 나누는 날이지만, 칠면조 입장에서 본다면 해마다 맞는 칠면조  대학살의 날이 되는 셈입니다. 

사람과 칠면조의 관점이라는 대칭이란 그저 상징이지만, 실제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찬찬히 꼼꼼하게 들여다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있는 관점의 차이를 느끼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고, 그 다른 생각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들의 결과가 아주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잡혀간  에스겔이 전하는 이야기들은  바로 유대인들이 그들의 기존 관점을 왜,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새롭게 바꾸게 되는지를 설명한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과 유대민족 사이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었다는 말입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은 바로 관점을 바꾸게 하는 도구였던 것입니다. 

에스겔은 환상을 통해서 야훼 하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영광스런 하나님의 모습이 움직이십니다.  이제까지 야훼 하나님이 계신 곳은 거룩한 다윗의 성, 영광스런 솔로몬의 성전이었습니다. 에스겔이 환상속에서 본 야훼 하나님은 그 곳 솔로몬의 성전을 떠나 동쪽 동산으로 움직이셨고, 바벨론 그발 강가에도 나타나셨습니다. 

솔로몬 성전 안에서 칩거하시는 야훼 하나님이 아닌 흩어진 유다 민족들과 함께 움직이시는 야훼 하나님의 환상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에스겔은 야훼 하나님께 받은 예언을 통해 이제 유대민족들이 야훼 하나님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꿀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이제껏 예루살렘 성안에서 성전 중심으로 바라본 야훼 하나님과 유대 민족의 주관적 시각에서 포로가 되어 지금 살고 있는 바벨론 그발 강가에서 예루살렘과 솔로몬 성전을 바라보는 객관적 시각으로 시각을 넓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민족과 야훼 하나님을 바라보는 객관적 시각이 생기자 첫번 째 하게 되는 일이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이제껏 이야기로 전해 지거나 조각 조각 단편적 기록들로 전해져 오던 탈애굽 이후로부터 바벨론 포로라는 현재의 시점까지의 모든 이야기들을 기록화 하는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읽고 있는 구약성경의 골격을 이루게 되는 많은 자료들이 바로 이 때, 포로기 시대를 전후해서 이루어진 것들입니다. 

두번 째는 예배와 제사의 형식에 대한 전통을 세우는 반면 현실적인 여건에 맞는 예배와 제사 의식으로 발전 시킨 것입니다. 전통을 세웠다는 말은 조상들이 해 온 일들에 대한 기록들을 모아 남겨서 후대에 전했다는 것이고, 그 전통을 이어갈 수 없는 현실적 여건에 맞는 제사 의식을 세우고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의 영역을 크게 확대한 것입니다. 

이제껏 조상들이 지켜 온 예배와  제사의식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는 제사 형태였습니다.  물론 에스겔 시대에도 예루살렘과 유다 땅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여전히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의 환상속에 나타나신 야훼는 그 성전을 떠나셨던 것입니다. 에스겔서 전반부는 야훼께서 왜 성전을 떠나게 되셨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제 에스겔의 입장에서 곧 바벨론 포로로 잡혀온 유다인들의 관점에서 선택할 수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지요.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포로 초기에는 “이제 곧”, “내가 살아 생전에…”  고향 땅으로 돌아 갈 수 있다는 생각들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간절한 생각에 사로잡혀 평생을 보낸 이들에 대해 알고 있답니다. 아마 우리 세대라면 거의 기억속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이야기들일 것입니다. 우리들의 아버지들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제 어릴 적 친구들 가운데는 고향이 함경도, 평안도인 아이들이 제법 있답니다. 아니 어릴 적 친구들까지 들출 것 없이 제 장모님, 돌아가신 처고모부와 제 고모부님 모두 평안도 사람들이랍니다. “이제 곧 돌아 갈 고향”을 생각하며 떠나 온 사람들입니다. 이제 그 세대들 중 대부분이  고향땅으로 돌아갈 기회없이 하늘고향으로 떠났습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이 선포한 예언 가운데 하나가 “너희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포로생활은 길어진다는 것입니다. 70년이 흐르고서야 돌아갈 수 있었으니 포로가 된 당대는 물론이고 아마 그 다음세대들 가운데도 돌아간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은 성전 예배를 더 이상 드릴 수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야훼 하나님만을 기리는 약속을 통해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유대인들에게는 세상이 끝난 것과 마찬가지인 현실에 부닥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새로운 예배와 제사 의식을 세운 까닭입니다. 바로 회당(會堂)이 만들어진 계기가 된 것입니다. 나아가 이제껏 예루살렘에서 지켜왔던 희생제물 중심의 예배에서 말씀 중심의 제사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번 째는 이제까지 공동체와 함께 하는 야훼 하나님 신앙에서 공동체는 물론이요 사람 누구나 개개인들이 만날 수 있는 야훼 하나님을 새롭게 보게되는 눈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에스겔서 18장과  33장에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내용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선 나 또는 당신이 될 수 있는 한 개인에 대한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에 대한 민족신앙이란  개인신앙을 내포한다는 선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구원에 대한 확신을 심은 일입니다 .비록 이젠 다  끝난 것 같은 현실이지만 관점을 달리 놓고 본다면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구원의 확신을 세운 일입니다. 

그 새로운 세상은 야휘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평화로운 세상이고, 그 일은 마치 마른 뼈들이 모여 다시 생기있는 몸으로 부활하는 꿈같은 일이 일어나는 세상입니다. 

에스겔서의 마지막 부분들(40 – 48장)은 그의 직업 의식이 잘 드러나는 이야기들입니다.  제사장 출신이었던 에스겔이 바라본 새로운 예루살렘 새 성전에 대한 환상입니다. 특히 47장에 나오는 성전에서 솟는 샘이 나쪽으로 흘러 사해 바다로 흐르는 환상은 성서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인 22장에 나오는 요한의 환상과 만난다는 사실 하나는 기억해 두시기를 바랍니다. 

에스겔이 꼼꼼히 기록한 성전 건축에 대한 환상은 결코 그가 남긴 기록대로 세워지지는 않는답니다. 

그러나 그가 관점을 바꾸어 바라본 세상은 그의 예언대로 오늘날까지 그 지경을  넓혀오고 있는 것입니다.

환상 – 포로기 2

(당신의 천국 – 쉰 두번 째 이야기) 

야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나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서 말한다. 나는 유다 사람들을 이 곳에서 바빌론 땅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 가게 하겠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이 좋은 무화과처럼 잘 돌보아 주리라.   – 중략 –   그러나 유다 왕 시드키야와 그의 고관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살아 남은 자들 가운데 국내에 남아 있는 자나 에집트로 망명한 자는 썩어서 먹지 못할 무화과같이 만들겠다. 나 야훼가 선언한다. – 예레미야 24 : 4 – 8 

그 날 부지의 아들 에제키엘 사제가 바빌론의 그발강 가에서 야훼의 말씀을 받았다. 거기에서 그는 야훼의 손에 잡혔던 것이다.   그 순간 북쪽에서 폭풍이 불어 오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구름이 막 밀려 오는데 번갯불이 번쩍이어 사방이 환해졌다. 그 한가운데에는 불이 있고 그 속에서 놋쇠 같은 것이 빛났다.  또 그 한가운데는 짐승 모양이면서 사람의 모습을 갖춘 것이 넷 있었는데     각각 얼굴이 넷이요 날개도 넷이었다. – 에스겔 1 : 3 – 6 

허황한 환상이나 보고 속임수로 점이나 치면서 야훼의 말을 사칭하는 것들이다. 내가 보내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지껄이고는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은근히 바라는 것들이다.   너희가 허황한 환상을 보고 속임수로 점을 치면서 야훼의 말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 에스겔 13 : 6 – 7 

에스겔은 기원전 597년 유다왕 여호야긴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잡혀 갔을 때 함께 끌려갔습니다. 이른바 제 일차 바벨론 포로 사건 때의 일입니다. 이 때의 일을  열왕기하 24장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전 시민과 고관들과 군인 일만 명, 그리고 은장이들과 대장장이들을 사로잡아 가고 가난한 지방민만 남겨 두었다.” 

그 포로 가운데 한 사람이 에스겔이었고 그는 사제였습니다. 바벨론으로 잡혀간 지 다섯 째 되던 해에 그는 환상속에서 야훼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환상속에서 본 이야기로 에스겔서의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그 환상을 본 장소는 바벨론 그발 강가에서였습니다. 

에스겔이 예언을 시작하던 때는 아직 예루살렘에 유다의 마지막왕인 시드기야가 왕국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던 시절입니다. 총 48장으로 이루어진 에스겔서의 전반부 반인 1장에서 24장까지의 이야기는 예루살렘이 곧 망할 것이라는 예언들입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그로부터 약 5년 후 현실이 됩니다. 

우리들이 이미 이야기했던 예레미야는 그가 본  무화과 나무  환상을 통해 유다왕국의 멸망 이후 그 맥을 이어나갈 집단은 바벨론 포로로 간 사람들이라는 예언을 했습니다.(예레미냐 24장) 유대 땅에 남아있는 유대인들도 아니고, 이집트나 다른 나라로 이주한 유대인들도 아니고 오직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간 이들이 결국은 유대의 정통을 이어갈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에스겔은 그런 예언의 결과를 확인시켜 주는 사람입니다. 

에스겔은  사제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의식 및 제례 전통에 대해서라면 통달한 사람이었습니다. 에스겔이 제사 및 예배의 정통성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각종 전해오는 예법에 따라 올려야만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 그가 그의 동족들과 함께 바벨론 그발강가 유대민 포로 정착지에서 산지 오년 째 되던 해 그가 환상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서를 처음 읽는 분이시거나, 제대로 읽어 본 경험없이 교회 다니면서 설교를 통해 들어 본 것 만으로 에스겔에 대한 어떤 선입관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 또는 어떤 환상이나 몽환적 신비야말로 믿음의 증거인 양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에스겔은  아주 낯설거나 특별한 의미로 다가올 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비단 에스겔뿐만 아니라 이제 이어질 다니엘, 요한계시록을 위시하여 성서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환상, 계시, 꿈 등의 이야기에서도 똑같이 경험할 수 있는 이야기랍니다. 

UFO_Ezekiel_Disc

에스겔서 일장을 보면 그가 환상에서 본, 하늘을 날아다니고 사방 어느 곳으로나 자유자재로 제 맘 먹은 대로 다닐 수 있는 병거 곧 수레 이야기가 나옵니다. 에스겔은 그 병거에서 야훼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그리고 그 야훼 하나님의 영광된 모습이 병거가 움직이듯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유대 민족이 겪게 될 일들에 대해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환상, 상징, 계시 등등의 언어는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만나는데 아주 소중한 도구가 되는 동시에 걸려 넘어질 장애이기도 합니다. 

아주 우스꽝스러운 예를 두가지 들겠겠습니다. 

첫째는  지금으로부터 약 2,600여년 전에 에스겔이 본 병거의 환상(에스겔서 1장에 나오는) 은 오늘날 비행접시를 미리 예언한 것이라는 또라이(乭아이), 왈 미친 놈들의 이야기가 이 문명의 21세기에도 떠돈다는 것이고요. 

둘째는 그런 돌아이들이 수천년래 지구상에는 셀 수 없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종종 즐겨 드는 예 가운데 하나랍니다. 중세기 기독교 사제들 가운데에는 평생을  “바늘 끝에 천사가 몇 명이나 앉을 수 있을까”라는 화두(話頭) 또는 신앙적 질문(?)을 풀려고 애쓰다 간 사람들도 있답니다. 

두 가지 예가 말해주는 것이 있지요. 바로 돌아이는 자신이 돌아이인 줄은 절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실제 이런 돌아이같은 일들은 오늘도 매 주일 교회에서  또는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무수히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돌아이들에게 에스겔이 해답을 준답니다. “그건 다 네 탓이다”라고요. (에스겔서 18장의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아무튼 환상을 보고 예언한 것은 당시 에스겔 뿐만이 아니라 제법 많은 이들이 있었다고 에스겔은 전하고 있답니다. 

“ 허황한 환상이나 보고 속임수로 점이나 치면서 야훼의 말을 사칭하는 것들이다. 내가 보내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지껄이고는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은근히 바라는 것들이다.  너희가 허황한 환상을 보고 속임수로 점을 치면서 야훼의 말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주 야훼가 말한다. 너희는 터무니없는 환상을 보고 허무맹랑한 말을 하였다. 내가 기필코 너희를 치리라.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허황한 환상이나 보고 속임수로 점이나 치는 예언자라는 것들을 이 손으로 치리라. 내 백성의 모임에 들이지도 않고 이스라엘 족속의 명단에서도 빼어 이스라엘 땅에 들어 가지도 못하게 하리라.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 야훼임을 알리라.   그 예언자라는 것들은 무엇 하나 잘 되는 것이 없는데도 잘만 되어 간다고 하며 나의 백성을 비뚤게 이끌었다. 그래서 백성이 담을 쌓으면, 그 위에 회나 바르는 것들이다.”  – 에스겔 3 : 6 – 7 

허황된 환상을 본 이들이 대부분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허황된 환상을 보았다고 말하는 이들을 야훼 하나님 이름을 파는 사기꾼들이라고 단언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을 비롯한 성서의 인물들이 본 환상, 또는 계시, 꿈이 참 된 것들이냐 아니면 가짜거나 허황된 사기이냐를 가름하는 판단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요? 

에스겔의 잣대입니다. 

“’주 야훼가 말한다. 저주받아라, 너희 사람 팔목에  토시를 만들어 끼우고 키 큰 사람 키 작은 사람에게  너울을 씌워 사람들의 목숨을 노리는 것들아!  너희가 내 백성의 목숨을 노리면서 너희의 목숨은 부지할 듯싶으냐?   너희는 내 백성이 보는 데서 보리 몇 줌과 빵 몇 조각을 받고 나를 욕되게 하였다. 거짓말에나 귀가 솔깃해 하는 나의 백성을 속여,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을 죽이고 죽여야 할 자를 살려 두었다.” 

비단 성서에 나오는 환상이나 계시들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나 오늘날에도 있을 수 있는 환상이나 계시의 옳고 그름의 잣대를 바로 세우는 열쇠입니다. 

바로 사람을 신이신 야훼(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게 바라보는 눈으로 본 환상이나 계시이냐는 것입니다. 

사람을 신앞에서 동등한 사람답게 바라보는 환상이나 계시만이 참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에스겔이 본 환상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흩어짐 – 포로기 1

(당신의 천국 – 쉰 한 번 째 이야기) 

야훼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바빌론 왕은 야훼의 전과 왕궁에 있는 모든 보화를 털어 갔고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야훼의 전에 만들어 두었던 온갖 금기물을 다 부수었다.  또한 예루살렘 전 시민과 고관들과 군인 일만 명, 그리고 은장이들과 대장장이들을 사로잡아 가고 가난한 지방민만 남겨 두었다.  그는 여호야긴도 그의 어머니와 왕비들과 내시들과 나라의 권력층과 함께 사로잡아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데려 갔다. – 열왕기하 24 : 14 – 15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  제십 구년 오월 칠일, 바빌론 왕의 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들어 와  야훼의 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성 안 건물을 모두 불태웠다. 큰 집은 모두 불탔다.  그  친위대장을 따르는 바빌론 군인들은 예루살렘을 둘러 싸고 있는 성벽을 죄다 허물어 버렸다.  친위대장 느부사라단은 예루살렘성에 남은 사람들과 바빌론 왕에게 항복해 온 자, 그리고 기타 남은 백성들을 포로로 데려 갔다. – 열왕기하 25 : 8 – 11 

수민원의 총재는 민영환이요, 이민 모집에 관한 일은 인천에 거류하고 있던 데쉴러에게 위탁하여 동아개발회사를 창설하였다.  –  중략  – 이 때에 그 교인 남녀 50여 명과 항내 노동자 20명이 이민가기를 자원하고 나섰다.  – 현순(玄栒)목사의 포와유람기(布哇遊覽記) 에서 (1909년에 쓴 책) 

제가 명동거리를 출입하기 시작한 때는 1960년대 초중반 쯤 부터였습니다. 당시 명동성당 옆에 있었던 시사문화사라는 인쇄 활자 판매 회사를 들락거렸던 까닭입니다. 제가 국민학교(초등학교)때 일입니다. 

신촌에서 작은 인쇄소와 도장포를 운영하시던 아버지의 심부름은 당시의 제 몫이었기 때문입니다. 명함, 청첩장 등 작은 활판인쇄와 등사 프린트와 도장포를 겸했던 아버지의 가게의 원재료 구입처는 명동의 시사문화사와 종로 단성사 뒤의 청조사(?) 가 있었고 을지로의 지물포가 있었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적 부터 명동 출입을 하게 된 이유랍니다. 

그리고 머리 굵어서 명동을 드나들 무렵에는 국립극장이 막 남산으로 이전하려던 무렵이었고 오래 전에 고인이 된 추성웅이라는 배우가 ‘빨간 피터의 고백’이라는 연극을 장기간 공연하던 곳이었고, 몇 해전 추억의 무대로 인기를 끌었던 쎄시봉이 아직 문을 열였던 시절이었답니다. 

그리고 70년대 말, 몇 개의 사건들이 일어났던 현장인 명동성당과 YWCA 등에 있었던 기억들이 남아 있답니다. 

덤으로 군대시절이었던 70년대 중반 명동 성당 앞 골목길 막걸리집들이 기억에 떠오르는군요. 

그리고 다시 명동을 찾았던 것이 2011년이었답니다. 많이 변해 있었답니다. 거리와 골목들을 옛 생각들을 떠올리게 하는데 일본인들과 중국인들을 호객하는 간판과 소리들이 아주 낯설게 다가왔었답니다. 

세월의 변화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낯섬의 크기는 아주 컸답니다. 

자!  이쯤 조선족, 고려인, 재일동포, 미주 및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는 한국인들과 대한민국인,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민으로 사는 한국인들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실까요. 

19세기 말엽 까지 거의 대부분의 한국인(조선인)들은 한반도 안에서 살았지요. 당시만해도 자기 조상들이 누워있는 땅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한다는 것은 죄짓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때였답니다. 

WritingFileImageView

물론 중국의 간도지방에는 19세기부터 일부 조선인들이 강(압록, 두만)을 넘어가 농지를 경영하기도 했지만 본격적으로 한국인들이 한반도를 떠난 사건들이 연이어 진 것은 20세기 들어와서의 일입니다. 특히 일본의 한반도 침략 이후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 일이지요. 

1912년 12월 22일 인천항을 떠난 이민단 121명이 하와이로 떠난 미주 이민의 시작부터 1905년 1033명의 조선인들이 역시 인천항을 떠나 유카탄 반도로 향한 남미 이민의 시작, 그리고 1910년 이후 중국 간도 지방으로의 대규모 이주, 그리고 1930년대 이후 벌어진 대규모 일본 및 러시아 이주, 1940년대 남북분단으로 이어지면서 생긴것이 조선족, 고려인, 재일동포, 재외 동포의 시원이 될 것입니다. 

이쯤 한 번 생각해 보지요. 

다 같은 한반도의 조상을 뿌리로 한, 한민족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지금 한반도 남에 사는 사람들과 북에 사는 사람들, 미국에 사는 사람들과 중국, 일본, 러시아 중앙아시아에 사는 사람들, 남미와 유럽, 아프리카 등지에 사는 한민족들의 공통점들과 다른 점들은 무엇일까요? 

제가 경험했던 1960, 70년대의 명동과 2013년 지금의 명동을 명동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차이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지난 약 백년간 일어난 변동들입니다. 

약 백년 전 한국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졌던 어떤 가치관이랄까 같은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생각들과 지금의 한국인들이 느끼는 그것들(생각이나 가치관)이 다를 수 밖에 없는 까닭이지요. 

이제 우리들은 유다인들이 약  70년 동안 겪게되는 이런 유사한 경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남왕국 유다가 망하고  바벨론 포로 시대가 시작됩니다. 이 시대에 유다민족들이 겪게되는 일대 변화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라고 한다고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사는 21세기에 흔히 말하는 유대인들 곧 Jewish 라는 말이 시작된 된 때가 이 무렵의 일입니다. 한마디로 민족이 갈라져 갈갈히 찢기면서 민족의 이름과 영역이 훨씬 커지는 정말 이상한 일이 발생한 때입니다. 

또한 우리들이 지금 하나님 나라를 찾아가기 위한 길잡이 도구로 읽고 있는 구약성서의 대부분의 책들의 이야기들이 완성되어지는 때이기도 합니다. 

가나안이라고 불리우던 땅에서 이스라엘과 유다라는 왕국의 이름으로 모여살던 한줄기 같은  민족이 바벨론, 이집트와 인근의 작은 나라들로 흩어질 수 밖에 없는 역사적 경험은 민족의 정체성을 바꾸어 놓는 지경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기의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이어가기 전에 우리들이 먼저 그 상황에 대한 이해를 해야만 하는 까닭입니다. 

유다의 멸망과 함께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사건은 두 차례(엄밀하게 따지자면 세차례이지만)일어납니다. 첫번 째는 기원 전 597년에 유다와 여호야긴이 끌려가던 때에 포로가 된 사람들입니다. 두번 째는 예루살렘이 완전히 무너지고 마지막왕 시드기야와 함께 끌려간 기원전 586년 일입니다. 

바벨론 포로라고 하여도 이렇게 끌려간 시기에 따라 다른 집단이 생깁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은 대부분 왕족, 고급 관료들과 제사장들, 당시 유다 왕국 시절 사회 상층부를 구성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즈음 말로 하자면 있고, 누리고, 배운 사람들이 주로 바벨론 포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집트로 피난을 간 집단도 있었습니다. 이미 우리들이 이야기했던 예레미야도 이 집단에 함께 했던 것입니다. 그들 중 일부는 후에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지만 그 곳에 정착한 집단이 있습니다. 

또한 인근 작은 나라들로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무리들은 가나안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서는 이들을 가리켜 “땅의 사람들”, “가난한 지방민”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집단으로 나뉘여져서 서로 다른 지방과 문화 속으로 분리되어 사는 시대로 접어 든 것입니다. 그렇게 약  70년을 사는 시간 동안 야훼 하나님께서 그 민족에게 내린 예언들을 대행했던 사람들을 이제 만나려는 것입니다. 

그 첫번 째 인물 에스겔입니다.